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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닮아도 삶은 다르다: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에서 생각하는 고은층의 삶"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닮은 말에서 다른 삶을 생각하다


어제 오후 낙동클럽 5인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우연히 ‘가라지’라는 말이 화제에 올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라는 세 단어가 잇달아 떠올랐다. 끝소리는 비슷하지만 그 말에서 연상되는 모습과 의미는 서로 전혀 다르다.

가라지는 흔히 알곡과 대비되는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미꾸라지는 잡힐 듯하다가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반면 도라지는 땅속에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그 뿌리까지 사람에게 쓰임을 주는 식물이다. 말의 끝은 비슷한데 그 속에 담긴 모습은 이처럼 다르다.

그러다 사람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모두 비슷하게 나이를 먹고 같은 세월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을 마음에 담고 살아왔는지, 책임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무엇을 남기는지에 따라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다.

특히 고은층의 삶에서는 무엇을 더 얻느냐보다 어떤 사람으로 남느냐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그래서 나는 우연한 대화에서 떠오른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라는 세 단어를 통해 인생 후반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라지,
알곡처럼 보이기보다 열매로 드러나는 삶


가라지를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나오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떠오른다. 마태복음 13장에는 한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사람들이 잠든 사이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지를 묻자 주인은 밀까지 함께 뽑힐 것을 염려하여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라지와 알곡을 구별한다. 성경의 가라지는 어린 시기에는 밀과 매우 비슷하여 쉽게 구별하기 어렵지만 자라면서 차이가 드러나는 식물로 이해된다.

나는 이 비유에서 한 가지 삶의 교훈을 생각한다. 처음에는 비슷해 보여도 결국 무엇을 맺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겉으로 알곡처럼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 알곡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직함이나 재산, 학력과 명예가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모두 말해 주지는 않는다. 삶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겉모습이나 이름표가 아니라 그가 살아오며 맺은 열매다.

젊은 시절에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어떤 자리에 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인정받는지가 삶의 큰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 후반에 들어서면 그런 외적인 표지는 하나둘 힘을 잃는다. 직함도 내려놓고 자리도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흔적이다.

많이 아는 사람보다 지혜롭게 말하는 사람이 귀하다.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보다 사람을 따뜻하게 대했던 사람이 오래 기억된다. 성공한 사람보다 성공 속에서도 겸손했던 사람이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길었는가보다 그 세월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가 중요하다.

성경의 가라지 비유를 다른 사람을 가려내고 판단하는 잣대로 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으면 좋겠다. ‘나는 알곡처럼 보이려고 살아왔는가, 아니면 실제로 알찬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는가?’라고 스스로 물어보는 것이다.

고은층에게 필요한 것은 알곡인 척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속을 알곡처럼 채워 가는 일이다. 살아온 경험을 자랑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성찰과 지혜로 바꾸며, 자신이 받은 것들을 감사와 나눔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결국 보이는 모습보다 속에 무엇을 담고 있으며, 어떤 열매를 남기느냐가 인생 후반의 품격을 결정한다.

미꾸라지,
책임을 피하지 않는 삶


미꾸라지는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어느새 빠져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상황에 따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사람을 미꾸라지에 빗대기도 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 그 자체보다 그다음의 태도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큰 차이를 만든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경험과 권위를 앞세우기 쉽다. “내가 살아 봐서 안다”거나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을 오래 살았다는 것은 책임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더 무게를 가져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고은층의 품격은 잘못하지 않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했을 때 인정하고, 사과할 때 사과하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피하지 않는 데 있다. 미꾸라지처럼 책임 앞에서 빠져나가는 노년보다 자신의 몫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고은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변명은 줄이고 책임은 더 크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후배 세대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고은의 모습이다. 또한 세월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도라지,
뿌리를 내리고 쓰임으로 남는 삶


마지막에는 도라지가 떠오른다. 도라지는 화려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식물은 아니다. 땅속에 오래 뿌리를 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 뿌리마저 사람에게 쓰임이 된다. 나는 여기에서 고은층의 바람직한 모습을 본다.

인생 후반은 더 높이 올라가는 시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려온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고, 그것을 어떻게 쓰임으로 바꿀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기이다. 누구에게나 평생 살아오며 쌓은 경험이 있다. 직업에서 얻은 지식도 있고 사람을 만나며 얻은 지혜도 있다. 성공뿐 아니라 실패와 아픔도 모두 삶의 뿌리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기 안에만 묻어 두지 않는 일이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삶의 기쁨과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배우고, 걷고, 사람을 만나고, 웃으며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고 꽃피는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내린 뿌리에서 이전과는 다른 깊이의 꽃이 필 수도 있다.

그리고 쓰임으로 남는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경험과 지혜를 가족과 후배, 이웃과 사회에 나누는 일이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따뜻한 말 한마디도 쓰임이고, 후배의 손을 잡아 주는 일도 쓰임이다. 가족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도 쓰임이다.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기는 일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한 하나의 쓰임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고은층의 삶을 ‘유유자작(悠悠自作)’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다. 남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가꾼다. 그러나  그 삶을 자신만을 위해 닫아 두지 않는 것이다. 제 뿌리를 지키고, 제 꽃을 피우며, 마지막에는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남기는 삶이다.

도라지는 깊이 뿌리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자신이 가진 것을 세상에 내어준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고은층이 지향할 만한 삶이 아닐까 싶다.

맺음글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젊은 시절에는 ‘무엇이 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한다. 좋은 직업을 얻고, 높은 자리에 오르며,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에 이르면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무엇이 되었는가보다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가라지는 알곡과 비슷해 보여도 마지막에는 열매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미꾸라지는 잡힐 듯하다가도 빠져나가지만, 사람은 자신의 책임까지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도라지는 보이지 않는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뿌리까지 쓰임으로 남긴다.

그렇다면 우리 고은층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야 할까?

가라지처럼 알곡인 듯 보이는 데 마음을 쓰기보다 실제로 알찬 열매를 맺어야 한다. 미꾸라지처럼 책임 앞에서 요리조리 피하기보다 자신의 몫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도라지처럼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끝내 누군가에게 쓰임으로 남는 삶이면 좋겠다.

끝소리는 닮아도 삶은 다르다.

가라지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미꾸라지처럼 피하지 말며,
도라지처럼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자.


그리고 마지막에는 누군가에게 작은 쓰임이라도 남기자. 고은층의 품격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보다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냐에 있다. 또한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아온 세월을 어떤 지혜와 쓰임으로 남기느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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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닮아도 삶은 다르다

이성근

가라지처럼 알곡인 척하지 말고
미꾸라지처럼 책임을 피해 돌지 말며
도라지처럼 제 뿌리를 깊이 내리자
때가 오면 꽃을 피우고
끝내 누군가의 쓰임으로 남자

[글·사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어제 오후 낙동클럽 5인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나눈 대화 가운데 우연히 ‘가라지’라는 말이 화제에 올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라는 세 단어가 잇달아 떠올랐다. 끝소리는 비슷하지만 그 말에서 연상되는 모습과 의미는 서로 전혀 다르다.

가라지는 알곡 사이에 섞여 있으면서 알곡과 혼동되기 쉬운 존재이다. 미꾸라지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도라지는 땅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그 뿌리까지 사람에게 쓰임을 주는 식물이다.

사람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기보다 속을 알차게 채우고, 책임을 피하기보다 기꺼이 감당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에는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는 흔적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쓰임이 되었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더 값진 삶이 아닐까? 차 안에서 우연히 나온 ‘가라지’라는 한마디가 이런 생각으로 이어져 이 시를 쓰게 되었다.

[시 해설]

이 시는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라는 끝소리가 닮은 세 단어를 서로 다른 삶의 모습에 빗대어 쓴 것이다.

‘가라지’는 알곡인 척하는 삶을 경계하는 이미지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처럼 보이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속을 얼마나 알차게 채우며 살아가느냐는 뜻을 담았다. ‘미꾸라지’는 책임 앞에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나이가 들수록 핑계보다 책임을, 회피보다 받아들임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의 ‘도라지’는 앞의 두 이미지와 달리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도라지는 보이지 않는 땅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그 뿌리까지 사람에게 쓰임을 준다. 사람도 자신의 자리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끝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끝소리는 닮아도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다. 무엇처럼 보일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가질 것인가보다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이것이 이 시가 전하고 싶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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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두가 은혜로세

이성근


숨 쉬는 공기도 은혜
마시는 물도 은혜
먹는 밥 한 그릇도 은혜
걷는 두 다리도 은혜
살아 있음이 모두 은혜로세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고은층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가족과 이웃, 사회와 자연으로부터 크고 작은 은혜를 받아온 세대다. 이제는 자신이 누려 온 삶을 당연하게 여기기보다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한 끼의 밥과 건강한 몸까지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볼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의 서예 전시를 둘러싼 한 해프닝에서 ‘밥 한 그릇도 나라의 은혜’라는 글귀를 접하면서 생각이 이어졌다. 다만 글씨를 쓴 사람과 그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별개의 문제로 둔다. 필자는 ‘밥 한 그릇조차 누군가와 세상의 도움 없이는 내 앞에 올 수 없다’는 말의 뜻을 오늘의 삶에 돌아보게 했다. 그래서 고은층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세상 모두가 은혜로세’라는 짧은 시에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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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高恩層) 개념의 제안과 이론적 논의: 이성근 교수의 고은층론"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 행정학박사


서문
인생 후반기를 새롭게 바라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사람들을 ‘노인’, ‘고령자’, ‘고령층’, ‘은퇴자’, ‘실버세대’, ‘시니어’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이러한 용어들은 각각 필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대체로 생물학적 연령이나 경제활동에서의 은퇴 여부를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한다.

그러나 오늘날 인생 후반기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고 있다.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은퇴 이후에도 상당히 긴 삶이 남아 있으며, 많은 사람이 학습과 사회활동, 여행과 취미, 봉사와 나눔 등을 통해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 후반기를 단순히 ‘늙어가는 시기’나 ‘은퇴 이후의 여생’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타당할까? 오랜 생애를 통해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남은 삶을 스스로 설계하며, 가족과 이웃, 사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생애단계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2024년부터 ‘고은층(高恩層)’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그 의미를 여러 글과 저술을 통해 발전시켜 왔다. 초기에는 고령층과 은퇴층을 함께 포괄하는 의미가 강했지만, 이후에는 단순한 인구학적 범주를 넘어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설명하는 생애적·철학적·실천적 개념으로 확장해 왔다.

고은층은 단순히 나이 든 사람을 새롭게 부르는 이름이 아니다. 인생 후반기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고, 어떻게 나이 들며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가며 완성할 것인가에 관한 삶의 방식이다.

고은층(高恩層)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고은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고은층(高恩層)이란 오랜 생애과정을 통해 경험과 지혜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관리하면서 성찰·관계·참여·나눔과 환원을 통해 인생 후반기를 성숙하고 품격 있게 살아가는 생애계층을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연령이 아니다. 몇 살인가 보다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어떻게 자신의 삶과 사회적 가치로 전환하는가가 중요하다.

따라서 고은층은 생물학적 노화만을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다. 인생 후반기의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 자기 관리와 성찰, 관계와 참여, 나눔과 환원을 함께 포괄하는 생애적 개념이다.

고은층을 이루는 다섯 가지 차원

고은층의 삶은 크게 다섯 가지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생애적 차원이다.
고은층은 학습과 가정생활, 직업과 사회활동 등 인생 전반기의 다양한 경험을 거쳐 인생 후반기에 이른 생애단계에 위치한다. 따라서 현재의 삶 속에는 지나온 시간과 경험이 축적되어 있으며, 그 경험은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토대가 된다.

둘째, 유유자작적 차원이다.
필자는 이를 유유자작(悠悠自適)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유유자작은 여유롭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조나 자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와 정신, 경제생활과 일상을 가능한 범위에서 스스로 관리하고, 필요한 도움은 적절히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과 주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조와 자기 관리는 유유자작을 실천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셋째, 성찰적 차원이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축적된 경험을 삶의 지혜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무엇을 이루었는지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내려놓으며, 무엇을 남길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 관계와 참여적 차원이다.
가족과 친구,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여건에 맞게 지역사회와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고은층의 삶은 사회와 단절되는 삶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과 범위를 새롭게 조정하면서 사회와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삶이다.

다섯째, 나눔과 환원적 차원이다.
평생 축적한 지식과 경험, 지혜와 재능뿐 아니라 물질적·정신적 자원을 가족과 다음 세대, 지역사회와 나누는 것이다. 한 개인이 오랜 세월을 통해 축적한 경험과 지혜는 개인적 자산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러한 다섯 차원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애적 흐름을 이룬다.

"생애의 축적 → 유유자작 → 성찰 → 관계와 참여 → 나눔과 환원"

이는 단순히 나이를 먹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재구성하면서 사회와 다시 연결되고, 자신이 받은 것을 다음 세대와 공동체에 돌려주는 능동적인 인생 후반기의 과정이다.

기존의 노인·고령층과 무엇이 다른가?

‘노인’이나 ‘고령층’은 주로 연령을 기준으로 하는 인구학적 개념이다. ‘은퇴자’는 직업생활에서 물러난 사회경제적 지위를 중심으로 한 개념이다. ‘실버세대’와 ‘시니어’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표현이지만 일정 연령 이상의 사람을 지칭하는 성격이 여전히 강하다.

이에 비해 고은층은 연령과 은퇴라는 현실적 조건을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인생 후반기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중요하게 본다.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성찰하며, 사람과 사회에 참여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환원하는 삶을 강조한다.

이를 간결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고은층은 ‘노인’이나 ‘고령층’을 단순히 다른 이름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아니다. 인생 후반기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전환하자는 제안이다."

고은층론의 핵심: 나이가 아니라 삶의 품격

필자가 생각하는 고은층론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고은층은 나이의 이름이 아니라 삶의 품격이다."

고령화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과정이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어갈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과 노력뿐 아니라 가족, 공동체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은층론은 노년을 쇠퇴와 상실의 시기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평생 축적한 경험을 지혜로 전환하고, 불필요한 것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다음 세대와 공동체에 나누면서 유유자작하는 삶의 시기로 바라본다.

따라서 고은층에게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에 머물지 않는다.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질문이 된다.

축적에서 유유자작으로, 유유자작에서 환원으로
고은층의 전체 생애구조를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축적(Accumulation) → 유유자작(Self-Directed Living) → 환원(Contribution)"

인생 전반기는 배우고 일하면서 지식과 경험, 관계와 자산을 축적하는 시간이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에는 무엇인가를 계속 더 쌓는 것만큼이나 이미 쌓아 온 것을 어떻게 정리하고 활용하며 의미 있게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그 중심에 유유자작이 있다.

유유자작은 단순히 한가롭고 여유롭게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평생 축적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여건과 가치에 따라 남은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자기 관리와 자조, 선택과 절제, 성찰과 학습, 관계의 재구성 등이 함께 포함된다.

그리고 삶이 더욱 성숙해질수록 자신의 경험과 지혜, 시간과 재능을 가족과 다음 세대, 지역사회와 나누고 환원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축적하는 삶에서 유유자작하는 삶으로, 유유자작하는 삶에서 나누고 환원하는 삶으로."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고은층의 중요한 생애적 전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은층은 사회적 지원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필요한 사회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사회와 나눌 수 있는 능동적인 삶의 주체이자 사회적 자산이다.

고은층의 조작적 정의와 앞으로의 과제

고은층을 하나의 학술적 연구대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개념적 정의와 더불어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작적 정의가 필요하다.

현 단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고은층은 원칙적으로 고령기 또는 은퇴 이후의 생애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유자작의 태도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관리하며, 축적된 생애경험을 성찰과 지혜로 전환한다. 또한 가족과 사회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자신의 여건과 역량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사회참여와 나눔·환원을 실천하는 생애집단이다."

여기에서 연령은 중요한 기준이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초기의 고은층 개념은 주로 60대 이상을 중심으로 고령층과 은퇴층을 포괄하는 의미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개념이 발전하면서 특정 연령만으로 고은층 여부를 판단하기보다는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는 태도와 삶의 방식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으로는 고은층의 연령적 범위와 생애단계를 보다 명확히 설정하고, 유유자작, 자기 관리, 성찰, 관계, 사회참여, 나눔과 환원 등의 구성요소와 상호관계를 더욱 정교하게 이론화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러한 요소를 경험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지표와 척도를 개발하고, 개인적 조건뿐 아니라 가족·지역사회·제도적 환경과의 관계까지 연구한다면 고은층론은 초고령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생애론적·실천적 연구 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은층론이 지향하는 삶

필자가 제안하는 고은층론은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바꾸는 데서 출발한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에서
‘어떻게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고 완성할 것인가?’로 시작한다.


인생 전반기가 성장과 성취, 축적의 시간이었다면 인생 후반기는 성찰과 유유자작, 그리고 환원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많이 가지는 삶에서 필요한 것을 남기는 삶으로, 경쟁하는 삶에서 함께하는 삶으로, 자신을 위한 축적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나눔으로 삶의 중심을 옮겨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은층의 삶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일상을 주체적으로 관리하는 삶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사색하며,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사회와 연결되어 살아가는 삶이다. 그리고 평생 얻은 경험과 지혜를 나누며 자신의 생애 마지막까지 품격 있게 준비하는 삶이다.

맺음말
고은층은 삶의 후반부를 새롭게 부르는 이름이다

고은층(高恩層)은 고령자와 은퇴자를 단순히 ‘늙어가는 사람들’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 현재의 삶을 주체적으로 관리한다. 또한 남은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이 받은 것을 가족과 이웃, 다음 세대와 사회에 나누는 성숙한 생애계층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필자는 고은층을 이렇게 생각한다.

"고은층은 늙음의 이름이 아니라 성숙의 이름이고,
은퇴의 이름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축적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성찰하고 유유자작하며 나누는 삶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나의 질문이 놓여 있다.

나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답을 자신의 삶 속에서 찾아가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필자가 말하는 고은층(高恩層)이다.

이것이 필자가 여러 해에 걸쳐 사색하고 글을 쓰면서 발전시켜 온 고은층론(高恩層論)의 기본 정신이다.

참고자료
"필자의 고은층(高恩層)에 대한 주요 논의와 개념의 발전"

이 글은 필자가 고령기와 은퇴 이후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사색하면서 여러 글과 저술을 통해 제시해 온 ‘고은층’에 관한 논의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고은층은 처음부터 완성된 이론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고령층과 은퇴층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인생 후반기의 삶의 방식과 가치에 관한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1. 고은층 개념의 초기 제안: 2024년
필자는 2024년 9월 8일 「고은층 인구/고령자와 은퇴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글에서 ‘고은층 인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당시 고은층은 주로 고령층과 은퇴층을 포괄하면서 60대 이상의 인생 후반기 계층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핵심 문제의식은 고령자나 은퇴자를 경제활동에서 물러난 사람이나 사회적 부양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은퇴 이후에도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설계하는 주체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2. 인생 후반기 삶의 주체로서 고은층
이후 필자는 여러 글을 통해 인생 후반기를 단순한 휴식이나 여생의 시기가 아니라 새로운 생애단계로 바라보는 관점을 발전시켜 왔다.

고은층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이다. 건강과 일상의 자기 관리,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 지속적인 학습과 사색, 여행과 여가, 사회참여, 봉사와 나눔, 그리고 삶의 마무리에 대한 준비까지 인생 후반기의 다양한 과제를 고은층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해 왔다.

3. 『이성근 교수의 인생 사색 7권』과 개념의 확장: 2025년
2025년 출간된 『이성근 교수의 인생 사색 7권』에서는 고은층이 인생 후반기를 바라보는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는 고은층을 단순히 일정 연령 이상의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기보다 인생 후반기를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생애계층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초기의 인구학적 의미는 점차 생애적·철학적·실천적 의미로 확장되었다.

4. 유유자작하는 삶의 주체로서 고은층: 2026년
2026년에 이르러 필자의 고은층 논의는 인생 후반기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실천하는 능동적인 삶의 주체라는 방향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유자작(悠悠自作, Self-Directed Living)은 고은층의 삶을 설명하는 핵심적 통합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유유자작은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 시간과 일상, 관계와 자원을 스스로 살피고 조절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 후반기를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만들어 가는 삶을 뜻한다.

이에 따라 자조와 자기 관리는 유유자작의 하위 실천요소로 포괄되며, 성찰·관계·참여·나눔과 환원은 유유자작을 통해 삶과 사회로 확장되는 고은층의 주요 실천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5. ‘고은층(高恩層)’으로 명칭의 통일: 2026년
고은층 개념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일부 글에서는 한자 표기가 달리 사용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개념의 의미와 향후 이론적 체계화를 고려하여 필자는 명칭을 ‘고은층(高恩層)’으로 통일하였다.

여기에서 ‘은(恩)’은 삶을 살아오면서 받은 은혜와 인연을 기억하고,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다시 가족과 이웃, 다음 세대와 사회에 나누고 환원한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따라서 고은층(高恩層)은 고령이나 은퇴라는 연령적·직업적 특성을 넘어,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 자신이 살아온 삶을 성찰하고 받은 것을 다시 나누는 삶의 가치를 상징한다.

6. 고은층론(高恩層論)으로의 발전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필자의 고은층 개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발전해 왔다.

고령층·은퇴층을 포괄하는 인구 개념
인생 후반기의 새로운 생애계층
→ 자기 삶을 설계하는 능동적 주체
→ 유유자작하는 삶
→ 경험과 지혜의 나눔과 환원
→ 고은층론(高恩層論)의 체계화

이를 보다 압축하면 고은층의 생애적 원리는 다음의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축적(Accumulation) → 유유자작(Self-Directed Living) → 환원(Contribution)

이 세 단계에서 축적은 평생 살아오면서 형성한 경험·지식·관계·자원의 기반이다. 유유자작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성찰·선택·관리·재구성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환원은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가족·다음 세대·공동체와 나누어 사회적 가치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고은층론은 새로운 명칭 하나를 제안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초고령사회에서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한 개인이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어떻게 자신의 성숙과 가족·다음 세대·사회의 가치로 이어갈 것인지를 탐구하는 생애론적·실천적 관점으로 발전할 수 있다.

참고자료 작성에 관한 주석
이 글에서 말하는 ‘고은층(高恩層)’은 필자가 2024년 이후 여러 글과 저술에서 사용하면서 그 의미를 확장하고 체계화해 온 개념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현 단계에서는 필자가 고은층을 독자적인 생애계층 개념으로 제안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다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

향후에는 관련 선행연구와 기존의 노년학·생애과정론·성공적 노화·활동적 노화 등의 개념과 비교하여 고은층론의 이론적 위치와 차별성을 보다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유유자작을 비롯한 주요 구성개념의 조작적 정의와 측정지표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사진 1·2는 제주 한림 금능의 근석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고추이며, 사진 3은 필자의 가족 모임 사진을 AI로 수정·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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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의 삶은 따라 다르다
생각·마음·사람·장소·시간이 빚는 인생의 빛깔"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같은 하루를 보내도 삶은 다르다


어제 칠구 파크클럽 회원들과 경북 예천 한천 파크골프장에서 하루를 보냈다. 함께 공을 치고, 걷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운동을 했지만 문득 돌아보니 저마다 느끼는 즐거움과 생각은 조금씩 달랐을 것이다. 우리 모두 고은층 세대이지만 살아온 길이 다르고, 바라보는 눈이 다르며, 마음에 담아 가는 것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날의 여운 속에서 문득 ‘따라 다르다’는 말이 떠올랐다. 생각에 따라 기분이 다르고, 마음에 따라 표정이 다르다. 사람에 따라 품이 달라지고, 장소에 따라 삶의 결이 달라지며, 시간에 따라 인생의 빛깔도 달라진다. 고은층 세대로 살아가는 필자 역시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한다. 또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하루가 즐거워지기도 하고 힘들어지기도 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생활의 리듬과 삶의 느낌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고은층의 삶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이 다섯 가지가 ‘결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건강과 경제적 여건, 가족관계와 사회적 환경 등 수많은 조건이 삶에 영향을 미친다. 다만 생각·마음·사람·장소·시간은 우리가 비교적 스스로 살피고 선택하며 가꾸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고은층의 삶의 질과 빛깔을 좌우하는 중요한 다섯 축이라 할 수 있다.

생각과 마음:
삶을 안에서 바꾸는 힘


먼저 생각이다. 같은 일을 겪어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진다. 작은 불편을 불행으로 여기면 하루가 무거워진다. 그러나 작은 감사거리를 발견하면 같은 하루도 한결 따뜻해진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분과 말과 행동의 출발점이 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 유배 시절 자신의 거처를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붙였다. 「사의재기」에서 그는 생각은 담박하게 하고〔思宜澹〕, 용모는 장엄하게 하며, 말은 신중하게 하고, 행동은 무겁게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경계했다. 특히 그 첫머리에 ‘생각’을 둔 것은 의미가 깊다. 생각이 흐트러지면 말과 행동도 흐트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고은층에게 필요한 것도 생각을 많이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경험도 많고 기억도 많다. 그 많은 경험을 후회와 원망의 재료로 삼을 수도 있고, 이해와 감사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도 있다. 지나간 일을 되씹으며 마음을 어지럽히기보다 불필요한 생각은 덜어 내고 중요한 것은 깊이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생각보다 한층 깊은 곳에는 마음이 있다. 생각이 판단의 방향이라면 마음은 삶을 대하는 정서적 바탕이라 할 수 있다. ‘청심사달(淸心事達)’, 곧 마음이 맑으면 일이 통한다는 말처럼 마음이 편안하면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말도 너그러워진다. 반대로 마음에 불평과 미움이 쌓이면 자신도 모르게 표정과 말투에 드러난다. 젊은 날에는 능력과 성취가 사람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았다면, 고은층에 이르면 표정과 말씨, 마음 씀씀이가 그 사람의 세월을 보여 준다. 그래서 고은층의 얼굴은 살아온 세월의 기록이면서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창이기도 하다. 좋은 생각을 품고 맑은 마음을 가꾸는 것이 곧 자신의 얼굴과 품격을 가꾸는 일이다.

사람과 장소:
누구와 어디에서 사느냐?


사람도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숫자보다 관계의 질이 더 중요해진다. 누구를 가까이하고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말과 생각, 생활습관까지 달라질 수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로운 세 종류의 벗, 곧 ‘익자삼우(益者三友)’를 말했다.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견문이 넓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유익하다는 가르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우정을 유익을 위한 관계, 즐거움을 위한 관계, 서로의 좋은 인품과 덕을 바탕으로 한 관계로 나누고, 좋은 사람끼리 서로의 선(善)을 바라는 우정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았다.

고은층의 벗은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만나고 돌아서면 남의 흉만 남는 관계보다 서로 웃고 배우고 격려하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관계가 좋다. 아플 때 안부를 묻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하며,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조용히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좋은 벗이다. 어제 한천 파크골프장에서 함께 걸었던 부부 회원들의 모습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운동도 즐겁지만 함께 걷고 웃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쩌면 더 큰 즐거움일 수 있다.

사람과 함께 중요한 것이 장소다. 옛날부터 맹모삼천지교가 전해지는 것도 사람이 살아가고 배우는 데 환경이 중요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장소가 사람의 삶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장소를 찾고 가꾸며 그곳에서 좋은 생활방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산책길이 그런 곳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도서관이나 텃밭, 공원이나 운동장이 그런 곳일 수 있다. 집 안의 작은 책상 하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돈하게 한다면 의미 있는 장소다. 예부터 풍수지리가 삶터의 방향과 자연환경을 중시했던 것도 결국 사람이 어디에 터를 잡고 어떻게 자연과 어울려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오랜 관심의 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은층에게는 이제 ‘어디에 사느냐’에 못지않게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하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좋은 사람을 만나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장소를 가까이할 필요가 있다. 좋은 장소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좋은 생활을 반복하게 만드는 삶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시간:
인생의 빛깔을 익히는 힘


마지막은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지만 체감하는 시간은 같지 않다. 즐거운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시계가 재는 시간은 같아도 사람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삶의 시간’은 서로 다르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의 길이가 중요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이루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은층에 이르면 시간의 양보다 밀도가 더 중요해진다. 하루를 얼마나 바쁘게 살았느냐보다 무엇을 하며 누구와 어떻게 보냈느냐가 더 중요하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만 세월은 사람 안에 쌓인다. 잘 보낸 시간은 추억이 되고, 배운 시간은 지혜가 되며, 함께한 시간은 관계가 된다. 어려웠던 시간도 잘 삭이면 인생을 이해하는 깊이가 된다. 그래서 고은층에게 시간은 단순히 줄어드는 자원이 아니라 남은 삶을 익혀 가는 자원이기도 하다.

어제의 파크골프도 지나고 보면 단순히 몇 시간 운동한 일이 아니다. 함께 걷고 웃었던 시간, 서로의 부부가 나란히 운동했던 모습을 보며, 그리고 한천 주변의 풍경과 이날 나누었던 이야기가 하나의 기억으로 남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의 빛깔을 만든다. 그러므로 고은층에게 중요한 질문은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만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고 묻는 편이 더 의미 있다. 남은 세월의 길이는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그 시간의 내용과 빛깔은 상당 부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맺음글
무엇을 따라 살 것인가?

돌아보면 인생은 참으로 ‘따라 다르다’. 생각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고, 마음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품이 달라지고, 머무는 장소에 따라 삶의 결이 달라진다. 그리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빛깔이 달라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뜻이 있다. ‘따라 다르다’고 해서 무엇인가에 끌려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무엇을 따라 살 것인가는 상당 부분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좋은 생각을 선택하고, 맑은 마음을 가꾸며,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좋다. 나를 살리는 장소를 찾으며,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쓰면 더욱 좋다.. 이것이 고은층이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나이가 들수록 환경을 탓하기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살펴야 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되 바꿀 수 있는 생각과 마음, 관계와 생활공간, 시간의 쓰임은 조금씩 더 좋은 쪽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결국 고은층의 품격은 살아온 세월만으로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마음을 품으며, 누구와 어울리느냐가 중요하다. 어디에 머물며,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남은 인생의 결이고 빛깔이 된다.

생각은 맑게,
마음은 따뜻하게,
사람은 좋게,
장소는 편안하게,
시간은 의미 있게.


고은층의 삶은 ‘따라 다르다’. 그리고 그 ‘따라’를 잘 선택하는 것이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지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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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다르다

이성근


생각 따라 기분이 다르고
마음 따라 표정이 다르다
사람 따라 품이 다르고
장소 따라 삶의 결이 다르다
시간 따라 인생의 빛깔이 다르다

[사진ㆍ글]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이 디카시를 쓰게 된 동기와 해설]

어제'칠구 파크클럽' 부부 회원들과 예천 한천 파크골프장에서 하루를 함께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각자 생각과 느낌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어서  ‘따라 다르다’는 말을 떠올렸다.
고은층의 삶도 그렇다. 생각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고, 마음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또한  만나는 사람과 머무는 장소, 흐르는 시간에 따라 삶의 결도 빛깔도 달라진다. 결국 인생의 빛깔은 주어진 환경만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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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요지경

이성근


못난 이는 잘난 체하고
잘못한 이는 남을 탓하고
방귀 뀐 이는 시치미 떼고
죄지은 이는 되레 큰소리친다
해는 그대로인데 세상만 거꾸로 돈다

[글ㆍ사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오늘 오후 귀갓길에 자동차를 운전하다 차창 밖으로 석조의 구름 사이에 걸린 해를 바라보았다. 문득 바로 보아도, 거꾸로 돌려 보아도 해는 여전히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오히려 무엇이 바로이고 무엇이 거꾸로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정치·외교·경제를 비롯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잘못한 사람이 남을 탓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그 순간 ‘요지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변하지 않는 해와 달리 상식과 책임의 자리가 뒤바뀐 듯한 세태를 바라보며, 오늘의 세상을 짧게 풍자해 보고자 이 디카시를 쓰게 되었다.

[디카시 해설]

이 디카시는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해와 상식이 뒤집힌 듯한 세상을 대비하여 오늘의 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잘난 체하기’, ‘남 탓하기’, ‘시치미 떼기’, ‘큰소리치기’로 이어지는 네 장면은 책임을 회피하고 잘못을 감추려는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의 “해는 그대로인데 세상만 거꾸로 돈다”는 자연의 질서는 변하지 않지만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오히려 뒤집혀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결국 이 디카시는 복잡한 세상일수록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상식이고 책임인지를 다시 돌아보자는 작은 풍자와 성찰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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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가 자연처럼: 혼돈의 시대, 고은층이 붙들 삶의 방향"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흔들리는 시대에도 삶의 중심은 있어야 한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인공지능(AI)과 디지털 변혁은 우리가 일하고 배우며 소통하는 방식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기후위기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 방식을 다시 묻고 있으며, 고령화와 저출생, 인구절벽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한다. 세계적으로는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 기조가 확산되고 경제와 군사안보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정치와 사회의 모습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공동체의 미래보다 눈앞의 이해관계가 앞서고, 서로 다른 생각을 조정하고 타협하기보다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모습도 적지 않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빨라졌는데, 정작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는 오히려 더 분명하지 않은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었다.

고은층(高恩層)의 세대로 살아가는 필자에게 이러한 변화는 남의 일이 아니다. 살아온 날이 많아질수록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지만, 동시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삶에는 방향이 있어야 하고, 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붙들어야 할 중심은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 끝에 문득 자연을 바라보게 되었다. 물은 흐르고, 새싹은 돋으며, 씨앗은 때를 기다린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제 길을 간다. 그 속에는 인간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질서와 지혜가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짧은 디카시를 적어 보았다.

세상만사가 자연처럼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사랑은 파릇한 새싹처럼
배움은 즐거운 놀이처럼
가족은 소중한 보물처럼
사회는 반듯한 저울처럼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


이 여섯 줄에는 남은 인생에서 필자가 지키고 싶은 여섯 가지 삶의 마음을 담았다.

흐르는 물과 파릇한 새싹: 순응하되 사랑은 새롭게

첫째,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야 한다.

물은 높은 곳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 장애물을 만나면 부딪치기보다 돌아가고, 작은 물줄기는 서로 만나 강을 이룬다. 유연하게 흐르지만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고은층에게도 이러한 물의 지혜가 필요하다. 오랜 세월 쌓아 온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지만 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낯설어도 조금씩 익히고, 젊은 세대의 생각이 다르더라도 먼저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변화에 순응한다는 것은 자신의 원칙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새롭게 찾아가는 일이다.

둘째, 사랑은 파릇한 새싹처럼 끊임없이 돋아나야 한다.

새싹은 작고 연약하지만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사랑도 거창한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따뜻한 안부 한마디, 상대를 먼저 헤아리는 작은 배려, 힘든 사람에게 건네는 손길에서 사랑의 싹은 돋아난다.

나이가 들수록 만나는 사람의 숫자는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관계의 깊이까지 줄어들 필요는 없다. 부부와 가족, 친구와 이웃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기보다 따뜻한 격려를 건네는 것, 그것이 고은층이 새롭게 피워낼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물처럼 유연하게 흐르면서도 새싹처럼 새로운 관계와 사랑을 피워내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첫 번째 지혜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놀이와 소중한 보물:  배움과 가족이 삶을 젊게 한다

셋째, 배움은 즐거운 놀이처럼 이어져야 한다.

젊은 시절에는 공부에도 졸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을 살아보니 배움에는 졸업이 없다. 특히 AI와 디지털 변혁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대에는 나이를 이유로 배움을 멈출 수 없다. 오히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고은층이 세상과 연결되고 삶의 활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필자도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여전히 배운다. 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동작을 익히고,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배우기도 한다.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하나 새롭게 알게 되는 데 즐거움을 느끼려고 한다.

배움이 의무가 되면 고단하지만 놀이가 되면 즐겁다. 남보다 잘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넓히기 위한 배움이라면 나이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고은층의 배움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삶의 호기심을 놓지 않는 즐거운 놀이가 되어야 한다.

넷째, 가족은 소중한 보물처럼 아끼고 살펴야 한다.

세상을 오래 살아보니 결국 가장 가까이 남아 있는 사람은 가족 즉, 부부이다. 젊은 시절에는 일과 사회생활에 쫓겨 가족의 소중함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가장 가까운 공동체임을 깨닫게 된다.

보물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가치가 유지되지 않는다.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고마움을 표현하고, 서로의 생활방식과 선택을 존중하며, 지나친 기대와 간섭은 줄일 필요가 있다.

또한 고은층의 가족사랑은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더 해주는 데만 있지 않다. 자신의 건강과 생활을 가능한 한 스스로 돌보고, 가족에게 불필요한 걱정과 부담을 줄이는 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다. 서로 의지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존중할 때 가족이라는 보물은 더욱 오래 빛날 수 있다.

반듯한 저울과 오늘의 씨앗:  공동체를 지키고 미래를 심다

다섯째, 사회는 반듯한 저울처럼 공정해야 한다.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까닭 없이 기울면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세대와 지역, 계층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기본적인 원칙과 공정성이 지켜질 때 공동체에 대한 신뢰도 유지된다.

오늘의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며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원칙을 내세우고 상대에게는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한 태도가 반복된다면 사회적 신뢰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민주사회의 정치는 서로 다른 생각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고은층 역시 공정의 문제에서 예외일 수 없다. 살아온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몫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기회와 미래도 함께 헤아려야 한다. 반듯한 저울은 남에게만 들이대는 잣대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놓아야 할 기준이다.

여섯째,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 세워진다.

작은 씨앗 속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가 들어 있다. 그러나 씨앗을 심지 않고 열매를 기다릴 수는 없다. 오늘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결국 내일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기후위기와 인구감소, AI 시대의 변화처럼 거대한 문제도 생각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에너지를 조금 아껴 쓰고, 새로운 기술을 하나 배우며, 젊은 세대에게 경험을 나누고, 이웃과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는 작은 행동들이 모여 미래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고은층에게도 아직 심을 씨앗은 많다. 오랜 경험과 지혜를 다음 세대와 나누는 일, 필요한 곳에 재능을 보태는 일, 좋은 글 한 편을 남기는 일, 가족과 이웃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일도 모두 작은 씨앗이다. 인생의 후반기는 지금까지 이룬 것을 거두기만 하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다시 무엇인가를 심고 세우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맺음글
자연처럼 살아간다는 것,
자연에는 말이 없지만 가르침이 있다.

물은 흐르되 방향을 잃지 말라고 하고, 새싹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놀이는 삶의 즐거움과 호기심을 놓지 말라고 하며, 보물은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을 잘 살피라고 일깨운다. 저울은 바른 기준과 균형을 지키라고 하고, 씨앗은 내일을 원한다면 오늘부터 심으라고 가르쳐 준다.

필자가 디카시 「세상만사가 자연처럼」에 담고 싶었던 것도 결국 이러한 삶의 이치다.

고은층의 삶은 지나온 세월을 회고하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생의 후반기에도 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새롭게 사랑하며, 배워야 한다. 또한 관계를 돌보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무엇인가를 남겨야 한다.

필자는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삶의 원칙과 방식은 오히려 단순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물처럼 유연하게,
새싹처럼 따뜻하게,
놀이처럼 즐겁게,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며,
저울처럼 반듯하게,
씨앗처럼 희망을 심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이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고은층에게 필요한 삶의 방향이 아닐까?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자연의 이치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흔들리는 세상을 바라볼수록 다시 자연을 바라본다. 먼 곳에서 삶의 해답을 찾기보다 늘 우리 곁에 있는 물과 새싹과 씨앗에서 남은 인생의 길을 배워도 좋겠다.

세상만사가 자연처럼.

우리의 남은 인생 또한 자연처럼 순리를 따르되 멈추지 않고, 사랑과 균형을 품되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계속 심어가는 여정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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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짱 도루묵을 지나, 진짜 도루묵을 맛보다: 고은층의 지난 삶과 오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도루묵 한 접시에서 인생을 생각하다


오늘 필자 가족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의 '순참깨방앗간'에 참기름을 짜러 갔다. 깨를 맡겨 놓고 기다리는 동안 인근 '함지박 한정식'에서 손위 동서 가족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정갈한 한식 밥상에 여러 반찬이 올랐는데, 그 가운데 유난히 '도루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점을 맛보니 담백하면서도 구수했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우리가 흔히 쓰는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 어째서 헛수고와 허무를 뜻하는 말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필자의 지난 삶으로 이어졌다. 돌아보면 오랫동안 애썼지만 이루지 못한 일도 있었고, 애써 이루어 놓았으나 남의 손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일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기도 했다. 젊은 날에는 그런 순간을 만나면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된 듯 허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긴 인생길을 지나 고은층에 이른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과연 지나온 삶의 그 모든 일이 정말 말짱 도루묵이었을까? 그리고 아직 살아 보지도 않은 앞으로의 삶까지 미리 말짱 도루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식탁 위의 진짜 도루묵을 맛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제는 지나간 삶의 ‘말짱 도루묵’을 아쉬워하기보다 오늘의 ‘진짜 도루묵’을 제대로 맛보고, 아직 맛보지 않은 ‘내일의 도루묵’을 기대할 때가 아닐까?

도루묵이라는 이름에 담긴 돌아옴과 허사

도루묵은 이름부터 흥미로운 물고기다. 널리 알려진 설화에 따르면 어느 임금이 피란길에 허기진 상태에서 ‘묵’이라는 생선을 먹고 그 맛에 감탄하여 ‘은어(銀魚)’라는 귀한 이름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궁궐로 돌아와 다시 먹어 보니 예전의 그 맛이 아니어서 “도로 묵이라 하라”고 했고, 그 말이 변해 ‘도루묵’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흔히 선조와 임진왜란에 얽힌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시대의 왕이나 조선 인조와 관련된 전승도 있어, 특정 임금의 실제 사건이라기보다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유래담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국어학적으로는 옛 문헌에 나타나는 ‘돌목’이나 ‘도루목’ 같은 명칭이 변하여 오늘의 ‘도루묵’이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따라서 ‘도로 묵’이라는 이야기는 확정된 어원이라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그 이름에 의미를 덧붙인 민간어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오히려 그 점이 더 흥미롭다. 사람들은 한 마리 생선의 이름 속에 ‘돌아감’의 이야기를 담았다. 귀한 이름을 얻었다가 다시 옛 이름으로 돌아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얻었다가 잃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인간사의 모습을 한 생선의 이름에 입혀 놓은 셈이다.

여기에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표현도 생겨났다. 오랫동안 공들인 일이 허사가 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기대와 결과의 차이, 성취와 상실, 전진과 회귀가 이 짧은 말속에 겹쳐 있다. 그래서 필자에게 '도루묵'은 이제 단순한 물고기만이 아니다. 먹는 도루묵이 있고, 돌아가는 도루묵이 있으며, 헛수고를 뜻하는 말짱 도루묵이 있고, 다시 새롭게 맛보게 되는 진짜 도루묵도 있다. 바로 그 여러 얼굴 속에서 긴 인생여정을 걸어온 고은층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온 삶의 ‘말짱 도루묵’을 다시 바라보다

고은층은 짧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공부하고 일하며 사람을 만나고 가족을 돌보았으며,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해 왔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으며,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았다. 열심히 추진했던 일이 중도에 무산되기도 했고, 정성을 다해 맺었던 관계가 뜻하지 않게 헤어지기도 했다. 꼭 이루고 싶었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며, 한때 자신의 전부처럼 여겼던 일도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했다. 그럴 때면 ‘그동안 애쓴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허탈함이 밀려왔고,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바라보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결과는 사라졌어도 과정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경험은 남고, 실패 속에서 판단력이 자라며, 인간관계의 아픔을 겪으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법도 배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오래 살아오면서 기다림과 절제, 때로는 포기와 겸손도 익히게 된다.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되돌아왔다고 해서 걸어온 길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흘린 땀이 남고, 보았던 풍경이 남으며, 무엇보다 그 길을 걸은 자신이 출발할 때와는 달라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는 생각만큼 완전한 ‘말짱 도루묵’이 많지 않은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실패였던 일이 훗날 소중한 경험이 되고, 상실이 새로운 길을 열어 주며, 좌절이 사람을 더 깊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도루묵 설화에서 피란길에 그렇게 맛있던 생선이 궁궐에서는 예전의 맛이 아니었던 것처럼 삶의 맛도 처지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젊은 날 그토록 중요했던 것이 고은층에 이르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고, 젊어서는 별것 아니라고 지나쳤던 일이 오히려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큰 성취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건강하게 아침을 맞는 일이 귀하고, 많은 사람을 아는 것보다 마음을 나눌 몇 사람이 소중하다. 어쩌면 고은층은 삶의 양을 계속 늘려 가는 시기라기보다 이미 지나온 삶의 의미와 지금 가진 삶의 맛을 더욱 깊게 음미하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진짜 도루묵’과 아직 맛보지 않은 내일

이날 점심 밥상에서 필자가 만난 것은 말속의 도루묵이 아니라 실제로 맛볼 수 있는 ‘진짜 도루묵’이었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에는 허무와 헛수고의 뜻이 담겨 있지만, 입안에서 맛본 도루묵은 담백하고 구수했다. 그 순간 우리는 혹시 이름과 관념에 사로잡혀 눈앞의 실제 삶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었다”, “이제 할 만큼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하겠는가”라고 생각하다 보면 고은층의 남은 삶까지 스스로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삶은 지금 여기에 있다. 오늘 걸을 수 있으면 걷고, 읽을 수 있으면 읽으며, 쓸 수 있으면 쓰면 된다. 만날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평생 쌓아 온 경험을 나눌 곳이 있다면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 된다. 필자 역시 글을 써 지인들과 생각을 나누고,
오랜 교수 생활과 사회활동을 통해 쌓은 경험을 필요한 곳에 조금이나마 돌려주고자 하며, 실제로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까운 사람들과 운동하고 자연을 걸으며 가족과 밥을 먹는다. 겉으로 보면 대단하지 않은 일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필자에게는 이런 일들이 바로 ‘진짜 도루묵의 맛’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한 끼, 이웃과 나누는 차 한 잔, 한 편의 글을 쓰는 시간, 몸을 위해 하는 작은 운동이 깊은 삶의 맛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돌아옴’의 의미도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말짱 도루묵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지만, 인생에서 돌아오는 일이 언제나 실패인 것은 아니다. 오랜 바깥 길을 걷다가 정년 이후 집과 가족에게 돌아오게 되고, 바쁜 사회생활을 마치고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 세상의 평가와 경쟁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도 소중한 돌아옴이다. 젊은 날의 돌아옴은 실패처럼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고은층의 돌아옴은 오히려 회복일 수 있다. 더 가지려는 삶에서 가진 것을 감사하는 삶으로, 경쟁하는 삶에서 함께하는 삶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에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왔다고 해서 모두 말짱 도루묵은 아니다. 잘 돌아오는 것도 삶의 지혜다.

그러나 고은층의 삶이 과거를 되돌아보고 오늘에 감사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아직 쓰지 않은 글이 있고, 만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걷지 않은 길과 배우지 않은 것이 있다. 나누지 못한 경험도 남아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고은층에게 ‘기대’라는 말을 특별히 소중하게 생각한다. 기대가 있다는 것은 아직 미래가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 기대는 젊은 날의 기대와는 달라야 한다. 더 높이 올라가기보다 더 깊어지기를 기대하고, 더 많이 가지기보다 더 잘 나누기를 기대하며, 단순히 더 오래 사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더 잘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미래는 아직 말짱 도루묵이 아니다. 아직 살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맛보지 않은 도루묵의 맛을 미리 단정할 수 없듯, 살아 보지 않은 내일의 맛 또한 미리 알 수 없다. 어쩌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맛있을 수도 있다.

맺음글
돌아옴을 또 하나의 출발로


경주 안강의 함지박 한정식에서 맛본 도루묵 한 접시가 생각보다 멀리 필자의 마음을 데리고 갔다. 도루묵은 한 마리 생선이면서 여러 의미를 품고 있었다. 되돌아감의 도루묵이 있고, 헛수고를 뜻하는 ‘말짱 도루묵’이 있으며, 밥상에서 직접 맛보는 ‘진짜 도루묵’도 있다. 필자의 삶에도 한때 말짱 도루묵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바라보니 결코 헛되지 않았던 일도 많았다. 성공과 실패, 만남과 헤어짐, 성취와 좌절은 모두 오늘의 나를 만들어 온 삶의 재료였다.

그러므로 고은층의 삶은 지나간 ‘말짱 도루묵’을 아쉬워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나간 실패에서는 지혜를 건져 내고, 지나간 성공에서는 감사를 남기면 된다. 그리고 오늘은 오늘의 진짜 도루묵을 제대로 맛보아야 한다. 가족과 함께 먹는 한 끼, 이웃과 나누는 한마디, 걸을 수 있는 한 걸음, 읽고 쓸 수 있는 하루,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작은 도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기대하면 된다.

인생은 때때로 돌고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왔다고 해서 모두 말짱 도루묵은 아니다. 돌아온 자리에서 지난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오늘의 맛을 음미하며, 앞으로 만나게 될 새로운 맛을 기대할 수 있다면 그 돌아옴은 실패가 아니라 또 하나의 출발이다.

필자는 이제 지나간 삶의 말짱 도루묵보다 오늘과 앞으로 맛볼 진짜 도루묵을 더 생각하고 싶다.

"말짱 도루묵은 지나온 인생에서 얻은 지혜의 맛이고,
오늘의 진짜 도루묵은 감사의 맛이며,
아직 맛보지 않은 내일의 도루묵은 기대의 맛이다."

지나간 삶에는 지혜를, 오늘의 삶에는 감사를,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는 기대를 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맛을 함께 음미하며 걸어가는 것이 긴 인생여정을 지나온 고은층의 멋이자 지혜이며, 아직 남아 있는 삶을 향한 또 하나의 희망이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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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가 자연처럼

이성근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사랑은 파릇한 새싹처럼
배움은 즐거운 놀이처럼
가족은 소중한 보물처럼
사회는 반듯한 저울처럼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

[디카시 해설]
물의 흐름에는 순리가 있고, 새싹에는 생명이 있으며, 씨앗에는 내일이 숨어 있다. 이 디카시는 세상과 사랑, 배움과 가족, 사회와 미래가 자연의 이치처럼 조화롭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특히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이라는 마지막 행은 내일의 모습이 결국 오늘의 생각과 실천에서 자라난다는 뜻을 전한다.

[글ㆍ사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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