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인원보다 오래 남은 것:
낙동강변 파크골프 소풍에서 나를 돌아보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좋은 사람, 좋은 곳, 좋은 날이 만든 소풍
어제 구미 낙동강변에 자리한 동락과 양포파크골프장에서 하루 종일 파크골프 놀이 소풍을 했다. 함께한 사람은 서귀포 칠십리파크골프장에서 인연을 맺은 이 선생과, 구미 어울림파크골프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정 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이었다. 나까지 네 사람이 가을 문턱의 하루를 함께했다.
나는 파크골프를 단순한 운동이라기보다 ‘놀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에 매이지 않고, 걸으며 이야기하고 웃으며 사람을 만나는 놀이이다.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 좋은 날씨까지 만난다면 운동은 어느새 놀이이자 소풍이 된다. 어제가 꼭 그런 하루였다.
사람·장소·날씨, 세 가지 복이 함께하다
이 선생은 서귀포 칠십리파크골프장에서 만난 사람이다. 영남대 사범대 졸업 후 중등교사로 평생 일했고 교회 장로로서 살아온 그는 믿음과 심지가 굳은 사람이다. 파크골프 1급 지도자 자격증까지 가진 고수이기도 하다. 두 정 선생은 어제 처음 만났다. 한 분은 신실한 기독교인이고, 다른 한 분은 일상에서 ‘나무아미타불’을 되뇌며 살아가는 분이었다. 믿음의 길은 서로 달랐지만 사람을 대하는 정성과 삶의 태도에는 닮은 점이 있어 보였다.
세 분 모두 파크골프를 생활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각자 먹을 간식까지 정성스럽게 준비해 왔다. 작은 준비 하나에서도 함께 놀이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고은층의 멋은 약속시간을 지키고, 먹을 것을 조금씩 나누며, 상대가 편안하도록 배려하는 작은 행동 속에서 삶의 품격은 나타난다.
장소도 좋았다. 선산은 예부터 인재향으로 이름난 곳이다. 『택리지』에는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 선산을 품은 구미를 가로질러 낙동강이 흐른다. 강변에 펼쳐진 파크골프장에서 바라보는 물빛은 넉넉했고, 고개를 들면 금오산과 인근의 천생산이 구미의 풍경을 감싸고 있었다.
날씨까지 우리 편이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고 고은층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든 계절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비로소 가을이 문 앞까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맑은 하늘 사이로 구름이 햇볕을 적당히 가려주었고,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사람 탓도, 장소 탓도, 날씨 탓도 할 것이 없는 날이었다. 서귀포에서 한라산과 태평양을 바라보며 파크골프를 즐기던 날들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가을 소풍이었다.
동락에서 배운 파크골프 놀이의 맛
처음 만난 두 분과 인사를 나누고 준비해 온 간식을 함께 먹은 뒤 동락파크골프장에서 놀이를 시작했다. 첫 홀은 언제나 조금 조심스럽다. 그런데 뜻밖에도 첫 홀부터 버디가 나왔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몇 홀을 지나자 이 선생이 작은 놀이 하나를 제안했다. 두 편으로 나누어 경기하되 진 팀이 다음 홀에서 이긴 팀의 공을 티잉 그라운드에 올려주자는 것이었다. 대단한 내기도 아니고 상품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작은 규칙 하나가 놀이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만들었다.
지면 상대방의 공을 올려주면서 겸손해지고, 이기면 공을 올려주는 상대에게 감사하게 된다. 서로 이겼다 졌다 하면서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니 승부보다는 웃음이 앞섰다. 파크골프의 재미가 바로 이런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는 기쁨도 있지만 함께 놀이하는 즐거움이 더 오래 남는다.
18홀을 마쳤는데도 점심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9홀을 더 돌았다. 그리고 점심을 먹은 뒤에도 오후 놀이를 계속하기로 자연스럽게 뜻이 모였다. 점심은 이 선생이 계산했고 나는 인근 카페에서 차를 대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금씩 주고받았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파크골프와 비슷한지 모른다. 한쪽만 계속 주거나 받기보다 서로 조금씩 주고받을 때 오래 편안하게 이어진다.
양포 96m 홀인원, 공 하나가 인연의 다리가 되다
오후에는 양포파크골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 가보는 구장이어서 첫 9홀은 코스를 익힌다는 마음으로 돌고, 이후 다시 편을 나누어 놀이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5번 홀, 96m 파 4였다. 티샷을 한 뒤 공이 그린 가까이 가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그 이후 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공이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함께 걷던 두 사람이 “무언가 맞는 소리가 났다”며 홀인원일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라고 웃었다. 96m 파 4에서의 홀인원이라니 나 자신도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홀 가까이 가보니 정말 공이 홀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일행과 함께 웃으며 기념사진도 남겼다.
나는 평소 파크골프를 두고 “운이 아홉이고 기량이 하나이다”라고 얘기를 한다. 특히 홀인원은 잘 쳤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방향과 거리뿐 아니라 잔디 상태와 경사, 바람과 공의 구름까지 맞아야 한다. 그래서 내게 이날의 홀인원은 실력의 자랑이라기보다 그날 찾아온 하나의 행운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진짜 행운은 홀인원 자체보다 그 뒤에 이어졌다. 경기를 마치고 남은 간식을 먹으며 쉬다가 문득 구미에 사는 오랜 인연의 김 관장이 생각났다. 젊은 시절 경북도의회와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고, 훗날 영남대 행정대학원에서 그의 석사과정 논문을 지도하기도 했다. 마침 홀인원 기념으로 일행과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으니 시간이 된다면 그도 불러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반갑게 통화가 되었고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오전에는 서로 몰랐던 사람들이 오후의 공 하나를 계기로 저녁 한자리에 앉게 되었다.
홀인원보다 더 반가웠던 새로운 인연
운동 중 간식을 많이 먹어 시장기가 크지 않았기에 우리는 인근 본죽집에서 가볍게 저녁을 먹기로 했다. 김 관장은 처음 만난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구미의 오늘과 내일로 이어졌다. 오래 구미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지역의 미래를 생각하는 이야기가 어우러지면서 식사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날의 홀인원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 홀인원은 그냥 홀인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 ‘인연의 홀인원’인 것 같습니다.”
96m를 날아간 공 하나가 다섯 사람을 한 식탁에 앉혔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브리지 홀인원’, 나아가 ‘복의 홀인원’이라고 불렀다. 김 관장도 파크골프채를 가지고 있고 몇 차례 운동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다음에는 다섯 사람이 함께 파크골프 소풍을 하자며 뜻을 모았다.
생각해 보면 인연은 거창한 계획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 한 번의 전화, 함께 한 식사 자리, 운동장에서 일어난 뜻밖의 행운이 또 다른 인연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고은층이 되어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을 이해관계보다 인연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맺음글
홀인원보다 오래 남은 세 가지 아쉬움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대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하루를 되돌아보는데 홀인원의 기쁨과는 다른 생각이 마음 한쪽에서 올라왔다. ‘오늘 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를 나눴는가?’
돌이켜보니 나는 듣기보다 말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묻고 경청하기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려 했다. 미래의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과거 내가 경험하고 관여했던 일, 특히 구미와 관련된 옛이야기를 많이 꺼냈다.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세우는 말보다 자칫 나를 알리고 내 경험을 드러내는 것으로 들릴 만한 이야기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오랜 교수 생활에서 몸에 밴 습관인지도 모른다. 가르치고 설명하고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 오랫동안 나의 일이었다. 직업에서는 필요했던 습관이 은퇴 이후의 인간관계에서는 때로 내려놓아야 할 습관이 될 수도 있다. 오래된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대구 집에 도착해서도 그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아침에 눈을 뜬 뒤에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성경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야고보서 1장 19절)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말인지도 모른다. 조금 더 듣고, 과거의 나보다 앞으로의 우리를 이야기하며, 나를 드러내기보다 상대방을 세워주는 것 말이다. 이것이 내가 앞으로 더 익혀야 할 고은층의 말하기이고 사람을 대하는 품격일 것이다.
어제 하루에는 좋은 사람도 있었고, 좋은 장소도 있었으며, 좋은 날씨도 있었다. 뜻밖의 96m 홀인원이라는 행운도 있었고 새로운 인연도 생겼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나니 홀인원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 일이었다.
고은층의 삶은 이미 굳어진 나의 습관을 “이 나이에 어찌할 것인가?” 하고 그대로 두는 삶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늦더라도 하나씩 고쳐가고,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품격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고은층답게 나이 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파크골프 소풍에서는 공을 조금 덜 쳐도 괜찮다.
대신 조금 더 듣고, 조금 덜 말하고, 사람의 이야기를 더 오래 마음에 담아보자고 다짐해 본다.
96m 홀인원보다 그것이 내게는 더 어려운 도전이자, 더 값진 홀인원일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