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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요지경

이성근


못난 이는 잘난 체하고
잘못한 이는 남을 탓하고
방귀 뀐 이는 시치미 떼고
죄지은 이는 되레 큰소리친다
해는 그대로인데 세상만 거꾸로 돈다

[글ㆍ사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오늘 오후 귀갓길에 자동차를 운전하다 차창 밖으로 석조의 구름 사이에 걸린 해를 바라보았다. 문득 바로 보아도, 거꾸로 돌려 보아도 해는 여전히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오히려 무엇이 바로이고 무엇이 거꾸로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정치·외교·경제를 비롯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잘못한 사람이 남을 탓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그 순간 ‘요지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변하지 않는 해와 달리 상식과 책임의 자리가 뒤바뀐 듯한 세태를 바라보며, 오늘의 세상을 짧게 풍자해 보고자 이 디카시를 쓰게 되었다.

[디카시 해설]

이 디카시는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해와 상식이 뒤집힌 듯한 세상을 대비하여 오늘의 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잘난 체하기’, ‘남 탓하기’, ‘시치미 떼기’, ‘큰소리치기’로 이어지는 네 장면은 책임을 회피하고 잘못을 감추려는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의 “해는 그대로인데 세상만 거꾸로 돈다”는 자연의 질서는 변하지 않지만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오히려 뒤집혀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결국 이 디카시는 복잡한 세상일수록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상식이고 책임인지를 다시 돌아보자는 작은 풍자와 성찰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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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가 자연처럼: 혼돈의 시대, 고은층이 붙들 삶의 방향"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흔들리는 시대에도 삶의 중심은 있어야 한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인공지능(AI)과 디지털 변혁은 우리가 일하고 배우며 소통하는 방식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기후위기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 방식을 다시 묻고 있으며, 고령화와 저출생, 인구절벽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한다. 세계적으로는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 기조가 확산되고 경제와 군사안보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정치와 사회의 모습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공동체의 미래보다 눈앞의 이해관계가 앞서고, 서로 다른 생각을 조정하고 타협하기보다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모습도 적지 않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빨라졌는데, 정작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는 오히려 더 분명하지 않은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었다.

고은층(高恩層)의 세대로 살아가는 필자에게 이러한 변화는 남의 일이 아니다. 살아온 날이 많아질수록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지만, 동시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삶에는 방향이 있어야 하고, 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붙들어야 할 중심은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 끝에 문득 자연을 바라보게 되었다. 물은 흐르고, 새싹은 돋으며, 씨앗은 때를 기다린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제 길을 간다. 그 속에는 인간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질서와 지혜가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짧은 디카시를 적어 보았다.

세상만사가 자연처럼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사랑은 파릇한 새싹처럼
배움은 즐거운 놀이처럼
가족은 소중한 보물처럼
사회는 반듯한 저울처럼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


이 여섯 줄에는 남은 인생에서 필자가 지키고 싶은 여섯 가지 삶의 마음을 담았다.

흐르는 물과 파릇한 새싹: 순응하되 사랑은 새롭게

첫째,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야 한다.

물은 높은 곳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 장애물을 만나면 부딪치기보다 돌아가고, 작은 물줄기는 서로 만나 강을 이룬다. 유연하게 흐르지만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고은층에게도 이러한 물의 지혜가 필요하다. 오랜 세월 쌓아 온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지만 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낯설어도 조금씩 익히고, 젊은 세대의 생각이 다르더라도 먼저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변화에 순응한다는 것은 자신의 원칙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새롭게 찾아가는 일이다.

둘째, 사랑은 파릇한 새싹처럼 끊임없이 돋아나야 한다.

새싹은 작고 연약하지만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사랑도 거창한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따뜻한 안부 한마디, 상대를 먼저 헤아리는 작은 배려, 힘든 사람에게 건네는 손길에서 사랑의 싹은 돋아난다.

나이가 들수록 만나는 사람의 숫자는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관계의 깊이까지 줄어들 필요는 없다. 부부와 가족, 친구와 이웃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기보다 따뜻한 격려를 건네는 것, 그것이 고은층이 새롭게 피워낼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물처럼 유연하게 흐르면서도 새싹처럼 새로운 관계와 사랑을 피워내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첫 번째 지혜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놀이와 소중한 보물:  배움과 가족이 삶을 젊게 한다

셋째, 배움은 즐거운 놀이처럼 이어져야 한다.

젊은 시절에는 공부에도 졸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을 살아보니 배움에는 졸업이 없다. 특히 AI와 디지털 변혁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대에는 나이를 이유로 배움을 멈출 수 없다. 오히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고은층이 세상과 연결되고 삶의 활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필자도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여전히 배운다. 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동작을 익히고,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배우기도 한다.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하나 새롭게 알게 되는 데 즐거움을 느끼려고 한다.

배움이 의무가 되면 고단하지만 놀이가 되면 즐겁다. 남보다 잘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넓히기 위한 배움이라면 나이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고은층의 배움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삶의 호기심을 놓지 않는 즐거운 놀이가 되어야 한다.

넷째, 가족은 소중한 보물처럼 아끼고 살펴야 한다.

세상을 오래 살아보니 결국 가장 가까이 남아 있는 사람은 가족 즉, 부부이다. 젊은 시절에는 일과 사회생활에 쫓겨 가족의 소중함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가장 가까운 공동체임을 깨닫게 된다.

보물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가치가 유지되지 않는다.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고마움을 표현하고, 서로의 생활방식과 선택을 존중하며, 지나친 기대와 간섭은 줄일 필요가 있다.

또한 고은층의 가족사랑은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더 해주는 데만 있지 않다. 자신의 건강과 생활을 가능한 한 스스로 돌보고, 가족에게 불필요한 걱정과 부담을 줄이는 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다. 서로 의지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존중할 때 가족이라는 보물은 더욱 오래 빛날 수 있다.

반듯한 저울과 오늘의 씨앗:  공동체를 지키고 미래를 심다

다섯째, 사회는 반듯한 저울처럼 공정해야 한다.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까닭 없이 기울면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세대와 지역, 계층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기본적인 원칙과 공정성이 지켜질 때 공동체에 대한 신뢰도 유지된다.

오늘의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며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원칙을 내세우고 상대에게는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한 태도가 반복된다면 사회적 신뢰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민주사회의 정치는 서로 다른 생각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고은층 역시 공정의 문제에서 예외일 수 없다. 살아온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몫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기회와 미래도 함께 헤아려야 한다. 반듯한 저울은 남에게만 들이대는 잣대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놓아야 할 기준이다.

여섯째,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 세워진다.

작은 씨앗 속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가 들어 있다. 그러나 씨앗을 심지 않고 열매를 기다릴 수는 없다. 오늘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결국 내일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기후위기와 인구감소, AI 시대의 변화처럼 거대한 문제도 생각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에너지를 조금 아껴 쓰고, 새로운 기술을 하나 배우며, 젊은 세대에게 경험을 나누고, 이웃과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는 작은 행동들이 모여 미래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고은층에게도 아직 심을 씨앗은 많다. 오랜 경험과 지혜를 다음 세대와 나누는 일, 필요한 곳에 재능을 보태는 일, 좋은 글 한 편을 남기는 일, 가족과 이웃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일도 모두 작은 씨앗이다. 인생의 후반기는 지금까지 이룬 것을 거두기만 하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다시 무엇인가를 심고 세우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맺음글
자연처럼 살아간다는 것,
자연에는 말이 없지만 가르침이 있다.

물은 흐르되 방향을 잃지 말라고 하고, 새싹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놀이는 삶의 즐거움과 호기심을 놓지 말라고 하며, 보물은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을 잘 살피라고 일깨운다. 저울은 바른 기준과 균형을 지키라고 하고, 씨앗은 내일을 원한다면 오늘부터 심으라고 가르쳐 준다.

필자가 디카시 「세상만사가 자연처럼」에 담고 싶었던 것도 결국 이러한 삶의 이치다.

고은층의 삶은 지나온 세월을 회고하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생의 후반기에도 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새롭게 사랑하며, 배워야 한다. 또한 관계를 돌보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무엇인가를 남겨야 한다.

필자는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삶의 원칙과 방식은 오히려 단순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물처럼 유연하게,
새싹처럼 따뜻하게,
놀이처럼 즐겁게,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며,
저울처럼 반듯하게,
씨앗처럼 희망을 심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이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고은층에게 필요한 삶의 방향이 아닐까?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자연의 이치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흔들리는 세상을 바라볼수록 다시 자연을 바라본다. 먼 곳에서 삶의 해답을 찾기보다 늘 우리 곁에 있는 물과 새싹과 씨앗에서 남은 인생의 길을 배워도 좋겠다.

세상만사가 자연처럼.

우리의 남은 인생 또한 자연처럼 순리를 따르되 멈추지 않고, 사랑과 균형을 품되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계속 심어가는 여정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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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짱 도루묵을 지나, 진짜 도루묵을 맛보다: 고은층의 지난 삶과 오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도루묵 한 접시에서 인생을 생각하다


오늘 필자 가족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의 '순참깨방앗간'에 참기름을 짜러 갔다. 깨를 맡겨 놓고 기다리는 동안 인근 '함지박 한정식'에서 손위 동서 가족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정갈한 한식 밥상에 여러 반찬이 올랐는데, 그 가운데 유난히 '도루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점을 맛보니 담백하면서도 구수했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우리가 흔히 쓰는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 어째서 헛수고와 허무를 뜻하는 말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필자의 지난 삶으로 이어졌다. 돌아보면 오랫동안 애썼지만 이루지 못한 일도 있었고, 애써 이루어 놓았으나 남의 손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일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기도 했다. 젊은 날에는 그런 순간을 만나면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된 듯 허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긴 인생길을 지나 고은층에 이른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과연 지나온 삶의 그 모든 일이 정말 말짱 도루묵이었을까? 그리고 아직 살아 보지도 않은 앞으로의 삶까지 미리 말짱 도루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식탁 위의 진짜 도루묵을 맛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제는 지나간 삶의 ‘말짱 도루묵’을 아쉬워하기보다 오늘의 ‘진짜 도루묵’을 제대로 맛보고, 아직 맛보지 않은 ‘내일의 도루묵’을 기대할 때가 아닐까?

도루묵이라는 이름에 담긴 돌아옴과 허사

도루묵은 이름부터 흥미로운 물고기다. 널리 알려진 설화에 따르면 어느 임금이 피란길에 허기진 상태에서 ‘묵’이라는 생선을 먹고 그 맛에 감탄하여 ‘은어(銀魚)’라는 귀한 이름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궁궐로 돌아와 다시 먹어 보니 예전의 그 맛이 아니어서 “도로 묵이라 하라”고 했고, 그 말이 변해 ‘도루묵’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흔히 선조와 임진왜란에 얽힌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시대의 왕이나 조선 인조와 관련된 전승도 있어, 특정 임금의 실제 사건이라기보다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유래담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국어학적으로는 옛 문헌에 나타나는 ‘돌목’이나 ‘도루목’ 같은 명칭이 변하여 오늘의 ‘도루묵’이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따라서 ‘도로 묵’이라는 이야기는 확정된 어원이라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그 이름에 의미를 덧붙인 민간어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오히려 그 점이 더 흥미롭다. 사람들은 한 마리 생선의 이름 속에 ‘돌아감’의 이야기를 담았다. 귀한 이름을 얻었다가 다시 옛 이름으로 돌아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얻었다가 잃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인간사의 모습을 한 생선의 이름에 입혀 놓은 셈이다.

여기에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표현도 생겨났다. 오랫동안 공들인 일이 허사가 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기대와 결과의 차이, 성취와 상실, 전진과 회귀가 이 짧은 말속에 겹쳐 있다. 그래서 필자에게 '도루묵'은 이제 단순한 물고기만이 아니다. 먹는 도루묵이 있고, 돌아가는 도루묵이 있으며, 헛수고를 뜻하는 말짱 도루묵이 있고, 다시 새롭게 맛보게 되는 진짜 도루묵도 있다. 바로 그 여러 얼굴 속에서 긴 인생여정을 걸어온 고은층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온 삶의 ‘말짱 도루묵’을 다시 바라보다

고은층은 짧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공부하고 일하며 사람을 만나고 가족을 돌보았으며,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해 왔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으며,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았다. 열심히 추진했던 일이 중도에 무산되기도 했고, 정성을 다해 맺었던 관계가 뜻하지 않게 헤어지기도 했다. 꼭 이루고 싶었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며, 한때 자신의 전부처럼 여겼던 일도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했다. 그럴 때면 ‘그동안 애쓴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허탈함이 밀려왔고,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바라보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결과는 사라졌어도 과정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경험은 남고, 실패 속에서 판단력이 자라며, 인간관계의 아픔을 겪으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법도 배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오래 살아오면서 기다림과 절제, 때로는 포기와 겸손도 익히게 된다.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되돌아왔다고 해서 걸어온 길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흘린 땀이 남고, 보았던 풍경이 남으며, 무엇보다 그 길을 걸은 자신이 출발할 때와는 달라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는 생각만큼 완전한 ‘말짱 도루묵’이 많지 않은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실패였던 일이 훗날 소중한 경험이 되고, 상실이 새로운 길을 열어 주며, 좌절이 사람을 더 깊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도루묵 설화에서 피란길에 그렇게 맛있던 생선이 궁궐에서는 예전의 맛이 아니었던 것처럼 삶의 맛도 처지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젊은 날 그토록 중요했던 것이 고은층에 이르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고, 젊어서는 별것 아니라고 지나쳤던 일이 오히려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큰 성취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건강하게 아침을 맞는 일이 귀하고, 많은 사람을 아는 것보다 마음을 나눌 몇 사람이 소중하다. 어쩌면 고은층은 삶의 양을 계속 늘려 가는 시기라기보다 이미 지나온 삶의 의미와 지금 가진 삶의 맛을 더욱 깊게 음미하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진짜 도루묵’과 아직 맛보지 않은 내일

이날 점심 밥상에서 필자가 만난 것은 말속의 도루묵이 아니라 실제로 맛볼 수 있는 ‘진짜 도루묵’이었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에는 허무와 헛수고의 뜻이 담겨 있지만, 입안에서 맛본 도루묵은 담백하고 구수했다. 그 순간 우리는 혹시 이름과 관념에 사로잡혀 눈앞의 실제 삶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었다”, “이제 할 만큼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하겠는가”라고 생각하다 보면 고은층의 남은 삶까지 스스로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삶은 지금 여기에 있다. 오늘 걸을 수 있으면 걷고, 읽을 수 있으면 읽으며, 쓸 수 있으면 쓰면 된다. 만날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평생 쌓아 온 경험을 나눌 곳이 있다면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 된다. 필자 역시 글을 써 지인들과 생각을 나누고,
오랜 교수 생활과 사회활동을 통해 쌓은 경험을 필요한 곳에 조금이나마 돌려주고자 하며, 실제로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까운 사람들과 운동하고 자연을 걸으며 가족과 밥을 먹는다. 겉으로 보면 대단하지 않은 일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필자에게는 이런 일들이 바로 ‘진짜 도루묵의 맛’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한 끼, 이웃과 나누는 차 한 잔, 한 편의 글을 쓰는 시간, 몸을 위해 하는 작은 운동이 깊은 삶의 맛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돌아옴’의 의미도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말짱 도루묵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지만, 인생에서 돌아오는 일이 언제나 실패인 것은 아니다. 오랜 바깥 길을 걷다가 정년 이후 집과 가족에게 돌아오게 되고, 바쁜 사회생활을 마치고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 세상의 평가와 경쟁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도 소중한 돌아옴이다. 젊은 날의 돌아옴은 실패처럼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고은층의 돌아옴은 오히려 회복일 수 있다. 더 가지려는 삶에서 가진 것을 감사하는 삶으로, 경쟁하는 삶에서 함께하는 삶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에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왔다고 해서 모두 말짱 도루묵은 아니다. 잘 돌아오는 것도 삶의 지혜다.

그러나 고은층의 삶이 과거를 되돌아보고 오늘에 감사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아직 쓰지 않은 글이 있고, 만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걷지 않은 길과 배우지 않은 것이 있다. 나누지 못한 경험도 남아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고은층에게 ‘기대’라는 말을 특별히 소중하게 생각한다. 기대가 있다는 것은 아직 미래가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 기대는 젊은 날의 기대와는 달라야 한다. 더 높이 올라가기보다 더 깊어지기를 기대하고, 더 많이 가지기보다 더 잘 나누기를 기대하며, 단순히 더 오래 사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더 잘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미래는 아직 말짱 도루묵이 아니다. 아직 살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맛보지 않은 도루묵의 맛을 미리 단정할 수 없듯, 살아 보지 않은 내일의 맛 또한 미리 알 수 없다. 어쩌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맛있을 수도 있다.

맺음글
돌아옴을 또 하나의 출발로


경주 안강의 함지박 한정식에서 맛본 도루묵 한 접시가 생각보다 멀리 필자의 마음을 데리고 갔다. 도루묵은 한 마리 생선이면서 여러 의미를 품고 있었다. 되돌아감의 도루묵이 있고, 헛수고를 뜻하는 ‘말짱 도루묵’이 있으며, 밥상에서 직접 맛보는 ‘진짜 도루묵’도 있다. 필자의 삶에도 한때 말짱 도루묵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바라보니 결코 헛되지 않았던 일도 많았다. 성공과 실패, 만남과 헤어짐, 성취와 좌절은 모두 오늘의 나를 만들어 온 삶의 재료였다.

그러므로 고은층의 삶은 지나간 ‘말짱 도루묵’을 아쉬워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나간 실패에서는 지혜를 건져 내고, 지나간 성공에서는 감사를 남기면 된다. 그리고 오늘은 오늘의 진짜 도루묵을 제대로 맛보아야 한다. 가족과 함께 먹는 한 끼, 이웃과 나누는 한마디, 걸을 수 있는 한 걸음, 읽고 쓸 수 있는 하루,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작은 도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기대하면 된다.

인생은 때때로 돌고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왔다고 해서 모두 말짱 도루묵은 아니다. 돌아온 자리에서 지난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오늘의 맛을 음미하며, 앞으로 만나게 될 새로운 맛을 기대할 수 있다면 그 돌아옴은 실패가 아니라 또 하나의 출발이다.

필자는 이제 지나간 삶의 말짱 도루묵보다 오늘과 앞으로 맛볼 진짜 도루묵을 더 생각하고 싶다.

"말짱 도루묵은 지나온 인생에서 얻은 지혜의 맛이고,
오늘의 진짜 도루묵은 감사의 맛이며,
아직 맛보지 않은 내일의 도루묵은 기대의 맛이다."

지나간 삶에는 지혜를, 오늘의 삶에는 감사를,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는 기대를 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맛을 함께 음미하며 걸어가는 것이 긴 인생여정을 지나온 고은층의 멋이자 지혜이며, 아직 남아 있는 삶을 향한 또 하나의 희망이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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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가 자연처럼

이성근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사랑은 파릇한 새싹처럼
배움은 즐거운 놀이처럼
가족은 소중한 보물처럼
사회는 반듯한 저울처럼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

[디카시 해설]
물의 흐름에는 순리가 있고, 새싹에는 생명이 있으며, 씨앗에는 내일이 숨어 있다. 이 디카시는 세상과 사랑, 배움과 가족, 사회와 미래가 자연의 이치처럼 조화롭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특히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이라는 마지막 행은 내일의 모습이 결국 오늘의 생각과 실천에서 자라난다는 뜻을 전한다.

[글ㆍ사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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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묵, 삶의 오미(五味)

이성근


말짱 도루묵은 지난날의 쓴맛
진짜 도루묵은 오늘의 감사 맛
아직 이름 없는 도루묵은 내일을 기다리는 맛
세월에 삭으면 쓴맛 단맛도 감칠맛
고은층의 삶은 그렇게 농익은 맛

[이 디카시를 쓰게 된 동기와 해설]
경주 안강의 '함지박 한정식' 집에서 도루묵을 맛보다 문득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눈앞의 ‘진짜 도루묵’과 애쓴 일이 허사가 된다는 ‘말짱 도루묵’의 의미가 겹치면서, 지나온 삶과 오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디카시는 지난날의 실패와 아픔을 ‘쓴맛’으로, 오늘의 삶을 ‘감사의 맛’으로, 내일을 ‘기다리는 맛’으로 표현했다. 삶의 쓴맛과 단맛도 세월 속에서 삭고 어우러지면 마침내 깊은 '감칠맛'이 된다.

그렇게 지나온 경험을 지혜로 품고, 오늘에 감사하며, 내일을 기대하는 삶이야말로 긴 인생여정을 살아온 고은층의 ‘농익은 맛’이 아닐까 생각했다.

[디카시 글ㆍ사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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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의 팔굽혀펴기, 완전한 하나보다 나아지는 하나"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팔굽혀펴기 하나가 던진 질문


필자는 요즘 집 가까운 헬스장에서 동호인 두 사람과 함께 운동하고 있다. 세 사람이 오후 3시에 만나 몸을 움직이는데, 운동 수준은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은 고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중견이며, 필자는 아직 초보에 가깝다. 우리는 세 단계에 걸쳐 30∼35가지의 스트레칭 동작을 함께하고, 여기에 팔굽혀펴기를 추가해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에게 팔굽혀펴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가슴을 충분히 낮추고 몸을 곧게 유지하는 정식 자세로는 한 번을 온전히 해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할 수 있는 만큼 몸을 낮추고, 조금씩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횟수를 늘려 가고자 했다. 비록 처음에는 불완전하더라도 단계적으로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된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수의 생각은 달랐다. 불완전한 자세로 여러 번 반복하기보다 처음부터 정식 자세로 한 번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필자는 그의 말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올바른 자세를 익히지 않은 채 횟수만 늘리면 잘못된 동작이 습관으로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은 질문 하나가 생겼다. 처음부터 완전한 하나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불완전하더라도 가능한 단계에서 시작해 조금씩 완성도를 높여 가야 하는가? 팔굽혀펴기 하나를 두고 나눈 생각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이는 운동을 넘어 사람이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기도 했다.

완전한 하나와 불완전한 시작

고수의 방식은 원칙을 중시한다. 처음부터 정확한 자세와 방법을 익히고, 정해진 기준에 맞게 운동해야 한다는 접근이다. 목표가 분명하고 기준이 엄격하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운동의 효과를 높이고 잘못된 자세에서 비롯될 수 있는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반면 필자가 택한 방식은 점진적 또는 점증적 접근이다. 둘 다 비슷한 접근이다.
점진적 접근은 쉬운 단계에서 시작해 차츰 어려운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며, 점증적 접근은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횟수와 강도를 조금씩 높여 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벽을 짚고 밀거나 높은 지지대에 손을 대고 시작할 수 있다. 이후 몸의 힘과 균형이 나아지면 무릎을 대고 하고, 마침내 정식 자세의 팔굽혀펴기에 도전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장점은 시작에 대한 부담을 줄인다는 데 있다. 처음부터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시도하기도 전에 주저하거나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동작부터 시작하면 작은 변화가 보인다. 어제보다 몸을 조금 더 낮추고, 지난주보다 한 번 더 해내면서 자신감과 만족감도 생긴다. 작은 성취가 다음 도전을 부르고, 반복되는 도전이 지속할 힘을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원칙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정확한 자세는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기준이다. 다만 그 기준에 이르는 길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원칙이 목적지라면 점진은 그곳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원칙 없는 점진은 방향을 잃기 쉽고, 점진 없는 원칙은 출발을 어렵게 한다. 따라서 완전한 하나를 지향하되, 오늘의 불완전한 시작도 허용할 필요가 있다.

운전 연습에서 배운 두 가지 가르침

팔굽혀펴기를 배우면서 오래전 미국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1980년대 초반, 필자는 자동차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두 유학생의 도움을 받아 운전을 연습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지도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한 사람은 처음부터 정확한 운전 방법을 가르쳤다. 운전 자세부터 출발과 정지, 차선 유지와 방향 전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절차와 원칙을 하나씩 꼼꼼하게 짚어 주었다. 작은 실수도 바로잡으며 정확하고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을 중시했다.

다른 한 사람은 먼저 운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데 중점을 두었다. 처음부터 모든 동작을 완벽하게 익히도록 요구하기보다 자동차와 도로 환경에 차츰 익숙해지도록 했다. 어느 정도 속도를 내어 직접 달려 보게 함으로써 자동차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조작 경험을 쌓아 자신감을 얻은 뒤 필요한 운전 요령을 차례로 가르쳐 주었다.

당시 필자는 두 사람의 접근방식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 사람은 원칙과 정확성을 앞세웠고, 다른 사람은 경험과 자신감을 먼저 키워 주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어느 한쪽만 옳았던 것은 아니다. 두려움을 줄여야 운전을 시작할 수 있고, 정확한 방법을 익혀야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 첫 번째 사람에게서는 원칙을 배웠고, 두 번째 사람에게서는 시작할 용기를 배웠다.

팔굽혀펴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올바른 동작을 아는 것과 그 동작에 도전할 자신감을 갖는 것은 함께 필요하다. 원칙은 배움의 기준을 세우고, 점진은 배움을 지속하게 한다.

계획이론에서 찾은 점진의 지혜

필자는 대학에서 평생 계획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계획이론에도 오늘의 팔굽혀펴기 논쟁과 닮은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하나는 종합적 합리주의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부분점진적 접근이다.

종합적 합리주의적 접근은 먼저 전체적인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가능한 대안과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려 한다. 전체적 합리성과 최적의 대안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정확한 자세로 팔굽혀펴기를 해야 한다는 고수의 생각과 통한다.

부분점진적 접근은 인간의 정보와 능력, 시간과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모든 조건을 한꺼번에 파악해 최적의 결정을 내리기보다 현재 가능한 범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그 결과를 살피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한 번에 완전한 해답을 찾기보다 작은 개선을 거듭해 더 나은 상태에 가까이 가는 방식이다.

필자는 살아오는 동안 대체로 이러한 점진적 개선의 방식을 선호해 왔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기보다 우선 가능한 일부터 시작했다. 실천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그때그때 고치고 보완해 왔다. 그것은 원칙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현실의 조건 속에서 원칙에 가까이 가는 방법이었다.

계획에서도 큰 비전과 올바른 방향은 필요하다. 그러나 비전만으로 현실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오늘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 결과를 살펴 다음 계획에 반영해야 한다. 팔굽혀펴기의 한 동작에도 목표 설정, 단계적 실행, 점검과 개선이라는 계획의 원리가 담겨 있는 셈이다.

고은층의 삶, 조금씩 더 나아가기

고은층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지혜와 경험을 쌓았지만, 신체적으로는 젊은 시절과 다른 한계와 제약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체력과 유연성, 균형감각과 회복력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수준을 그대로 따라가거나 처음부터 무리한 목표를 세우기보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정확히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고은층의 팔굽혀펴기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자세를 기본 원칙으로 삼되, 자신의 능력에 맞는 단계에서 시작해야 한다. 횟수를 늘리는 데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자세와 호흡, 몸의 반응도 함께 살펴야 한다. 통증이나 부담이 느껴질 때는 멈추고 운동 강도를 조절해야 한다. 고은층의 운동은 남과 겨루는 기록 경쟁이 아니라 어제의 자신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과정이어야 한다.

점진 또는 점증의 원리는 운동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기를 배우는 일, 글을 쓰는 일,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일, 여행을 시작하는 일, 사회에 봉사하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처음부터 거창하고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마음이 앞서거나 쉽게 지칠 수 있다. 그러나 하루에 한 가지를 배우고, 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며, 작은 역할 하나를 기꺼이 맡는다면 삶의 범위는 조금씩 넓어진다.

고은층에게 작은 실천은 결코 작은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안정감을 준다. 조금씩 나아지는 경험은 자신감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얻는 성취는 일상의 만족감을 높인다. 중요한 것은 빠르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일이다.

맺음글
원칙은 방향이고, 점진은 길이다

정식 자세의 팔굽혀펴기 한 번을 제대로 하는 것은 여전히 필자의 목표다. 그러나 지금 당장 완전한 한 번을 해내지 못한다고 해서 도전을 멈출 생각은 없다. 오늘 할 수 있는 동작에서 시작해 몸을 조금 더 낮추고, 자세를 조금 더 바로잡으며, 어제보다 한 번 더 시도할 것이다.

고수의 원칙론과 필자의 점진론은 서로 대립하는 방식이 아니다. 원칙론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점진론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출발할 것인지를 알려 준다. 원칙은 방향이고, 점진은 길이다.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시작은 지속으로, 지속은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은층의 삶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지나온 세월이 길다고 해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받아들이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완전한 한 번을 목표로 삼되, 오늘의 불완전한 한 번에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작은 성공을 쌓아 더 나은 자신에게 다가가야 한다. 필자는 그것이 고은층에게 필요한 점진 또는 점증의 지혜라고 믿는다.

팔굽혀펴기 한 번은 작아 보인다. 그러나 그 한 번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에는 고은층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완전함은 기다렸다가 시작하는 조건이 아니라, 시작하고 지속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목표이다.

사진 1은 비 온 뒤의 금호강 풍경, 사진 2는 김미예 한지작가의 목단꽃 한지그림, 사진 3은 제드피트니스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필자의 모습이다. 2026년 8월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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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물이 터졌다:
물을 품는 섬에서 사람을 품는 제주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보이지 않던 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지난 8월 중하순,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 숲해설사로 일하는 서귀삼연의 현 선생을 만났다. 한동안 한라산에 많은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현 선생은 “한라산 여기저기에서 물이 터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음 들으면 폭우로 둑이나 제방이 무너졌다는 뜻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제주에서 ‘물이 터졌다’는 말은 전혀 다른 자연의 장면을 가리킨다. 땅속으로 스며들었던 물이 바위틈과 지층 사이에서 솟아나 마른 계곡과 숲길에 새로운 물길을 내는 현상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한라산에 물이 터졌다.”

이 짧은 말에는 화산섬 제주의 지질과 물순환뿐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는 제주 사람들의 감각이 담겨 있다. 물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땅의 품에 스며들어 저장되고 이동하다가, 더는 머물 수 없는 곳에서 밖으로 솟아난다. 제주에서 물이 터진다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생성이며, 무너짐이 아니라 생명의 귀환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물을 받아들이고 오래 품었다가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내는 제주의 자연 저장고는 오늘의 제주사회에도 하나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물을 품는 제주가 사람과 차이까지 품는 포용의 섬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비를 품는 화산섬:
제주에는 보이지 않는 물길이 있다


제주는 불이 만든 섬이지만, 그 불의 땅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물이다.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에 내린 비는 다공질의 현무암과 화산쇄설층 사이로 스며든다. 일부는 하천을 따라 흐르거나 바다로 향하지만, 많은 물은 암석과 지층의 틈을 따라 땅속으로 이동한다. 제주에서 평소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 많은 것도 이러한 화산지질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땅속으로 들어간 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낮은 곳으로 이동하다가 물이 잘 통하지 않는 지층이나 암석층을 만나면 그 위에 머문다. 비가 계속 내려 지하에 머무는 물의 양이 많아지면 수위가 높아지고, 마침내 암석과 지층의 틈을 통해 지표로 솟아난다. 제주 사람들이 말하는 ‘물이 터지는’ 순간이다. 학술적으로는 지하수가 자연스럽게 지표로 흘러나오는 용출 또는 용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주의 땅속에 실제로 거대한 빈 물탱크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주 땅 전체를 하나의 자연 저장고에 비유할 수는 있다. 현무암의 작은 구멍과 갈라진 틈, 서로 다른 용암층의 경계가 물을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이동시키는 통로가 된다. 한라산은 거대한 산인 동시에 하늘에서 내린 비를 품고 걸러 내며 다시 내어놓는 자연의 물그릇이다.

물이 터진 자리에는 새로운 흐름이 생긴다. 마른 계곡에 물소리가 돌아오고, 숲의 습도가 높아지며, 이끼와 풀과 나무가 생기를 얻는다. 작은 물길은 아래로 흘러 더 큰 흐름과 만나고, 일부는 다시 땅속으로 스며들며,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비와 땅, 숲과 계곡, 지하수와 바다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하나의 생명순환 속에서 물을 받아들이고 머금으며 다음 자리로 이어 준다.

제주에서는 물이 터지고, 육지에서는 둑이 터진다:
같은 물을 대하는 서로 다른 땅의 방식


육지에서 “둑이 터졌다”는 말은 대개 위험과 재난을 떠올리게 한다.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면 수문을 열어 수위를 조절하고, 폭우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둑이나 제방이 무너져 물이 한꺼번에 쏟아질 수 있다. 강은 지표 위에 뚜렷한 물길을 만들고, 사람은 제방과 보, 댐을 세워 그 흐름을 조절해 왔다.

이에 비해 제주에서는 많은 비가 내리면 상당한 물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지표의 큰 강보다는 땅속의 보이지 않는 물길이 발달해 있다. 육지의 저수지가 지표 위에 물을 가두는 인공 저장고라면, 제주의 화산지층은 빗물을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천천히 이동시키는 자연 저장고라 할 수 있다.

육지에서 둑이 터진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경계가 무너지는 일이다. 그러나 제주에서 물이 터진다는 것은 자연이 품고 있던 것을 밖으로 내어놓는 일이다. 하나는 수용 한계를 넘어선 물이 불러오는 파괴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충분히 채워진 물이 새로운 길을 여는 생성의 언어이다. 같은 ‘터짐’이지만 그 의미는 이처럼 다르다.

물론 제주라고 해서 물로 인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중호우가 내리면 짧은 시간에 계곡과 건천으로 많은 물이 몰리고, 급경사 하천을 따라 빠르게 바다로 흘러가면서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 자연의 저장 능력에도 한계가 있으며, 개발로 땅의 투수성이 낮아지면 물의 흐름과 저장 능력도 달라진다. 따라서 제주 고유의 물순환을 지키려면 자연이 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숲과 토양, 곶자왈과 습지, 지하수 함양지역을 함께 보전해야 한다.

자연을 관리한다는 것은 자연을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이 스스로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순환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지켜 주는 일도 중요한 관리이다.

낙동강 둑에서 배운 물:
유어의 어린 시절과 정책 현장에서의 경험


필자의 고향은 낙동강변에 자리한 경남 창녕군 유어면이다. 유어는 한자로 놀 유(遊), 고기 잡을 어(漁)를 쓴다. 실제 지명은 옛 유장면과 어촌면이 합쳐지면서 두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글자의 뜻을 풀어 보면 물가에서 놀고 고기를 잡으며 살아온 지역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낙동강의 강변 둑은 필자에게 거대한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둑을 오르내리고 넓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뛰어놀았다. 당시에는 둑이 왜 필요한지, 강물이 사람의 삶과 농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알지 못했다. 다만 강이 불어나면 어른들의 표정이 달라졌고, 장마철이면 둑과 강의 수위를 살피는 일이 마을의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혔다.

세월이 흘러 필자는 이명박 정부 시절 4대 강 사업 정책자문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청와대 정책자문회의에서는 낙동강을 대표하여 5분간 토론한 경험도 있다. 어린 시절 놀이의 공간이었던 낙동강을 국가정책의 대상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강의 흐름을 어떻게 관리하고, 홍수에 어떻게 대비하며, 물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는 개인의 경험을 넘어 국가와 지역사회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제주에서 ‘물이 터지는’ 모습을 생각하면 물을 관리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강을 준설하고 제방과 보를 세우는 것도 물관리의 한 방식이다. 그러나 땅이 물을 받아들이고 숲이 물을 머금으며 습지와 지하수층이 물을 조절하도록 돕는 것도 중요한 물관리이다. 때로는 자연이 스스로 저장하고 순환하며 회복하는 능력을 지켜 주는 일이 더 근본적인 관리가 될 수 있다.

낙동강은 필자에게 흐르는 물의 힘과 둑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한라산은 스며드는 물의 깊이와 땅의 포용력을 일깨워 주었다. 하나는 지표 위로 장대하게 흐르고, 다른 하나는 땅속으로 조용히 흐른다. 물의 모습은 다르지만, 두 물길 모두 인간에게 자연의 힘과 한계를 함께 가르쳐 준다.

수용에서 관용을 거쳐 포용으로:
자연 저장고가 가르쳐 주는 사회의 그릇


제주의 자연 저장고는 먼저 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땅속에 물을 머금고, 서로 다른 지층과 통로를 거치게 하며, 필요한 때에는 다시 숲과 계곡과 바다로 흘려보낸다. 이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수용과 관용, 포용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수용은 나와 다른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관용은 서로 다르더라도 그 차이를 배척하지 않고 함께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태도이다. 포용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다른 사람을 단순히 받아들이거나 참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여 함께 참여하고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용이 문을 여는 일이라면 관용은 그 안에 머물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고, 포용은 같은 자리에서 함께 길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포용은 모든 차이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무원칙을 뜻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기본 질서와 책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차이와 존엄을 인정하고, 누구도 공동체의 흐름에서 배제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제주의 땅은 내리는 비를 가려 받지 않는다. 큰 빗방울과 작은 빗방울, 한라산에 내린 비와 오름에 내린 비를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받아들인 물은 서로 다른 지층과 바위틈을 지나면서 하나의 지하수 흐름으로 이어진다. 각기 다른 곳에서 시작한 물이 땅속에서 만나 숲과 마을과 바다를 살리는 공동의 물이 되는 것이다.

제주의 자연 저장고가 넓고 깊을수록 더 많은 물을 품을 수 있듯, 사회의 포용력도 그 공동체가 지닌 그릇의 깊이와 넓이에 달려 있다. 사회의 그릇이 얕으면 작은 차이와 갈등에도 쉽게 넘치고 갈라진다. 반면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조정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가 갖추어져 있으면 갈등은 파괴의 물결이 아니라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

물을 품어 온 제주, 사람을 품는 제주: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의 포용사회로

과거의 제주는 척박한 자연환경과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속에서 살아야 했다. 거센 바람과 많은 비, 돌이 많은 땅과 물이 귀한 생활환경은 혼자만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제주 사람들은 수눌음과 공동노동을 통해 힘을 나누고, 마을의 물과 목장과 바다를 함께 이용하며 삶을 이어 왔다. 자연의 제약은 사람들을 갈라놓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공동체의 지혜를 낳았다.

과거 제주의 포용은 생존을 위한 상호의존에서 출발하였다. 가진 것이 넉넉해서 나눈 것이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함께 나누었고, 혼자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서로 힘을 보태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의 기억은 오늘의 제주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다.

현재의 제주는 과거와는 다른 포용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제주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과 새로 이주한 사람, 개발을 중시하는 사람과 환경보전을 앞세우는 사람, 관광객과 지역주민, 청년세대와 고은층, 농어촌과 도시지역의 요구가 서로 다르다. 제주가 국제적인 관광지이자 다양한 사람이 오가는 섬이 되면서 이해관계와 가치의 차이도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차이를 없애려 하거나 어느 한쪽의 목소리만을 앞세우면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필요한 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수용, 차이를 견디는 관용, 그리고 서로를 공동체의 주체로 참여시키는 포용이다. 누구에게나 문을 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이 제주사회의 의사결정과 공동의 삶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제주는 자연의 수용력과 사회의 포용력을 함께 키워 가야 한다. 자연의 수용력을 넘어서는 개발은 제주의 물과 숲과 생태계를 훼손하고, 사회의 포용력을 넘어서는 갈등은 공동체의 신뢰와 연대를 무너뜨린다.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개발과 이용을 조절하는 일과, 사회가 다양한 사람과 가치를 품을 수 있도록 제도와 문화를 넓히는 일은 서로 분리된 과제가 아니다.

제주의 미래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것을 얼마나 조화롭게 품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자연을 품고, 사람을 품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차이, 미래세대의 권리까지 함께 품는 제주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물을 품어 온 화산섬 제주가 포용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맺음글
품은 것은 언젠가 생명의 길로 흘러야 한다


“한라산 여기저기에서 물이 터졌습니다.”

현 선생의 한마디는 제주의 자연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였다. 비는 내리는 순간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길을 흐르고, 바위와 지층 사이에 머물다가 다시 숲과 계곡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물이 터진다는 것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오랜 스며듦과 채워짐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낙동강변에서 자란 필자에게 물은 둑 사이를 흐르는 강이었고, 때로는 막고 다스려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제주에서 만난 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기다리고, 스스로 길을 찾아 다시 솟아나는 존재였다. 낙동강이 물의 크기와 힘을 보여주었다면, 한라산은 물의 깊이와 포용을 보여주었다.

제주의 자연은 물을 억지로 붙잡지 않는다. 먼저 받아들이고, 깊이 품으며, 때가 되면 생명의 길로 돌려보낸다. 숲과 땅과 바다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물을 받아 다음 자리로 이어 준다. 그 흐름 속에는 어느 하나 홀로 존재하지 않는 자연의 연결 질서가 담겨 있다.

사회도 이와 같아야 한다. 사람과 차이를 받아들이되 그저 머물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함께 흐르게 해야 한다. 포용은 모든 것을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제 몫의 길을 찾아 공동체를 살리도록 이어 주는 일이다.

한라산에 물이 터졌다. 그것은 비가 많이 왔다는 소식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자연의 순환이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으며, 충분히 품은 생명은 언젠가 밖으로 흘러나와 또 다른 생명을 살린다는 소식이다.

물을 품어 온 제주가 이제는 사람을 품는 제주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의 공동체적 지혜를 이어받고, 현재의 차이와 갈등을 포용하며, 미래세대가 살아갈 자연과 사회의 자리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 제주의 물은 오늘도 땅속을 흐르다가 때가 되면 세상 밖으로 솟아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깊이 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품은 것은 누구를 살리는 길로 흘러갈 것인가?

사진 1·2는 한라산과 백록담을 찾은 필자, 사진 3은 서귀포 정방폭포, 사진 4는 안덕계곡을 찾은 서귀삼연, 사진 5는 한라산 수악길을 걷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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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브리지, 삶의 다리: 연결의 철학에서 배우는 고은층의 지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몸을 이어 주는 관절처럼, 삶에도 이어 주는 다리가 필요하다


사람의 몸은 수많은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 목은 머리를 지탱하면서 몸과 연결하고, 어깨와 손목은 팔과 손의 움직임을 이어 준다. 고관절은 골반과 다리를 연결해 몸의 중심을 잡게 하고, 발목은 다리와 발을 이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느 한 부분도 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작은 연결 하나가 불편해져도 몸 전체의 움직임과 균형이 달라진다.

인생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고, 책임은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나의 삶은 가족과 만나고, 가족은 이웃과 이어지며, 한 세대의 경험은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그런 점에서 삶이란 수많은 사람과 시간 사이에 크고 작은 다리를 놓으며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생의 긴 시간을 살아온 고은층(高恩層)에게 ‘연결’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에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른 사람의 길과 이어 주는 일이 중요해진다. 살아오며 얻은 경험과 지혜를 가족에게 전하고, 이웃과 나누며, 사회와 다음 세대에 건네주는 것이다. 몸의 브리지가 서로 다른 부분을 연결하여 하나의 몸으로 움직이게 하듯, 고은층의 삶도 사람과 사람, 세대와 세대, 경험과 미래를 이어 주는 하나의 다리가 될 수 있다.

목의 브리지
생각과 행동, 경험과 새로운 현실을 이어 주다


목은 머리와 몸을 연결하고 머리를 지탱하며 움직임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삶에 비추어 보면 목은 생각과 행동 사이를 이어 주는 상징적인 브리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삶을 변화시키기 어렵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고, 해야 한다고 판단한 일을 작은 것부터 행동으로 옮길 때 생각은 비로소 삶이 된다.

여기에 또 하나 필요한 것이 겸손과 유연함이다.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고 했다. 삶의 경험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생각만을 앞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고은층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이다. 경험은 귀중한 자산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는 확신으로 굳어지면 오히려 새로운 세대와의 연결을 막을 수 있다. 과거의 경험을 오늘의 현실과 연결하고, 자신의 지혜를 젊은 세대의 새로운 생각과 이어 갈 수 있을 때 경험은 비로소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

『로마서』 12장 2절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말한다. 변화는 생각에서 시작되지만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이어질 때 더욱 의미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고은층에게 필요한 첫 번째 브리지는 생각과 행동, 경험과 새로운 현실을 이어 주는 유연한 목의 지혜라 할 수 있다.

어깨와 손목의 브리지
책임을 실천으로 바꾸고, 가진 것을 나누다


어깨에는 흔히 ‘책임을 짊어진다’는 표현이 따라붙는다. 가족을 책임지고, 직분을 맡고,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어깨 위에 쌓여 있다. 반면 손과 손목은 생각과 의지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깨와 손목은 책임과 실천을 이어 주는 브리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생 전반기에는 자신의 어깨에 많은 것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가족을 돌보고 자녀를 키우며 직업과 사회적 책무를 감당한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의 책임은 조금 달라질 필요가 있다. 모든 짐을 다시 자신이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 축적한 것을 필요한 곳에 나누는 책임으로 바뀌는 것이다. 고은층에게는 경험과 전문성, 인간관계와 시간이 있다. 그것을 자신만을 위해 간직하면 한 개인의 경험으로 머물지만 가족과 이웃, 후배와 지역사회에 나누면 공동체의 자산이 된다. 자녀에게 삶의 경험을 들려주고, 후배에게 시행착오에서 얻은 지혜를 전하며, 지역사회의 작은 일에 참여하는 것 또한 책임을 실천으로 이어 가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대신해 주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좋은 도움은 상대의 짐을 모두 들어주는 데 있지 않고, 스스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필요할 때 힘을 보태는 데 있다. 고은층의 손은 붙잡아 끌고 가는 손이라기보다 필요할 때 조용히 내밀어 주는 손이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의 방식도 ‘내가 직접 하는 책임’에서 ‘함께할 수 있도록 돕는 책임’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 평생 어깨에 짊어졌던 책임의 무게는 인생 후반기의 나눔과 보람으로 바뀔 수 있다.

고관절과 발목의 브리지
균형을 지키면서도 삶의 걸음을 멈추지 않다

고관절은 몸의 중심에서 골반과 다리를 연결하며 서고 걷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발목 역시 다리와 발을 이어 주면서 몸의 무게를 지탱하고 한 걸음씩 움직이게 한다. 이를 삶의 의미로 옮겨 보면 고관절이 ‘균형의 브리지’라면 발목은 ‘전진과 전환의 브리지’라 할 수 있다.

인생 후반기에는 무엇보다 균형이 중요하다. 일과 쉼, 건강과 활동, 자신과 가족, 물질과 정신,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는 삶이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는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강조해 온 중용(中庸)의 지혜와도 맞닿아 있다. 중용은 단순히 양쪽의 가운데에 서는 것이 아니라 지나침과 모자람을 경계하면서 그때그때의 형편과 상황에 맞는 적절함을 찾아가는 삶의 지혜이다.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세를 조절하듯 인생의 균형 또한 한 번 정해 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살피고 조절해야 한다.

그러나 균형만 지킨다고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발목이 우리 몸을 앞으로 움직이게 하듯 인생 후반기에도 새로운 걸음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삶의 걸음까지 멈출 필요는 없다. 속도를 조금 늦추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길을 찾아 꾸준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한다. 길을 오래 걷기 위해 중요한 것은 빠른 속도보다 바른 방향이다. 인생 후반기의 걸음은 남보다 앞서기 위한 경쟁의 걸음이 아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는 걸음이어야 한다. 고은층에게 필요한 것은 젊은 날과 같은 빠른 발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과 방향을 잃지 않는 발걸음이다.

삶의 브리지
가족과 이웃, 사회를 잇는 ‘소소익선’의 다리가 되다


몸의 여러 브리지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가장 중요한 하나의 다리에 이르게 된다. 바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삶의 브리지’이다. 고은층이 살아온 긴 세월에는 성공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실패와 시행착오도 있었고, 기쁨과 함께 아픔도 있었다. 수많은 선택과 후회, 만남과 이별을 지나며 얻은 경험은 어떤 책에서도 그대로 배울 수 없는 삶의 자산이다. 그러나 경험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건네지고 다른 사람의 삶에 작은 도움이라도 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

가족 안에서는 부모와 자녀를 연결하는 세대의 다리가 될 수 있다. 옛날이 무조건 좋았다고 말하기보다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젊은 세대의 새로운 생각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웃과 지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랫동안 쌓아 온 인간관계와 경험을 활용해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고, 갈등이 있을 때 양쪽의 말을 들어주며 의견을 나눌 수도 있다. 또한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필요한 사람이나 자원과 연결해 줄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가정과 공동체는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장소가 아니라 서로 배우며 미래를 만들어 가는 공간이 된다.

필자 역시 고은층으로 살아가면서  작지만 의미 있는 브리지 역할을 시도하고 지낸다. 필자는 이를 ‘소소익선의 브리지’라고 생각한다. 다리가 반드시 커야만 사람이 건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은 징검돌 하나도 필요한 자리에 놓이면 누군가의 발을 다음 자리로 안전하게 옮겨 줄 수 있다.

그 하나가 글쓰기이다. 필자는 『이성근 교수의 인생사색』과 『제주사색』, 그리고 ‘고은산책’을 통해 살아오며 생각하고 경험한 것을 글로 남기고 있다. 소수의 지인들과 생각을 나누고, 한 사람이라도 그 글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새로운 생각을 얻는다면 글 또한 경험과 사람을 이어 주는 작은 브리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평생 교수직을 수행하며 쌓은 전문경험을 가능한 범위에서 사회에 되돌려 주는 일이다. 기회가 많지는 않더라도 필요한 곳에서 경험을 나누고 의견을 보태는 것 또한 인생 후반기에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이다. 최근에는 지역 공군 비행단의 민관군 갈등조정협의체 의장을 맡아 작은 연결 하나를 경험했다. 항공훈련으로 발생하는 소음은 군에게는 불가피한 훈련의 과정일 수 있지만 시민에게는 일상의 불편이 될 수 있다. 이에 훈련에 따른 소음 발생 가능성을 시민들에게 문자로 미리 알리는 방안을 회의안건으로 다루었고, 이를 처음 시행하게 되었다. 큰 제도나 거창한 정책은 아니지만 군의 필요와 시민의 일상 사이에 작은 소통의 다리 하나를 놓았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필자는 브리지의 가치는 그 크기보다 ‘무엇과 무엇을 이어 주었는가’에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글은 경험과 사람을 이어 주고, 전문성은 사회의 문제와 해결 가능성을 이어 주며, 조정과 소통은 서로 다른 입장 사이를 이어 준다. 고은층의 역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사회에 내놓거나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살아오며 얻은 경험과 지혜 가운데 작은 하나를 필요한 곳에 건네면 된다.

징검다리는 자신이 목적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를 내어 줄 뿐이다. 그래서 인생 후반기에는 “내가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보다 “내가 무엇을 이어 줄 것인가”, “내 이름을 얼마나 남길 것인가”보다 “누군가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어떤 작은 디딤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작은 연결들이 모이면 가족과 이웃을 잇고, 세대를 잇고, 마침내 사회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다리가 된다.

맺음글
잘 살아온 인생에서 잘 이어 주는 인생으로


우리 몸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움직인다. 목이 머리를 지탱하며 몸과 이어지고, 어깨와 손목이 맡은 일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며, 고관절이 몸의 중심을 잡고 발목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느 하나의 연결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삶 또한 그러하다. 생각은 행동과 연결되어야 하고, 경험은 지혜로 이어져야 하며, 책임은 나눔과 공헌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나의 삶은 가족과 연결되고, 가족은 이웃과 이어지며, 오늘의 세대는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잠언』 4장 23절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라고 가르친다. 몸의 관절을 돌보듯 살아가며 맺어 온 관계와 마음의 연결도 잘 돌보아야 한다. 관계가 끊어지면 삶은 외로워지고, 세대의 연결이 끊어지면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과 지혜도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고은층에게 인생 후반기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시간만이 아니다. 그 보다 그동안 쌓아 온 경험과 지혜를 누구에게, 무엇으로, 어떻게 이어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젊은 날에는 누군가가 놓아준 다리를 건너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건널 수 있도록 작은 다리 하나를 놓아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자녀에게는 세대를 잇는 다리가 되고, 후배에게는 경험을 건네는 다리가 되는 것이다. 이웃에게는 관계를 이어 주는 다리가 되고, 사회에서는 갈등과 이해 사이를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 다리는 반드시 크고 화려할 필요가 없다. 글 한 편일 수도 있고, 따뜻한 말 한마디일 수도 있으며, 필요한 사람을 서로 이어 주는 일일 수도 있다. 평생 쌓은 전문성을 작은 사회문제 하나를 해결하는 데 보태는 것 또한 훌륭한 다리가 된다.

좋은 다리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사람을 건너가게 한다. 필자는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잘 살아온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잘 이어 주는 삶, 많이 가진 삶보다 가진 것을 필요한 곳에 연결해 주는 삶이다.  앞장서기보다 누군가가 건너갈 수 있도록 작은 발판 하나를 놓아주는 삶이다.

크지 않아도 좋다. 많지 않아도 좋다. 필요한 곳에 놓인 작은 징검돌 하나면 충분할 때가 있다. 그러한 ‘소소익선의 브리지’를 하나씩 놓아 가는 것이 고은층이 인생 후반기에 감당할 수 있는 뜻깊은 역할이다. 오래 살아온 한 사람의 삶이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회에 남길 수 있는 귀한 유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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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의 삶, 셋으로 균형을 잡다: 숫자 3이 주는 생활의 지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복잡한 삶일수록 단순한 기준이 필요하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숫자와 함께한다. 나이와 시간, 날짜와 거리, 건강수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은 숫자로 표현되고 관리된다. 그러나 숫자는 단순히 많고 적음을 나타내는 계산의 도구만은 아니다. 어떤 숫자는 생활의 질서를 세우고 생각을 정리하며 삶의 방향을 돌아보게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필자에게는 오래전부터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숫자가 있다. 바로 숫자 3이다. 돌이켜보면 하루를 오전·오후·저녁으로 나누어 생각할 때 생활이 한결 단정해지고, 식사도 아침·점심·저녁 세끼를 중심으로 일정한 리듬을 갖는다. 하루의 생활 역시 일하고, 쉬고, 잠드는 세 과정으로 바라보면 그 흐름이 보다 분명해진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했다. 정년 이후의 삶을 돌아보면 필자가 오래 유지해 온 여러 모임에는 공교롭게도 세 사람이 함께한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숫자 3을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세 사람이 만나 걷고 운동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편안했고 비교적 오래 지속되었다.

그래서 요즘 필자는 숫자 3을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복잡한 생활을 단순하게 정리하고 삶의 균형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작은 원리로 생각한다.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는 고은층(高恩層)에게도 무엇이든 많이 갖고 많이 하는 것보다는 중요한 몇 가지를 가려내어 균형 있게 지속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숫자 3은 고은층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흥미로운 생활의 틀이 될 수 있다.

하루의 세 박자, 일하고 쉬고 잠든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생활의 흐름은 몇 개의 큰 마디로 나누어 바라볼 때 오히려 선명해진다. 오전·오후·저녁이라는 시간의 구분도 그렇고, 아침·점심·저녁이라는 식사의 리듬도 그러하다. 긴 하루를 몇 개의 단순한 구간으로 나누면 무엇을 할 것인지, 언제 쉬어야 할 것인지도 한결 분명해진다.

인생 후반기의 하루도 마찬가지다. 젊을 때처럼 하루를 일로 가득 채울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계획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필자는 좋은 하루를 만드는 기본적인 세 박자를 일·쉼·잠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일이란 반드시 직업적 노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텃밭을 가꾸고 운동하는 일,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돕는 일처럼 자신에게 의미를 주는 활동을 모두 포함한다. 의미 있는 일은 삶에 목적과 활력을 준다. 그러나 일만 계속하면 몸과 마음이 지친다. 그래서 일 사이에는 적절한 쉼과 회복이 있어야 하고, 하루의 마지막에는 충분한 잠이 뒤따라야 한다.

일하고, 쉬고, 잘 자는 세 과정이 서로 이어질 때 다음 날을 다시 건강하게 시작할 수 있다. 고은층에게 좋은 하루란 반드시 많은 일을 해낸 하루가 아니라 할 일을 하고, 쉴 때 쉬며, 편안히 잠드는 하루인지도 모른다. 하루의 성취보다 하루의 균형이 중요해지는 것이 인생 후반기의 지혜일 것이다.

세 사람의 관계가 만드는 작은 공동체

필자의 정년 이후 생활을 돌아보면 숫자 3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주 나타났다.

대구 팔공산에서 전원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약 3년 동안 이웃 세 사람이 매일 아침 5시 반에 만나 한 시간 반가량 산행을 했다. 걸으면서 서로의 삶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각자가 하는 일을 격려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성공을 이끄는 3인 모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년 이후 대구에서는 세 명의 교수가 매월 산행을 함께했다. 산길을 걸으며 건강을 챙겼고, 살아온 이야기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제주에서도 산행과 세상사 이야기를 함께한 ‘서귀삼연’, 파크골프를 함께한 ‘신서귀삼연’, 서귀포 혁신도시 복지관을 중심으로 만난 ‘서귀복연’ 등 세 사람을 중심으로 이어진 인연이 적지 않았다. 최근에는 대구에서 세 명의 동호인이 오후 3시에 만나 운동을 함께하고 있다. 세 사람이 오후 세 시에 만나는 모습까지 생각하면 숫자 3과의 인연이 우연치고는 제법 깊다.

물론 세 사람이 언제나 가장 이상적인 관계의 숫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둘이 더 편안할 수도 있고, 네 명이나 그 이상의 사람이 어울릴 때 더 즐거운 모임도 많다. 다만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세 사람의 관계에는 나름의 장점이 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 한 사람은 들을 수 있고, 의견이 엇갈릴 때 다른 한 사람이 관계의 균형을 잡아 줄 수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에서는 넓이보다 깊이가 중요해진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편안하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걷고 운동하며, 서로의 관심사를 토론할 수 있는 몇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그런 점에서 세 사람의 작은 모임은 고은층에게 부담은 덜면서 정은 깊게 나눌 수 있는 하나의 관계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세 사람이라는 숫자 자체가 아니라 함께할 사람을 가까이 두고 관계를 꾸준히 이어 가는 일이다.

즐거움·유익함·지향가치의 3·3·3 원칙

필자는 생활 속에서 이른바 ‘3·3·3 원칙’을 좋아한다. 너무 많은 목표를 세우면 기억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 어렵다. 반면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하면 무엇이 중요한지 분명해지고 생활 속에서 스스로 점검하기도 쉽다.

첫째는 세 가지 즐거움이다. 몸의 즐거움, 마음의 즐거움, 관계의 즐거움이다. 몸을 움직이며 건강함을 느끼는 즐거움,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며 마음이 충만해지는 즐거움, 가족과 이웃을 만나 정을 나누는 즐거움이 고르게 있어야 한다. 한쪽 즐거움에만 치우치기보다 몸과 마음과 관계가 함께 즐거운 삶이 오래간다.

둘째는 세 가지 유익함이다. 건강에 유익한가, 배움에 유익한가, 나눔에 유익한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운동은 건강에 도움을 주고, 독서와 글쓰기는 배움을 이어 가게 하며, 가족과 이웃을 돕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일은 자신은 물론이고 사회에도 보탬이 된다. 하나의 활동이 이 가운데 두세 가지를 함께 충족시킨다면 더욱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셋째는 고은층이 지향할 세 가지 가치, 곧 자유·자작·고요이다. 여기에서 자유는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삶이다. 자작(自作)은 자신의 형편과 능력에 맞게 할 일을 스스로 찾고, 자신의 하루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삶이다. 고요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중심을 지키는 삶을 뜻한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스스로 만들어 가며, 마음의 고요를 잃지 않는 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고은층의 세 가지 지향가치이다.

그렇게 보면 3·3·3 원칙은 거창한 이론이라기보다 작은 생활 점검표에 가깝다. 하루를 마치면서 “오늘 나는 무엇을 즐겼는가?, 무엇이 나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가치를 향해 살아갔는가?”를 스스로 물어보는 것이다. 질문이 단순할수록 생활 속에서는 오히려 오래 실천할 수 있다.

셋이 가르치는 균형과 조화의 삶

우리의 삶은 쉽게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하거나 너무 적게 하고,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거나 반대로 관계를 끊어 버리기도 한다. 운동도 지나치면 몸을 상하게 하고, 하지 않으면 건강을 지키기 어렵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 환경과 형편에 맞는 적절한 정도를 찾는 일이다.

동양의 중용(中庸)도 단순히 상·중·하 가운데 언제나 한가운데를 택하라는 뜻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지나침과 모자람을 경계하면서 때와 형편에 맞는 적절함을 찾는 데 있다. 일과 쉼, 말함과 침묵, 혼자 있는 시간과 사람을 만나는 시간 사이에서 자신의 알맞은 자리를 찾는 것이다.

숫자 3은 이러한 균형을 생각하기에 좋은 틀을 제공한다. 양쪽 끝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요소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하늘과 땅과 사람을 천·지·인(天地人)으로 함께 바라보았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는 세계와 자연,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이다. 이를 오늘의 고은층 생활에 비추어 보면 필자는 신·자연·사람이라는 세 축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신은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와 가치에 대한 경외와 겸손을 뜻한다.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지배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몸과 마음을 회복하게 하는 삶의 터전이다. 그리고 사람은 가족과 친구, 이웃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다. 사람과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관계가 필요하다.

필자의 생활을 돌아보아도 산을 걷고 농사를 짓고 파크골프를 하며 자연을 만나는 시간, 가족과 친구 및 이웃과 관계를 나누는 시간,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자신보다 더 큰 존재와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해지면 삶은 조금 더 깊어진다.

결국 신을 경외하고, 자연과 가까이하며, 사람을 소중히 하는 삶이다. 그리고 사람을 소중히 한다는 말에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과 함께 자기 자신을 함부로 소모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된다. 이 세 축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인생 후반기의 삶도 한결 안정되고 충실해질 수 있다.

맺음말
셋으로 나누되, 하나의 삶으로 살아간다


돌이켜보면 필자의 정년 이후 삶의 여러 장면에는 숫자 3이 있었다. 오전·오후·저녁으로 이어지는 하루가 있었고, 일·쉼·잠의 순환이 있었다. 팔공산에서 함께 걸었던 세 사람, 정년 이후 산행을 함께한 세 사람, 제주에서 만난 여러 세 사람의 인연이 있었고, 지금도 세 사람이 오후 3시에 만나 운동을 함께한다.

그러나 숫자 3 자체에 특별한 힘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 3이 우리에게 주는 단순함과 균형, 그리고 조화의 지혜이다. 복잡한 것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다 쉽게 보이고, 삶의 우선순위도 한결 분명해진다.

고은층의 삶도 너무 많은 것을 새롭게 더하기보다 이미 가진 것 가운데 소중한 것을 가려내어 잘 지키는 삶이면 좋겠다. 일하고 쉬고 잘 자며 하루의 균형을 지키고, 가까운 사람들과 따뜻한 관계를 이어 가며, 몸과 마음과 관계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건강과 배움과 나눔을 이어 가고, 자유와 자작과 고요의 가치를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나아가 신을 경외하고, 자연과 가까이하며, 사람을 소중히 하는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좋은 삶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많은 일을 해내는 데만 있지 않다.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오래 지속하는 데 있다.

셋은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숫자가 아니라 오히려 복잡한 삶을 단정하게 정리해 주는 숫자일 수 있다.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되, 그 셋을 조화롭게 엮어 하나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고은층이 숫자 3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생활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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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가 아니면 멈출 줄 아는 삶:
고은층이 지켜야 할 사물(四勿)의 품격"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나이가 들수록 더 필요한 것은 절제의 품격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것을 쌓아 간다. 살아온 세월이 쌓이고 경험이 늘어나며,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깊어진다. 그러나 연륜이 언제나 지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지나치게 믿거나 익숙한 생각을 고집하고, 남을 쉽게 판단하며,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인생 후반기에 더욱 필요한 덕목은 많이 알고 많은 경험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을 것인지,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데 있다. 연륜에 절제가 더해질 때 경험은 지혜가 되고, 지혜에 예가 더해질 때 비로소 삶의 품격이 된다.

『논어』 「안연」 제1장에서 안연이 인(仁)을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곧 자신을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라고 답하였다. 이어 “위인유기 이유인호재(爲仁由己,而由人乎哉)”라고 하였다. 인을 실천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안연이 다시 그 구체적인 방법을 묻자 공자는 네 가지를 말한다.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동(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예(禮)는 단순한 인사법이나 형식적인 예절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와 존중의 태도이며, 동시에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절제하여 관계의 질서를 세우는 삶의 규범이다. 따라서 공자의 사물(四勿)은 남에게 예를 요구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예를 적용하라는 자기 수양의 가르침으로 읽어야 한다.

오늘날 이 네 가지 가르침은 오히려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들으며, 너무 쉽게 말하고, 때로는 생각하기도 전에 행동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생 후반기를 은혜에 감사하며 품격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고은층(高恩層)에게 사물은 2천여 년 전의 오래된 금기가 아니다. 무엇 앞에서 멈추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일깨우는 오늘의 생활철학이 될 수 있다.

비례물시와 비례물청,
눈과 귀에도 품격이 필요하다

첫째는 비례물시(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보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본다’는 것은 눈앞의 사물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텔레비전과 신문을 보고, 인터넷과 유튜브를 보며, 휴대전화 화면을 통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삶과 세상의 사건을 들여다본다. 무엇을 반복해서 보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쌓이면 결국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비례물시는 세상을 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무엇을 볼 것인가를 선택할 줄 아는 힘을 가지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남의 불행을 호기심으로 들여다보지 않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정보에 지나치게 눈을 빼앗기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을 찾아내는 데 자신의 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볼 때에도 단점만 찾기보다 장점을 보고, 겉모습만 보기보다 그 사람의 마음과 됨됨이를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을 오래 살아왔다는 것은 많은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은층의 눈은 ‘많이 본 눈’에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에서 눈을 거두어야 하는지를 아는 ‘바르게 보는 눈’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비례물시가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눈의 품격이다.

둘째는 비례물청(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듣지 않는 것이다.

듣는 일 역시 선택과 절제가 필요하다. 근거 없는 소문과 자리에 없는 사람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말에 영향을 받는다. 처음에는 듣기만 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특히 오랜 친분을 가진 사람들이 편하게 모이는 자리에서는 자리에 없는 사람의 사생활과 허물이 쉽게 이야깃거리가 된다. 이때 귀를 열어 두는 것과 마음까지 내어 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고은층에게 필요한 경청은 모든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들어야 할 말에는 귀를 열고, 듣지 말아야 할 말에는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어야 한다.
어려움을 털어놓는 사람의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주고, 자녀와 후배 세대의 다른 생각도 자신의 잣대로 서둘러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 악의적인 비난,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말에는 함께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귀하다. 잘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입을 다무는 일이 아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사람의 마음이 머물 자리를 내어 주는 또 하나의 예이다.

비례물언,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헤아릴 줄 아는가?


셋째는 비례물언(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것이다.

사물 가운데 오늘날 가장 실천하기 어렵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이 말의 절제인지도 모른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면 되돌리기 어렵다. 직접 한 말뿐 아니라 문자메시지와 단체대화방, SNS에 남긴 한마디도 오랫동안 남아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특히 나이가 들고 사회적 경험이 많아지면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도 커질 수 있다. 그 확신이 지나치면 자녀나 후배에게 쉽게 충고하고, 부탁받지 않은 조언을 하며, 자신의 경험을 마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정답처럼 말하기 쉽다.
그러나 경험이 많다는 것과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세대가 달라지면 삶의 조건도 달라지고, 시대가 달라지면 문제의 해답도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고은층의 말 앞에는 세 가지 물음이 필요하다.

해야 할 말인가?
지금 해야 할 말인가?
그리고 내가 해야 할 말인가?


사실이라고 해서 모든 사실을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옳은 말도 때와 방법을 잃으면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상대를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비례물언을 무조건 말을 줄이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필요한 때에는 할 말을 해야 한다. 잘못과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이 언제나 예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헤아리는 데 있다. 충고하기 전에 상대가 그것을 원하는지 생각하고, 비판하기 전에 내가 같은 처지라면 어떻게 느낄지를 돌아보며, 비난하기 전에 이해할 여지가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연륜의 말은 많아서 무게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있을 때 무게가 생긴다. 고은층의 말의 품격은 얼마나 많이 말했는가 보다, 사람의 마음에 어떤 말을 남겼는가에서 드러난다.

비례물동,
예는 결국 행동으로 증명된다

넷째는 비례물동(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예는 마음속의 생각이나 좋은 말에만 머물러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을 대하는 몸가짐과 일상의 작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상대가 다가오면 몸을 돌려 맞으며, 약속을 지키고, 고마울 때 고맙다고 말하며, 잘못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하는 일은 모두 생활 속의 예이다. 함께 사용하는 공간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자신의 편의를 위해 남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는 나이와 지위에 따른 권위적인 예절이 많이 약해졌다. 그것은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사회가 수평적으로 변했다고 해서 예가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와 지위에 의존하지 않고 서로를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는 새로운 예가 더욱 중요해졌다.
선배라고 해서 후배의 인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 후배라고 해서 서로 친하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예를 모두 생략해서도 안 된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대접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기보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고, 자리를 권하고,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는 상하관계를 확인하는 형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방식이다.
특히 고은층에게는 ‘대접받는 예’보다 ‘먼저 베푸는 예’가 더 잘 어울린다. 내가 연장자이므로 상대가 먼저 예를 갖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대접을 요구할수록 연륜은 권위가 되기 쉽지만, 먼저 예를 베풀수록 연륜은 품격이 된다.
비례물동은 바로 그 차이를 행동으로 보여 주는 가르침이다.

맺음글
사물(四勿)을 오늘의 사품(四品)으로

공자의 사물(四勿)에 반복되는 ‘물(勿)’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을 위축시키는 소극적인 금지가 아니다. 순간적인 욕망과 감정을 멈추고 더 나은 것을 선택하기 위한 적극적인 자기 절제이다.
『논어』에서도 네 가지 ‘물’은 “극기복례”, 곧 자신을 다스려 예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제시된다.

필자는 이 사물(四勿)을 오늘의 고은층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품격, 곧 ‘사품(四品)’으로 새롭게 읽어 보고자 한다. 여기서 사품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별도의 유교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사물을 오늘의 고은층의 삶에 맞추어 이 글에서 새롭게 풀어 본 표현이다.
사물이 ‘무엇에서 멈출 것인가’를 일깨우는 절제의 언어라면, 사품은 그 멈춤을 통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밝히는 품격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비례물시는 바르게 보는 품격이고,
비례물청은 가려듣고 깊이 듣는 품격이며,
비례물언은 말을 헤아리는 품격이고,
비례물동은 행동을 바로 세우는 품격이다."


이렇게 보면 사물은 단순한 네 가지 금지가 아니다. 눈의 품격, 귀의 품격, 말의 품격, 행동의 품격을 세우는 네 가지 생활원리이다.
고은층에게 연륜은 저절로 품격이 되지 않는다. 오래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존경을 받을 수도 없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보고 싶은 것을 모두 보지 않고, 듣고 싶은 말을 모두 듣지 않으며,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말하지 않고, 감정이 움직인다고 곧바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연륜은 비로소 절제의 깊이를 갖는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의 예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사물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의 예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남의 무례를 보았다고 나까지 무례해지지 않고, 좋지 않은 말을 들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예는 남에게 요구하기 전에 자신에게 적용할 때 가장 빛난다.

공자가 “위인유기 이유인호재(爲仁由己,而由人乎哉)”라고 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을 실천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예를 보였는가는 그 사람의 몫이지만, 내가 어떤 예를 보일 것인가는 나의 몫이다.
이것이 사물이 말하는 자기 절제의 출발점이다.

"볼 것을 가려 보고,
들을 것을 가려듣고,
말할 것을 헤아려 말하며,
행동할 것을 돌아보아 행동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2천여 년 전 공자의 사물(四勿)을 오늘의 삶 속에 되살리는 길이다.

그리고 사물의 ‘멈춤’을 사품의 ‘품격’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생 후반기를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고은층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이 새겨야 할 절제와 예의 품격일 것이다.

사진 1·2는 필자의 대구 서재이며, 사진 3은 2026년 8월 21일 오전 서귀포 치유의 숲길에서 찍은 필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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