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해무변의 인연은 계속된다: 박상철 교수와 함께한 26년의 만남과 새로운 동행"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대구에서 다시 만난 학해무변의 인연
필자는 최근 대구 인터불고에서 박상철 교수와 오랜만에 만나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박 교수는 일본과 스웨덴의 대학에서 오랫동안 연구와 교육활동을 해 온 국제적인 학자이자, 필자와 북유럽 혁신정책에 관한 국제공동연구를 수행했던 소중한 학문적 동반자이다. 여러 차례 만남을 약속하고도 서로의 일정으로 미루어 오다가 마침내 대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니 지난날 영남대학교에서의 첫 만남부터 포항과 경주의 동행, 북유럽 혁신정책의 공동연구, 스웨덴 고텐버그에서의 따뜻한 환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억이 떠올랐다.
필자와 박 교수가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경이다. 당시 필자는 50대 초반이었고 박 교수는 40대 초반이었다. 서로 다른 대학과 국가에서 학문활동을 하던 두 사람이 지역발전과 혁신정책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통해 만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26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정년을 지나 필자는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로, 박 교수는 석좌교수로서 학문과 교육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 학문적 관심으로 시작한 만남이 인생 후반기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필자는 이러한 만남을 학해무변(學海無邊)의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학해무변은 학문의 바다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다. 학문은 대학에 재직하는 동안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며, 정년을 맞았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지난 경험을 성찰하며, 서로의 지혜를 나누는 일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도 계속될 수 있다. 이번 박 교수와의 만남은 필자에게 학해무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만남의 시작,
압량벌에서 만난 귀족의 풍모와 선비의 마음
필자가 박 교수를 처음 만난 곳은 영남대학교 압량벌 캠퍼스였다. 당시 박 교수는 일본공업대학에 근무하면서 경북테크노파크의 장기발전전략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영남대학교를 방문하였다. 경북테크노파크는 필자가 설계를 주도했던 지역혁신 기반시설이었으며, 대학과 산업, 연구기관의 연계를 통해 지역의 기술혁신과 산업발전을 도모하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러한 공통의 관심사가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이어 주었다.
박 교수의 첫인상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단정한 외모와 세련된 태도,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모습이 마치 유럽의 귀족을 연상하게 하였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일본과 스웨덴의 대학에서 활동하던 박 교수는 필자에게 새로운 학문적 시각과 국제적 경험을 전해 줄 수 있는 연구자로 보였다. 그러나 첫 만남에서 느낀 외적인 풍모보다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이후의 동행에서 보여 준 박 교수의 예의 바르고 겸손한 태도였다.
2000년 10월경 필자는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한 지도교수님을 대구로 초청하면서 박 교수에게도 동행을 제안하였다. 처음에는 함께 식사하는 자리로 생각했던 만남이 포항 호미곶과 경주 불국사로 이어지는 여행이 되었다. 우리는 포항의 밤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경주의 역사문화유적을 찾으면서 학문과 인생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 교수는 처음 만나는 필자의 은사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첫 만남에서 느꼈던 귀족의 풍모에 더하여 한국 선비의 품격을 발견하게 되었다.
훗날 박 교수가 필자의 정년을 기념하는 회상록에 보내 준 글을 읽으면서 이때의 만남이 그에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 교수는 당시 국내 학자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던 자신을 필자가 스스럼없이 초대하고 따뜻하게 대해 준 일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필자에게는 자연스러운 초대였지만 박 교수에게는 새로운 학문적 관계를 열어 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좋은 인연은 때로 거창한 계획보다 작은 배려와 열린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학문의 동행,
북유럽 혁신정책의 공동연구로 깊어진 인연
첫 만남과 여행을 통해 형성된 인간적 신뢰는 곧 학문적 협력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필자는 지역발전과 지역혁신체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박 교수는 유럽의 산업기술정책과 혁신체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전공과 연구 경험을 결합하면 한국의 지역혁신정책을 국제비교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겠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이후 필자는 당시 한국학술진흥재단, 현재의 한국연구재단이 지원하는 국제공동연구의 연구책임자를 맡고 박 교수는 공동연구자로 참여하였다. 연구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다. 2001년에는 한국과 스웨덴의 지역혁신체제를 비교하였고, 2002년에는 한국과 핀란드의 혁신정책을 분석하였으며, 2003년에는 한국과 덴마크의 지역혁신클러스터를 비교하였다.
연구 결과는 모두 SCOPUS 등재지이며 영국에서 발행되는
국제학술지 『AI & Society』 등에 발표하였다. 필자와 박 교수가 가장 활발하게 공동연구를 수행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연구는 필자에게 학문적 의미가 컸다. 지역발전은 단순히 산업시설이나 기반시설을 확충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학과 기업, 연구기관, 정부 사이의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지역의 지식과 기술이 혁신과 생산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유럽 국가들의 혁신정책을 비교하면서 이러한 지역혁신체제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국가별 제도와 지역적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외국의 성공사례를 단순히 모방하기보다 우리나라 지역의 특성과 발전 단계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학문적 연구에서 무엇을 연구하느냐 못지않게 누구와 어떻게 연구하느냐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국제공동연구는 서로 다른 학문적 배경과 관점을 가진 연구자들이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과정이다. 박 교수는 북유럽의 제도와 정책, 현지 연구자료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필자는 한국의 지역발전정책과 계획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호보완성이 공동연구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무엇보다 연구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학해무변의 소중한 인연이었다.
인간적 동행,
고텐버그에서 발견한 따뜻한 신사의 품격
필자가 박 교수의 또 다른 면모를 깊이 느낀 것은 2004년 스웨덴 방문 때였다. 당시 필자는 세계과학기술도시연합(WTA)의 국제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스웨덴 웁살라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회의에 앞서 박 교수가 근무하던 고텐버그대학교를 방문하여 대학 관계자들과 교류하고 지역혁신과 국제협력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박 교수는 필자의 방문을 세심하게 준비하였다. 대학 방문과 관계자 면담은 물론이고 자신의 집과 바닷가 별장으로 초대하여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특히 고텐버그의 한 생선전문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며 와인을 마시던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박 교수의 회상글에도 두 사람이 와인 두 병을 마시고 식당을 나서면서 크게 웃었던 일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학문과 정책을 진지하게 논의하던 두 교수가 잠시 연구자의 모습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웃음을 나누었던 시간이었다.
주말에는 박 교수의 바닷가 별장을 방문하였다. 인적이 드문 북유럽의 해변을 산책하면서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자연환경을 감상하였다. 그곳에서 필자는 연구자 박상철뿐 아니라 가정과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는 박상철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였다. 첫 만남에서는 귀족 같은 외모와 풍모에 눈길이 갔고, 두 번째 동행에서는 선비의 예절을 느꼈으며, 공동연구에서는 학자의 능력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고텐버그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아우르는 한 인간의 따뜻한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만남이 거듭될수록 달라지고 깊어진다. 처음에는 겉모습과 태도를 보고 판단하지만 함께 일하면서 능력과 책임감을 알게 되고, 일상의 시간을 나누면서 인품과 배려를 이해하게 된다. 필자와 박 교수의 인연도 그러하였다. 학문적 능력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하여 인간적 신뢰와 우정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이 만남은 필자의 교수 인생에 오래 남을 소중한 기억이다.
새로운 동행,
고은과 AI, 지역정책의 미래를 함께 도모하다
이번 대구에서의 재회는 단순히 지난날을 회상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동안의 학문활동과 근황을 나누면서 정년 이후의 삶과 새로운 연구 주제, AI 시대의 미래에 대해 폭넓게 이야기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지역혁신과 산업발전이라는 공통의 연구과제를 중심으로 만났다면, 이제는 지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앞으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만남이 되었다.
특히 필자는 새롭게 구상하고 있는 지역정책 및 지역경제정책 관련 저서의 출판계획을 박 교수에게 설명하고 참여를 제안하였다. 박 교수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직 구체적인 연구체계와 집필방식 등을 협의해야 하지만 오래전 북유럽 혁신정책을 함께 연구했던 두 사람이 다시 새로운 학문적 과제를 모색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뜻깊었다. 과거에는 국제공동연구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정책적 시사점을 찾았다면, 앞으로는 축적된 학문적 경험과 정책적 통찰을 체계화하여 후학과 사회에 남기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AI의 발전은 지역발전과 지역경제정책에도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AI와 디지털 전환은 산업구조와 일자리, 지식과 기술의 활용방식은 물론 지역 간 발전격차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지역정책은 전통적인 산업입지와 기반시설 중심의 접근을 넘어 혁신역량, 인적자본, 지식 네트워크, 기술변화와 지역사회의 대응능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는 필자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지역발전정책과 박 교수가 축적해 온 국제적인 산업기술·혁신정책 연구 경험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필자는 고은층(高恩層)으로 살아가면서 유유자작(悠悠自作)의 생활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유는 조급함 없이 여유롭고 유연하게 살아가는 태도이며, 자작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고 만들어 가는 실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년 이후의 학문활동도 과거와 같이 성과와 경쟁에 매달리기보다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자발적으로 이어가는 활동이어야 한다. 박 교수와의 새로운 저술 협력 구상 역시 이러한 고은층의 삶과 학문적 실천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맺음말
학문은 끝이 없고 좋은 인연은 계속된다
필자와 박 교수의 만남은 2000년경 영남대학교 압량벌에서 시작되어 포항과 경주의 동행, 북유럽 혁신정책의 공동연구, 스웨덴 고텐버그에서의 인간적 교류로 이어졌다. 그리고 26년이 흐른 지금, 대구에서 다시 만나 새로운 학문적 동행을 모색하게 되었다. 돌아보면 두 사람의 인연은 단순히 오래 알고 지낸 관계가 아니라 학문과 사람, 경험과 신뢰가 함께 성장해 온 과정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인연을 학해무변과 근학무실(勤學務實)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학해무변이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학문적 자세라면, 근학무실은 배움에 부지런하고 맡은 소임에 충실하며 이를 실천으로 이어가는 삶의 태도이다.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된 덕목이 아니다. 끊임없이 배우되 배운 것을 삶과 사회에 유익하게 활용할 때 학문은 더욱 큰 가치를 갖게 된다. 젊은 시절의 국제공동연구가 이러한 정신의 실천이었다면 정년 이후의 새로운 저술 구상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은층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의 성취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학문과 도전을 계속하는 일이다. 이제는 직책과 지위보다 사람과 관계가 소중하고, 개인적 성과보다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일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좋은 인연은 서로를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배우게 하고 성장시키며 새로운 일을 함께 도모하게 한다. 필자는 박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관계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였다.
압량벌에서 시작된 인연은 호미곶과 불국사, 북유럽의 연구 현장과 고텐버그의 바닷가를 지나 다시 대구로 이어졌다. 그동안 장소도 달라지고 세월도 흘렀지만 학문을 향한 열정과 서로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제 두 사람은 고은층으로서 여유롭고 유연하게, 그러면서도 스스로 새로운 삶과 학문을 가꾸어 가는 유유자작의 동행을 이어가고자 한다.
"배움의 바다에는 끝이 없다. 좋은 인연의 항해도 끝나지 않는다. 박 교수와 함께하는 학해무변의 새로운 항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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