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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세월은 흘러 고은층이 되었다: 2환의 봄소풍에서 유유자작의 오늘까지"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세월이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다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참 먼 길을 걸어왔다. 초등학교 1학년 봄소풍을 가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긴 세월을 지나 고은층(高恩層)이 되었다. 그동안 세상도 많이 변했고 나의 삶도 여러 차례 모습을 바꾸었다. 어린 시절의 소박한 생활에서 대학원생이 되었고, 다시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대학과 여러 기관에서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이제는 오랜 대학생활을 마치고 사학연금으로 살아가는 은퇴자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참 묘하다. 그 순간에는 힘들고 막막했던 일도 세월이 지나면 한 장의 추억이 된다. 당시에는 대단하게 여겼던 성취도 세월 앞에서는 지나간 하나의 장면이 된다. 그래서 요즘 나는 과거를 돌아보되 그 시절에 머물지는 않으려 한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고요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유유자작(悠悠自作)’의 삶이다. 남이 짜놓은 시간표에 맞춰 살기보다 스스로 하루를 짓고,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2환의 봄소풍, 가진 것은 적어도 기쁨은 컸다

1957년,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때의 봄소풍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날 할머니로부터 도시락과 용돈을 받았다. 나는 소풍 용돈으로 2환을 받았고 사촌누나는 1환을 받았다. 어린 마음에도 왜 나는 2환이고 누나는 1환인가 하는 기억이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우리 사회에 깊이 남아 있던 남아선호의 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도시락도 달랐다. 나는 그때 흔히 ‘벤또’라 부르던 도시락을 들고 갔고, 사촌누나는 놋그릇에 밥과 반찬을 담아 소풍길에 나섰다.

오늘날 아이들의 풍성한 소풍 준비와 비교하면 참 소박한 모습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 적다고 기쁨까지 작았던 것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작은 용돈 몇 푼에도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지금의 눈으로 그 시절을 바라보면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그만큼 작은 것 하나가 귀했고 작은 것에도 기뻐할 줄 알았다. 세월이 흐른 뒤 생각해 보니 풍요란 물건이 많고 적음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2환을 손에 쥐고 세상을 다 얻은 듯 좋아하던 어린아이의 설렘도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하나의 풍요였다.

신림동 하숙방에서 시작된 교수의 길

그로부터 스무 해가 흐른 1977년, 나는 서울 신림동의 하숙집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2인 1실 하숙비가 한 달에 2만 5천 원이었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조교로 일하며 받은 돈은 월 5만 원 정도였다. 오늘의 화폐가치와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의 5만 원은 젊은 대학원생이 공부를 계속하며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돈이었다. 미래가 또렷하게 보였던 것도 아니다. 학문의 길은 길었고 교수가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젊은 날에는 가진 것보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는 사실이 힘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논문을 준비하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나의 평생 직업으로 이어졌다.

1980년 3월 영남대학교 전임강사 대우로 대학에 들어갔을 때 월급은 25만 원이었다. 대학원 조교 시절 월 5만 원을 받다가 25만 원을 받게 되었으니 당시의 나에게는 그야말로 ‘제1의 천지개벽’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진짜 변화는 월급이 다섯 배가 되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학생의 자리에서 교단에 서는 사람으로, 배우는 사람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며 책임져야 하는 사람으로 삶의 위치가 달라졌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첫 강의를 준비하며 학생들 앞에 섰던 젊은 교수의 긴장과 설렘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교수생활이 38년 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당시의 나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810달러의 미국생활, 삶의 두 번째 천지개벽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전환점은 1984년 12월 찾아왔다. 문교부 국비파견 해외연구교수로 선발되어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국비로 월 810달러를 지원받았고 국내 대학의 봉급도 계속 지급되었다. 지금의 기준에서 810달러라는 숫자만 보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해외에서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았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나는 이를 마음속으로 ‘제2의 천지개벽’이라 여겼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준 변화는 경제적인 것보다 학문적·정신적인 것이 더 컸다. 더 넓은 학문의 세계를 접했고, 다른 사회와 대학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졌다. 한 사람이 어느 곳에 서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세계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도 배웠다. 그 경험은 이후 교수와 연구자로 살아가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세월이 더 흐른 뒤에는 내가 살아온 길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들도 있었다. 2000년대 어느 해 연말정산 때 예상보다 세금이 많이 나와 대학 본부 담당자에게 문의한 적이 있다. 당시 담당자는 내 소득 수준이 의과대학 교수급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 무렵이 대학 안팎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2010년대 초에는 외부기관에 파견되어 연구원장으로 근무하면서 정관에 보수 기준이 장관급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름의 자긍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아보면 중요한 것은 ‘얼마를 받았는가’가 아니었다. 2환의 소풍 용돈에서 시작해 대학원 조교 수당 월 5만 원, 전임강사 대우 월 25만 원, 국비파견 해외연구교수의 월 810달러를 거쳐 직책과 책임에 따라 보수가 높아지는 동안 내가 사회로부터 받은 기회와 책임도 함께 커져갔다는 사실이다. 봉급은 생활의 형편을 보여주는 숫자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더 열심히 일하고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의 표시이기도 했다.

팔공산에서 제주까지, 이제는 유유자작의 시간

교수로서 앞만 보며 달려온 시간에도 마침내 끝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원의 둘레에서는 시작과 끝이 하나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하나의 끝은 또 다른 시작과 맞닿아 있다는 뜻으로 나는 이 말을 받아들인다.

정년을 앞둔 2016년부터 나는 팔공산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약 3년 동안 자연 가까이에서 지내며 이전과는 다른 삶의 리듬을 경험했다. 대학과 조직이 정해 놓은 시간표에서 조금씩 벗어나, 비로소 내 삶의 시간을 내 뜻대로 조율하기 시작한 때였다. 돌아보면 팔공산에서의 그 시간은 교수로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준비이면서 동시에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을 여는 첫걸음이었다.

2019년부터는 다시 대구 집에서 약 3년을 보냈고, 마침 코로나19가 세상을 뒤덮으면서 사람을 만나고 이동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은 시간을 겪었다. 누구에게나 답답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2022년부터는 제주 서귀포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제주에서의 삶은 내 인생의 또 하나의 새로운 장이었다. 정해진 출근시간도 없고, 맡은 보직도 없으며, 결재해야 할 서류도 없었다. 자연을 가까이하고, 걷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때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내는 자유를 누렸다. 젊은 날에는 ‘무엇이 될 것인가’를 생각했고, 중년에는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고은층이 된 지금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달라졌다. 이제는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그 답을 ‘유유자작’에서 찾는다. 유유(悠悠)는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이고, 자작(自作)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어가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남이 정해주는 삶에서 벗어나 내가 하루의 주인이 되는 삶이다. 아침에 눈을 떠 무엇을 읽을지, 누구를 만날지, 어디를 걸을지, 무엇을 쓸지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자유다. 젊은 시절에는 그 자유가 얼마나 귀한지 몰랐다. 이제야 그것이 은퇴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맺음글
받은 것을 헤아리며 남은 시간을 살아간다

2환을 손에 쥐고 봄소풍을 가던 초등학교 1학년 아이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지 못했다. 신림동 2인 1실 하숙방에서 공부하던 대학원생도, 월급 25만 원을 받고 기뻐하던 젊은 교수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캠퍼스를 걷던 해외연구교수도 오늘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긴 인생을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내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간 부모와 가족의 보살핌이 있었고 스승이 있었으며, 동료와 제자가 있었다. 대학이라는 일터가 있었고 국가와 사회가 마련해 준 기회도 있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때로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과 은혜가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나를 단순한 고령층이나 은퇴자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은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고은층(高恩層)’이라고 생각한다. 고은층의 삶은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받은 것을 헤아리고 감사하며, 남은 시간을 자신의 뜻에 따라 품격 있게 살아가는 데 의미가 있다. 젊은 시절에는 더 빨리 가려 했고 더 높이 오르려 했다. 이제는 굳이 서두르지 않는다. 오늘 하루를 잘 살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읽고 싶은 것을 읽으며, 걷고 싶은 길을 걷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시 세상에 돌려주며 살아가고 싶다.

그때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2환의 봄소풍도, 신림동 하숙방도, 첫 월급의 설렘도, 미국에서의 연구생활도 모두 오늘의 나를 만든 소중한 시간이었다. 인생은 어느 한순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고 소박했던 시간과 힘들었던 시절, 뜻밖의 기회와 성취의 순간들이 하나하나 이어져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이제 나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 보다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고요와 자유 속에서, 받은 은혜를 헤아리며 남은 하루하루를 내 뜻대로 다시 지어간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고은층의 삶이며, 유유자작하는 오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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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 부부의 평화는 말(言)에서 시작된다: 미래·수용·배려의 세 가지 지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부부의 평화는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부부가 평생 싸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서로 다른 성격과 습관을 지닌 두 사람이 수십 년을 함께 살아가는데 의견 차이가 전혀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갈등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고은층 부부에게 필요한 평화도 마찬가지다. 평화란 아무런 의견 차이 없이 살아가는 상태가 아니다. 차이가 있어도 서로에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삶의 지혜가 평화이다.

성경 『잠언』 15장 1절에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했다. 같은 내용도 어떤 말로 하느냐에 따라 다툼이 되기도 하고 대화가 되기도 한다. 부부의 평화 역시 거창한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고은층 부부가 남은 삶을 조금 더 평화롭게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과거보다 미래를 말하자

갈등이 생겼을 때 가장 하기 쉬운 말 가운데 하나가 “당신은 옛날에도 그랬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로 해결되는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미 지나간 일과 함께 묻어 두었던 감정까지 다시 살아나기 쉽다. 복수난수(覆水難收), 곧 엎질러진 물은 다시 거두기 어렵다는 말처럼 지나간 일 자체를 되돌릴 수는 없다.

그래서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때 왜 그랬어?”라고 따지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묻는 것이다. 지난날의 언어를 미래의 언어로 바꾸는 셈이다. 잘못한 것만 찾아내기보다 잘한 일과 고마운 일도 말해 줄 필요가 있다. 오래 함께 살다 보면 잘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부족한 것만 눈에 들어오기 쉽다. “당신은 이것도 못해”라는 말보다 “당신이 이것은 참 잘해 주었어”라는 말 한마디가 관계의 온도를 바꾼다.

과거는 고칠 수 없지만 앞으로의 하루는 바꿀 수 있다. 특히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는 고은층에게 남은 시간은 지나간 일을 되풀이해 원망하는 데 쓰기에는 너무 귀하다. 지난 잘못을 기억하는 데 머물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부부의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다.

바꾸기 어려운 것은 받아들이자

오래 살아온 배우자를 이제 와서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으로 바꾸겠다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에게 널리 알려진 ‘평온의 기도(Serenity Prayer)’에는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그 둘을 구별하는 지혜를 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지혜는 부부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배우자의 건강을 해치는 습관이나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는 행동은 함께 고쳐 나가야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말투나 취향, 생활 리듬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 것까지 끊임없이 지적하고 바로잡으려 한다면 두 사람 모두 지치게 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도 오래된 습관을 바꾸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럴 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지혜다.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고 했다. 서로 조화를 이루되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 나는 『맹자』 「등문공상」의 오륜에 나오는 부부유별(夫婦有別)도 오늘의 관점에서 새롭게 생각해 보고 싶다. 본래 부부 사이에도 지켜야 할 분별과 질서가 있다는 뜻이지만, 오늘날에는 부부라 하더라도 서로의 인격과 생각, 취향과 영역에 존중해야 할 차이가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부부는 한집에서 한평생을 살아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이다.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고, 만나는 사람도 다르며, 쉬는 방법과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 모든 것을 함께해야 하고 모든 생각이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래 살아갈수록 함께할 것은 함께하고 다를 것은 다르게 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화이부동과 부부유별은 그런 의미에서 서로 통한다. 다름을 인정하기 때문에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기 때문에 더 오래 가까이 살아갈 수 있다.

상대의 역린을 알고도 건드리지 말자

부부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만큼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디가 강하고 어디가 약한지도 안다. 그래서 갈등이 생겼을 때 마음만 먹으면 상대에게 가장 아픈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다는 것은 상대의 약점을 공격할 권리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약점을 알고 있기에 보호해 줄 책임이 더 커졌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역린(逆鱗)’은 『한비자』 「세난(說難)」에서 비롯된 말이다. 용의 목 아래에는 거꾸로 난 비늘이 있어 그것을 건드리면 사람을 해친다는 비유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나 남이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예민하고 아픈 부분이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논어』 「안연」편에도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곧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부부 사이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상대에게 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에 가장 상처받는지를 안다면 그것을 굳이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남들 앞에서 지적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족을 비난하는 말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지나간 실패를 다시 들추는 데 깊은 상처를 받는다. 배우자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굳이 그곳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오래 산 부부가 보여 줄 수 있는 배려다.

역린을 모르는 사람보다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조심해야 한다. 사랑은 좋은 것을 해주는 것만이 아니다. 상대가 가장 싫어하고 아파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사랑이다. 오래 함께 살아 상대를 잘 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까지 안다는 뜻이어야 한다.

맺음글
서로를 덜 고치고 더 이해하는 삶


젊은 시절의 부부에게는 함께 이루어야 할 일이 많다.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키우며 직장과 가정을 꾸려 가야 한다. 그러나 고은층 부부에게는 조금 다른 과제가 남는다. 이제는 서로를 얼마나 더 바꿀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서로를 조금 더 편안하게 해줄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고은층 부부의 평화를 위한 삶의 태도를 세 가지로 마음에 담아 본다. 지나간 것은 놓아주고 앞으로를 이야기하자. 바꾸기 어려운 것은 억지로 고치려 하기보다 받아들이자. 그리고 서로의 아픈 곳을 알면서도 굳이 건드리지 말자. 결국 미래의 언어, 수용의 태도, 배려의 마음이다.

부부는 평생을 함께 살아도 서로 다른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유별이고,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화이부동이다. 오래 산 부부의 아름다움은 서로를 얼마나 많이 고쳐 놓았느냐에 있지 않을 것이다.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상대를 조금 더 이해하고, 조금 덜 상처 주며,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삼키고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데 있을 것이다.

백년해로(百年偕老)는 단지 오래 함께 사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서로의 다름을 품고, 해서는 안 될 말 한마디를 아끼며, 남은 날을 편안하고 평화롭게 함께 늙어 가는 일일 것이다. 말 한마디를 바꾸면 관계가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지면 남은 삶의 빛깔도 달라진다. 그것이 고은층 부부가 함께 만들어 가는 인생 후반기의 아름다운 동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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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 부부는 왜 사소한 말로 부딪히는가? 과거·습관·역린이 만드는 세 가지 언쟁(言爭)"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오래 함께 살아도 부부는 다르다


부부는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사이다. 젊은 날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며 온갖 희로애락을 함께 겪는다. 그렇게 수십 년을 함께 살다 보면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래 함께 살았다고 해서 생각과 성격, 습관과 취향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맹자』 「등문공상」에는 오륜의 하나로 부부유별(夫婦有別)이 나온다. 본래는 부부 사이에도 지켜야 할 분별과 도리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 오늘의 부부관계에 그대로 옮겨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한 가지 지혜를 새롭게 읽어보고 싶다. 부부는 평생을 함께 살아도 서로 다른 인격과 생각, 취향과 생활방식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다. 가까울수록 그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논어』 「자로」에서 공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했다. 조화를 이루되 반드시 같아지려 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부부야말로 화이부동의 지혜가 가장 필요한 관계가 아닐까? 하나의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서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하되 서로 다를 수 있고, 다르면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고은층에 접어들면 대체로 자녀가 성장하고 사회적 역할에서도 한발 물러나면서 부부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런데 함께하는 시간이 늘수록 아주 사소한 말로 부딪히기도 한다. 큰 사건 때문이라기보다 오래 묵은 과거를 다시 꺼내고, 평생의  습관을 고치려 하며, 상대의 가장 민감한 곳을 건드리는 말 한마디에서 언쟁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말

부부의 언쟁은 흔히 현재의 작은 문제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수십 년 전의 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당신이 그랬잖아”, “평생 당신은 그랬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오늘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사라지고 지난 결혼생활 전체를 평가하는 언쟁으로 번지기 쉽다. 오늘 청소를 할 것인가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신혼 시절의 서운함으로 이어지고, 한 번의 실수가 평생의 잘못처럼 확대되기도 한다.

한자성어에 복수난수(覆水難收)라는 말이 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거두어 담기 어렵다는 뜻이다. 영어에도 “Let bygones be bygones.”라는 표현이 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두자는 뜻이다. 물론 과거를 모두 잊으라는 말은 아니다. 좋은 추억은 오래 간직하고 잘못에서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다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오늘의 다툼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간다고 했다. 본래는 신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것에 붙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은 오랜 부부의 삶에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과거는 교훈으로 남겨야지 원망으로 붙들어서는 안 된다. 오래 살아온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판결문을 다시 읽는 일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일이다.

고치려는 마음이 만드는 갈등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오랜 습관이 그만큼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십 년을 살아온 부부에게는 저마다 몸에 밴 생활방식이 있다. 물건을 놓는 자리도 다르고, 식사하는 습관도 다르다.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과 말하는 방법도 다르다. 한 사람은 무엇이든 미리 준비해야 마음이 놓이지만 다른 사람은 때가 닥쳐야 움직일 수 있고, 한 사람은 정돈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조금 흐트러져 있어도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다.

젊을 때도 쉽게 고치지 못했던 습관을 칠십, 팔십이 되어 바꾸기는 더욱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버릇 좀 고쳐요”,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되나요”라고 쉽게 말한다. 물론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바꾸어야 할 것도 있다. 건강이나 안전에 관계되는 습관, 상대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는 행동이라면 함께 노력해 고쳐야 한다. 그러나 사소한 생활습관과 취향까지 모두 내 방식에 맞추려 한다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어쩌면 문제는 상대의 습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내 방식대로 고치려는 마음에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고은층 부부에게는 무엇을 바꾸어야 하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함께 산다고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다. 부부 사이의 평화는 모든 차이가 없어질 때 오는 것이 아니다. 고쳐야 할 것은 함께 고치되 바꾸기 어려운 차이는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찾아든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건드리는 역린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듣기 싫은 말과 건드리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말도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된 상처를 되살리는 말이 될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고사가 역린(逆鱗)이다. 『한비자』 「세난」에는 용의 목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역린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민감한 부분이나 자존심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부부는 서로의 역린을 누구보다 잘 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 어떤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꺼내면 오래된 상처가 되살아나는지를 안다. 문제는 언쟁이 생겼을 때 바로 그곳을 공격하는 데 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친정이나 시댁, 자녀 문제, 경제 문제, 과거의 실패를 들추기도 하고 때로는 건강이나 외모까지 건드린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약점을 가장 잘 알고,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가장 아픈 곳을 찌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역린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건드릴 권리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커졌다는 뜻일 것이다.

흔히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한다. 싸우더라도 쉽게 다시 풀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부싸움이 칼로 물 베기일 수는 있어도 말로 벤 마음의 상처까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 부부일수록 말의 수는 줄어들지 몰라도 말의 무게는 더 무거워진다. 상대의 아픈 곳을 알고도 피해 말하는 것이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배려이다.

맺음글
가까울수록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고은층 부부의 언쟁은 대개 거대한 문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고, 쉽게 바뀌지 않는 습관을 억지로 고치려 할 때 생겨난다. 그리고 상대가 가장 싫어하는 말과 행동을 건드리는 데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일수록 과거는 오늘의 무기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쉽게 바뀌지 않는 차이는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상대의 역린을 알고 있다면 오히려 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부부는 오래 살았다고 서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함께 살아도 나는 나이고 배우자는 배우자다. 부부유별의 옛 가르침에서 오늘의 다름과 존중을 생각해 볼 수 있고, 화이부동의 지혜에서는 그 다름을 없애려 하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젊어서는 함께 앞을 보며 달려가는 것이 부부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고은층이 된 뒤에는 서로의 속도와 다름을 인정하며 나란히 걸어가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끝까지 가리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남은 날을 어떻게 더 평화롭고 따뜻하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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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닮아도 삶은 다르다: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에서 생각하는 고은층의 삶"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닮은 말에서 다른 삶을 생각하다


어제 오후 낙동클럽 5인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우연히 ‘가라지’라는 말이 화제에 올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라는 세 단어가 잇달아 떠올랐다. 끝소리는 비슷하지만 그 말에서 연상되는 모습과 의미는 서로 전혀 다르다.

가라지는 흔히 알곡과 대비되는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미꾸라지는 잡힐 듯하다가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반면 도라지는 땅속에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그 뿌리까지 사람에게 쓰임을 주는 식물이다. 말의 끝은 비슷한데 그 속에 담긴 모습은 이처럼 다르다.

그러다 사람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모두 비슷하게 나이를 먹고 같은 세월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을 마음에 담고 살아왔는지, 책임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무엇을 남기는지에 따라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다.

특히 고은층의 삶에서는 무엇을 더 얻느냐보다 어떤 사람으로 남느냐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그래서 나는 우연한 대화에서 떠오른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라는 세 단어를 통해 인생 후반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라지,
알곡처럼 보이기보다 열매로 드러나는 삶


가라지를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나오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떠오른다. 마태복음 13장에는 한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사람들이 잠든 사이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지를 묻자 주인은 밀까지 함께 뽑힐 것을 염려하여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라지와 알곡을 구별한다. 성경의 가라지는 어린 시기에는 밀과 매우 비슷하여 쉽게 구별하기 어렵지만 자라면서 차이가 드러나는 식물로 이해된다.

나는 이 비유에서 한 가지 삶의 교훈을 생각한다. 처음에는 비슷해 보여도 결국 무엇을 맺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겉으로 알곡처럼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 알곡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직함이나 재산, 학력과 명예가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모두 말해 주지는 않는다. 삶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겉모습이나 이름표가 아니라 그가 살아오며 맺은 열매다.

젊은 시절에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어떤 자리에 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인정받는지가 삶의 큰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 후반에 들어서면 그런 외적인 표지는 하나둘 힘을 잃는다. 직함도 내려놓고 자리도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흔적이다.

많이 아는 사람보다 지혜롭게 말하는 사람이 귀하다.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보다 사람을 따뜻하게 대했던 사람이 오래 기억된다. 성공한 사람보다 성공 속에서도 겸손했던 사람이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길었는가보다 그 세월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가 중요하다.

성경의 가라지 비유를 다른 사람을 가려내고 판단하는 잣대로 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으면 좋겠다. ‘나는 알곡처럼 보이려고 살아왔는가, 아니면 실제로 알찬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는가?’라고 스스로 물어보는 것이다.

고은층에게 필요한 것은 알곡인 척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속을 알곡처럼 채워 가는 일이다. 살아온 경험을 자랑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성찰과 지혜로 바꾸며, 자신이 받은 것들을 감사와 나눔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결국 보이는 모습보다 속에 무엇을 담고 있으며, 어떤 열매를 남기느냐가 인생 후반의 품격을 결정한다.

미꾸라지,
책임을 피하지 않는 삶


미꾸라지는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어느새 빠져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상황에 따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사람을 미꾸라지에 빗대기도 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 그 자체보다 그다음의 태도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큰 차이를 만든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경험과 권위를 앞세우기 쉽다. “내가 살아 봐서 안다”거나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을 오래 살았다는 것은 책임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더 무게를 가져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고은층의 품격은 잘못하지 않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했을 때 인정하고, 사과할 때 사과하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피하지 않는 데 있다. 미꾸라지처럼 책임 앞에서 빠져나가는 노년보다 자신의 몫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고은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변명은 줄이고 책임은 더 크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후배 세대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고은의 모습이다. 또한 세월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도라지,
뿌리를 내리고 쓰임으로 남는 삶


마지막에는 도라지가 떠오른다. 도라지는 화려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식물은 아니다. 땅속에 오래 뿌리를 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 뿌리마저 사람에게 쓰임이 된다. 나는 여기에서 고은층의 바람직한 모습을 본다.

인생 후반은 더 높이 올라가는 시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려온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고, 그것을 어떻게 쓰임으로 바꿀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기이다. 누구에게나 평생 살아오며 쌓은 경험이 있다. 직업에서 얻은 지식도 있고 사람을 만나며 얻은 지혜도 있다. 성공뿐 아니라 실패와 아픔도 모두 삶의 뿌리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기 안에만 묻어 두지 않는 일이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삶의 기쁨과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배우고, 걷고, 사람을 만나고, 웃으며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고 꽃피는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내린 뿌리에서 이전과는 다른 깊이의 꽃이 필 수도 있다.

그리고 쓰임으로 남는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경험과 지혜를 가족과 후배, 이웃과 사회에 나누는 일이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따뜻한 말 한마디도 쓰임이고, 후배의 손을 잡아 주는 일도 쓰임이다. 가족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도 쓰임이다.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기는 일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한 하나의 쓰임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고은층의 삶을 ‘유유자작(悠悠自作)’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다. 남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가꾼다. 그러나  그 삶을 자신만을 위해 닫아 두지 않는 것이다. 제 뿌리를 지키고, 제 꽃을 피우며, 마지막에는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남기는 삶이다.

도라지는 깊이 뿌리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자신이 가진 것을 세상에 내어준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고은층이 지향할 만한 삶이 아닐까 싶다.

맺음글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젊은 시절에는 ‘무엇이 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한다. 좋은 직업을 얻고, 높은 자리에 오르며,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에 이르면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무엇이 되었는가보다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가라지는 알곡과 비슷해 보여도 마지막에는 열매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미꾸라지는 잡힐 듯하다가도 빠져나가지만, 사람은 자신의 책임까지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도라지는 보이지 않는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뿌리까지 쓰임으로 남긴다.

그렇다면 우리 고은층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야 할까?

가라지처럼 알곡인 듯 보이는 데 마음을 쓰기보다 실제로 알찬 열매를 맺어야 한다. 미꾸라지처럼 책임 앞에서 요리조리 피하기보다 자신의 몫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도라지처럼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끝내 누군가에게 쓰임으로 남는 삶이면 좋겠다.

끝소리는 닮아도 삶은 다르다.

가라지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미꾸라지처럼 피하지 말며,
도라지처럼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자.


그리고 마지막에는 누군가에게 작은 쓰임이라도 남기자. 고은층의 품격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보다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냐에 있다. 또한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아온 세월을 어떤 지혜와 쓰임으로 남기느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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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닮아도 삶은 다르다

이성근

가라지처럼 알곡인 척하지 말고
미꾸라지처럼 책임을 피해 돌지 말며
도라지처럼 제 뿌리를 깊이 내리자
때가 오면 꽃을 피우고
끝내 누군가의 쓰임으로 남자

[글·사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어제 오후 낙동클럽 5인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나눈 대화 가운데 우연히 ‘가라지’라는 말이 화제에 올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라는 세 단어가 잇달아 떠올랐다. 끝소리는 비슷하지만 그 말에서 연상되는 모습과 의미는 서로 전혀 다르다.

가라지는 알곡 사이에 섞여 있으면서 알곡과 혼동되기 쉬운 존재이다. 미꾸라지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도라지는 땅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그 뿌리까지 사람에게 쓰임을 주는 식물이다.

사람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기보다 속을 알차게 채우고, 책임을 피하기보다 기꺼이 감당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에는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는 흔적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쓰임이 되었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더 값진 삶이 아닐까? 차 안에서 우연히 나온 ‘가라지’라는 한마디가 이런 생각으로 이어져 이 시를 쓰게 되었다.

[시 해설]

이 시는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라는 끝소리가 닮은 세 단어를 서로 다른 삶의 모습에 빗대어 쓴 것이다.

‘가라지’는 알곡인 척하는 삶을 경계하는 이미지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처럼 보이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속을 얼마나 알차게 채우며 살아가느냐는 뜻을 담았다. ‘미꾸라지’는 책임 앞에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나이가 들수록 핑계보다 책임을, 회피보다 받아들임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의 ‘도라지’는 앞의 두 이미지와 달리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도라지는 보이지 않는 땅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그 뿌리까지 사람에게 쓰임을 준다. 사람도 자신의 자리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끝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끝소리는 닮아도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다. 무엇처럼 보일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가질 것인가보다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이것이 이 시가 전하고 싶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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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두가 은혜로세

이성근


숨 쉬는 공기도 은혜
마시는 물도 은혜
먹는 밥 한 그릇도 은혜
걷는 두 다리도 은혜
살아 있음이 모두 은혜로세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고은층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가족과 이웃, 사회와 자연으로부터 크고 작은 은혜를 받아온 세대다. 이제는 자신이 누려 온 삶을 당연하게 여기기보다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한 끼의 밥과 건강한 몸까지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볼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의 서예 전시를 둘러싼 한 해프닝에서 ‘밥 한 그릇도 나라의 은혜’라는 글귀를 접하면서 생각이 이어졌다. 다만 글씨를 쓴 사람과 그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별개의 문제로 둔다. 필자는 ‘밥 한 그릇조차 누군가와 세상의 도움 없이는 내 앞에 올 수 없다’는 말의 뜻을 오늘의 삶에 돌아보게 했다. 그래서 고은층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세상 모두가 은혜로세’라는 짧은 시에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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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高恩層) 개념의 제안과 이론적 논의: 이성근 교수의 고은층론"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 행정학박사


서문
인생 후반기를 새롭게 바라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사람들을 ‘노인’, ‘고령자’, ‘고령층’, ‘은퇴자’, ‘실버세대’, ‘시니어’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이러한 용어들은 각각 필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대체로 생물학적 연령이나 경제활동에서의 은퇴 여부를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한다.

그러나 오늘날 인생 후반기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고 있다.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은퇴 이후에도 상당히 긴 삶이 남아 있으며, 많은 사람이 학습과 사회활동, 여행과 취미, 봉사와 나눔 등을 통해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 후반기를 단순히 ‘늙어가는 시기’나 ‘은퇴 이후의 여생’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타당할까? 오랜 생애를 통해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남은 삶을 스스로 설계하며, 가족과 이웃, 사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생애단계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2024년부터 ‘고은층(高恩層)’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그 의미를 여러 글과 저술을 통해 발전시켜 왔다. 초기에는 고령층과 은퇴층을 함께 포괄하는 의미가 강했지만, 이후에는 단순한 인구학적 범주를 넘어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설명하는 생애적·철학적·실천적 개념으로 확장해 왔다.

고은층은 단순히 나이 든 사람을 새롭게 부르는 이름이 아니다. 인생 후반기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고, 어떻게 나이 들며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가며 완성할 것인가에 관한 삶의 방식이다.

고은층(高恩層)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고은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고은층(高恩層)이란 오랜 생애과정을 통해 경험과 지혜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관리하면서 성찰·관계·참여·나눔과 환원을 통해 인생 후반기를 성숙하고 품격 있게 살아가는 생애계층을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연령이 아니다. 몇 살인가 보다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어떻게 자신의 삶과 사회적 가치로 전환하는가가 중요하다.

따라서 고은층은 생물학적 노화만을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다. 인생 후반기의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 자기 관리와 성찰, 관계와 참여, 나눔과 환원을 함께 포괄하는 생애적 개념이다.

고은층을 이루는 다섯 가지 차원

고은층의 삶은 크게 다섯 가지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생애적 차원이다.
고은층은 학습과 가정생활, 직업과 사회활동 등 인생 전반기의 다양한 경험을 거쳐 인생 후반기에 이른 생애단계에 위치한다. 따라서 현재의 삶 속에는 지나온 시간과 경험이 축적되어 있으며, 그 경험은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토대가 된다.

둘째, 유유자작적 차원이다.
필자는 이를 유유자작(悠悠自適)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유유자작은 여유롭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조나 자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와 정신, 경제생활과 일상을 가능한 범위에서 스스로 관리하고, 필요한 도움은 적절히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과 주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조와 자기 관리는 유유자작을 실천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셋째, 성찰적 차원이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축적된 경험을 삶의 지혜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무엇을 이루었는지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내려놓으며, 무엇을 남길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 관계와 참여적 차원이다.
가족과 친구,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여건에 맞게 지역사회와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고은층의 삶은 사회와 단절되는 삶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과 범위를 새롭게 조정하면서 사회와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삶이다.

다섯째, 나눔과 환원적 차원이다.
평생 축적한 지식과 경험, 지혜와 재능뿐 아니라 물질적·정신적 자원을 가족과 다음 세대, 지역사회와 나누는 것이다. 한 개인이 오랜 세월을 통해 축적한 경험과 지혜는 개인적 자산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러한 다섯 차원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애적 흐름을 이룬다.

"생애의 축적 → 유유자작 → 성찰 → 관계와 참여 → 나눔과 환원"

이는 단순히 나이를 먹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재구성하면서 사회와 다시 연결되고, 자신이 받은 것을 다음 세대와 공동체에 돌려주는 능동적인 인생 후반기의 과정이다.

기존의 노인·고령층과 무엇이 다른가?

‘노인’이나 ‘고령층’은 주로 연령을 기준으로 하는 인구학적 개념이다. ‘은퇴자’는 직업생활에서 물러난 사회경제적 지위를 중심으로 한 개념이다. ‘실버세대’와 ‘시니어’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표현이지만 일정 연령 이상의 사람을 지칭하는 성격이 여전히 강하다.

이에 비해 고은층은 연령과 은퇴라는 현실적 조건을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인생 후반기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중요하게 본다.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성찰하며, 사람과 사회에 참여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환원하는 삶을 강조한다.

이를 간결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고은층은 ‘노인’이나 ‘고령층’을 단순히 다른 이름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아니다. 인생 후반기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전환하자는 제안이다."

고은층론의 핵심: 나이가 아니라 삶의 품격

필자가 생각하는 고은층론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고은층은 나이의 이름이 아니라 삶의 품격이다."

고령화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과정이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어갈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과 노력뿐 아니라 가족, 공동체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은층론은 노년을 쇠퇴와 상실의 시기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평생 축적한 경험을 지혜로 전환하고, 불필요한 것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다음 세대와 공동체에 나누면서 유유자작하는 삶의 시기로 바라본다.

따라서 고은층에게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에 머물지 않는다.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질문이 된다.

축적에서 유유자작으로, 유유자작에서 환원으로
고은층의 전체 생애구조를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축적(Accumulation) → 유유자작(Self-Directed Living) → 환원(Contribution)"

인생 전반기는 배우고 일하면서 지식과 경험, 관계와 자산을 축적하는 시간이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에는 무엇인가를 계속 더 쌓는 것만큼이나 이미 쌓아 온 것을 어떻게 정리하고 활용하며 의미 있게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그 중심에 유유자작이 있다.

유유자작은 단순히 한가롭고 여유롭게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평생 축적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여건과 가치에 따라 남은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자기 관리와 자조, 선택과 절제, 성찰과 학습, 관계의 재구성 등이 함께 포함된다.

그리고 삶이 더욱 성숙해질수록 자신의 경험과 지혜, 시간과 재능을 가족과 다음 세대, 지역사회와 나누고 환원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축적하는 삶에서 유유자작하는 삶으로, 유유자작하는 삶에서 나누고 환원하는 삶으로."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고은층의 중요한 생애적 전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은층은 사회적 지원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필요한 사회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사회와 나눌 수 있는 능동적인 삶의 주체이자 사회적 자산이다.

고은층의 조작적 정의와 앞으로의 과제

고은층을 하나의 학술적 연구대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개념적 정의와 더불어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작적 정의가 필요하다.

현 단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고은층은 원칙적으로 고령기 또는 은퇴 이후의 생애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유자작의 태도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관리하며, 축적된 생애경험을 성찰과 지혜로 전환한다. 또한 가족과 사회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자신의 여건과 역량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사회참여와 나눔·환원을 실천하는 생애집단이다."

여기에서 연령은 중요한 기준이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초기의 고은층 개념은 주로 60대 이상을 중심으로 고령층과 은퇴층을 포괄하는 의미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개념이 발전하면서 특정 연령만으로 고은층 여부를 판단하기보다는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는 태도와 삶의 방식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으로는 고은층의 연령적 범위와 생애단계를 보다 명확히 설정하고, 유유자작, 자기 관리, 성찰, 관계, 사회참여, 나눔과 환원 등의 구성요소와 상호관계를 더욱 정교하게 이론화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러한 요소를 경험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지표와 척도를 개발하고, 개인적 조건뿐 아니라 가족·지역사회·제도적 환경과의 관계까지 연구한다면 고은층론은 초고령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생애론적·실천적 연구 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은층론이 지향하는 삶

필자가 제안하는 고은층론은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바꾸는 데서 출발한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에서
‘어떻게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고 완성할 것인가?’로 시작한다.


인생 전반기가 성장과 성취, 축적의 시간이었다면 인생 후반기는 성찰과 유유자작, 그리고 환원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많이 가지는 삶에서 필요한 것을 남기는 삶으로, 경쟁하는 삶에서 함께하는 삶으로, 자신을 위한 축적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나눔으로 삶의 중심을 옮겨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은층의 삶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일상을 주체적으로 관리하는 삶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사색하며,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사회와 연결되어 살아가는 삶이다. 그리고 평생 얻은 경험과 지혜를 나누며 자신의 생애 마지막까지 품격 있게 준비하는 삶이다.

맺음말
고은층은 삶의 후반부를 새롭게 부르는 이름이다

고은층(高恩層)은 고령자와 은퇴자를 단순히 ‘늙어가는 사람들’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 현재의 삶을 주체적으로 관리한다. 또한 남은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이 받은 것을 가족과 이웃, 다음 세대와 사회에 나누는 성숙한 생애계층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필자는 고은층을 이렇게 생각한다.

"고은층은 늙음의 이름이 아니라 성숙의 이름이고,
은퇴의 이름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축적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성찰하고 유유자작하며 나누는 삶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나의 질문이 놓여 있다.

나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답을 자신의 삶 속에서 찾아가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필자가 말하는 고은층(高恩層)이다.

이것이 필자가 여러 해에 걸쳐 사색하고 글을 쓰면서 발전시켜 온 고은층론(高恩層論)의 기본 정신이다.

참고자료
"필자의 고은층(高恩層)에 대한 주요 논의와 개념의 발전"

이 글은 필자가 고령기와 은퇴 이후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사색하면서 여러 글과 저술을 통해 제시해 온 ‘고은층’에 관한 논의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고은층은 처음부터 완성된 이론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고령층과 은퇴층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인생 후반기의 삶의 방식과 가치에 관한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1. 고은층 개념의 초기 제안: 2024년
필자는 2024년 9월 8일 「고은층 인구/고령자와 은퇴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글에서 ‘고은층 인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당시 고은층은 주로 고령층과 은퇴층을 포괄하면서 60대 이상의 인생 후반기 계층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핵심 문제의식은 고령자나 은퇴자를 경제활동에서 물러난 사람이나 사회적 부양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은퇴 이후에도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설계하는 주체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2. 인생 후반기 삶의 주체로서 고은층
이후 필자는 여러 글을 통해 인생 후반기를 단순한 휴식이나 여생의 시기가 아니라 새로운 생애단계로 바라보는 관점을 발전시켜 왔다.

고은층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이다. 건강과 일상의 자기 관리,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 지속적인 학습과 사색, 여행과 여가, 사회참여, 봉사와 나눔, 그리고 삶의 마무리에 대한 준비까지 인생 후반기의 다양한 과제를 고은층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해 왔다.

3. 『이성근 교수의 인생 사색 7권』과 개념의 확장: 2025년
2025년 출간된 『이성근 교수의 인생 사색 7권』에서는 고은층이 인생 후반기를 바라보는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는 고은층을 단순히 일정 연령 이상의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기보다 인생 후반기를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생애계층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초기의 인구학적 의미는 점차 생애적·철학적·실천적 의미로 확장되었다.

4. 유유자작하는 삶의 주체로서 고은층: 2026년
2026년에 이르러 필자의 고은층 논의는 인생 후반기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실천하는 능동적인 삶의 주체라는 방향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유자작(悠悠自作, Self-Directed Living)은 고은층의 삶을 설명하는 핵심적 통합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유유자작은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 시간과 일상, 관계와 자원을 스스로 살피고 조절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 후반기를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만들어 가는 삶을 뜻한다.

이에 따라 자조와 자기 관리는 유유자작의 하위 실천요소로 포괄되며, 성찰·관계·참여·나눔과 환원은 유유자작을 통해 삶과 사회로 확장되는 고은층의 주요 실천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5. ‘고은층(高恩層)’으로 명칭의 통일: 2026년
고은층 개념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일부 글에서는 한자 표기가 달리 사용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개념의 의미와 향후 이론적 체계화를 고려하여 필자는 명칭을 ‘고은층(高恩層)’으로 통일하였다.

여기에서 ‘은(恩)’은 삶을 살아오면서 받은 은혜와 인연을 기억하고,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다시 가족과 이웃, 다음 세대와 사회에 나누고 환원한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따라서 고은층(高恩層)은 고령이나 은퇴라는 연령적·직업적 특성을 넘어,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 자신이 살아온 삶을 성찰하고 받은 것을 다시 나누는 삶의 가치를 상징한다.

6. 고은층론(高恩層論)으로의 발전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필자의 고은층 개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발전해 왔다.

고령층·은퇴층을 포괄하는 인구 개념
인생 후반기의 새로운 생애계층
→ 자기 삶을 설계하는 능동적 주체
→ 유유자작하는 삶
→ 경험과 지혜의 나눔과 환원
→ 고은층론(高恩層論)의 체계화

이를 보다 압축하면 고은층의 생애적 원리는 다음의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축적(Accumulation) → 유유자작(Self-Directed Living) → 환원(Contribution)

이 세 단계에서 축적은 평생 살아오면서 형성한 경험·지식·관계·자원의 기반이다. 유유자작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성찰·선택·관리·재구성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환원은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가족·다음 세대·공동체와 나누어 사회적 가치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고은층론은 새로운 명칭 하나를 제안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초고령사회에서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한 개인이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어떻게 자신의 성숙과 가족·다음 세대·사회의 가치로 이어갈 것인지를 탐구하는 생애론적·실천적 관점으로 발전할 수 있다.

참고자료 작성에 관한 주석
이 글에서 말하는 ‘고은층(高恩層)’은 필자가 2024년 이후 여러 글과 저술에서 사용하면서 그 의미를 확장하고 체계화해 온 개념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현 단계에서는 필자가 고은층을 독자적인 생애계층 개념으로 제안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다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

향후에는 관련 선행연구와 기존의 노년학·생애과정론·성공적 노화·활동적 노화 등의 개념과 비교하여 고은층론의 이론적 위치와 차별성을 보다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유유자작을 비롯한 주요 구성개념의 조작적 정의와 측정지표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사진 1·2는 제주 한림 금능의 근석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고추이며, 사진 3은 필자의 가족 모임 사진을 AI로 수정·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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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의 삶은 따라 다르다
생각·마음·사람·장소·시간이 빚는 인생의 빛깔"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같은 하루를 보내도 삶은 다르다


어제 칠구 파크클럽 회원들과 경북 예천 한천 파크골프장에서 하루를 보냈다. 함께 공을 치고, 걷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운동을 했지만 문득 돌아보니 저마다 느끼는 즐거움과 생각은 조금씩 달랐을 것이다. 우리 모두 고은층 세대이지만 살아온 길이 다르고, 바라보는 눈이 다르며, 마음에 담아 가는 것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날의 여운 속에서 문득 ‘따라 다르다’는 말이 떠올랐다. 생각에 따라 기분이 다르고, 마음에 따라 표정이 다르다. 사람에 따라 품이 달라지고, 장소에 따라 삶의 결이 달라지며, 시간에 따라 인생의 빛깔도 달라진다. 고은층 세대로 살아가는 필자 역시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한다. 또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하루가 즐거워지기도 하고 힘들어지기도 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생활의 리듬과 삶의 느낌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고은층의 삶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이 다섯 가지가 ‘결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건강과 경제적 여건, 가족관계와 사회적 환경 등 수많은 조건이 삶에 영향을 미친다. 다만 생각·마음·사람·장소·시간은 우리가 비교적 스스로 살피고 선택하며 가꾸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고은층의 삶의 질과 빛깔을 좌우하는 중요한 다섯 축이라 할 수 있다.

생각과 마음:
삶을 안에서 바꾸는 힘


먼저 생각이다. 같은 일을 겪어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진다. 작은 불편을 불행으로 여기면 하루가 무거워진다. 그러나 작은 감사거리를 발견하면 같은 하루도 한결 따뜻해진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분과 말과 행동의 출발점이 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 유배 시절 자신의 거처를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붙였다. 「사의재기」에서 그는 생각은 담박하게 하고〔思宜澹〕, 용모는 장엄하게 하며, 말은 신중하게 하고, 행동은 무겁게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경계했다. 특히 그 첫머리에 ‘생각’을 둔 것은 의미가 깊다. 생각이 흐트러지면 말과 행동도 흐트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고은층에게 필요한 것도 생각을 많이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경험도 많고 기억도 많다. 그 많은 경험을 후회와 원망의 재료로 삼을 수도 있고, 이해와 감사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도 있다. 지나간 일을 되씹으며 마음을 어지럽히기보다 불필요한 생각은 덜어 내고 중요한 것은 깊이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생각보다 한층 깊은 곳에는 마음이 있다. 생각이 판단의 방향이라면 마음은 삶을 대하는 정서적 바탕이라 할 수 있다. ‘청심사달(淸心事達)’, 곧 마음이 맑으면 일이 통한다는 말처럼 마음이 편안하면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말도 너그러워진다. 반대로 마음에 불평과 미움이 쌓이면 자신도 모르게 표정과 말투에 드러난다. 젊은 날에는 능력과 성취가 사람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았다면, 고은층에 이르면 표정과 말씨, 마음 씀씀이가 그 사람의 세월을 보여 준다. 그래서 고은층의 얼굴은 살아온 세월의 기록이면서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창이기도 하다. 좋은 생각을 품고 맑은 마음을 가꾸는 것이 곧 자신의 얼굴과 품격을 가꾸는 일이다.

사람과 장소:
누구와 어디에서 사느냐?


사람도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숫자보다 관계의 질이 더 중요해진다. 누구를 가까이하고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말과 생각, 생활습관까지 달라질 수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로운 세 종류의 벗, 곧 ‘익자삼우(益者三友)’를 말했다.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견문이 넓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유익하다는 가르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우정을 유익을 위한 관계, 즐거움을 위한 관계, 서로의 좋은 인품과 덕을 바탕으로 한 관계로 나누고, 좋은 사람끼리 서로의 선(善)을 바라는 우정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았다.

고은층의 벗은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만나고 돌아서면 남의 흉만 남는 관계보다 서로 웃고 배우고 격려하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관계가 좋다. 아플 때 안부를 묻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하며,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조용히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좋은 벗이다. 어제 한천 파크골프장에서 함께 걸었던 부부 회원들의 모습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운동도 즐겁지만 함께 걷고 웃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쩌면 더 큰 즐거움일 수 있다.

사람과 함께 중요한 것이 장소다. 옛날부터 맹모삼천지교가 전해지는 것도 사람이 살아가고 배우는 데 환경이 중요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장소가 사람의 삶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장소를 찾고 가꾸며 그곳에서 좋은 생활방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산책길이 그런 곳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도서관이나 텃밭, 공원이나 운동장이 그런 곳일 수 있다. 집 안의 작은 책상 하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돈하게 한다면 의미 있는 장소다. 예부터 풍수지리가 삶터의 방향과 자연환경을 중시했던 것도 결국 사람이 어디에 터를 잡고 어떻게 자연과 어울려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오랜 관심의 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은층에게는 이제 ‘어디에 사느냐’에 못지않게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하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좋은 사람을 만나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장소를 가까이할 필요가 있다. 좋은 장소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좋은 생활을 반복하게 만드는 삶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시간:
인생의 빛깔을 익히는 힘


마지막은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지만 체감하는 시간은 같지 않다. 즐거운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시계가 재는 시간은 같아도 사람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삶의 시간’은 서로 다르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의 길이가 중요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이루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은층에 이르면 시간의 양보다 밀도가 더 중요해진다. 하루를 얼마나 바쁘게 살았느냐보다 무엇을 하며 누구와 어떻게 보냈느냐가 더 중요하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만 세월은 사람 안에 쌓인다. 잘 보낸 시간은 추억이 되고, 배운 시간은 지혜가 되며, 함께한 시간은 관계가 된다. 어려웠던 시간도 잘 삭이면 인생을 이해하는 깊이가 된다. 그래서 고은층에게 시간은 단순히 줄어드는 자원이 아니라 남은 삶을 익혀 가는 자원이기도 하다.

어제의 파크골프도 지나고 보면 단순히 몇 시간 운동한 일이 아니다. 함께 걷고 웃었던 시간, 서로의 부부가 나란히 운동했던 모습을 보며, 그리고 한천 주변의 풍경과 이날 나누었던 이야기가 하나의 기억으로 남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의 빛깔을 만든다. 그러므로 고은층에게 중요한 질문은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만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고 묻는 편이 더 의미 있다. 남은 세월의 길이는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그 시간의 내용과 빛깔은 상당 부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맺음글
무엇을 따라 살 것인가?

돌아보면 인생은 참으로 ‘따라 다르다’. 생각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고, 마음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품이 달라지고, 머무는 장소에 따라 삶의 결이 달라진다. 그리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빛깔이 달라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뜻이 있다. ‘따라 다르다’고 해서 무엇인가에 끌려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무엇을 따라 살 것인가는 상당 부분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좋은 생각을 선택하고, 맑은 마음을 가꾸며,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좋다. 나를 살리는 장소를 찾으며,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쓰면 더욱 좋다.. 이것이 고은층이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나이가 들수록 환경을 탓하기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살펴야 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되 바꿀 수 있는 생각과 마음, 관계와 생활공간, 시간의 쓰임은 조금씩 더 좋은 쪽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결국 고은층의 품격은 살아온 세월만으로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마음을 품으며, 누구와 어울리느냐가 중요하다. 어디에 머물며,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남은 인생의 결이고 빛깔이 된다.

생각은 맑게,
마음은 따뜻하게,
사람은 좋게,
장소는 편안하게,
시간은 의미 있게.


고은층의 삶은 ‘따라 다르다’. 그리고 그 ‘따라’를 잘 선택하는 것이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지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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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다르다

이성근


생각 따라 기분이 다르고
마음 따라 표정이 다르다
사람 따라 품이 다르고
장소 따라 삶의 결이 다르다
시간 따라 인생의 빛깔이 다르다

[사진ㆍ글]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이 디카시를 쓰게 된 동기와 해설]

어제'칠구 파크클럽' 부부 회원들과 예천 한천 파크골프장에서 하루를 함께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각자 생각과 느낌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어서  ‘따라 다르다’는 말을 떠올렸다.
고은층의 삶도 그렇다. 생각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고, 마음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또한  만나는 사람과 머무는 장소, 흐르는 시간에 따라 삶의 결도 빛깔도 달라진다. 결국 인생의 빛깔은 주어진 환경만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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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요지경

이성근


못난 이는 잘난 체하고
잘못한 이는 남을 탓하고
방귀 뀐 이는 시치미 떼고
죄지은 이는 되레 큰소리친다
해는 그대로인데 세상만 거꾸로 돈다

[글ㆍ사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오늘 오후 귀갓길에 자동차를 운전하다 차창 밖으로 석조의 구름 사이에 걸린 해를 바라보았다. 문득 바로 보아도, 거꾸로 돌려 보아도 해는 여전히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오히려 무엇이 바로이고 무엇이 거꾸로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정치·외교·경제를 비롯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잘못한 사람이 남을 탓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그 순간 ‘요지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변하지 않는 해와 달리 상식과 책임의 자리가 뒤바뀐 듯한 세태를 바라보며, 오늘의 세상을 짧게 풍자해 보고자 이 디카시를 쓰게 되었다.

[디카시 해설]

이 디카시는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해와 상식이 뒤집힌 듯한 세상을 대비하여 오늘의 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잘난 체하기’, ‘남 탓하기’, ‘시치미 떼기’, ‘큰소리치기’로 이어지는 네 장면은 책임을 회피하고 잘못을 감추려는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의 “해는 그대로인데 세상만 거꾸로 돈다”는 자연의 질서는 변하지 않지만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오히려 뒤집혀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결국 이 디카시는 복잡한 세상일수록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상식이고 책임인지를 다시 돌아보자는 작은 풍자와 성찰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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