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그 시절, 세월은 흘러 고은층이 되었다: 2환의 봄소풍에서 유유자작의 오늘까지"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세월이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다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참 먼 길을 걸어왔다. 초등학교 1학년 봄소풍을 가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긴 세월을 지나 고은층(高恩層)이 되었다. 그동안 세상도 많이 변했고 나의 삶도 여러 차례 모습을 바꾸었다. 어린 시절의 소박한 생활에서 대학원생이 되었고, 다시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대학과 여러 기관에서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이제는 오랜 대학생활을 마치고 사학연금으로 살아가는 은퇴자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참 묘하다. 그 순간에는 힘들고 막막했던 일도 세월이 지나면 한 장의 추억이 된다. 당시에는 대단하게 여겼던 성취도 세월 앞에서는 지나간 하나의 장면이 된다. 그래서 요즘 나는 과거를 돌아보되 그 시절에 머물지는 않으려 한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고요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유유자작(悠悠自作)’의 삶이다. 남이 짜놓은 시간표에 맞춰 살기보다 스스로 하루를 짓고,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2환의 봄소풍, 가진 것은 적어도 기쁨은 컸다
1957년,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때의 봄소풍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날 할머니로부터 도시락과 용돈을 받았다. 나는 소풍 용돈으로 2환을 받았고 사촌누나는 1환을 받았다. 어린 마음에도 왜 나는 2환이고 누나는 1환인가 하는 기억이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우리 사회에 깊이 남아 있던 남아선호의 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도시락도 달랐다. 나는 그때 흔히 ‘벤또’라 부르던 도시락을 들고 갔고, 사촌누나는 놋그릇에 밥과 반찬을 담아 소풍길에 나섰다.
오늘날 아이들의 풍성한 소풍 준비와 비교하면 참 소박한 모습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 적다고 기쁨까지 작았던 것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작은 용돈 몇 푼에도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지금의 눈으로 그 시절을 바라보면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그만큼 작은 것 하나가 귀했고 작은 것에도 기뻐할 줄 알았다. 세월이 흐른 뒤 생각해 보니 풍요란 물건이 많고 적음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2환을 손에 쥐고 세상을 다 얻은 듯 좋아하던 어린아이의 설렘도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하나의 풍요였다.
신림동 하숙방에서 시작된 교수의 길
그로부터 스무 해가 흐른 1977년, 나는 서울 신림동의 하숙집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2인 1실 하숙비가 한 달에 2만 5천 원이었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조교로 일하며 받은 돈은 월 5만 원 정도였다. 오늘의 화폐가치와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의 5만 원은 젊은 대학원생이 공부를 계속하며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돈이었다. 미래가 또렷하게 보였던 것도 아니다. 학문의 길은 길었고 교수가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젊은 날에는 가진 것보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는 사실이 힘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논문을 준비하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나의 평생 직업으로 이어졌다.
1980년 3월 영남대학교 전임강사 대우로 대학에 들어갔을 때 월급은 25만 원이었다. 대학원 조교 시절 월 5만 원을 받다가 25만 원을 받게 되었으니 당시의 나에게는 그야말로 ‘제1의 천지개벽’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진짜 변화는 월급이 다섯 배가 되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학생의 자리에서 교단에 서는 사람으로, 배우는 사람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며 책임져야 하는 사람으로 삶의 위치가 달라졌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첫 강의를 준비하며 학생들 앞에 섰던 젊은 교수의 긴장과 설렘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교수생활이 38년 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당시의 나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810달러의 미국생활, 삶의 두 번째 천지개벽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전환점은 1984년 12월 찾아왔다. 문교부 국비파견 해외연구교수로 선발되어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국비로 월 810달러를 지원받았고 국내 대학의 봉급도 계속 지급되었다. 지금의 기준에서 810달러라는 숫자만 보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해외에서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았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나는 이를 마음속으로 ‘제2의 천지개벽’이라 여겼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준 변화는 경제적인 것보다 학문적·정신적인 것이 더 컸다. 더 넓은 학문의 세계를 접했고, 다른 사회와 대학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졌다. 한 사람이 어느 곳에 서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세계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도 배웠다. 그 경험은 이후 교수와 연구자로 살아가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세월이 더 흐른 뒤에는 내가 살아온 길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들도 있었다. 2000년대 어느 해 연말정산 때 예상보다 세금이 많이 나와 대학 본부 담당자에게 문의한 적이 있다. 당시 담당자는 내 소득 수준이 의과대학 교수급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 무렵이 대학 안팎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2010년대 초에는 외부기관에 파견되어 연구원장으로 근무하면서 정관에 보수 기준이 장관급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름의 자긍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아보면 중요한 것은 ‘얼마를 받았는가’가 아니었다. 2환의 소풍 용돈에서 시작해 대학원 조교 수당 월 5만 원, 전임강사 대우 월 25만 원, 국비파견 해외연구교수의 월 810달러를 거쳐 직책과 책임에 따라 보수가 높아지는 동안 내가 사회로부터 받은 기회와 책임도 함께 커져갔다는 사실이다. 봉급은 생활의 형편을 보여주는 숫자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더 열심히 일하고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의 표시이기도 했다.
팔공산에서 제주까지, 이제는 유유자작의 시간
교수로서 앞만 보며 달려온 시간에도 마침내 끝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원의 둘레에서는 시작과 끝이 하나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하나의 끝은 또 다른 시작과 맞닿아 있다는 뜻으로 나는 이 말을 받아들인다.
정년을 앞둔 2016년부터 나는 팔공산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약 3년 동안 자연 가까이에서 지내며 이전과는 다른 삶의 리듬을 경험했다. 대학과 조직이 정해 놓은 시간표에서 조금씩 벗어나, 비로소 내 삶의 시간을 내 뜻대로 조율하기 시작한 때였다. 돌아보면 팔공산에서의 그 시간은 교수로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준비이면서 동시에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을 여는 첫걸음이었다.
2019년부터는 다시 대구 집에서 약 3년을 보냈고, 마침 코로나19가 세상을 뒤덮으면서 사람을 만나고 이동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은 시간을 겪었다. 누구에게나 답답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2022년부터는 제주 서귀포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제주에서의 삶은 내 인생의 또 하나의 새로운 장이었다. 정해진 출근시간도 없고, 맡은 보직도 없으며, 결재해야 할 서류도 없었다. 자연을 가까이하고, 걷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때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내는 자유를 누렸다. 젊은 날에는 ‘무엇이 될 것인가’를 생각했고, 중년에는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고은층이 된 지금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달라졌다. 이제는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그 답을 ‘유유자작’에서 찾는다. 유유(悠悠)는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이고, 자작(自作)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어가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남이 정해주는 삶에서 벗어나 내가 하루의 주인이 되는 삶이다. 아침에 눈을 떠 무엇을 읽을지, 누구를 만날지, 어디를 걸을지, 무엇을 쓸지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자유다. 젊은 시절에는 그 자유가 얼마나 귀한지 몰랐다. 이제야 그것이 은퇴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맺음글
받은 것을 헤아리며 남은 시간을 살아간다
2환을 손에 쥐고 봄소풍을 가던 초등학교 1학년 아이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지 못했다. 신림동 2인 1실 하숙방에서 공부하던 대학원생도, 월급 25만 원을 받고 기뻐하던 젊은 교수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캠퍼스를 걷던 해외연구교수도 오늘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긴 인생을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내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간 부모와 가족의 보살핌이 있었고 스승이 있었으며, 동료와 제자가 있었다. 대학이라는 일터가 있었고 국가와 사회가 마련해 준 기회도 있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때로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과 은혜가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나를 단순한 고령층이나 은퇴자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은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고은층(高恩層)’이라고 생각한다. 고은층의 삶은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받은 것을 헤아리고 감사하며, 남은 시간을 자신의 뜻에 따라 품격 있게 살아가는 데 의미가 있다. 젊은 시절에는 더 빨리 가려 했고 더 높이 오르려 했다. 이제는 굳이 서두르지 않는다. 오늘 하루를 잘 살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읽고 싶은 것을 읽으며, 걷고 싶은 길을 걷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시 세상에 돌려주며 살아가고 싶다.
그때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2환의 봄소풍도, 신림동 하숙방도, 첫 월급의 설렘도, 미국에서의 연구생활도 모두 오늘의 나를 만든 소중한 시간이었다. 인생은 어느 한순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고 소박했던 시간과 힘들었던 시절, 뜻밖의 기회와 성취의 순간들이 하나하나 이어져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이제 나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 보다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고요와 자유 속에서, 받은 은혜를 헤아리며 남은 하루하루를 내 뜻대로 다시 지어간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고은층의 삶이며, 유유자작하는 오늘의 모습이다.



'생각하며 사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성근 교수의 고은산책] 고은층 부부의 평화는 말(言)에서 시작된다: 미래·수용·배려의 세 가지 지혜 (0) | 2026.09.17 |
|---|---|
| [이성근 교수의 고은산책] 고은층 부부는 왜 사소한 말로 부딪히는가? 과거·습관·역린이 만드는 세 가지 언쟁(言爭) (0) | 2026.09.17 |
| [이성근 교수의 고은산책] 끝은 닮아도 삶은 다르다 (1) | 2026.09.15 |
| [이성근 교수의 디카시 산책] 끝은 닮아도 삶은 다르다 (0) | 2026.09.14 |
| [이성근 교수의 디카시 산책] 세상 모두가 은혜로세 (0) | 2026.09.1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