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은 닮아도 삶은 다르다: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에서 생각하는 고은층의 삶"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닮은 말에서 다른 삶을 생각하다
어제 오후 낙동클럽 5인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우연히 ‘가라지’라는 말이 화제에 올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라는 세 단어가 잇달아 떠올랐다. 끝소리는 비슷하지만 그 말에서 연상되는 모습과 의미는 서로 전혀 다르다.
가라지는 흔히 알곡과 대비되는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미꾸라지는 잡힐 듯하다가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반면 도라지는 땅속에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그 뿌리까지 사람에게 쓰임을 주는 식물이다. 말의 끝은 비슷한데 그 속에 담긴 모습은 이처럼 다르다.
그러다 사람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모두 비슷하게 나이를 먹고 같은 세월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을 마음에 담고 살아왔는지, 책임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무엇을 남기는지에 따라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다.
특히 고은층의 삶에서는 무엇을 더 얻느냐보다 어떤 사람으로 남느냐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그래서 나는 우연한 대화에서 떠오른 가라지·미꾸라지·도라지라는 세 단어를 통해 인생 후반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라지,
알곡처럼 보이기보다 열매로 드러나는 삶
가라지를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나오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떠오른다. 마태복음 13장에는 한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사람들이 잠든 사이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지를 묻자 주인은 밀까지 함께 뽑힐 것을 염려하여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라지와 알곡을 구별한다. 성경의 가라지는 어린 시기에는 밀과 매우 비슷하여 쉽게 구별하기 어렵지만 자라면서 차이가 드러나는 식물로 이해된다.
나는 이 비유에서 한 가지 삶의 교훈을 생각한다. 처음에는 비슷해 보여도 결국 무엇을 맺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겉으로 알곡처럼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 알곡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직함이나 재산, 학력과 명예가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모두 말해 주지는 않는다. 삶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겉모습이나 이름표가 아니라 그가 살아오며 맺은 열매다.
젊은 시절에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어떤 자리에 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인정받는지가 삶의 큰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 후반에 들어서면 그런 외적인 표지는 하나둘 힘을 잃는다. 직함도 내려놓고 자리도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흔적이다.
많이 아는 사람보다 지혜롭게 말하는 사람이 귀하다.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보다 사람을 따뜻하게 대했던 사람이 오래 기억된다. 성공한 사람보다 성공 속에서도 겸손했던 사람이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길었는가보다 그 세월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가 중요하다.
성경의 가라지 비유를 다른 사람을 가려내고 판단하는 잣대로 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으면 좋겠다. ‘나는 알곡처럼 보이려고 살아왔는가, 아니면 실제로 알찬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는가?’라고 스스로 물어보는 것이다.
고은층에게 필요한 것은 알곡인 척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속을 알곡처럼 채워 가는 일이다. 살아온 경험을 자랑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성찰과 지혜로 바꾸며, 자신이 받은 것들을 감사와 나눔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결국 보이는 모습보다 속에 무엇을 담고 있으며, 어떤 열매를 남기느냐가 인생 후반의 품격을 결정한다.
미꾸라지,
책임을 피하지 않는 삶
미꾸라지는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어느새 빠져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상황에 따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사람을 미꾸라지에 빗대기도 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 그 자체보다 그다음의 태도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큰 차이를 만든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경험과 권위를 앞세우기 쉽다. “내가 살아 봐서 안다”거나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을 오래 살았다는 것은 책임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더 무게를 가져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고은층의 품격은 잘못하지 않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했을 때 인정하고, 사과할 때 사과하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피하지 않는 데 있다. 미꾸라지처럼 책임 앞에서 빠져나가는 노년보다 자신의 몫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고은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변명은 줄이고 책임은 더 크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후배 세대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고은의 모습이다. 또한 세월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도라지,
뿌리를 내리고 쓰임으로 남는 삶
마지막에는 도라지가 떠오른다. 도라지는 화려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식물은 아니다. 땅속에 오래 뿌리를 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 뿌리마저 사람에게 쓰임이 된다. 나는 여기에서 고은층의 바람직한 모습을 본다.
인생 후반은 더 높이 올라가는 시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려온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고, 그것을 어떻게 쓰임으로 바꿀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기이다. 누구에게나 평생 살아오며 쌓은 경험이 있다. 직업에서 얻은 지식도 있고 사람을 만나며 얻은 지혜도 있다. 성공뿐 아니라 실패와 아픔도 모두 삶의 뿌리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기 안에만 묻어 두지 않는 일이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삶의 기쁨과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배우고, 걷고, 사람을 만나고, 웃으며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고 꽃피는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내린 뿌리에서 이전과는 다른 깊이의 꽃이 필 수도 있다.
그리고 쓰임으로 남는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경험과 지혜를 가족과 후배, 이웃과 사회에 나누는 일이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따뜻한 말 한마디도 쓰임이고, 후배의 손을 잡아 주는 일도 쓰임이다. 가족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도 쓰임이다.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기는 일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한 하나의 쓰임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고은층의 삶을 ‘유유자작(悠悠自作)’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다. 남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가꾼다. 그러나 그 삶을 자신만을 위해 닫아 두지 않는 것이다. 제 뿌리를 지키고, 제 꽃을 피우며, 마지막에는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남기는 삶이다.
도라지는 깊이 뿌리내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며, 자신이 가진 것을 세상에 내어준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고은층이 지향할 만한 삶이 아닐까 싶다.
맺음글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젊은 시절에는 ‘무엇이 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한다. 좋은 직업을 얻고, 높은 자리에 오르며,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에 이르면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무엇이 되었는가보다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가라지는 알곡과 비슷해 보여도 마지막에는 열매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미꾸라지는 잡힐 듯하다가도 빠져나가지만, 사람은 자신의 책임까지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도라지는 보이지 않는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뿌리까지 쓰임으로 남긴다.
그렇다면 우리 고은층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야 할까?
가라지처럼 알곡인 듯 보이는 데 마음을 쓰기보다 실제로 알찬 열매를 맺어야 한다. 미꾸라지처럼 책임 앞에서 요리조리 피하기보다 자신의 몫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도라지처럼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끝내 누군가에게 쓰임으로 남는 삶이면 좋겠다.
끝소리는 닮아도 삶은 다르다.
가라지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미꾸라지처럼 피하지 말며,
도라지처럼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자.
그리고 마지막에는 누군가에게 작은 쓰임이라도 남기자. 고은층의 품격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보다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냐에 있다. 또한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아온 세월을 어떤 지혜와 쓰임으로 남기느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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