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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학무실의 만남은 끝나지 않았다: 영남대 이실연과 함께한 청풍호 가을소풍"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가을소풍에서 다시 만난 근학무실의 인연


2026년 10월 5일, 영남대학교 이론과 실천연구회(약칭 이실연) 회원들과 함께 청풍명월의 고장 충북 제천과 단양으로 가을소풍을 다녀왔다. 이날 소풍에는 12명이 함께했다. 아침 8시 대구 월드컵경기장 주차장을 출발하여 저녁 9시 30분에 되돌아왔으니, 무려 13시간 30분에 걸친 하루의 긴 여정이었다.

이번 소풍은 오전에는 충주호 유람선을 타고 청풍호의 산수경관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오후에는 청풍호반케이블카를 이용하여 비봉산 정상에서 호수와 산자락을 내려다보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단양 영춘의 구인사를 찾는 일정이었다. 물길과 하늘길, 산길을 따라 자연과 문화를 만나는 여행이었다. 특히 같은 청풍호를 물 위에서 올려다보고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바라보는 위치와 관점에 따라 풍경이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소풍에서 필자에게 더욱 의미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자연경관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근학무실의 정신으로 맺어진 이실연 회원들과 다시 만나 함께 걷고, 보고, 이야기하며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학위논문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으로 시작한 만남이 정년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으니, 이는 필자의 교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다.

필자는 이러한 만남을 근학무실(勤學務實)의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에 부지런하고 맡은 일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서로를 기억하고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시작된 배움의 관계가 인생을 함께 나누는 관계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가을소풍은 더욱 뜻깊었다.

청풍호에서 되살아난 세 가지 인연

필자에게 이번 제천과 단양의 가을소풍은 세 가지 인연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하나는 사람의 인연이고, 다른 하나는 장소의 인연이며, 마지막은 전공의 인연이다. 이 세 가지 인연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번 소풍을 통해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졌다.

첫째, 사람의 인연은 이실연 회원들과의 만남이다. 필자는 영남대학교 환경대학원과 행정대학원에서 오랫동안 석사학위논문을 지도하였다. 환경대학원에서는 도시계획학 석사학위 취득자 37명과 수료자 4명, 행정대학원에서는 행정학 석사학위 취득자 59명과 수료자 5명을 지도하였다. 당시 특수대학원생들은 대부분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했으므로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필자는 이들의 논문연구를 돕고 선후배 간 정보교류와 상호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이론과 실천연구회를 만들었다.

이실연은 단순한 학위논문 연구모임에 머물지 않았다. 학위를 취득한 이후에도 회원들은 서로 교류하며 친목과 배움을 이어갔다. 필자가 정년을 맞은 이후에도 이러한 만남은 계속되고 있다. 학문적 관계가 인간적 신뢰로 발전하고, 그 신뢰가 오랜 우정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번 가을소풍 역시 이러한 인연이 만들어 낸 소중한 자리였다.

둘째, 장소의 인연은 단양과 제천에 얽힌 지난 활동의 기억이다. 필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 지역발전정책의 하나였던 신활력사업과 관련하여 단양의 지역자원과 발전방안을 자문한 인연이 있다. 당시 단양팔경의 관광자원과 단양 육쪽마늘의 지역특산물 가치를 활용한 지역발전의 가능성을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또한 제천은 필자가 교육부 파견 학교법인 순총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할 당시 학교 행사와 졸업식 등을 위해 여러 차례 방문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번 여행은 낯선 지역을 처음 둘러보는 소풍이라기보다 과거의 활동과 경험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셋째, 전공의 인연은 충주댐과 지역개발, 자원관리의 문제이다. 필자는 대학원에서 도시 및 지역계획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지역개발과 정책계획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수자원개발과 환경관리, 개발과 보전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왔다. 충주댐은 홍수조절과 용수공급, 수력발전 등의 기능을 담당하는 대표적인 다목적댐이다. 1985년 준공된 충주댐으로 광대한 인공호수가 형성되었으며, 오늘날 이 호수는 지역의 주요 관광자원이 되었다.

그런데 같은 호수를 두고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충주에서는 충주호, 제천에서는 청풍호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며, 단양호라는 이름도 쓰인다. 하나의 호수를 두고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에서도 장소에 대한 지역사회의 애착과 정체성을 읽게 된다. 같은 공간이라도 어느 지역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상징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충주댐 건설은 수자원개발의 성과와 함께 수몰지역 주민들의 삶과 문화유산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오늘날 청풍문화유산단지(옛 청풍문화재단지)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였던 지역의 문화유산을 이전·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는 역사문화 공간이다. 청풍호의 아름다운 풍경 뒤에는 수자원개발의 성과뿐 아니라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기억과 아픔도 함께 남아 있다.

따라서 지역개발은 새로운 시설을 만들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개발의 성과와 함께 그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과 상실, 보전해야 할 자연과 문화의 가치도 살펴보아야 한다. 필자는 청풍호를 바라보며 개발과 보전, 성과와 희생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지역계획의 기본 원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물길에서 올려다본 청풍호의 풍경

이번 소풍에서 처음 만난 청풍호의 풍경은 유람선 위에서 바라본 물길의 풍경이었다.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에 올라 호수의 물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주변의 산과 바위, 절벽과 숲을 가까이 바라보았다. 호수의 수면에서 산자락을 올려다보는 미시적·상향적 조망이었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청풍호의 대표적인 풍경은 구담봉과 옥순봉이다. 단양팔경에 속하는 구담봉은 거북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기암절벽으로 유명하다. 옥순봉은 마치 대나무 싹이 솟아오르듯 희고 높은 바위 봉우리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주변의 제비봉과 말목산, 옥순대교가 호수와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산수화를 펼쳐 보였다. 물 위에서 올려다보니 산의 높이와 절벽의 웅장함이 더욱 가까이 느껴졌다.

이 일대에는 자연경관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문적 이야기도 전해진다. 특히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두향의 인연은 구담봉과 장회나루 주변에 얽힌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두향의 묘가 전해지는 강선대 일대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자연은 단순히 산과 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역사와 기억까지 함께 품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유람선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자 햇빛을 받은 호수의 수면이 반짝거렸다. 물가의 바위와 나무, 가마우지와 왜가리 등 물새들이 어우러진 풍경에서도 자연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작은 바위와 나무 한 그루, 잔잔한 물결 하나에도 눈길이 머물렀다. 전체보다는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는 미시적 관찰의 즐거움이었다.

필자는 평소 지역을 연구할 때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 작은 변화와 주민의 생활을 살펴보는 미시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아무리 큰 개발계획이라도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자연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좋은 계획이 되기 어렵다. 지역의 실상은 통계와 지도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며, 현장에 다가가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유람선을 타고 청풍호를 가까이 바라본 경험은 단순한 자연 감상에 머물지 않았다. 작은 풍경을 자세히 살피는 일이 지역과 사람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물길에서 올려다본 청풍호는 필자에게 현장 중심적 사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 풍경이었다.

하늘길에서 내려다본 청풍호의 풍경

유람선에서 청풍호를 가까이 바라본 뒤에는 청풍호반케이블카를 타고 비봉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청풍호반케이블카는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에서 해발 531m의 비봉산 정상까지 약 2.3km 구간을 운행한다. 물길에서 산을 올려다보던 시선이 이번에는 하늘길에서 호수와 산자락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케이블카가 서서히 올라갈수록 발아래 청풍호의 모습도 달라졌다. 가까이에서는 서로 떨어져 보이던 산과 호수가 하나의 큰 경관으로 연결되었다. 호수는 산자락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지고, 크고 작은 산봉우리와 능선들은 겹겹이 펼쳐졌다. 비봉산 정상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호수를 바라보니 청풍호를 '내륙의 바다'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청풍호가 개별적인 바위와 절벽, 물결과 숲의 풍경이었다면, 케이블카와 비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청풍호는 산과 물, 자연과 인공시설이 하나로 연결된 전체적인 풍경이었다. 같은 호수이지만 보는 위치와 높이에 따라 풍경의 규모와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조망의 차이를 미시적·상향적 시선과 거시적·하향적 시선에 비유해 보았다.

지역개발과 정책계획에서도 미시적 접근과 거시적 접근은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 미시적 접근이 현장의 구체적인 문제와 개별 요소를 살피는 일이라면, 거시적 접근은 지역 전체의 구조와 기능,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일이다. 아래에서 바라보아야 보이는 것이 있고,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이해되는 것이 있다. 두 시선이 함께할 때 지역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청풍호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이러한 원리가 우리의 인생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작은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만, 멀리서 보면 그 일이 삶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때로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피고, 때로는 한 걸음 물러나 넓게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선이 필요하다. 특히 인생의 후반기에는 지난날의 경험을 돌아보며 부분과 전체, 현재와 과거를 함께 바라보는 지혜가 더욱 중요해진다.

이번 청풍호반케이블카의 경험은 자연을 감상하면서 지역을 이해하는 관점과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을 함께 생각하게 한 시간이었다. 같은 대상이라도 어디에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였다.

한편 소풍길에 만난 '고메막국수'도 기억에 남았다. 고구마 전분과 메밀을 활용한 이 음식은 지역의 농산물을 음식문화와 연결한 사례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지역의 자연과 특산물이 관광과 음식으로 이어질 때 지역자원의 활용가치는 더욱 넓어질 수 있다. 작은 음식 하나에서도 지역자원을 새로운 가치로 연결하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산길에서 짧게 만난 구인사의 풍경

청풍호의 물길과 하늘길을 둘러본 뒤에는 단양군 영춘면에 자리한 구인사를 찾았다.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루 동안 여러 곳을 둘러본 뒤라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다. 이번 구인사 방문은 물길에서의 미시적 조망과 하늘길에서의 거시적 조망에 이어, 짧은 시간에 주요 풍경을 살펴보는 주마간산(走馬看山)식 방문이었다.

구인사는 대한불교천태종의 총본산으로, 1945년 상월원각대조사가 수행도량을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 오늘날에는 소백산 자락의 깊은 계곡을 따라 수많은 전각이 층층이 자리 잡은 웅장한 사찰로 발전하였다. 경내에 들어서자 산자락을 따라 높이 이어지는 전각들의 규모와 장엄함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산사의 소박하고 고즈넉한 모습과는 또 다른 인상을 주었다.

가까운 법당에서는 청아한 반야심경 독송 소리가 흘러나왔다. 웅장한 전각과 산사의 고요함, 그리고 맑게 울려 퍼지는 경전 소리가 어우러지면서 짧은 방문에도 깊은 여운을 남겼다. 좀 더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으나 날이 저물고 있어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결국 아쉬움 하나를 남긴 채 산문을 나서야 했다.

구인사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행한다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전통으로도 알려져 있다. 필자는 이러한 정신이 오랫동안 강조해 온 근학무실의 정신과도 일정 부분 통한다고 생각한다. 배움과 수행이 일상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학문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삶에서 실천되어야 하며, 신앙과 수행 역시 일상의 생활과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필자가 지도했던 이실연 회원들은 대부분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이론을 배우고 현장에서 실천해 온 사람들이다. 낮에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일과를 마친 뒤에는 배움과 연구에 힘썼던 이들의 모습이 구인사의 주경야선 정신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비록 종교적 수행과 학문적 연구는 그 목적과 내용이 다르지만, 배움과 실천을 함께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통하는 의미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구인사에서 느꼈던 짧은 만남과 아쉬움을 몇 줄의 디카시로 정리하였다. 제목은 「해 질 무렵 구인사」이다. 특히 마지막 두 행에 그날의 마음을 담았다.

서산의 해는 벌써 기울고
아쉬움 하나 두고 산문을 나선다.


주마간산식 방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 의미까지 얕아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짧은 순간의 만남이 오히려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이번 구인사 방문이 그러했다.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웅장한 전각과 맑은 독경 소리, 그리고 저물어 가는 산사의 풍경은 다음에 다시 찾아 좀 더 천천히 둘러보고 싶은 마음을 남겼다.

맺음글
풍경은 지나가도 인연은 남는다

이번 영남대 이실연의 청풍호 가을소풍은 아침 8시에 시작하여 저녁 9시 30분에 끝난 긴 하루의 여정이었다. 청풍호의 물길에서는 자연을 가까이 바라보았고, 비봉산의 하늘길에서는 자연을 넓게 내려다보았다. 구인사로 이어진 산길에서는 짧은 시간 속에서도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물길과 하늘길, 산길에서 만난 서로 다른 풍경은 필자에게 자연과 지역, 그리고 인생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일깨워 주었다.

이번 소풍은 사람과 장소, 전공이라는 세 가지 인연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람의 인연에서는 오랜 세월 이어진 배움과 신뢰의 가치를 떠올렸다. 장소의 인연에서는 지난날의 활동과 기억을 되살렸다. 전공의 인연에서는 개발과 보전, 부분과 전체를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는 지역계획의 원리를 되새겼다. 하나의 소풍길에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만남, 그리고 인생의 성찰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번 소풍에서 가장 오래 남을 것은 함께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야기일 것이다. 근학무실의 마음으로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도 서로를 기억하고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사람의 인연은 단순히 만나는 횟수나 함께 보내는 시간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이어질 때 그 인연의 가치는 더욱 깊어진다.

필자는 근학무실의 '무(務)'를 자신의 소명과 책무에 충실하는 자세로, '실(實)'을 진정성 있는 실천과 실효성을 추구하는 태도로 정의해 왔다. 배움에 부지런하고 맡은 일에 충실하는 근학무실의 정신은 젊은 시절의 학문과 직장생활에만 필요한 덕목이 아니다. 정년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 배우고, 경험을 나누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가는 데 필요한 삶의 원리이다.

특히 고은층(高恩層)에 들어선 필자에게 오래된 인연은 더욱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젊은 시절에는 배움과 일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었다면, 이제는 그동안 쌓아 온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서로의 삶을 격려하는 관계가 중요해진다. 과거에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이 오늘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풍길에 동행하는 모습에서 관계의 지속성과 삶의 품격을 생각하게 된다.

오랜 세월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으로 시작한 관계가 이제는 함께 소풍을 다니며 인생의 경험과 즐거움을 나누는 관계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필자가 생각하는 교육의 보람이자 근학무실의 만남이 지닌 참된 가치이다. 교실에서의 배움은 끝났어도 인생에서의 배움은 계속되고, 학위논문 지도는 끝났어도 사람 사이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청풍호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은 계절과 함께 지나가겠지만, 이실연 회원들과 나눈 하루의 추억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이다. 배움은 계속되고, 신뢰는 깊어지며, 좋은 인연은 이어진다.

근학무실의 만남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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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 구인사

이성근

굽이굽이 산길
구인사가 산자락에 웅장히 서 있다
가까운 법당에서
반야심경 맑은 소리 흘러오는데
서산의 해는 벌써 기울고
아쉬움 하나 두고 산문을 나선다

[글·사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영남대 이실연 회원들과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과 단양으로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충주호 유람선을 타고 호반과 산이 어우러진 가을 풍광을 바라보고, 이어 청풍호반 케이블카에 올라 정상에서 굽이굽이 겹겹이 이어진 호반과 산자락을 다시 눈에 담았다.

오후에는 단양 영춘에 자리한 대한불교천태종의 총본산 구인사를 찾아갔다.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경내에 들어서자 산자락을 따라 층층이 자리 잡은 전각들의 웅장한 모습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가까운 법당에서는 청아한 반야심경 소리가 들려와 저녁 무렵 산사의 분위기를 더욱 깊게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구인사가 지닌 규모와 장엄함, 그리고 기도와 수행의 공간이 주는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좀 더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으나 날이 저물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래서인지 짧은 만남 뒤에 남은 아쉬움은 오히려 더 컸다. 언젠가 다시 찾아 천천히 둘러보리라는 마음을 남기며, 해 질 무렵 구인사에서 느낀 순간을 사진과 몇 줄의 시로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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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로 기억하는
어머니의 사랑"


이성근


말은 삼사일언으로 한 번만 하고
노래는 가무유절로 두 절만 부르고
인생은 춘하추동 네 계절을 따르며
성령강림을 오순절로 기념하고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구절초로 기억한다.

[사진·글]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어제 오전,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평생 봉직한 영남대 캠퍼스 산책길을 걸었다. 걷는 도중 활짝 핀 구절초(九節草)를 만났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사진을 찍었다.

구절초를 바라보는 순간 꽃말인 ‘어머니의 사랑’이 떠올랐다. 말에는 삼사일언(三思一言)의 절제가 있고, 노래에는
가무유절(歌舞有節)의 절도가 있으며, 인생에는 춘하추동의 네 계절이 있고, 신앙에는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오순절(五旬節이 있다. 문득 이처럼 서로 다른 의미의 ‘절’들이 구절초의 ‘절’과 하나의 언어적 연상으로 이어졌다.

그 끝에서 평생 가슴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가르침을 떠올렸다. 그래서 구절초 한 송이에 어머니의 사랑을 담아 이 디카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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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근 교수의 인생사색』 전 7권 종합비평: 삶을 개념화하고 ‘고은층론’으로 나아간 학자적 인생에세이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AI 활용 및 작성 안내**
이 글은 『이성근 교수의 인생사색』 전 7권의 저자가 자신의 저작을 다시 돌아보며 작성한 자기 비평적 종합검토이다. 필자가 주요 질문과 관점, 자료와 평가 방향을 제시하고, AI ChatGPT와의 반복적인 대화와 검토를 통해 초안의 구성과 표현을 수정·보완하였다.


서문
삶을 다시 하나의 사유 대상으로 삼다


『이성근 교수의 인생사색』 전 7권은 한 학자로서 저자가 정년 이후 자신의 삶을 다시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 학문과 삶, 관계와 가정, 믿음과 노년의 문제를 개념화하고 체계화해 온 기록이다. 일반적인 수필집이라고 하기에는 개념과 논리의 틀이 비교적 뚜렷하다. 그러나 철학서나 학술서라고 하기에는 저자의 실제 삶과 경험이 글의 중심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리즈는 학자의 사고방식과 한 개인의 생애 경험이 결합된 ‘학자적 인생에세이’이자 실천적 생활철학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경험에서 의미를 찾아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다. 다시 독자가 자신의 일상에서 생각하고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데 이 저술의 특징이 있다.

전 7권을 차례로 읽으면 저자의 관심이 단순한 인생계획과 자기 관리에서 출발하여 관계와 가정, 믿음과 공존을 거쳐 인생 후반기의 삶으로 점차 확대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리즈는 서로 독립된 일곱 권의 책이면서 동시에 저자의 생애와 사유가 함께 변화해 온 연속적인 기록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인생을 설계하는 데서 성찰하는 데로

전 7권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저자의 관심과 사유가 점차 확대되고 심화되는 과정이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 1권은 개념과 계획을 중심으로 인생을 이해하고 설계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시한다. 2권에서는 태도와 습관, 지향가치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질문이 본격화된다. 이어 3권에서는 자기관리와 멘토의 문제가 부각되면서 개인의 내면을 넘어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삶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로 시야가 넓어진다.

4권에 이르면 호기심과 관계, 교수인생 등 자전적 요소가 더욱 뚜렷해진다. 앞선 권들이 비교적 일반적인 인생론의 성격을 띠었다면, 이때부터는 저자 자신의 구체적인 삶과 경험이 사유의 중요한 재료가 된다. 5권에서는 원칙과 통찰, 회복과 공존이 강조되면서 오랫동안 삶에서 지켜 온 기준과 태도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6권에서는 믿음과 지혜, 가정과 사랑으로 사색의 범위가 다시 확장된다. 자기 관리와 사회적 관계를 넘어 삶을 지탱하는 내면적·가족적 토대까지 아우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7권에서는 은퇴 이후의 삶과 건강, 놀이와 배움, 인생설계가 폭넓게 다루어진다.  마침내 ‘고은층(高恩層)’이라는 인생 후반기의 새로운 관점으로 나아간다. 이런 흐름에서 보면 전 7권은 인생을 계획하고 관리하려는 데서 출발하여, 삶을 성찰하고 관계와 가정으로 시야를 넓혀 간다. 따라서 마지막 7권은 궁극적으로 인생 후반기의 삶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온 하나의 연속적인 사유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일관된 질문, 확장되는 삶의 시야

이 시리즈의 중요한 강점 가운데 하나는 문제의식의 일관성이다. 7권에 걸쳐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지만 저자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질문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남은 삶을 어떻게 관리하고 가꾸어 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한다.

주제가 달라져도 질문의 중심에는 언제나 삶이 놓여 있다. 또한 삶을 우연히 흘러가는 시간으로만 보기보다 스스로 성찰하고 선택하며 가꾸어 가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태도에는 오랜 교수생활과 정책·계획 분야의 연구 경험을 통해 형성된 학자로서 저자의 사고방식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문제를 발견하고, 원인을 살피고, 기준을 세우며, 대안을 생각하는 방식이 인생에 대한 성찰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삶을 지나치게 계획과 관리의 대상으로 바라볼 경우 인간의 삶을 도식화하거나 규범화할 위험도 있다. 『인생사색』의 변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한계를 스스로 넓혀 가는 과정이 나타난다는 데 있다. 권수가 거듭될수록 계획과 관리 못지않게 관계와 감사, 믿음과 사랑, 건강과 놀이, 공존과 내려놓음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처음에는 ‘삶을 어떻게 설계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무게가 실렸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관계 맺으며 의미 있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해진다.

이러한 변화는 『인생사색』이 초기의 자기 관리적 인생론에서 점차 관계적·성찰적 생활철학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일관된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도 생애경험에 따라 사유의 폭을 넓혀 왔다는 점이 전 7권의 중요한 흐름이다.

학자의 사고를 일상의 언어로 옮기다

『인생사색』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학문적 사고방식을 일상의 언어로 전환한다는 점이다. 저자의 글에는 일정한 사고의 흐름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먼저 하나의 개념이나 문제를 제시하고 그 의미와 기준을 구분한다. 이어 자신의 경험이나 일상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그것이 삶에 주는 의미와 실천의 방향을 정리한다.

행정학과 정책학, 지역개발과 계획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가르쳐 온 학자의 사고구조가 인생에세이에도 자연스럽게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책과 계획에서는 복잡한 현실을 일정한 개념과 기준으로 정리하고, 문제와 대안을 체계적으로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인생사색』에서도 이러한 사고습관은 그대로 이어진다. 다만 연구의 대상이 사회와 정책에서 자신의 삶과 일상으로 옮겨왔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방식은 『인생사색』을 일반적인 회고록과 구별하게 한다. 저자는 경험을 단순한 추억으로 남겨 두기보다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개념화하려 한다. 경험은 생각으로 이어지고, 생각은 개념과 원리로 정리되며, 그 원리는 다시 일상의 실천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인생사색』은 전문적인 철학서나 이론서는 아니지만 나름의 사유 구조를 갖는다. 자신의 삶에서 얻은 경험을 독자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로 전환한다. 다소 추상적인 개념도 가능한 한 일상의 언어와 사례를 통해 풀어내려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학자로서 저자의 사고와 생활인의 경험이 만나는 『인생사색』만의 성격이 형성된다.

후반부에서 뚜렷해지는 저자 고유의 인생론

전 7권 가운데 특히 주목할 부분은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 자신의 목소리와 생애 경험이 더욱 뚜렷해진다는 점이다. 초기 권에서는 인생계획, 태도, 습관, 자기 관리와 같이 비교적 보편적인 인생론이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주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만큼 기존의 자기 계발서나 일반적인 인생론과 일정 부분 겹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4권 이후에는 교수인생과 관계, 원칙과 기준, 회복과 공존, 믿음과 가정 등 저자 자신의 생애 경험이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추상적인 삶의 원칙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무엇을 지켜 왔는가?’, ‘무엇을 새롭게 깨닫고 있는가?’가 글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글에 개인적인 색채를 더하면서 동시에 시리즈의 독자성을 강화한다.

특히 7권을 전후하여 ‘고은층’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저자 고유의 인생론은 한층 분명해진다. 고은층은 단순히 노인이나 고령자를 대신하여 부르는 새로운 명칭에 머물지 않는다. 인생 후반기에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관리하며, 오랜 생애경험을 성찰과 지혜로 전환한다. 가족과 사회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능한 범위에서 참여와 나눔, 환원을 실천하려는 삶의 관점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인생사색』의 의미는 처음부터 완성된 하나의 인생철학을 제시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칠십 이후에도 계속 사색하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생애 경험에 맞는 삶의 개념과 언어를 조금씩 만들어 왔다는 데 있다. 즉, 완성된 철학을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삶과 함께 형성되어 온 사유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반복을 덜고 권별 정체성을 세우다

전 7권을 종합적으로 읽을 때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보완점은 반복성이다. 개념을 설명하고 사례를 들며, 때로는 고사성어나 동서양의 명언, 성경 구절 등을 인용한다. 그리고 삶의 의미나 교훈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은 독자가 글의 뜻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중요한 생각을 여러 글에서 되풀이함으로써 저자의 가치관과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개별 글이 아니라 전 7권을 하나의 시리즈로 연속해서 읽으면 이러한 반복은 오히려 더 두드러질 수 있다. 유사한 개념과 교훈, 인용과 결론이 여러 글에서 다시 등장하면서 개별 글이나 각 권의 경계가 다소 희미해지는 부분이 있다. 특히 자기 관리, 관계, 감사, 배움, 실천과 같은 핵심 가치가 여러 방식으로 반복될 경우 독자에게 친숙함을 주는 장점과 함께 새로움이 줄어드는 한계도 생긴다.

따라서 앞으로 전 7권을 다시 정리하거나 선집으로 묶는다면 반복되는 개념과 인용, 유사한 서론과 결론은 과감하게 덜어낼 필요가 있다. 대신 각 권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경험과 사유, 저자의 생애를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글을 보다 전면에 내세우는 편이 좋다. 지금까지가 삶을 계속 기록하며 ‘더 쓰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는 축적된 글 가운데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선택하는 ‘덜어내고 남기는 과정’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각 권의 차별성과 정체성을 보다 선명하게 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인생사색 1』에서 『인생사색 7』까지 이어지는 통일된 제목은 시리즈의 연속성을 보여 주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권수가 늘어나고 각 권에서 다루는 주제와 저자의 사유도 변화하면서 숫자만으로는 각 권의 특징을 충분히 드러내기 어려워졌다.

특히 4권 이후에는 자전적 성찰과 교수인생, 원칙과 공존, 믿음과 가정, 고은층과 인생 후반기 등 비교적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향후 개정하거나 전집을 새롭게 구성한다면 각 권의 중심 내용을 담은 부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만하다. 예를 들어 7권에 ‘고은층, 인생 후반기를 다시 설계하다’와 같은 부제를 붙인다면 그 권의 중심 문제를 제목에서부터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독자가 자신의 관심에 맞는 책을 쉽게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전 7권을 관통하는 사유의 변화와 발전 과정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직접출판의 가능성과 편집의 과제

『인생사색』 시리즈가 주문형 출판과 전자책 방식을 활용해 지속적으로 출간되어 왔다는 점도 이 저술의 성격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리즈는 처음부터 완결된 하나의 사상을 제시하기 위해 일시에 집필된 책이 아니다. 저자가 살아가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 과정과 함께 계속 축적되고 성장해 온 저작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는 필요에 따라 글을 추가하고 수정하면서 후속 권으로 이어 갈 수 있는 직접출판 방식이 『인생사색』의 성격과 잘 맞는다.

직접출판은 저자가 자신의 글을 비교적 자유롭게 기획하고 빠르게 책으로 묶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블로그와 칼럼을 통해 계속 생산되는 글을 한 시기의 기록으로 묶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생애 기록형 저술과도 잘 어울린다.

다만 직접출판에서는 전통적인 출판사가 담당해 온 기획·편집·교정·디자인 등의 상당 부분을 저자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권수가 늘어날수록 새로운 글을 더하는 일 못지않게 기존 글을 선별하고 재배열하며 전체 시리즈의 구조를 정돈하는 편집 작업이 중요해진다. 이제 『인생사색』은 단순히 권수를 늘려 가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축적된 글 가운데 무엇을 대표작으로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생각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인생사색』에서 ‘고은층론’으로

전 7권을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볼 때 가장 주목되는 지점은 마지막 권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고은층’이라는 개념이다. 1권에서 시작된 인생의 개념과 계획에 관한 관심은 태도와 습관, 자기 관리와 관계, 교수인생과 원칙, 믿음과 가정을 지나 인생 후반기의 삶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책의 주제가 달라져 온 것이 아니라 저자의 실제 생애단계에 따라 사유의 중심도 함께 이동해 왔음을 보여 준다.

특히 최근의 고은층에 관한 사유에서는 유유자작(悠悠自作), 품격, 관계, 건강, 놀이, 배움, 나눔과 공헌 등의 주제가 하나의 중심개념 아래 다시 연결되기 시작한다. 이전의 『인생사색』에서 개별적으로 논의되던 삶의 요소들이 이제 ‘고은층’이라는 이름 아래보다 통합적인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사색』 7권을 하나의 종착점으로 보기보다는 앞으로 ‘고은층론’이 형성되는 데 필요한 지적·생활사적 토대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지금까지의 인생사색이 삶의 여러 측면을 하나씩 생각하고 정리하는 과정이었다면, 고은층론은 그동안 축적된 생각을 인생 후반기의 하나의 삶의 관점으로 묶어 가는 다음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인생사색』이 오랫동안 던져 온 중심 질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다면, 고은총론에서는 그 질문이 더욱 구체화된다.
“인생 후반기를 어떤 태도와 관계, 품격과 실천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은 지금까지 축적된 인생사색을 하나의 새로운 삶의 관점으로 연결하는 중심축이 될 수 있다. 또한 고은층이 단순한 명칭의 제안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생활철학이나 생애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개념의 정의와 구성요소, 실천원리, 다른 노년 개념과의 차이 등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

맺음글
삶을 연구하고, 다시 삶으로 돌아오다


『이성근 교수의 인생사색』 전 7권은 한 행정학자이자 지역개발학자가 긴 교수생활과 사회활동을 거친 뒤 자신의 삶을 다시 성찰하고 개념화해 온 기록이다. 초기의 개념과 계획, 태도와 습관, 자기 관리에서 출발한 사색은 관계와 교수인생, 원칙과 공존, 믿음과 가정으로 확대되었다. 마침내 ‘고은층’이라는 인생 후반기의 새로운 삶의 관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책들은 학문적 엄밀성을 앞세운 전문적인 철학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기억과 감상을 기록하는 데 머무는 일반적인 수필집만으로 보기도 어렵다. 자신의 경험을 생각으로 바꾸고, 생각을 개념으로 정리하며, 그 개념을 다시 생활의 실천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학자적 인생에세이’이자 생활철학서에 가깝다.

물론 보완할 점도 있다. 유사한 개념과 교훈이 반복되고 설명적인 문체가 두드러지는 부분이 있다. 각 권의 정체성과 차별성을 보다 분명하게 할 필요도 있다. 앞으로는 더 많은 글을 추가하는 것 못지않게 이미 축적된 글을 선별하고 압축하는 일이 중요하다. 전 7권 가운데 핵심적인 글과 생각을 엄선하여 대표선집으로 재구성하는 작업도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축적해 온 고은층에 관한 생각을 하나의 독립적인 저술로 체계화하는 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완점과 별개로,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성찰하면서 그 경험에서 새로운 개념과 의미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은 이 시리즈의 뚜렷한 특징이다. 특히 그 과정이 정년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인생사색』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지나온 삶을 회고하는 데 머물지 않고 지금의 삶을 새롭게 해석하며, 앞으로 살아갈 삶의 방향까지 계속 묻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사색』 전 7권의 중요한 의미는 이미 완성된 인생철학을 남겼다는 데 있지 않다. 평생 학문으로 사회와 세상을 연구해 온 한 학자로서  저자가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다시 하나의 사유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성찰의 결과를 ‘고은층’이라는 새로운 삶의 언어로 발전시켜 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이성근 교수의 인생사색』은 지나온 삶을 정리한 기록인 동시에, 앞으로 더욱 체계화될 ‘고은층론’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의 토대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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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색’ 책 출간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자기성찰로 출발, 누군가의 삶에 자양분 됐

‘인간의 사회성 발달 이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이자 발달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은 65세 이상의 노년기를 통합과 절망의 양립기라고 분석했다.평생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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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근 전 영남대 교수 책 ‘인생사색’ 4~7권 출간 - 대구신문

신간 ‘인생사색 4,5,6,7’을 출간한 이성근 전 영남대 교수. 지적 활동과 영적 사유, 육체적인 휴식이 견고하게 맞물린 이성근 전 영남대 교수의 노년기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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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성근. 서귀포 월라봉 파크골프장의 담벼락에 비친 이미지를 디카에 담아 수정한 것임.

사진. 대구 앞산 고산골 산책길  풍경. 2026. 9.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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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이 건강한 삶에 이르는 열 길(十道): 매일의 작은 실천이 이룬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건강은 일상의 작은 실천에 있다


고은층(高恩層)이 되면서 건강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또 자주 하게 된다. 누구를 만나도 건강이 화제가 되고, 헤어질 때면 “건강하십시오”라는 인사를 나눈다. 오래 사는 것만큼이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꾸려 가는 일이 중요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고은산책」에서 웃음과 감사, 관계와 운동, 자연과 걷기, 놀이와 파크골프, 삶의 의미와 유유자작에 관해 여러 차례 생각을 나누었다. 돌이켜 보면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결국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과 관계를 이어 가며, 자신의 하루를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여러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동안의 생각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열 가지로 묶어 보고자 한다. 이름하여 ‘고은층이 건강한 삶에 이르는 열 길(十道)’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길은 특별한 건강법이나 새로운 처방이 아니다. 오늘도 걸어 볼 수 있고 내일 다시 되풀이할 수 있는 작은 생활의 길이다.

마음을 여는 세 길
웃고, 감사하고, 말한다


첫째 길은 웃는 것이다.

때로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한 번 웃어 본다. 혼자 있을 때도 웃어 보고, 사람을 만나면 먼저 웃으며 인사한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에 미소를 한번 지어 보는 것도 좋다. 나이가 들면 얼굴의 주름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얼굴에 어떤 표정을 담고 살아갈지는 어느 정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웃음에 대해서는 그 효용을 길게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웃음이 좋다’고 아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 생활에서 웃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고 의식적이어도 괜찮다. 좋은 습관은 반복할수록 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둘째 길은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는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할 일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는 오히려 작은 것부터 찾아보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고, 오늘 갈 곳과 할 일이 있다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다.

감사는 없는 것을 헤아리기보다 지금 내게 있는 것을 바라보게 한다. 하루에 한두 가지라도 감사할 일을 찾아가다 보면 삶을 바라보는 마음의 방향도 조금씩 달라진다.

셋째 길은 말하는 것이다.

말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가족과 대화하고, 친구에게 안부를 묻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책에서 읽은 것을 이야기하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묻는다. 혼자 있을 때 좋은 글을 소리 내어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기도문이나 익숙한 신앙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도 좋다.

말하고 대화한다는 것은 입만 움직이는 일이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기억을 되살리며 세상과의 연결을 이어 가는 일이다. 생활 반경이 좁아질수록 대화의 기회도 줄어들 수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먼저 전화를 걸고, 먼저 묻고, 먼저 말을 건네는 노력이 필요하다.

몸과 일상을 깨우는 세 길
노래하고, 놀이하며, 걷는다


넷째 길은 노래하는 것이다.

잘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좋아하는 노래면 된다. 혼자 따라 불러도 좋고 여러 사람과 함께 부르면 더욱 즐겁다. 젊은 시절 좋아했던 노래 한 곡을 부르다 보면 오래전 사람과 장소가 떠오르기도 한다. 노래는 현재의 나와 지난날의 나를 이어 주는 작은 다리가 되기도 한다.

평소보다 조금 큰 목소리를 내어 보는 것도 좋다. 말하고 노래하면서 목소리를 쓰고 감정을 표현하며 잠시라도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다. 한 곡의 노래가 하루 전체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그 순간의 기분과 분위기를 밝게 만들 수는 있다.

다섯째 길은 놀이하는 것이다.

고은층에게 놀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파크골프를 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텃밭을 가꾸는 것도 놀이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손과 머리와 몸을 계속 사용하는 데 있다. 젊은 시절에는 일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인생 후반에는 일을 놀이처럼 하고 놀이에서도 배움과 보람을 찾을 수 있다. 무엇을 얼마나 잘하느냐보다 얼마나 즐겁게 오래 계속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여섯째 길은 걷는 것이다.

길이 있으면 걷고, 가능하면 자연과 가까이서 걷는다. 빠른 속도나 먼 거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몸과 형편에 맞게 꾸준히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걷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만난다. 봄꽃이 피고 여름 나무가 짙어지며, 가을잎이 물들고 겨울 가지가 드러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걷기는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면서 주변을 바라보고 생각을 정돈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 역시 산책과 파크골프를 하면서 여러 생각을 얻는다. 그러나 걷기의 의미를 굳이 철학적으로 확대하지 않아도 좋다. 오래 앉아 있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오늘도 몸을 한 번 더 움직이는 것, 그것만으로도 여섯째 길의 실천은 충분하다.

삶을 가꾸는 두 길
키우고, 의미를 가진다


일곱째 길은 키우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돌보고 키울 때 관심을 자기 밖으로 넓히게 된다. 작은 화분에 물을 주고, 텃밭의 채소를 돌보고,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다. 배움이나 취미 하나를 정하여 오랫동안 익히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도 ‘키우는 삶’이다.

키운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결과를 얻으려 하지 않고 기다리는 일이다. 어제와 오늘의 작은 변화를 살펴보는 동안 생활에도 일정한 리듬이 생긴다. 무엇인가 돌볼 것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아직 해야 할 일과 역할이 있다는 뜻이 된다.

여덟째 길은 의미(意味)를 가지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직장과 가정, 사회적 역할이 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은퇴하고 세월이 흐르면 그런 역할 가운데 일부는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이때부터는 누가 정해 주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 할 때가 많아진다.

그 의미는 우리 곁에 다양하게 존재한다. 가족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후배에게 경험 하나를 전하는 것도 의미이다. 작은 봉사를 하고 배우며 글을 쓰는 것도 의미이다. 친구의 안부를 묻는 일도 결코 작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일이 하나쯤 있으면 좋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하루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돌보는 두 길
잘 먹고, 쉬며 비운다


아홉째 길은 먹는 것이다.

먹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생활이면서 나이가 들수록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할 일이다. 나는 이를 정식(定食)·소식(少食)·서식(徐食)이라는 세 가지 ‘식’으로 생각해 본다.

정식은 가능한 한 일정한 시간에 식사하는 것이다. 소식은 무조건 적게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과식을 피하고 자신의 몸에 알맞은 양을 먹는 것이다. 서식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먹는 것이다.

특정한 음식 하나가 건강 전체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건강 상태와 생활 여건에 맞추어 균형 있게 먹고, 필요한 경우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우선이다. 여기에 식사를 즐겁게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좋은 사람과 편안하게 나누는 한 끼는 음식을 먹는 시간을 넘어 정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열째 길은 비우고 쉬는 것이다.

아홉째 길이 잘 먹는 것이라면, 열째 길은 잘 비우고 잘 쉬는 것이다. 몸은 받아들이는 것만큼 내보내는 일도 중요하다. 먹은 것을 잘 소화하고 내보내며 몸의 순환을 원활하게 유지하는 일은 특히 고은층의 건강에서 중요하다. 잘 먹고 잘 내보내는  것은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리듬이다.

비움에는 휴식과 회복도 포함된다. 몸이 피곤하면 쉬고, 잠이 부족하면 충분히 자야  한다.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다시 움직일 힘을 채우는 시간이다.

생각과 마음의 비움도 필요하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서운함, 지나친 걱정과 욕심을 오래 붙들기보다 조금씩 내려놓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덜 중요한 것을 덜어 내어 더 소중한 것을 남기는 선택이다. 영정치원(寧靜致遠), 곧 마음이 고요해야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뜻처럼, 잘 비우고 잘 쉬며 몸과 마음에 여백을 만드는 것도 고은층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중요한 길이다.

맺음글
열 길은 아는 길이 아니라 걷는 길이다


웃고, 감사하고, 말한다. 노래하고, 놀고, 걷는다. 무엇인가를 키우고 삶의 의미를 가지며, 알맞게 먹고 쉬면서 지나친 것은 덜어 낸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전혀 낯선 일은 아니다. 대부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건강한 삶에서 중요한 것은 아는 데 머물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다. 열 길을 모두 한꺼번에 걸을 필요도 없다. 오늘 한 번 더 웃고, 조금 더 걷고, 누군가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작은 실천이 하루가 되고, 그 하루가 쌓여 생활이 된다.

고은층의 건강은 젊음을 되돌리는 데 있지 않다. 지금 가진 몸과 마음을 잘 돌보며 자신의 하루를 스스로 꾸려 가는 데 있다. 내가 말해 온 유유자작(悠悠自作)의 삶도 결국 이러한 평범한 하루의 실천 속에서 이루어진다. 건강에 단번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어도, 오늘부터 한 걸음씩 걸어갈 열 길은 있다.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고 했다. 여기에 실천의 뜻을 더한다면,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좋아하며, 즐기면서 몸소 행할 때 비로소 삶의 길이 된다. 고은층의 건강한 삶에 이르는 열 길도 결국 아는 길이 아니라 오늘 하루 직접 걷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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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커케’에 담긴 작은딸의 마음

이성근

추석날 고요한 오후 나절
문득 찾아든 녹커케 향기
속 깊은 작은딸의 따뜻한 정
'사운드 오브 뮤직' 들으며
우리 부부는 둥근 보름달을 기다린다

사진·글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행정학박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추석날 오후, 서울에 사는 둘째 딸이 녹차와 커피, 그리고 케이크, 이른바 ‘녹커케’를 보내왔다. 우리 부부는 거실에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며 ‘녹커케’를 음미했다. 케이크의 향과 맛보다 더 깊이 다가온 것은 명절을 맞아 부모를 생각하는 작은딸의 속 깊은 마음이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그 따뜻한 정을 느끼며 저녁 하늘에 은은하게 떠오를 둥근 보름달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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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손님에서 한 식구로: 고은층이 생각하는 새 가족 맞이"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추석 전날, 분주한 부엌을 보면서 가족을 생각하다


추석을 하루 앞둔 오늘, 집안이 아침부터 분주하다. 금년 여름 결혼한 큰딸과 사위가 온다고 아내는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부엌을 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가 어릴 적부터 귀에 익도록 들어온 말들이 새삼 떠오른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다.
사위 사랑은 장모다.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는다.
사위도 반자식이다."

한때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었던 말들이다. 그러나 두 딸을 키우고 큰딸을 출가시킨 뒤, 실제로 사위를 맞는 장인이 되어 보니 그 말들이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그 속에는 옛사람들의 가족관도 들어 있고, 자식의 배우자를 맞이하는 부모의 마음도 담겨 있다. 동시에 오늘의 가족관계에 비추어 새롭게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도 있다.

고은층이 되어 새 가족을 맞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옛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뜻을 오늘의 가족관계에 맞게 다시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백년손님이라는 오래된 말

예부터 사위를 ‘백년손님’ 또는 ‘백년지객(百年之客)’이라고 했다. 한평생을 두고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귀한 손님이라는 뜻이다. 딸의 남편이니 가족이면서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도 생겼을 것이다. 장모는 딸을 아끼는 마음만큼이나 자신의 딸과 평생을 살아갈 사람을 귀하게 여겼다. 사위에게 잘해 주는 마음 한편에는 결국 딸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백년손님이라는 말에서 오늘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것은 ‘손님’이라는 거리감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인지 모른다.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하지 않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예의를 잊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일수록 한 번 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는 뜻이 이 오래된 말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씨암탉 한 마리에 담긴 환대의 마음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는다”는 말도 오래전부터 전해 온다. 지금은 닭 한 마리가 특별한 음식이 아니지만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는 사정이 달랐다. 특히 알을 낳는 씨암탉은 농가에서 계속 길러야 할 소중한 밑천이었다. 그런 씨암탉을 잡아 사위에게 내놓았다는 것은 음식 한 그릇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 찾아온 사람을 귀하게 생각한다는 마음을 가장 좋은 음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늘 아내가 사위가 온다고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옛날의 씨암탉이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 씨암탉을 잡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는 사람을 기다리며 무엇을 먹일까 생각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하는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을 맞는 데에는 예나 지금이나 음식이 따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음식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그 음식에 담긴 마음이다. “당신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이 반갑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씨암탉 한 마리가 오랫동안 전해 온 가장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뜻일 것이다.

사위와 며느리를 달리 보던 가족의 문법

옛날에는 “사위는 백년손님이고 며느리는 평생 식구”라는 말도 흔히 했다. 며느리는 혼인을 하면 시가의 사람이 되고, 사위는 딸과 혼인해도 처가에서는 여전히 손님처럼 대하던 당시의 가족질서가 이 말에 그대로 비쳐 있다.
‘사위 사랑은 장모,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도 있다. 조금은 해학적인 표현이지만 새로 가족이 된 사람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잘 대해 주려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이제 사위와 며느리를 서로 다른 잣대로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위도 누군가가 귀하게 키운 아들이고, 며느리 또한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다.

따라서 고은층이 된 부모 세대가 옛 가족문화에서 이어받아야 할 것은 서열이나 구별이 아니라 정과 예의라고 생각한다. 전통은 옛 모습을 그대로 되풀이할 때보다 그 안에 담긴 좋은 뜻을 오늘의 삶에 맞게 되살릴 때 더욱 가치가 있다.

새 가족은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관계

흔히 결혼하면 “새 식구가 들어왔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표현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요즘은 이 말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가 이미 완성되어 있는 우리 가족 안으로 단순히 ‘들어오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딸이 결혼하면 사위만 우리 가족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우리 딸도 사위의 부모와 형제자매에게 새로운 가족이 된다. 한 사람만 어느 집안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양쪽 가족의 관계가 함께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결혼은 한 사람이 한 집안으로 들어오는 일이라기보다 두 사람이 새로운 가정을 만든다는데  의미가 크다. 그로 인해 두 가족의 인연이 새롭게 이어지는 일이라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렇게 생각하면 새 가족을 맞는 부모의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서 자녀 부부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는다. 내 집의 방식이 익숙하다고 해서 그 방식을 새 가족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녀의 배우자를 내 자식과 비교하지 않는 일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생활방식과 생각을 인정하고 적당한 거리를 지켜 주는 것도 새로운 가족관계를 만드는 중요한 지혜다.

고은층이 되면 삶의 경험은 많아진다. 그러나 경험이 많다는 것이 언제나 새로운 세대의 삶을 더 잘 안다는 뜻은 아니다. 오래 살아 얻은 지혜가 있다면 젊은 세대보다 더 많이 말하는 데 있지 않다. 때로는 기다려 주고 지켜봐 주는 데 있을 것이다. 필요할 때 조용히 손을 내밀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것도 지혜다.
가족관계에서도 나이가 들수록 말보다 여백이 필요하다.

맺음글
귀하게 맞되 편안하게 품는 가족

오늘 큰딸과 사위가 온다. 아내는 여전히 부엌에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백년손님과 씨암탉 이야기를 떠올리다가 결국 한 가지 생각에 이른다.

사위가 언제까지 손님이어야 할까?

처음에는 조금 어렵고 조심스러운 사이일 수 있다. 그러나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명절과 가족의 크고 작은 일을 함께하다 보면 ‘손님’이라는 말은 조금씩 옅어지고, 그 자리에 ‘식구’라는 말이 들어설 것이다.
그래도 나는 ‘백년손님’이라는 옛말을 완전히 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 말에 담긴 좋은 뜻 하나만은 오래 남겨 두고 싶다. 백년손님처럼 귀하게 여기되 손님처럼 거리를 두지는 않는다.  한 식구처럼 가까이 지내되 가족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오늘의 고은층이 새 가족을 맞는 바람직한 마음가짐일 것이다.

가족은 혈연과 혼인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조금씩 자리를 내어 주고 다른 점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긴 시간 동안 정을 쌓아 가면서 비로소 가족이 되어 간다. 큰딸의 결혼으로 우리 집에도 새로운 인연 하나가 더해졌다. 이제 나는 ‘사위를 얻었다’고 생각하기보다 우리 가족의 관계가 하나 더 넓어졌다고 생각하고 싶다.
추석을 앞둔 오늘, 음식을 마련하며 새 식구를 기다리는 집안 풍경 속에서 새삼 깨닫는다.
가족을 맞는다는 것은 한 사람을 우리에게 맞추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이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자리를 조금 넓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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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高秋)의 또 다른 풍경: 고은층은 자연을 닮아 있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고추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다


나는 그동안 여러 글에서 청춘(靑春)에 이어지는 인생 후반의 시간을 고추(高秋)라고 불러왔다. 청춘은 젊음의 한때를 상징한다. 고추는 긴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 맞이하는 또 하나의 인생 시절이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

요즘 내가 새삼 생각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고추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무엇을 닮아가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녁의 노을과 푸른 하늘의 달, 가을의 단풍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 익은 된장과 잘 익은 수박, 붉은 대추와 고추, 감초에서도 저마다 다른 삶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과 우리 곁의 익숙한 것들이 고은층(高恩層)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를 조용히 들려주고 있었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자연을 오래 바라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꽃은 피어야 할 때 피고 열매는 익어야 할 때 익는다. 비바람이 분다고 계절이 가던 길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숲에는 저마다의 질서가 생긴다. 수많은 나무와 풀, 생명이 제 모습대로 살아가면서도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아가는 자기 조직화의 모습이다.

고은층의 삶도 이와 닮으면 좋다는 생각을 한다. 살아 보니 세상일 가운데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았다. 사람도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세상 역시 내 생각에 맞추어 돌아가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그것을 바꾸려고 애썼다면, 이제는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지혜가 더 필요하다.

그렇다고 수용이 체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관용 또한 무원칙을 의미하지 않는다. 견딜 것은 견디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며,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가지는 흔들려도 뿌리는 땅속에 머무는 나무처럼 유연함과 중심을 함께 지니는 삶이다.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것만으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일을 경험했기에 조금 더 기다릴 줄 알고, 여러 사람을 만났기에 다름을 조금 더 받아들인다. 어려움을 겪었기에 다른 사람의 아픔까지 헤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월은 연륜이 된다.

지는 해와 차오르는 달을 닮는다

고은의 나는 저녁 무렵의 태양, 저녁노을을 좋아한다. 한낮처럼 강렬하지 않지만 일몰의 햇빛에는 부드러운 온기가 있다. 산과 들, 건물을 황금빛으로 감싸다가 요란하지 않게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고은층의 시간도 어느 면에서는 그 저녁노을을 닮았다. 직장과 조직의 시간표에 맞추어 분주하게 움직이던 때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줄어들고,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선택할 여지가 늘어난다. 빨리 가는 것보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그러나 고은층을 지는 해에만 비유하고 싶지는 않다. 어느 맑은 날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상현달을 바라보면 또 다른 생각이 든다. 상현달은 아직 보름달이 아니다. 절반쯤 모습을 드러냈지만 여전히 차오르고 있다. 이 모습 또한 내가 생각하는 고은층과 잘 어울린다.

살아온 날이 많다고 해서 사람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새롭게 배울 것이 있고 고쳐야 할 습관이 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아직 해 보지 못한 일도 남아 있다. 몸의 시간은 저녁을 향해 가더라도 생각과 마음은 보일 듯 말 듯 하늘의 상현달과 닮아 있다. 그래서 고은층의 삶에는 정중동(靜中動)이 어울린다. 겉으로는 이전보다 조용해 보여도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생각이 움직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운동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어제보다 조금 나은 자신을 만들어 간다.

저녁 해의 고요와 상현달의 차오름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함께 놓고 보면 하나의 지혜가 된다. 저녁 해는 내려놓을 때를 가르쳐 주고, 차오르는 달은 아직 고숙(高熟)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고은층에게는 물러날 줄 아는 여유와 계속 배우려는 마음이 함께 필요하다.

오래 익은 것에는 저마다의 맛이 있다

가을도 고은층과 닮은 점이 많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산과 들의 나뭇잎은 저마다 다른 빛깔로 물든다. 봄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움이라면 붉게 물든 단풍에는 뜨거운 여름을 지나온 뒤에야 나타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도 세월에 따라 아름다움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 같다. 젊은 날에는 생기와 활력이 돋보였다면 고은층의 아름다움은 고숙과 고품(高品)에서 배어 나온다.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 필요한 말을 따뜻하게 건네는 사람에게서 깊은 고품이 느껴진다.

오래 익은 된장도 생각난다. 된장은 시간을 건너뛰어 만들 수 없다. 기다리고 익어야 특유의 구수한 맛이 난다. 사람의 생각도 비슷하다. 오래 살았다고 저절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살아온 경험을 마음속에서 삭이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의 말에는 다른 맛이 생긴다. 그래서 고은층에게는 기다림과 조절, 절제가 중요하다. 아는 것을 모두 말할 필요도 없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나 곧바로 주장할 필요도 없다. 한마디 덜 하는 것이 나을 때가 있고, 조금 기다려 주는 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길일 때도 있다. 오래 익은 된장의 맛처럼 은근하게 배어 나오는 것이 좋다.

잘 익은 수박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본다. 겉만 보아서는 그 속을 알기 어렵지만, 갈라 보면 붉고 달고 시원한 속살이 드러난다. 고은층도 이처럼 겉모습보다 속마음이 깊고 따뜻하면 좋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사랑과 정을 담백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붉게 익은 대추도 그렇다. 시간이 흐르면서 겉에는 주름이 늘어나지만, 그 안에는 농익은 단맛이 깊이 배어 있다. 사람의 얼굴에 생긴 주름도 긴 세월을 살아온 흔적이다. 나이가 들면서 얼굴의 주름을 모두 지울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의 모서리는 얼마든지 둥글게 다듬을 수 있다. 평소 인간관계에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항상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려본다. 일상에서 갈등이 생기더라도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해 본다. 그러면 얼굴의 주름에는 단순한 세월의 흔적을 넘어 삶의 온기와 깊이가 담길 것이다.

고추처럼 할 말은 하고 감초처럼 어울린다

이번에는 고추(高秋)가 아니라 밭에서 붉게 익어 가는 고추를 생각해 본다. 잘 익은 고추에는 은근한 단맛도 있고 매운맛도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맛이 고은층에게 함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모든 일에 “좋다” 하는 것이 어른의 관용은 아니다.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때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에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지켜야 할 원칙과 기준이 있다면 관계가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필요한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다만 그 매운맛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말과 젊은 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말은 삼가야 한다. 과거의 경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말은 자칫 아집과 편견으로 비치기 쉽다. 고추의 매운맛도 음식 전체의 맛을 살릴 만큼이면 충분하다. 지나치면 다른 맛을 모두 덮어 버린다.

그래서 고추 곁에는 감초를 놓아 보고 싶다. 우리는 여러 곳에 빠지지 않고 어울리며 제 역할을 하는 사람을 두고 ‘약방의 감초’라고 한다. 고은층의 역할도 때로 이와 닮았으면 한다. 자신이 언제나 주인공이 되기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준다. 부족한 곳을 메우며, 젊은 세대가 앞으로 나아갈 때 조용히 뒤를 받쳐 주는 것이다.

경험과 지혜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보다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묻지 않았는데 앞서 가르치기보다 필요로 할 때 들려준다. 자리를 차지하기보다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자신의 경험을 기꺼이 보태준다.
따라서 고추의 원칙과 감초의 조화가 함께해야 한다. 할 말을 해야 할 때는 분명하게 한다. 평소에는 따뜻하고 유연한 사람이 된다. 또한 중심은 지키되 그 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지 않아야 한다. 이들 모두가 내가 생각하는 고은층의 어른다운 모습이다.

맺음글
자연을 닮아간다는 것

돌이켜보면 자연과 우리 곁의 익숙한 것들은 참 여러 모습으로 삶의 지혜를 들려준다. 저녁 해는 물러날 줄 아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차오르는 달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배우고 고숙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가을 단풍은 계절에 따라 아름다움의 빛깔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래 익은 된장은 기다림과 깊이를, 수박은 속 깊고 담백한 마음을 나타낸다. 대추는 세월 속에서 익어가는 온정을 생각하게 한다. 고추에서는 필요한 원칙을 배우고, 감초에서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지혜를 배운다.

그러나 어느 하나만 닮아서는 부족하다. 늘 부드럽기만 하면 중심을 잃기 쉽고, 언제나 원칙만 앞세우면 사람을 잃을 수 있다. 고요하기만 하면 삶이 메마를 수 있고, 끊임없이 움직이기만 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어렵다. 자연의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 다른 빛깔과 모습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은층도 그러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가지 색깔만 강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맛과 빛깔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다. 받아들일 줄 알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고요하면서도 마음은 계속 움직인다. 속은 깊어지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필요할 때는 원칙을 말하되 대부분의 시간에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 준다.

그동안 나는 고추(高秋)를 인생의 한 시절로 생각해 왔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고추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그 답의 하나를 자연을 닮아가는 삶에서 찾고 싶다.

"지는 해처럼 따뜻하게 물러날 줄 알고, 차오르는 달처럼 여전히 배우며 살아가는 삶이다. 오래 익은 열매처럼 생각은 깊어지고 마음은 넉넉해진다. 때로는 고추처럼 맵싸한 기개로 원칙을 지키되, 평소에는 감초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 주며 살아간다."

고은층의 고추(高秋)는 이미 완성된 계절이 아니다. 오히려 긴 세월을 품고도 오늘을 새롭게 살아가며 조금씩 더 익어 가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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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도 다시 길을 찾는다: 고은층의 삶에서 배운 길의 지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영화 한 장면에서 삶의 길을 생각하다


지난 토요일 밤 교육방송 명화극장에서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보았다. 글이 막혀 답답해하던 젊은 셰익스피어가 점성술과 상담을 겸하는 닥터 모스를 찾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은 길을 가다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볼 수도 있고, 주변 사람에게 길을 물을 수도 있다. 때로는 잠시 머물러 새로운 길이 보이기를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오래전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선택과목으로 들었던 경제학과 송 교수님의 강의에서 인상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교수나 연구자가 학문의 길을 오래가려면 하나의 주전공만 붙들고 있기보다 주전공과 더불어 두 개 정도의 부전공을 가지는 것이 좋다는 말씀이었다. 주전공 연구가 막히면 잠시 다른 분야를 연구하다가 어느 순간 막혔던 문제가 풀리면 다시 주전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한쪽의 연구가 막혀도 학문의 길 자체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는 연구자의 공부 방법으로 들었지만,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학문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했다. 어떤 때는 스스로 길을 정해 걸었고, 어떤 때는 부모나 스승, 조직과 사회가 정해 놓은 길을 걸었다. 때로는 남들이 가는 길이 옳겠거니 하며 별생각 없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기도 했다. 이제 고은층(高恩層)이 되어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한 번도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다시 길을 찾느냐에 있었던 것 같다.

길은 언제나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길이란 이미 나 있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눈이 많이 내린 날 길을 나서면 어른들은 낮은 곳보다 높은 곳을 살펴 걸으라고 했다. 바람이 불면 눈이 낮은 곳부터 깊게 쌓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이 있으면 그 자국을 따라 걷기도 했다. 눈으로 길이 잘 보이지 않아도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은 훌륭한 길잡이가 되었다.

인생에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먼저 살아간 부모와 스승의 발자국을 따라 배우고, 앞서간 학자들의 연구를 읽으며 학문의 길을 찾았다. 남의 길을 따른다고 해서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처음 걷는 사람에게 앞사람의 발자국만큼 좋은 이정표도 드물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길을 익혀 가는 과정이다. 언제까지나 다른 사람의 발자국만 밟으며 살 수는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왜 그곳으로 가려하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요즈음 즐기는 파크골프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낀다. 처음 가는 파크골프장에서는 많은 사람이 공을 쳐 한쪽의 잔디가 닳거나 흙이 드러난 곳을 보면 대강의 동선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공략은 지형에 따라 달라진다. 경사진 곳에서는 높은 쪽과 낮은 쪽을 살펴야 하고, 평지에서도 물이 흐르는 방향을 보면 지형의 기울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같은 홀을 공략하더라도 사람의 힘과 기술, 구질과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길은 달라진다.

산도 마찬가지다. 오르는 길과 내려오는 길은 같은 길이어도 몸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다르다. 결국 길은 지형에 따라 다르고, 사람에 따라 다르며, 때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길 또한 그러하다. 남에게 좋은 길이라고 반드시 나에게도 좋은 길인 것은 아니다. 젊은 날 옳았던 길이 지금도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길이 의심스러우면 멈추고 돌아본다

1970년 학창 시절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가 하산하던 때가 생각난다.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어느 순간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내려가면 더 빨리 갈 수도 있었지만, 의심을 품은 채 계속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발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와 길이 갈라진 곳에서 다시 방향을 살폈다. 돌이켜보면 잘한 선택이었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길이 의심스러울 때 되돌아가는 것은 후퇴가 아니다. 더 멀리 잘못 가기 전에 돌아와 다시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만 더 가보자’며 잘못된 길을 고집한다. 이미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되돌아가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산에서는 잘못 든 길을 오래 갈수록 위험해진다. 인생에서도 잘못된 선택을 오래 붙들수록 되돌아오는 데 더 많은 대가가 따른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렌스 신부는 서두르는 로미오에게 말한다. “Wisely and slow. They stumble that run fast.” 현명하게, 그리고 천천히 가라. 서둘러 달리는 사람은 넘어지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동양의 지혜로 옮겨 보면 『논어』 「자로」의 욕속즉부달(欲速則不達), 곧 너무 빨리 이루려 하면 오히려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젊은 시절에는 빨리 가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남보다 먼저 가고 더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어느 길인지 분명하지 않을 때는 빨리 가는 것보다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 모르면 묻고, 의심스러우면 멈추고, 잘못 들었다면 돌아올 줄 알아야 한다. 돌아선다고 해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모두 헛된 것도 아니다. 잘못 든 길도 다음 길을 선택하는 데 필요한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걸어본다

대학원 시절 송 교수님의 말씀이 세월이 흐른 뒤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 길이 막혔다고 모든 길이 막힌 것은 아니다. 주전공 연구가 풀리지 않을 때 부전공 연구를 하듯이, 한 일을 잠시 내려놓고 다른 일을 하다 보면 뜻밖의 곳에서 답을 얻기도 한다.

글을 쓰다가 문장이 막히면 억지로 책상 앞에 붙들려 있기보다 밖으로 나가 걷는다. 산책을 하다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파크골프를 하다가 사람들과 나눈 말 한마디에서 글감이 생기기도 한다. 책에서 찾지 못했던 답을 사람에게서 얻고, 사람에게서 얻지 못한 답을 자연에서 얻기도 한다. 한 길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 반드시 방황은 아니다. 때로는 우회가 또 다른 전진이 된다.

그래서 길을 잃었을 때 나는 세 가지를 생각한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고, 그래도 보이지 않으면 잠시 기다려 보는 것이다.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답을 찾는 것이고, 묻는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조급하게 답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주전공의 문제가 풀릴 때까지 부전공을 공부하듯이 다른 길을 걸으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길은 가만히 멈춰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길을 성실하게 걷는 동안 문득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맺음글
유유자작, 나의 길을 나의 걸음으로

긴 인생길을 돌아보면 언제나 내가 선택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부모와 스승이 일러준 길도 걸었고, 조직과 시대가 요구하는 길도 걸었다. 때로는 남들이 많이 가는 길을 별 의심 없이 따라가기도 했다.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온 적도 있고,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 때도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길과 우회와 되돌아섬이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 고은층이 되어서는 길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남보다 빨리 가는 것보다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아는 것이 중요해졌다. 다른 사람의 발자국을 참고하되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는다. 내가 오래 걸어온 길이라고 해서 끝까지 고집하지도 않는다. 필요하면 멈추고, 돌아보고, 묻고, 기다리며, 때로는 다른 길을 걸어본다.

내가 여러 글에서 말해 온 유유자작(悠悠自作)의 삶도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길을 스스로 정하되 서두르지 않고, 한 번 정한 길에 자신을 가두지도 않는 삶이다. 길이 달라지면 보폭도 달리하고, 때가 아니면 기다리며, 길을 잘못 들었다면 다시 돌아설 수 있는 여유와 주체성을 갖는 것이다.

젊은 날에는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중요했다. 이제는 어디로 가느냐, 그리고 왜 그 길을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잠시 멈추어도 좋다. 잘못 들었다면 돌아가도 좋고,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걸어도 좋다. 길을 잃었다고 인생까지 잃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길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이 정해 준 길을 무작정 따라가기보다 내가 갈 길을 스스로 살피며 걷고 싶다. 서두르지 않되 멈추지 않고, 고집하지 않되 중심을 잃지 않는 길이다.
나의 길을, 나의 걸음으로 걷는다.
길을 잃으면 다시 찾고,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살피면서 그렇게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싶은 고은층의 유유자작이다.

참고자료
· John Madden 감독, Shakespeare in Love, 1998. 각본 Marc Norman·Tom Stoppard.
· William Shakespeare, Romeo and Juliet, Act 2, Scene 3: “Wisely and slow. They stumble that run fast.”
· 『논어(論語)』 「자로(子路)」 제17장: “欲速則不達.”

사진. 정상오 박사 주관으로 사공클럽 회원들과 함께 찾은 대구 동구 불로파크골프장 전경. 2026. 9. 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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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인원보다 오래 남은 것:
낙동강변 파크골프 소풍에서 나를 돌아보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좋은 사람, 좋은 곳, 좋은 날이 만든 소풍


어제 구미 낙동강변에 자리한 동락과 양포파크골프장에서 하루 종일 파크골프 놀이 소풍을 했다. 함께한 사람은 서귀포 칠십리파크골프장에서 인연을 맺은 이 선생과, 구미 어울림파크골프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정 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이었다. 나까지 네 사람이 가을 문턱의 하루를 함께했다.

나는 파크골프를 단순한 운동이라기보다 ‘놀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에 매이지 않고, 걸으며 이야기하고 웃으며 사람을 만나는 놀이이다.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 좋은 날씨까지 만난다면 운동은 어느새 놀이이자 소풍이 된다. 어제가 꼭 그런 하루였다.

사람·장소·날씨, 세 가지 복이 함께하다

이 선생은 서귀포 칠십리파크골프장에서 만난 사람이다. 영남대 사범대  졸업 후 중등교사로 평생 일했고 교회 장로로서 살아온 그는 믿음과 심지가 굳은 사람이다. 파크골프 1급 지도자 자격증까지 가진 고수이기도 하다. 두 정 선생은 어제 처음 만났다. 한 분은 신실한 기독교인이고, 다른 한 분은 일상에서 ‘나무아미타불’을 되뇌며 살아가는 분이었다. 믿음의 길은 서로 달랐지만 사람을 대하는 정성과 삶의 태도에는 닮은 점이 있어 보였다.

세 분 모두 파크골프를 생활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각자 먹을 간식까지 정성스럽게 준비해 왔다. 작은 준비 하나에서도 함께 놀이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고은층의 멋은 약속시간을 지키고, 먹을 것을 조금씩 나누며, 상대가 편안하도록 배려하는 작은 행동 속에서 삶의 품격은 나타난다.

장소도 좋았다. 선산은 예부터 인재향으로 이름난 곳이다. 『택리지』에는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 선산을 품은 구미를 가로질러 낙동강이 흐른다. 강변에 펼쳐진 파크골프장에서 바라보는 물빛은 넉넉했고, 고개를 들면 금오산과 인근의 천생산이 구미의 풍경을 감싸고 있었다.

날씨까지 우리 편이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고 고은층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든 계절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비로소 가을이 문 앞까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맑은 하늘 사이로 구름이 햇볕을 적당히 가려주었고,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사람 탓도, 장소 탓도, 날씨 탓도 할 것이 없는 날이었다. 서귀포에서 한라산과 태평양을 바라보며 파크골프를 즐기던 날들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가을 소풍이었다.

동락에서 배운 파크골프 놀이의 맛

처음 만난 두 분과 인사를 나누고 준비해 온 간식을 함께 먹은 뒤 동락파크골프장에서 놀이를 시작했다. 첫 홀은 언제나 조금 조심스럽다. 그런데 뜻밖에도 첫 홀부터 버디가 나왔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몇 홀을 지나자 이 선생이 작은 놀이 하나를 제안했다. 두 편으로 나누어 경기하되 진 팀이 다음 홀에서 이긴 팀의 공을 티잉 그라운드에 올려주자는 것이었다. 대단한 내기도 아니고 상품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작은 규칙 하나가 놀이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만들었다.

지면 상대방의 공을 올려주면서 겸손해지고, 이기면 공을 올려주는 상대에게 감사하게 된다. 서로 이겼다 졌다 하면서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니 승부보다는 웃음이 앞섰다. 파크골프의 재미가 바로 이런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는 기쁨도 있지만 함께 놀이하는 즐거움이 더 오래 남는다.

18홀을 마쳤는데도 점심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9홀을 더 돌았다. 그리고 점심을 먹은 뒤에도 오후 놀이를 계속하기로 자연스럽게 뜻이 모였다. 점심은 이 선생이 계산했고 나는 인근 카페에서 차를 대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금씩 주고받았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파크골프와 비슷한지 모른다. 한쪽만 계속 주거나 받기보다 서로 조금씩 주고받을 때 오래 편안하게 이어진다.

양포 96m 홀인원, 공 하나가 인연의 다리가 되다

오후에는 양포파크골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 가보는 구장이어서 첫 9홀은 코스를 익힌다는 마음으로 돌고, 이후 다시 편을 나누어 놀이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5번 홀, 96m 파 4였다. 티샷을 한 뒤 공이 그린 가까이 가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그 이후 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공이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함께 걷던 두 사람이 “무언가 맞는 소리가 났다”며 홀인원일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라고 웃었다. 96m 파 4에서의 홀인원이라니 나 자신도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홀 가까이 가보니 정말 공이 홀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일행과 함께 웃으며 기념사진도 남겼다.

나는 평소 파크골프를 두고 “운이 아홉이고 기량이 하나이다”라고 얘기를 한다. 특히 홀인원은 잘 쳤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방향과 거리뿐 아니라 잔디 상태와 경사, 바람과 공의 구름까지 맞아야 한다. 그래서 내게 이날의 홀인원은 실력의 자랑이라기보다 그날 찾아온 하나의 행운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진짜 행운은 홀인원 자체보다 그 뒤에 이어졌다. 경기를 마치고 남은 간식을 먹으며 쉬다가 문득 구미에 사는 오랜 인연의 김 관장이 생각났다. 젊은 시절 경북도의회와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고, 훗날 영남대 행정대학원에서 그의 석사과정 논문을 지도하기도 했다. 마침 홀인원 기념으로 일행과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으니 시간이 된다면 그도 불러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반갑게 통화가 되었고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오전에는 서로 몰랐던 사람들이 오후의 공 하나를 계기로 저녁 한자리에 앉게 되었다.

홀인원보다 더 반가웠던 새로운 인연

운동 중 간식을 많이 먹어 시장기가 크지 않았기에 우리는 인근 본죽집에서 가볍게 저녁을 먹기로 했다. 김 관장은 처음 만난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구미의 오늘과 내일로 이어졌다. 오래 구미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지역의 미래를 생각하는 이야기가 어우러지면서 식사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날의 홀인원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 홀인원은 그냥 홀인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 ‘인연의 홀인원’인 것 같습니다.”

96m를 날아간 공 하나가 다섯 사람을 한 식탁에 앉혔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브리지 홀인원’, 나아가 ‘복의 홀인원’이라고 불렀다. 김 관장도 파크골프채를 가지고 있고 몇 차례 운동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다음에는 다섯 사람이 함께 파크골프 소풍을 하자며 뜻을 모았다.

생각해 보면 인연은 거창한 계획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 한 번의 전화, 함께 한 식사 자리, 운동장에서 일어난 뜻밖의 행운이 또 다른 인연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고은층이 되어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을 이해관계보다 인연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맺음글
홀인원보다 오래 남은 세 가지 아쉬움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대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하루를 되돌아보는데 홀인원의 기쁨과는 다른 생각이 마음 한쪽에서 올라왔다. ‘오늘 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를 나눴는가?’

돌이켜보니 나는 듣기보다 말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묻고 경청하기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려 했다. 미래의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과거 내가 경험하고 관여했던 일, 특히 구미와 관련된 옛이야기를 많이 꺼냈다.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세우는 말보다 자칫 나를 알리고 내 경험을 드러내는 것으로 들릴 만한 이야기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오랜 교수 생활에서 몸에 밴 습관인지도 모른다. 가르치고 설명하고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 오랫동안 나의 일이었다. 직업에서는 필요했던 습관이 은퇴 이후의 인간관계에서는 때로 내려놓아야 할 습관이 될 수도 있다. 오래된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대구 집에 도착해서도 그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아침에 눈을 뜬 뒤에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성경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야고보서 1장 19절)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말인지도 모른다. 조금 더 듣고, 과거의 나보다 앞으로의 우리를 이야기하며, 나를 드러내기보다 상대방을 세워주는 것  말이다. 이것이 내가 앞으로 더 익혀야 할 고은층의 말하기이고 사람을 대하는 품격일 것이다.

어제 하루에는 좋은 사람도 있었고, 좋은 장소도 있었으며, 좋은 날씨도 있었다. 뜻밖의 96m 홀인원이라는 행운도 있었고 새로운 인연도 생겼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나니 홀인원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 일이었다.

고은층의 삶은 이미 굳어진 나의 습관을 “이 나이에 어찌할 것인가?” 하고 그대로 두는 삶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늦더라도 하나씩 고쳐가고,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품격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고은층답게 나이 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파크골프 소풍에서는 공을 조금 덜 쳐도 괜찮다.
대신 조금 더 듣고, 조금 덜 말하고, 사람의 이야기를 더 오래 마음에 담아보자고 다짐해 본다.
96m 홀인원보다 그것이 내게는 더 어려운 도전이자, 더 값진 홀인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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