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공기도 은혜 마시는 물도 은혜 먹는 밥 한 그릇도 은혜 걷는 두 다리도 은혜 살아 있음이 모두 은혜로세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고은층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가족과 이웃, 사회와 자연으로부터 크고 작은 은혜를 받아온 세대다. 이제는 자신이 누려 온 삶을 당연하게 여기기보다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한 끼의 밥과 건강한 몸까지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볼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의 서예 전시를 둘러싼 한 해프닝에서 ‘밥 한 그릇도 나라의 은혜’라는 글귀를 접하면서 생각이 이어졌다. 다만 글씨를 쓴 사람과 그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별개의 문제로 둔다. 필자는 ‘밥 한 그릇조차 누군가와 세상의 도움 없이는 내 앞에 올 수 없다’는 말의 뜻을 오늘의 삶에 돌아보게 했다. 그래서 고은층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세상 모두가 은혜로세’라는 짧은 시에 담아 보았다.
어제 칠구 파크클럽 회원들과 경북 예천 한천 파크골프장에서 하루를 보냈다. 함께 공을 치고, 걷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운동을 했지만 문득 돌아보니 저마다 느끼는 즐거움과 생각은 조금씩 달랐을 것이다. 우리 모두 고은층 세대이지만 살아온 길이 다르고, 바라보는 눈이 다르며, 마음에 담아 가는 것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날의 여운 속에서 문득 ‘따라 다르다’는 말이 떠올랐다. 생각에 따라 기분이 다르고, 마음에 따라 표정이 다르다. 사람에 따라 품이 달라지고, 장소에 따라 삶의 결이 달라지며, 시간에 따라 인생의 빛깔도 달라진다. 고은층 세대로 살아가는 필자 역시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한다. 또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하루가 즐거워지기도 하고 힘들어지기도 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생활의 리듬과 삶의 느낌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고은층의 삶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이 다섯 가지가 ‘결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건강과 경제적 여건, 가족관계와 사회적 환경 등 수많은 조건이 삶에 영향을 미친다. 다만 생각·마음·사람·장소·시간은 우리가 비교적 스스로 살피고 선택하며 가꾸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고은층의 삶의 질과 빛깔을 좌우하는 중요한 다섯 축이라 할 수 있다.
생각과 마음: 삶을 안에서 바꾸는 힘
먼저 생각이다. 같은 일을 겪어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진다. 작은 불편을 불행으로 여기면 하루가 무거워진다. 그러나 작은 감사거리를 발견하면 같은 하루도 한결 따뜻해진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분과 말과 행동의 출발점이 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 유배 시절 자신의 거처를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붙였다. 「사의재기」에서 그는 생각은 담박하게 하고〔思宜澹〕, 용모는 장엄하게 하며, 말은 신중하게 하고, 행동은 무겁게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경계했다. 특히 그 첫머리에 ‘생각’을 둔 것은 의미가 깊다. 생각이 흐트러지면 말과 행동도 흐트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고은층에게 필요한 것도 생각을 많이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경험도 많고 기억도 많다. 그 많은 경험을 후회와 원망의 재료로 삼을 수도 있고, 이해와 감사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도 있다. 지나간 일을 되씹으며 마음을 어지럽히기보다 불필요한 생각은 덜어 내고 중요한 것은 깊이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생각보다 한층 깊은 곳에는 마음이 있다. 생각이 판단의 방향이라면 마음은 삶을 대하는 정서적 바탕이라 할 수 있다. ‘청심사달(淸心事達)’, 곧 마음이 맑으면 일이 통한다는 말처럼 마음이 편안하면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말도 너그러워진다. 반대로 마음에 불평과 미움이 쌓이면 자신도 모르게 표정과 말투에 드러난다. 젊은 날에는 능력과 성취가 사람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았다면, 고은층에 이르면 표정과 말씨, 마음 씀씀이가 그 사람의 세월을 보여 준다. 그래서 고은층의 얼굴은 살아온 세월의 기록이면서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창이기도 하다. 좋은 생각을 품고 맑은 마음을 가꾸는 것이 곧 자신의 얼굴과 품격을 가꾸는 일이다.
사람과 장소: 누구와 어디에서 사느냐?
사람도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숫자보다 관계의 질이 더 중요해진다. 누구를 가까이하고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말과 생각, 생활습관까지 달라질 수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로운 세 종류의 벗, 곧 ‘익자삼우(益者三友)’를 말했다.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견문이 넓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유익하다는 가르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우정을 유익을 위한 관계, 즐거움을 위한 관계, 서로의 좋은 인품과 덕을 바탕으로 한 관계로 나누고, 좋은 사람끼리 서로의 선(善)을 바라는 우정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았다.
고은층의 벗은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만나고 돌아서면 남의 흉만 남는 관계보다 서로 웃고 배우고 격려하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관계가 좋다. 아플 때 안부를 묻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하며,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조용히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좋은 벗이다. 어제 한천 파크골프장에서 함께 걸었던 부부 회원들의 모습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운동도 즐겁지만 함께 걷고 웃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쩌면 더 큰 즐거움일 수 있다.
사람과 함께 중요한 것이 장소다. 옛날부터 맹모삼천지교가 전해지는 것도 사람이 살아가고 배우는 데 환경이 중요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장소가 사람의 삶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장소를 찾고 가꾸며 그곳에서 좋은 생활방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산책길이 그런 곳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도서관이나 텃밭, 공원이나 운동장이 그런 곳일 수 있다. 집 안의 작은 책상 하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돈하게 한다면 의미 있는 장소다. 예부터 풍수지리가 삶터의 방향과 자연환경을 중시했던 것도 결국 사람이 어디에 터를 잡고 어떻게 자연과 어울려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오랜 관심의 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은층에게는 이제 ‘어디에 사느냐’에 못지않게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하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좋은 사람을 만나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장소를 가까이할 필요가 있다. 좋은 장소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좋은 생활을 반복하게 만드는 삶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시간: 인생의 빛깔을 익히는 힘
마지막은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지만 체감하는 시간은 같지 않다. 즐거운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시계가 재는 시간은 같아도 사람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삶의 시간’은 서로 다르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의 길이가 중요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이루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은층에 이르면 시간의 양보다 밀도가 더 중요해진다. 하루를 얼마나 바쁘게 살았느냐보다 무엇을 하며 누구와 어떻게 보냈느냐가 더 중요하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만 세월은 사람 안에 쌓인다. 잘 보낸 시간은 추억이 되고, 배운 시간은 지혜가 되며, 함께한 시간은 관계가 된다. 어려웠던 시간도 잘 삭이면 인생을 이해하는 깊이가 된다. 그래서 고은층에게 시간은 단순히 줄어드는 자원이 아니라 남은 삶을 익혀 가는 자원이기도 하다.
어제의 파크골프도 지나고 보면 단순히 몇 시간 운동한 일이 아니다. 함께 걷고 웃었던 시간, 서로의 부부가 나란히 운동했던 모습을 보며, 그리고 한천 주변의 풍경과 이날 나누었던 이야기가 하나의 기억으로 남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의 빛깔을 만든다. 그러므로 고은층에게 중요한 질문은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만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고 묻는 편이 더 의미 있다. 남은 세월의 길이는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그 시간의 내용과 빛깔은 상당 부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맺음글 무엇을 따라 살 것인가?
돌아보면 인생은 참으로 ‘따라 다르다’. 생각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고, 마음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품이 달라지고, 머무는 장소에 따라 삶의 결이 달라진다. 그리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빛깔이 달라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뜻이 있다. ‘따라 다르다’고 해서 무엇인가에 끌려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무엇을 따라 살 것인가는 상당 부분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좋은 생각을 선택하고, 맑은 마음을 가꾸며,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좋다. 나를 살리는 장소를 찾으며,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쓰면 더욱 좋다.. 이것이 고은층이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나이가 들수록 환경을 탓하기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살펴야 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되 바꿀 수 있는 생각과 마음, 관계와 생활공간, 시간의 쓰임은 조금씩 더 좋은 쪽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결국 고은층의 품격은 살아온 세월만으로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마음을 품으며, 누구와 어울리느냐가 중요하다. 어디에 머물며,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남은 인생의 결이고 빛깔이 된다.
생각은 맑게, 마음은 따뜻하게, 사람은 좋게, 장소는 편안하게, 시간은 의미 있게.
고은층의 삶은 ‘따라 다르다’. 그리고 그 ‘따라’를 잘 선택하는 것이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지혜가 된다.
생각 따라 기분이 다르고 마음 따라 표정이 다르다 사람 따라 품이 다르고 장소 따라 삶의 결이 다르다 시간 따라 인생의 빛깔이 다르다
[사진ㆍ글]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이 디카시를 쓰게 된 동기와 해설]
어제'칠구 파크클럽' 부부 회원들과 예천 한천 파크골프장에서 하루를 함께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각자 생각과 느낌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어서 ‘따라 다르다’는 말을 떠올렸다. 고은층의 삶도 그렇다. 생각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고, 마음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또한 만나는 사람과 머무는 장소, 흐르는 시간에 따라 삶의 결도 빛깔도 달라진다. 결국 인생의 빛깔은 주어진 환경만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을 담았다.
못난 이는 잘난 체하고 잘못한 이는 남을 탓하고 방귀 뀐 이는 시치미 떼고 죄지은 이는 되레 큰소리친다 해는 그대로인데 세상만 거꾸로 돈다
[글ㆍ사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오늘 오후 귀갓길에 자동차를 운전하다 차창 밖으로 석조의 구름 사이에 걸린 해를 바라보았다. 문득 바로 보아도, 거꾸로 돌려 보아도 해는 여전히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오히려 무엇이 바로이고 무엇이 거꾸로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정치·외교·경제를 비롯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잘못한 사람이 남을 탓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그 순간 ‘요지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변하지 않는 해와 달리 상식과 책임의 자리가 뒤바뀐 듯한 세태를 바라보며, 오늘의 세상을 짧게 풍자해 보고자 이 디카시를 쓰게 되었다.
[디카시 해설]
이 디카시는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해와 상식이 뒤집힌 듯한 세상을 대비하여 오늘의 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잘난 체하기’, ‘남 탓하기’, ‘시치미 떼기’, ‘큰소리치기’로 이어지는 네 장면은 책임을 회피하고 잘못을 감추려는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의 “해는 그대로인데 세상만 거꾸로 돈다”는 자연의 질서는 변하지 않지만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오히려 뒤집혀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결국 이 디카시는 복잡한 세상일수록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상식이고 책임인지를 다시 돌아보자는 작은 풍자와 성찰을 담고 있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인공지능(AI)과 디지털 변혁은 우리가 일하고 배우며 소통하는 방식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기후위기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 방식을 다시 묻고 있으며, 고령화와 저출생, 인구절벽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한다. 세계적으로는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 기조가 확산되고 경제와 군사안보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정치와 사회의 모습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공동체의 미래보다 눈앞의 이해관계가 앞서고, 서로 다른 생각을 조정하고 타협하기보다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모습도 적지 않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빨라졌는데, 정작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는 오히려 더 분명하지 않은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었다.
고은층(高恩層)의 세대로 살아가는 필자에게 이러한 변화는 남의 일이 아니다. 살아온 날이 많아질수록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지만, 동시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삶에는 방향이 있어야 하고, 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붙들어야 할 중심은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 끝에 문득 자연을 바라보게 되었다. 물은 흐르고, 새싹은 돋으며, 씨앗은 때를 기다린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제 길을 간다. 그 속에는 인간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질서와 지혜가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짧은 디카시를 적어 보았다.
세상만사가 자연처럼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사랑은 파릇한 새싹처럼 배움은 즐거운 놀이처럼 가족은 소중한 보물처럼 사회는 반듯한 저울처럼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
이 여섯 줄에는 남은 인생에서 필자가 지키고 싶은 여섯 가지 삶의 마음을 담았다.
흐르는 물과 파릇한 새싹: 순응하되 사랑은 새롭게
첫째,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야 한다.
물은 높은 곳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 장애물을 만나면 부딪치기보다 돌아가고, 작은 물줄기는 서로 만나 강을 이룬다. 유연하게 흐르지만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고은층에게도 이러한 물의 지혜가 필요하다. 오랜 세월 쌓아 온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지만 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낯설어도 조금씩 익히고, 젊은 세대의 생각이 다르더라도 먼저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변화에 순응한다는 것은 자신의 원칙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새롭게 찾아가는 일이다.
둘째, 사랑은 파릇한 새싹처럼 끊임없이 돋아나야 한다.
새싹은 작고 연약하지만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사랑도 거창한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따뜻한 안부 한마디, 상대를 먼저 헤아리는 작은 배려, 힘든 사람에게 건네는 손길에서 사랑의 싹은 돋아난다.
나이가 들수록 만나는 사람의 숫자는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관계의 깊이까지 줄어들 필요는 없다. 부부와 가족, 친구와 이웃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기보다 따뜻한 격려를 건네는 것, 그것이 고은층이 새롭게 피워낼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물처럼 유연하게 흐르면서도 새싹처럼 새로운 관계와 사랑을 피워내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첫 번째 지혜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놀이와 소중한 보물: 배움과 가족이 삶을 젊게 한다
셋째, 배움은 즐거운 놀이처럼 이어져야 한다.
젊은 시절에는 공부에도 졸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을 살아보니 배움에는 졸업이 없다. 특히 AI와 디지털 변혁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대에는 나이를 이유로 배움을 멈출 수 없다. 오히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고은층이 세상과 연결되고 삶의 활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필자도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여전히 배운다. 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동작을 익히고,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배우기도 한다.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하나 새롭게 알게 되는 데 즐거움을 느끼려고 한다.
배움이 의무가 되면 고단하지만 놀이가 되면 즐겁다. 남보다 잘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넓히기 위한 배움이라면 나이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고은층의 배움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삶의 호기심을 놓지 않는 즐거운 놀이가 되어야 한다.
넷째, 가족은 소중한 보물처럼 아끼고 살펴야 한다.
세상을 오래 살아보니 결국 가장 가까이 남아 있는 사람은 가족 즉, 부부이다. 젊은 시절에는 일과 사회생활에 쫓겨 가족의 소중함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가장 가까운 공동체임을 깨닫게 된다.
보물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가치가 유지되지 않는다.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고마움을 표현하고, 서로의 생활방식과 선택을 존중하며, 지나친 기대와 간섭은 줄일 필요가 있다.
또한 고은층의 가족사랑은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더 해주는 데만 있지 않다. 자신의 건강과 생활을 가능한 한 스스로 돌보고, 가족에게 불필요한 걱정과 부담을 줄이는 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다. 서로 의지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존중할 때 가족이라는 보물은 더욱 오래 빛날 수 있다.
반듯한 저울과 오늘의 씨앗: 공동체를 지키고 미래를 심다
다섯째, 사회는 반듯한 저울처럼 공정해야 한다.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까닭 없이 기울면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세대와 지역, 계층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기본적인 원칙과 공정성이 지켜질 때 공동체에 대한 신뢰도 유지된다.
오늘의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며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원칙을 내세우고 상대에게는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한 태도가 반복된다면 사회적 신뢰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민주사회의 정치는 서로 다른 생각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고은층 역시 공정의 문제에서 예외일 수 없다. 살아온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몫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기회와 미래도 함께 헤아려야 한다. 반듯한 저울은 남에게만 들이대는 잣대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놓아야 할 기준이다.
여섯째,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 세워진다.
작은 씨앗 속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가 들어 있다. 그러나 씨앗을 심지 않고 열매를 기다릴 수는 없다. 오늘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결국 내일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기후위기와 인구감소, AI 시대의 변화처럼 거대한 문제도 생각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에너지를 조금 아껴 쓰고, 새로운 기술을 하나 배우며, 젊은 세대에게 경험을 나누고, 이웃과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는 작은 행동들이 모여 미래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고은층에게도 아직 심을 씨앗은 많다. 오랜 경험과 지혜를 다음 세대와 나누는 일, 필요한 곳에 재능을 보태는 일, 좋은 글 한 편을 남기는 일, 가족과 이웃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일도 모두 작은 씨앗이다. 인생의 후반기는 지금까지 이룬 것을 거두기만 하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다시 무엇인가를 심고 세우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맺음글 자연처럼 살아간다는 것, 자연에는 말이 없지만 가르침이 있다.
물은 흐르되 방향을 잃지 말라고 하고, 새싹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놀이는 삶의 즐거움과 호기심을 놓지 말라고 하며, 보물은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을 잘 살피라고 일깨운다. 저울은 바른 기준과 균형을 지키라고 하고, 씨앗은 내일을 원한다면 오늘부터 심으라고 가르쳐 준다.
필자가 디카시 「세상만사가 자연처럼」에 담고 싶었던 것도 결국 이러한 삶의 이치다.
고은층의 삶은 지나온 세월을 회고하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생의 후반기에도 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새롭게 사랑하며, 배워야 한다. 또한 관계를 돌보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무엇인가를 남겨야 한다.
필자는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삶의 원칙과 방식은 오히려 단순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물처럼 유연하게, 새싹처럼 따뜻하게, 놀이처럼 즐겁게,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며, 저울처럼 반듯하게, 씨앗처럼 희망을 심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이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고은층에게 필요한 삶의 방향이 아닐까?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자연의 이치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흔들리는 세상을 바라볼수록 다시 자연을 바라본다. 먼 곳에서 삶의 해답을 찾기보다 늘 우리 곁에 있는 물과 새싹과 씨앗에서 남은 인생의 길을 배워도 좋겠다.
세상만사가 자연처럼.
우리의 남은 인생 또한 자연처럼 순리를 따르되 멈추지 않고, 사랑과 균형을 품되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계속 심어가는 여정이기를 소망한다.
"말짱 도루묵을 지나, 진짜 도루묵을 맛보다: 고은층의 지난 삶과 오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도루묵 한 접시에서 인생을 생각하다
오늘 필자 가족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의 '순참깨방앗간'에 참기름을 짜러 갔다. 깨를 맡겨 놓고 기다리는 동안 인근 '함지박 한정식'에서 손위 동서 가족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정갈한 한식 밥상에 여러 반찬이 올랐는데, 그 가운데 유난히 '도루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점을 맛보니 담백하면서도 구수했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우리가 흔히 쓰는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 어째서 헛수고와 허무를 뜻하는 말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필자의 지난 삶으로 이어졌다. 돌아보면 오랫동안 애썼지만 이루지 못한 일도 있었고, 애써 이루어 놓았으나 남의 손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일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기도 했다. 젊은 날에는 그런 순간을 만나면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된 듯 허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긴 인생길을 지나 고은층에 이른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과연 지나온 삶의 그 모든 일이 정말 말짱 도루묵이었을까? 그리고 아직 살아 보지도 않은 앞으로의 삶까지 미리 말짱 도루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식탁 위의 진짜 도루묵을 맛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제는 지나간 삶의 ‘말짱 도루묵’을 아쉬워하기보다 오늘의 ‘진짜 도루묵’을 제대로 맛보고, 아직 맛보지 않은 ‘내일의 도루묵’을 기대할 때가 아닐까?
도루묵이라는 이름에 담긴 돌아옴과 허사
도루묵은 이름부터 흥미로운 물고기다. 널리 알려진 설화에 따르면 어느 임금이 피란길에 허기진 상태에서 ‘묵’이라는 생선을 먹고 그 맛에 감탄하여 ‘은어(銀魚)’라는 귀한 이름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궁궐로 돌아와 다시 먹어 보니 예전의 그 맛이 아니어서 “도로 묵이라 하라”고 했고, 그 말이 변해 ‘도루묵’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흔히 선조와 임진왜란에 얽힌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시대의 왕이나 조선 인조와 관련된 전승도 있어, 특정 임금의 실제 사건이라기보다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유래담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국어학적으로는 옛 문헌에 나타나는 ‘돌목’이나 ‘도루목’ 같은 명칭이 변하여 오늘의 ‘도루묵’이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따라서 ‘도로 묵’이라는 이야기는 확정된 어원이라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그 이름에 의미를 덧붙인 민간어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오히려 그 점이 더 흥미롭다. 사람들은 한 마리 생선의 이름 속에 ‘돌아감’의 이야기를 담았다. 귀한 이름을 얻었다가 다시 옛 이름으로 돌아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얻었다가 잃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인간사의 모습을 한 생선의 이름에 입혀 놓은 셈이다.
여기에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표현도 생겨났다. 오랫동안 공들인 일이 허사가 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기대와 결과의 차이, 성취와 상실, 전진과 회귀가 이 짧은 말속에 겹쳐 있다. 그래서 필자에게 '도루묵'은 이제 단순한 물고기만이 아니다. 먹는 도루묵이 있고, 돌아가는 도루묵이 있으며, 헛수고를 뜻하는 말짱 도루묵이 있고, 다시 새롭게 맛보게 되는 진짜 도루묵도 있다. 바로 그 여러 얼굴 속에서 긴 인생여정을 걸어온 고은층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온 삶의 ‘말짱 도루묵’을 다시 바라보다
고은층은 짧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공부하고 일하며 사람을 만나고 가족을 돌보았으며,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해 왔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으며,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았다. 열심히 추진했던 일이 중도에 무산되기도 했고, 정성을 다해 맺었던 관계가 뜻하지 않게 헤어지기도 했다. 꼭 이루고 싶었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며, 한때 자신의 전부처럼 여겼던 일도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했다. 그럴 때면 ‘그동안 애쓴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허탈함이 밀려왔고,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바라보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결과는 사라졌어도 과정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경험은 남고, 실패 속에서 판단력이 자라며, 인간관계의 아픔을 겪으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법도 배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오래 살아오면서 기다림과 절제, 때로는 포기와 겸손도 익히게 된다.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되돌아왔다고 해서 걸어온 길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흘린 땀이 남고, 보았던 풍경이 남으며, 무엇보다 그 길을 걸은 자신이 출발할 때와는 달라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는 생각만큼 완전한 ‘말짱 도루묵’이 많지 않은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실패였던 일이 훗날 소중한 경험이 되고, 상실이 새로운 길을 열어 주며, 좌절이 사람을 더 깊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도루묵 설화에서 피란길에 그렇게 맛있던 생선이 궁궐에서는 예전의 맛이 아니었던 것처럼 삶의 맛도 처지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젊은 날 그토록 중요했던 것이 고은층에 이르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고, 젊어서는 별것 아니라고 지나쳤던 일이 오히려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큰 성취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건강하게 아침을 맞는 일이 귀하고, 많은 사람을 아는 것보다 마음을 나눌 몇 사람이 소중하다. 어쩌면 고은층은 삶의 양을 계속 늘려 가는 시기라기보다 이미 지나온 삶의 의미와 지금 가진 삶의 맛을 더욱 깊게 음미하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진짜 도루묵’과 아직 맛보지 않은 내일
이날 점심 밥상에서 필자가 만난 것은 말속의 도루묵이 아니라 실제로 맛볼 수 있는 ‘진짜 도루묵’이었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에는 허무와 헛수고의 뜻이 담겨 있지만, 입안에서 맛본 도루묵은 담백하고 구수했다. 그 순간 우리는 혹시 이름과 관념에 사로잡혀 눈앞의 실제 삶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었다”, “이제 할 만큼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하겠는가”라고 생각하다 보면 고은층의 남은 삶까지 스스로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삶은 지금 여기에 있다. 오늘 걸을 수 있으면 걷고, 읽을 수 있으면 읽으며, 쓸 수 있으면 쓰면 된다. 만날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평생 쌓아 온 경험을 나눌 곳이 있다면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 된다. 필자 역시 글을 써 지인들과 생각을 나누고, 오랜 교수 생활과 사회활동을 통해 쌓은 경험을 필요한 곳에 조금이나마 돌려주고자 하며, 실제로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까운 사람들과 운동하고 자연을 걸으며 가족과 밥을 먹는다. 겉으로 보면 대단하지 않은 일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필자에게는 이런 일들이 바로 ‘진짜 도루묵의 맛’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한 끼, 이웃과 나누는 차 한 잔, 한 편의 글을 쓰는 시간, 몸을 위해 하는 작은 운동이 깊은 삶의 맛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돌아옴’의 의미도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말짱 도루묵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지만, 인생에서 돌아오는 일이 언제나 실패인 것은 아니다. 오랜 바깥 길을 걷다가 정년 이후 집과 가족에게 돌아오게 되고, 바쁜 사회생활을 마치고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 세상의 평가와 경쟁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도 소중한 돌아옴이다. 젊은 날의 돌아옴은 실패처럼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고은층의 돌아옴은 오히려 회복일 수 있다. 더 가지려는 삶에서 가진 것을 감사하는 삶으로, 경쟁하는 삶에서 함께하는 삶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에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왔다고 해서 모두 말짱 도루묵은 아니다. 잘 돌아오는 것도 삶의 지혜다.
그러나 고은층의 삶이 과거를 되돌아보고 오늘에 감사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아직 쓰지 않은 글이 있고, 만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걷지 않은 길과 배우지 않은 것이 있다. 나누지 못한 경험도 남아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고은층에게 ‘기대’라는 말을 특별히 소중하게 생각한다. 기대가 있다는 것은 아직 미래가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 기대는 젊은 날의 기대와는 달라야 한다. 더 높이 올라가기보다 더 깊어지기를 기대하고, 더 많이 가지기보다 더 잘 나누기를 기대하며, 단순히 더 오래 사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더 잘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미래는 아직 말짱 도루묵이 아니다. 아직 살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맛보지 않은 도루묵의 맛을 미리 단정할 수 없듯, 살아 보지 않은 내일의 맛 또한 미리 알 수 없다. 어쩌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맛있을 수도 있다.
맺음글 돌아옴을 또 하나의 출발로
경주 안강의 함지박 한정식에서 맛본 도루묵 한 접시가 생각보다 멀리 필자의 마음을 데리고 갔다. 도루묵은 한 마리 생선이면서 여러 의미를 품고 있었다. 되돌아감의 도루묵이 있고, 헛수고를 뜻하는 ‘말짱 도루묵’이 있으며, 밥상에서 직접 맛보는 ‘진짜 도루묵’도 있다. 필자의 삶에도 한때 말짱 도루묵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바라보니 결코 헛되지 않았던 일도 많았다. 성공과 실패, 만남과 헤어짐, 성취와 좌절은 모두 오늘의 나를 만들어 온 삶의 재료였다.
그러므로 고은층의 삶은 지나간 ‘말짱 도루묵’을 아쉬워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나간 실패에서는 지혜를 건져 내고, 지나간 성공에서는 감사를 남기면 된다. 그리고 오늘은 오늘의 진짜 도루묵을 제대로 맛보아야 한다. 가족과 함께 먹는 한 끼, 이웃과 나누는 한마디, 걸을 수 있는 한 걸음, 읽고 쓸 수 있는 하루,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작은 도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기대하면 된다.
인생은 때때로 돌고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왔다고 해서 모두 말짱 도루묵은 아니다. 돌아온 자리에서 지난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오늘의 맛을 음미하며, 앞으로 만나게 될 새로운 맛을 기대할 수 있다면 그 돌아옴은 실패가 아니라 또 하나의 출발이다.
필자는 이제 지나간 삶의 말짱 도루묵보다 오늘과 앞으로 맛볼 진짜 도루묵을 더 생각하고 싶다.
"말짱 도루묵은 지나온 인생에서 얻은 지혜의 맛이고, 오늘의 진짜 도루묵은 감사의 맛이며, 아직 맛보지 않은 내일의 도루묵은 기대의 맛이다."
지나간 삶에는 지혜를, 오늘의 삶에는 감사를,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는 기대를 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맛을 함께 음미하며 걸어가는 것이 긴 인생여정을 지나온 고은층의 멋이자 지혜이며, 아직 남아 있는 삶을 향한 또 하나의 희망이라고 생각해 본다.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사랑은 파릇한 새싹처럼 배움은 즐거운 놀이처럼 가족은 소중한 보물처럼 사회는 반듯한 저울처럼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
[디카시 해설] 물의 흐름에는 순리가 있고, 새싹에는 생명이 있으며, 씨앗에는 내일이 숨어 있다. 이 디카시는 세상과 사랑, 배움과 가족, 사회와 미래가 자연의 이치처럼 조화롭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특히 ‘내일은 오늘 심은 씨앗처럼’이라는 마지막 행은 내일의 모습이 결국 오늘의 생각과 실천에서 자라난다는 뜻을 전한다.
말짱 도루묵은 지난날의 쓴맛 진짜 도루묵은 오늘의 감사 맛 아직 이름 없는 도루묵은 내일을 기다리는 맛 세월에 삭으면 쓴맛 단맛도 감칠맛 고은층의 삶은 그렇게 농익은 맛
[이 디카시를 쓰게 된 동기와 해설] 경주 안강의 '함지박 한정식' 집에서 도루묵을 맛보다 문득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눈앞의 ‘진짜 도루묵’과 애쓴 일이 허사가 된다는 ‘말짱 도루묵’의 의미가 겹치면서, 지나온 삶과 오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디카시는 지난날의 실패와 아픔을 ‘쓴맛’으로, 오늘의 삶을 ‘감사의 맛’으로, 내일을 ‘기다리는 맛’으로 표현했다. 삶의 쓴맛과 단맛도 세월 속에서 삭고 어우러지면 마침내 깊은 '감칠맛'이 된다.
그렇게 지나온 경험을 지혜로 품고, 오늘에 감사하며, 내일을 기대하는 삶이야말로 긴 인생여정을 살아온 고은층의 ‘농익은 맛’이 아닐까 생각했다.
필자는 요즘 집 가까운 헬스장에서 동호인 두 사람과 함께 운동하고 있다. 세 사람이 오후 3시에 만나 몸을 움직이는데, 운동 수준은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은 고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중견이며, 필자는 아직 초보에 가깝다. 우리는 세 단계에 걸쳐 30∼35가지의 스트레칭 동작을 함께하고, 여기에 팔굽혀펴기를 추가해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에게 팔굽혀펴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가슴을 충분히 낮추고 몸을 곧게 유지하는 정식 자세로는 한 번을 온전히 해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할 수 있는 만큼 몸을 낮추고, 조금씩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횟수를 늘려 가고자 했다. 비록 처음에는 불완전하더라도 단계적으로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된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수의 생각은 달랐다. 불완전한 자세로 여러 번 반복하기보다 처음부터 정식 자세로 한 번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필자는 그의 말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올바른 자세를 익히지 않은 채 횟수만 늘리면 잘못된 동작이 습관으로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은 질문 하나가 생겼다. 처음부터 완전한 하나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불완전하더라도 가능한 단계에서 시작해 조금씩 완성도를 높여 가야 하는가? 팔굽혀펴기 하나를 두고 나눈 생각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이는 운동을 넘어 사람이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기도 했다.
완전한 하나와 불완전한 시작
고수의 방식은 원칙을 중시한다. 처음부터 정확한 자세와 방법을 익히고, 정해진 기준에 맞게 운동해야 한다는 접근이다. 목표가 분명하고 기준이 엄격하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운동의 효과를 높이고 잘못된 자세에서 비롯될 수 있는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반면 필자가 택한 방식은 점진적 또는 점증적 접근이다. 둘 다 비슷한 접근이다. 점진적 접근은 쉬운 단계에서 시작해 차츰 어려운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며, 점증적 접근은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횟수와 강도를 조금씩 높여 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벽을 짚고 밀거나 높은 지지대에 손을 대고 시작할 수 있다. 이후 몸의 힘과 균형이 나아지면 무릎을 대고 하고, 마침내 정식 자세의 팔굽혀펴기에 도전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장점은 시작에 대한 부담을 줄인다는 데 있다. 처음부터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시도하기도 전에 주저하거나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동작부터 시작하면 작은 변화가 보인다. 어제보다 몸을 조금 더 낮추고, 지난주보다 한 번 더 해내면서 자신감과 만족감도 생긴다. 작은 성취가 다음 도전을 부르고, 반복되는 도전이 지속할 힘을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원칙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정확한 자세는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기준이다. 다만 그 기준에 이르는 길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원칙이 목적지라면 점진은 그곳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원칙 없는 점진은 방향을 잃기 쉽고, 점진 없는 원칙은 출발을 어렵게 한다. 따라서 완전한 하나를 지향하되, 오늘의 불완전한 시작도 허용할 필요가 있다.
운전 연습에서 배운 두 가지 가르침
팔굽혀펴기를 배우면서 오래전 미국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1980년대 초반, 필자는 자동차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두 유학생의 도움을 받아 운전을 연습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지도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한 사람은 처음부터 정확한 운전 방법을 가르쳤다. 운전 자세부터 출발과 정지, 차선 유지와 방향 전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절차와 원칙을 하나씩 꼼꼼하게 짚어 주었다. 작은 실수도 바로잡으며 정확하고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을 중시했다.
다른 한 사람은 먼저 운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데 중점을 두었다. 처음부터 모든 동작을 완벽하게 익히도록 요구하기보다 자동차와 도로 환경에 차츰 익숙해지도록 했다. 어느 정도 속도를 내어 직접 달려 보게 함으로써 자동차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조작 경험을 쌓아 자신감을 얻은 뒤 필요한 운전 요령을 차례로 가르쳐 주었다.
당시 필자는 두 사람의 접근방식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 사람은 원칙과 정확성을 앞세웠고, 다른 사람은 경험과 자신감을 먼저 키워 주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어느 한쪽만 옳았던 것은 아니다. 두려움을 줄여야 운전을 시작할 수 있고, 정확한 방법을 익혀야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 첫 번째 사람에게서는 원칙을 배웠고, 두 번째 사람에게서는 시작할 용기를 배웠다.
팔굽혀펴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올바른 동작을 아는 것과 그 동작에 도전할 자신감을 갖는 것은 함께 필요하다. 원칙은 배움의 기준을 세우고, 점진은 배움을 지속하게 한다.
계획이론에서 찾은 점진의 지혜
필자는 대학에서 평생 계획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계획이론에도 오늘의 팔굽혀펴기 논쟁과 닮은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하나는 종합적 합리주의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부분점진적 접근이다.
종합적 합리주의적 접근은 먼저 전체적인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가능한 대안과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려 한다. 전체적 합리성과 최적의 대안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정확한 자세로 팔굽혀펴기를 해야 한다는 고수의 생각과 통한다.
부분점진적 접근은 인간의 정보와 능력, 시간과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모든 조건을 한꺼번에 파악해 최적의 결정을 내리기보다 현재 가능한 범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그 결과를 살피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한 번에 완전한 해답을 찾기보다 작은 개선을 거듭해 더 나은 상태에 가까이 가는 방식이다.
필자는 살아오는 동안 대체로 이러한 점진적 개선의 방식을 선호해 왔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기보다 우선 가능한 일부터 시작했다. 실천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그때그때 고치고 보완해 왔다. 그것은 원칙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현실의 조건 속에서 원칙에 가까이 가는 방법이었다.
계획에서도 큰 비전과 올바른 방향은 필요하다. 그러나 비전만으로 현실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오늘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 결과를 살펴 다음 계획에 반영해야 한다. 팔굽혀펴기의 한 동작에도 목표 설정, 단계적 실행, 점검과 개선이라는 계획의 원리가 담겨 있는 셈이다.
고은층의 삶, 조금씩 더 나아가기
고은층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지혜와 경험을 쌓았지만, 신체적으로는 젊은 시절과 다른 한계와 제약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체력과 유연성, 균형감각과 회복력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수준을 그대로 따라가거나 처음부터 무리한 목표를 세우기보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정확히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고은층의 팔굽혀펴기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자세를 기본 원칙으로 삼되, 자신의 능력에 맞는 단계에서 시작해야 한다. 횟수를 늘리는 데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자세와 호흡, 몸의 반응도 함께 살펴야 한다. 통증이나 부담이 느껴질 때는 멈추고 운동 강도를 조절해야 한다. 고은층의 운동은 남과 겨루는 기록 경쟁이 아니라 어제의 자신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과정이어야 한다.
점진 또는 점증의 원리는 운동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기를 배우는 일, 글을 쓰는 일,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일, 여행을 시작하는 일, 사회에 봉사하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처음부터 거창하고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마음이 앞서거나 쉽게 지칠 수 있다. 그러나 하루에 한 가지를 배우고, 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며, 작은 역할 하나를 기꺼이 맡는다면 삶의 범위는 조금씩 넓어진다.
고은층에게 작은 실천은 결코 작은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안정감을 준다. 조금씩 나아지는 경험은 자신감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얻는 성취는 일상의 만족감을 높인다. 중요한 것은 빠르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일이다.
맺음글 원칙은 방향이고, 점진은 길이다
정식 자세의 팔굽혀펴기 한 번을 제대로 하는 것은 여전히 필자의 목표다. 그러나 지금 당장 완전한 한 번을 해내지 못한다고 해서 도전을 멈출 생각은 없다. 오늘 할 수 있는 동작에서 시작해 몸을 조금 더 낮추고, 자세를 조금 더 바로잡으며, 어제보다 한 번 더 시도할 것이다.
고수의 원칙론과 필자의 점진론은 서로 대립하는 방식이 아니다. 원칙론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점진론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출발할 것인지를 알려 준다. 원칙은 방향이고, 점진은 길이다.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시작은 지속으로, 지속은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은층의 삶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지나온 세월이 길다고 해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받아들이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완전한 한 번을 목표로 삼되, 오늘의 불완전한 한 번에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작은 성공을 쌓아 더 나은 자신에게 다가가야 한다. 필자는 그것이 고은층에게 필요한 점진 또는 점증의 지혜라고 믿는다.
팔굽혀펴기 한 번은 작아 보인다. 그러나 그 한 번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에는 고은층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완전함은 기다렸다가 시작하는 조건이 아니라, 시작하고 지속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목표이다.
사진 1은 비 온 뒤의 금호강 풍경, 사진 2는 김미예 한지작가의 목단꽃 한지그림, 사진 3은 제드피트니스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필자의 모습이다. 2026년 8월 어느 날.
지난 8월 중하순,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 숲해설사로 일하는 서귀삼연의 현 선생을 만났다. 한동안 한라산에 많은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현 선생은 “한라산 여기저기에서 물이 터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음 들으면 폭우로 둑이나 제방이 무너졌다는 뜻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제주에서 ‘물이 터졌다’는 말은 전혀 다른 자연의 장면을 가리킨다. 땅속으로 스며들었던 물이 바위틈과 지층 사이에서 솟아나 마른 계곡과 숲길에 새로운 물길을 내는 현상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한라산에 물이 터졌다.”
이 짧은 말에는 화산섬 제주의 지질과 물순환뿐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는 제주 사람들의 감각이 담겨 있다. 물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땅의 품에 스며들어 저장되고 이동하다가, 더는 머물 수 없는 곳에서 밖으로 솟아난다. 제주에서 물이 터진다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생성이며, 무너짐이 아니라 생명의 귀환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물을 받아들이고 오래 품었다가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내는 제주의 자연 저장고는 오늘의 제주사회에도 하나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물을 품는 제주가 사람과 차이까지 품는 포용의 섬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비를 품는 화산섬: 제주에는 보이지 않는 물길이 있다
제주는 불이 만든 섬이지만, 그 불의 땅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물이다.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에 내린 비는 다공질의 현무암과 화산쇄설층 사이로 스며든다. 일부는 하천을 따라 흐르거나 바다로 향하지만, 많은 물은 암석과 지층의 틈을 따라 땅속으로 이동한다. 제주에서 평소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 많은 것도 이러한 화산지질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땅속으로 들어간 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낮은 곳으로 이동하다가 물이 잘 통하지 않는 지층이나 암석층을 만나면 그 위에 머문다. 비가 계속 내려 지하에 머무는 물의 양이 많아지면 수위가 높아지고, 마침내 암석과 지층의 틈을 통해 지표로 솟아난다. 제주 사람들이 말하는 ‘물이 터지는’ 순간이다. 학술적으로는 지하수가 자연스럽게 지표로 흘러나오는 용출 또는 용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주의 땅속에 실제로 거대한 빈 물탱크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주 땅 전체를 하나의 자연 저장고에 비유할 수는 있다. 현무암의 작은 구멍과 갈라진 틈, 서로 다른 용암층의 경계가 물을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이동시키는 통로가 된다. 한라산은 거대한 산인 동시에 하늘에서 내린 비를 품고 걸러 내며 다시 내어놓는 자연의 물그릇이다.
물이 터진 자리에는 새로운 흐름이 생긴다. 마른 계곡에 물소리가 돌아오고, 숲의 습도가 높아지며, 이끼와 풀과 나무가 생기를 얻는다. 작은 물길은 아래로 흘러 더 큰 흐름과 만나고, 일부는 다시 땅속으로 스며들며,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비와 땅, 숲과 계곡, 지하수와 바다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하나의 생명순환 속에서 물을 받아들이고 머금으며 다음 자리로 이어 준다.
제주에서는 물이 터지고, 육지에서는 둑이 터진다: 같은 물을 대하는 서로 다른 땅의 방식
육지에서 “둑이 터졌다”는 말은 대개 위험과 재난을 떠올리게 한다.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면 수문을 열어 수위를 조절하고, 폭우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둑이나 제방이 무너져 물이 한꺼번에 쏟아질 수 있다. 강은 지표 위에 뚜렷한 물길을 만들고, 사람은 제방과 보, 댐을 세워 그 흐름을 조절해 왔다.
이에 비해 제주에서는 많은 비가 내리면 상당한 물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지표의 큰 강보다는 땅속의 보이지 않는 물길이 발달해 있다. 육지의 저수지가 지표 위에 물을 가두는 인공 저장고라면, 제주의 화산지층은 빗물을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천천히 이동시키는 자연 저장고라 할 수 있다.
육지에서 둑이 터진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경계가 무너지는 일이다. 그러나 제주에서 물이 터진다는 것은 자연이 품고 있던 것을 밖으로 내어놓는 일이다. 하나는 수용 한계를 넘어선 물이 불러오는 파괴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충분히 채워진 물이 새로운 길을 여는 생성의 언어이다. 같은 ‘터짐’이지만 그 의미는 이처럼 다르다.
물론 제주라고 해서 물로 인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중호우가 내리면 짧은 시간에 계곡과 건천으로 많은 물이 몰리고, 급경사 하천을 따라 빠르게 바다로 흘러가면서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 자연의 저장 능력에도 한계가 있으며, 개발로 땅의 투수성이 낮아지면 물의 흐름과 저장 능력도 달라진다. 따라서 제주 고유의 물순환을 지키려면 자연이 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숲과 토양, 곶자왈과 습지, 지하수 함양지역을 함께 보전해야 한다.
자연을 관리한다는 것은 자연을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이 스스로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순환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지켜 주는 일도 중요한 관리이다.
낙동강 둑에서 배운 물: 유어의 어린 시절과 정책 현장에서의 경험
필자의 고향은 낙동강변에 자리한 경남 창녕군 유어면이다. 유어는 한자로 놀 유(遊), 고기 잡을 어(漁)를 쓴다. 실제 지명은 옛 유장면과 어촌면이 합쳐지면서 두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글자의 뜻을 풀어 보면 물가에서 놀고 고기를 잡으며 살아온 지역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낙동강의 강변 둑은 필자에게 거대한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둑을 오르내리고 넓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뛰어놀았다. 당시에는 둑이 왜 필요한지, 강물이 사람의 삶과 농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알지 못했다. 다만 강이 불어나면 어른들의 표정이 달라졌고, 장마철이면 둑과 강의 수위를 살피는 일이 마을의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혔다.
세월이 흘러 필자는 이명박 정부 시절 4대 강 사업 정책자문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청와대 정책자문회의에서는 낙동강을 대표하여 5분간 토론한 경험도 있다. 어린 시절 놀이의 공간이었던 낙동강을 국가정책의 대상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강의 흐름을 어떻게 관리하고, 홍수에 어떻게 대비하며, 물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는 개인의 경험을 넘어 국가와 지역사회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제주에서 ‘물이 터지는’ 모습을 생각하면 물을 관리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강을 준설하고 제방과 보를 세우는 것도 물관리의 한 방식이다. 그러나 땅이 물을 받아들이고 숲이 물을 머금으며 습지와 지하수층이 물을 조절하도록 돕는 것도 중요한 물관리이다. 때로는 자연이 스스로 저장하고 순환하며 회복하는 능력을 지켜 주는 일이 더 근본적인 관리가 될 수 있다.
낙동강은 필자에게 흐르는 물의 힘과 둑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한라산은 스며드는 물의 깊이와 땅의 포용력을 일깨워 주었다. 하나는 지표 위로 장대하게 흐르고, 다른 하나는 땅속으로 조용히 흐른다. 물의 모습은 다르지만, 두 물길 모두 인간에게 자연의 힘과 한계를 함께 가르쳐 준다.
수용에서 관용을 거쳐 포용으로: 자연 저장고가 가르쳐 주는 사회의 그릇
제주의 자연 저장고는 먼저 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땅속에 물을 머금고, 서로 다른 지층과 통로를 거치게 하며, 필요한 때에는 다시 숲과 계곡과 바다로 흘려보낸다. 이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수용과 관용, 포용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수용은 나와 다른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관용은 서로 다르더라도 그 차이를 배척하지 않고 함께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태도이다. 포용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다른 사람을 단순히 받아들이거나 참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여 함께 참여하고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용이 문을 여는 일이라면 관용은 그 안에 머물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고, 포용은 같은 자리에서 함께 길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포용은 모든 차이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무원칙을 뜻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기본 질서와 책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차이와 존엄을 인정하고, 누구도 공동체의 흐름에서 배제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제주의 땅은 내리는 비를 가려 받지 않는다. 큰 빗방울과 작은 빗방울, 한라산에 내린 비와 오름에 내린 비를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받아들인 물은 서로 다른 지층과 바위틈을 지나면서 하나의 지하수 흐름으로 이어진다. 각기 다른 곳에서 시작한 물이 땅속에서 만나 숲과 마을과 바다를 살리는 공동의 물이 되는 것이다.
제주의 자연 저장고가 넓고 깊을수록 더 많은 물을 품을 수 있듯, 사회의 포용력도 그 공동체가 지닌 그릇의 깊이와 넓이에 달려 있다. 사회의 그릇이 얕으면 작은 차이와 갈등에도 쉽게 넘치고 갈라진다. 반면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조정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가 갖추어져 있으면 갈등은 파괴의 물결이 아니라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
물을 품어 온 제주, 사람을 품는 제주: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의 포용사회로
과거의 제주는 척박한 자연환경과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속에서 살아야 했다. 거센 바람과 많은 비, 돌이 많은 땅과 물이 귀한 생활환경은 혼자만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제주 사람들은 수눌음과 공동노동을 통해 힘을 나누고, 마을의 물과 목장과 바다를 함께 이용하며 삶을 이어 왔다. 자연의 제약은 사람들을 갈라놓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공동체의 지혜를 낳았다.
과거 제주의 포용은 생존을 위한 상호의존에서 출발하였다. 가진 것이 넉넉해서 나눈 것이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함께 나누었고, 혼자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서로 힘을 보태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의 기억은 오늘의 제주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다.
현재의 제주는 과거와는 다른 포용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제주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과 새로 이주한 사람, 개발을 중시하는 사람과 환경보전을 앞세우는 사람, 관광객과 지역주민, 청년세대와 고은층, 농어촌과 도시지역의 요구가 서로 다르다. 제주가 국제적인 관광지이자 다양한 사람이 오가는 섬이 되면서 이해관계와 가치의 차이도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차이를 없애려 하거나 어느 한쪽의 목소리만을 앞세우면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필요한 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수용, 차이를 견디는 관용, 그리고 서로를 공동체의 주체로 참여시키는 포용이다. 누구에게나 문을 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이 제주사회의 의사결정과 공동의 삶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제주는 자연의 수용력과 사회의 포용력을 함께 키워 가야 한다. 자연의 수용력을 넘어서는 개발은 제주의 물과 숲과 생태계를 훼손하고, 사회의 포용력을 넘어서는 갈등은 공동체의 신뢰와 연대를 무너뜨린다.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개발과 이용을 조절하는 일과, 사회가 다양한 사람과 가치를 품을 수 있도록 제도와 문화를 넓히는 일은 서로 분리된 과제가 아니다.
제주의 미래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것을 얼마나 조화롭게 품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자연을 품고, 사람을 품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차이, 미래세대의 권리까지 함께 품는 제주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물을 품어 온 화산섬 제주가 포용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맺음글 품은 것은 언젠가 생명의 길로 흘러야 한다
“한라산 여기저기에서 물이 터졌습니다.”
현 선생의 한마디는 제주의 자연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였다. 비는 내리는 순간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길을 흐르고, 바위와 지층 사이에 머물다가 다시 숲과 계곡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물이 터진다는 것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오랜 스며듦과 채워짐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낙동강변에서 자란 필자에게 물은 둑 사이를 흐르는 강이었고, 때로는 막고 다스려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제주에서 만난 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기다리고, 스스로 길을 찾아 다시 솟아나는 존재였다. 낙동강이 물의 크기와 힘을 보여주었다면, 한라산은 물의 깊이와 포용을 보여주었다.
제주의 자연은 물을 억지로 붙잡지 않는다. 먼저 받아들이고, 깊이 품으며, 때가 되면 생명의 길로 돌려보낸다. 숲과 땅과 바다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물을 받아 다음 자리로 이어 준다. 그 흐름 속에는 어느 하나 홀로 존재하지 않는 자연의 연결 질서가 담겨 있다.
사회도 이와 같아야 한다. 사람과 차이를 받아들이되 그저 머물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함께 흐르게 해야 한다. 포용은 모든 것을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제 몫의 길을 찾아 공동체를 살리도록 이어 주는 일이다.
한라산에 물이 터졌다. 그것은 비가 많이 왔다는 소식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자연의 순환이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으며, 충분히 품은 생명은 언젠가 밖으로 흘러나와 또 다른 생명을 살린다는 소식이다.
물을 품어 온 제주가 이제는 사람을 품는 제주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의 공동체적 지혜를 이어받고, 현재의 차이와 갈등을 포용하며, 미래세대가 살아갈 자연과 사회의 자리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 제주의 물은 오늘도 땅속을 흐르다가 때가 되면 세상 밖으로 솟아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깊이 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품은 것은 누구를 살리는 길로 흘러갈 것인가?
사진 1·2는 한라산과 백록담을 찾은 필자, 사진 3은 서귀포 정방폭포, 사진 4는 안덕계곡을 찾은 서귀삼연, 사진 5는 한라산 수악길을 걷는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