
"고은층의 ‘그럼에도’ 정신과 삶의 오행지도(五行之道): 듣고, 참고, 나누고, 걷고, 배우는 삶"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인생 후반기, ‘그럼에도’ 살아가는 지혜
인생의 전반기가 무엇을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라면, 후반기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성찰하는 시기이다. 젊은 날에는 미래를 향한 도전과 성취가 삶의 중심이었다면, 나이가 들수록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과제로 다가온다. 삶의 무게중심이 성취에서 의미로, 소유에서 나눔으로, 경쟁에서 공존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의 현실이 언제나 평온한 것은 아니다. 신체적 기능의 변화와 사회적 역할의 축소, 익숙했던 인간관계의 변화는 새로운 적응을 요구한다.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활동의 범위가 좁아지고, 오랫동안 지켜 온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도 찾아온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필요한 것은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는 마음보다 변화한 현실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려는 자세이다.
필자는 이러한 인생 후반기의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고은층(高恩層)이라 부른다. 고은층은 단순히 연령으로 구분되는 노년층이 아니다. 살아온 세월의 은혜를 기억하고,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자신과 이웃, 사회에 의미 있는 삶을 이어 가려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고은층의 가치는 과거의 지위나 업적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태도와 실천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생각을 담아 필자는 최근 "고은층의 ‘그럼에도’ 삶"이라는 디카시를 썼다. 그 핵심은 ‘들어야 한다, 참아야 한다, 나누어야 한다, 걸어야 한다, 배워야 한다’라는 다섯 가지 다짐이다. 필자는 이를 인생 후반기의 다섯 가지 실천의 길, 곧 ‘고은의 오행지도(五行之道)’라 이름 붙이고자 한다. 여기서 오행은 전통적인 음양오행의 요소가 아니라 일상에서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다섯 가지 삶의 길을 뜻한다.
이 오행지도를 관통하는 정신은 바로 ‘그럼에도’이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건강과 환경이 달라졌음에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겼음에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이는 현실을 외면하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변화와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이다. ‘그럼에도’가 마음의 결단이라면, 오행지도는 그 결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경청(傾聽)의 길
들어야 한다: 존중으로 관계를 여는 지혜
고은층의 첫 번째 길은 경청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에게 경험과 지식은 귀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경험이 많다는 사실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생각과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을 때, 풍부한 경험은 오히려 새로운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
특히 과거에 사회적 책임과 지도적 역할을 맡았던 사람일수록 자신의 의견을 먼저 말하고 상대방에게 조언하려는 습관이 남아 있기 쉽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에 요구되는 지혜는 모든 문제에 답을 제시하는 능력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이해하는 태도에 있다. 때로는 조언보다 경청이, 설명보다 공감이 상대방에게 더 큰 힘이 된다.
경청은 단순히 말을 듣는 행위가 아니다. 자신의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려는 노력이다. 부부 사이에서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마음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고, 자녀와의 관계에서는 부모의 경험을 일방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친구와 이웃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서로 다른 삶의 배경과 가치관을 인정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오늘날처럼 세대 간 생활방식과 의사소통 방법이 빠르게 달라지는 시대에는 경청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젊은 세대의 생각이 자신의 경험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판단하거나 부정할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관점 속에서도 배울 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경청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통해 자신의 시야를 넓히는 과정이다.
고은층에게 경청은 관계의 주도권을 내려놓는 겸손이자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실천이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보다 상대방이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람이 오래 기억된다. 결국 경청의 길은 자신의 존재를 앞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관계의 깊이를 더해 가는 길이다.
인내(忍耐)의 길
참아야 한다: 절제로 마음을 다스리는 품격
두 번째 길은 인내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생활의 경험이 풍부해지는 동시에 오랫동안 형성된 습관과 판단방식이 굳어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자신의 기대와 다른 상황을 마주하면 쉽게 불편함을 느끼거나 사소한 문제에도 감정이 앞설 수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절제의 지혜이다.
그러나 인내를 무조건 참거나 모든 일을 양보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부당한 일을 묵인하거나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존엄까지 포기하는 것은 성숙한 인내가 아니다. 참아야 할 일과 바로잡아야 할 일을 분별하고, 감정적인 반응과 원칙 있는 대응을 구별하는 것이 진정한 인내이다.
인생 후반기에는 말 한마디와 작은 행동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더욱 깊이 헤아릴 필요가 있다. 당장의 감정에 따라 내뱉은 말은 오래된 우정을 상하게 할 수 있고, 사소한 의견 차이를 끝까지 다투는 태도는 가족 사이의 불필요한 갈등을 키울 수 있다. 반대로 잠시 말을 멈추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여유는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내의 바탕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이 있다.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조화를 이루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자세이다. 인간관계에서 모든 생각을 같게 만들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차이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찾는 것이다.
인내는 자신의 뜻을 끝까지 관철하는 힘이 아니라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내면의 여유이다. 지나친 욕심을 줄이고 불필요한 경쟁에서 벗어나며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때 마음의 평온도 깊어진다. 경청이 타인의 마음을 향해 자신을 열어 가는 길이라면, 인내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삶의 균형을 지키는 길이다. 절제할 줄 아는 마음에서 고은층의 품격이 드러난다.
나눔(分享)의 길
나누어야 한다: 받은 은혜를 돌려주는 보은의 실천
세 번째 길은 나눔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결코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족의 사랑과 스승의 가르침, 동료의 협력과 이웃의 도움, 그리고 사회가 마련해 준 여러 기회가 어우러져 오늘의 삶을 만들어 왔다. 그러므로 인생 후반기에 이르면 자신이 무엇을 이루었는가 못지않게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말하는 고은층의 ‘은(恩)’에는 이러한 관계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인생의 성취를 오직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로만 여기지 않고 여러 사람과 사회로부터 받은 도움의 결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받은 것을 다시 세상에 돌려주려는 보은(報恩)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나눔의 대상은 재산이나 물질에 한정되지 않는다. 평생 축적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하는 일, 지역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혜를 보태는 일,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도움을 건네는 일도 모두 나눔이다. 특히 은퇴 이후에는 직업적 책임에서 벗어난 만큼 자신의 시간과 역량을 보다 자유롭게 사회적 가치로 연결할 수 있다.
나눔에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다. 자신이 주고 싶은 것을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다. 경험을 전할 때에도 훈계보다 조언이,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함께 고민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나눔이 상대방에게 부담이나 간섭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 본래의 의미가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오랜 대학 생활과 사회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을 이제는 글과 만남을 통해 이웃과 나누고자 한다. 이는 과거의 업적을 되풀이하여 알리기 위한 일이 아니라 그동안 받은 도움과 배움의 일부를 다시 사회에 돌려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인생 후반기의 나눔은 무엇을 얼마나 주었느냐보다 자신의 경험과 시간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의미가 있다.
나눔은 가진 것을 줄이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삶의 의미를 넓히는 실천이다. 자신에게 머물던 지식과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때, 지나온 세월은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 고은층의 보람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만 있지 않다. 자신이 받은 은혜가 다른 사람의 삶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돕는 데에도 있다.
걸음(步行)의 길
걸어야 한다: 몸과 세상을 이어 가는 생동의 실천
네 번째 길은 걸음이다. 걷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신체활동이지만, 인생 후반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자연을 만나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일상의 변화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걸음은 몸을 움직이는 행위인 동시에 삶의 활동영역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실천이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 상태와 신체적 능력에는 개인차가 커진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같은 거리와 속도를 요구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많이 걷거나 빠르게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건강과 형편에 맞는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다. 걷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가능한 범위에서 몸을 움직이고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걸음의 본질은 특정한 운동방식보다 삶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려는 자세에 있다.
필자는 산책과 파크골프를 즐기면서 걸음이 주는 여러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다. 자연 속에서 걷다 보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발견하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평소 지나쳤던 주변의 모습에도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시간은 신체활동과 사회적 교류, 자연에 대한 관찰이 함께 이루어지는 생활의 현장이다.
걸음에는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기능도 있다. 빠르게 움직일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천천히 걸을 때 눈에 들어온다. 길가의 작은 꽃과 나무, 마을의 오래된 풍경,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 새로운 생각의 소재가 된다. 걷는 동안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고, 미처 풀지 못했던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또한 걸음은 사회적 고립을 예방하고 사람들과의 접점을 유지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활의 반경은 좁아지기 쉽다. 반면 가까운 공원이나 마을길을 찾고, 이웃과 인사를 나누며, 소규모 모임에 참여하는 활동은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작은 움직임이 세상과의 관계를 이어 주는 통로가 된다.
고은층에게 필요한 걸음은 무리한 도전이나 기록 경쟁이 아니다. 자신의 몸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일상을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사람과 자연,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일이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고, 빠르게 걷지 않더라도 깊이 사색할 수 있다. 걸음의 가치는 속도와 거리보다 그 안에서 발견하는 삶의 생동감에 있다.
배움(學習)의 길
배워야 한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기 갱신의 지혜
다섯 번째 길은 배움이다. 배움은 특정한 연령이나 직업에 속한 사람만의 과제가 아니다. 특히 인생 후반기에는 사회적 지위나 직업적 성취를 위한 공부에서 벗어나 자신의 관심과 호기심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탐구할 수 있다. 이러한 배움은 지식을 얻는 활동을 넘어 자신을 변화시키고 삶의 가능성을 넓히는 과정이다.
오늘날 사회는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전을 비롯하여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생활방식과 소통수단이 달라지고 새로운 지식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배움을 멈춘다면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 커지고 다른 세대와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반대로 필요한 것을 하나씩 익히려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변화는 부담인 동시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기술과 유행을 모두 따라갈 필요는 없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선택하여 배우고, 익힌 내용을 실제 생활에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마트폰의 새로운 기능을 익히거나 인공지능을 활용해 정보를 탐색하는 일, 관심 있는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거나 새로운 취미를 배우는 일 모두 의미 있는 배움이다.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공부가 일상의 불편을 줄이고 새로운 즐거움을 열어 주기도 한다.
고은층의 배움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차원이 있다. 바로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해석하는 일이다. 젊은 시절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생각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과거의 판단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지식과 타인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는 과정 역시 배움이다. 이처럼 배움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익숙한 믿음을 다시 살펴보는 용기이기도 하다.
필자는 정년퇴임 이후에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배움의 끈을 이어 가고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건, 자연과 사회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 의미를 글로 정리하는 과정은 또 다른 공부이다. 오랫동안 지식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는 배우는 사람의 자세로 세상과 마주하려고 한다. 가르치는 역할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배움의 기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배움의 궁극적인 가치는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 새로운 것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넓히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가다듬는 데 있다. 나이가 들어도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새롭게 배우려는 사람은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 갈 수 있다. 배움은 고은층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며 내일의 가능성을 열어 가는 자기 갱신의 길이다.
맺음글
‘그럼에도’ 정신으로 완성하는 고은의 오행지도
인생 후반기의 삶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건강과 경제적 여건, 가족관계와 생활환경에 따라 각자가 마주하는 현실은 다르다. 그러나 어떠한 조건에서도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가꾸려는 태도는 중요하다. 필자가 강조하는 ‘그럼에도’ 정신은 바로 이러한 현실 인식과 삶의 의지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고은의 오행지도는 그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다섯 가지 길이다.
첫째, 그럼에도 들어야 한다.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앞세우기보다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는 경청의 길이다.
둘째, 그럼에도 참아야 한다. 순간의 감정을 다스리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관계의 조화를 지키는 인내의 길이다.
셋째, 그럼에도 나누어야 한다. 살아오면서 받은 사랑과 도움을 기억하고 자신의 시간과 경험을 이웃과 사회에 돌려주는 나눔의 길이다.
넷째, 그럼에도 걸어야 한다. 자신의 건강과 형편에 맞게 몸과 마음을 움직이며 사람과 자연, 세상과의 관계를 이어 가는 걸음의 길이다.
다섯째, 그럼에도 배워야 한다. 익숙한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는 배움의 길이다.
이 다섯 가지 길은 서로 분리된 행동수칙이 아니다. 경청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하고, 인내는 그 관계를 지켜 준다. 나눔은 관계를 공동체로 확장하고, 걸음은 세상과의 접촉을 지속하게 한다. 배움은 이 모든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과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다섯 가지 실천이 서로 어우러질 때 오행지도는 하나의 온전한 생활철학이 된다.
이를 삶의 가치로 정리하면 경청은 존중의 지혜이고, 인내는 절제의 품격이며, 나눔은 보은의 실천이다. 또한 걸음은 생동의 힘이고, 배움은 자기 갱신의 원천이다. 이 다섯 가지는 인간관계와 공동체, 신체활동과 정신적 성장이라는 인생 후반기의 주요 영역을 함께 아우른다.
물론 오행지도를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실천할 수는 없다. 듣기 어려운 사람은 문자나 다른 소통수단을 활용할 수 있고, 걷기 어려운 사람은 자신의 몸에 맞는 활동을 선택할 수 있다. 나눔과 배움도 각자의 여건에 따라 방법과 정도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행동의 외형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존중과 절제, 감사와 실천, 자기 발전의 정신이다.
따라서 오행지도는 고은층에게 또 다른 성취의 부담을 주는 규범이 아니다.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는 길잡이이다. 때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일이, 때로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을 아끼는 일이 그 출발점이 된다. 누군가에게 경험을 나누고, 가까운 길을 걷고, 새로운 지식을 하나 익히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지향하는 유유자작(悠悠自作)의 삶도 이러한 실천과 맞닿아 있다. 자신의 형편과 속도를 존중하면서 스스로 의미 있는 일을 찾아가는 생활방식이다. ‘그럼에도’ 정신이 삶을 향한 내면의 의지이고 오행지도가 그 의지를 실천하는 길이라면, 유유자작은 그 실천을 자신의 일상에 조화롭게 정착시키는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인생 후반기의 품격은 지나온 세월의 길이나 과거에 차지했던 자리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늘 누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는지, 어떤 감정을 절제했는지, 무엇을 나누었는지, 어디를 향해 움직였는지, 그리고 무엇을 새롭게 배웠는지가 삶의 깊이를 만들어 간다.
세월의 흐름은 멈출 수 없지만, 세월을 대하는 자세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나이가 들었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었음에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 인생 후반기는 가능성이 모두 소진된 시간이 아니라 남아 있는 가능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현해 가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듣고, 그럼에도 참고, 그럼에도 나누고, 그럼에도 걷고, 그럼에도 배우는 삶이다."
이것이 필자가 제안하는 고은층의 ‘그럼에도’ 정신이며, 삶의 오행지도(五行之道)이다. 나아가 지나온 세월에는 감사하고, 오늘의 삶에는 충실하며, 다가올 시간에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고은층의 인생 후반기 철학이다.






[사진 해설] 비슬산 자연휴양림과 소재사의 가을 풍경
위 사진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에 위치한 비슬산 자연휴양림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비슬산 자락에 자리한 소재사(消災寺)의 전경을 담은 것이다. 비슬산 자연휴양림은 사계절마다 다채로운 풍광을 선사하는 명소로,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심신의 안식과 여유를 누릴 수 있는 힐링 휴양지이다.
[사진·글] 이성근. 2026.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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