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명의 인연이 비춰 준 나의 자화상: 다섯 가지 삶의 모습과 성찰"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타인의 기억으로 돌아보는 나의 인생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삶의 모습은 자신의 기억 속에만 남지 않는다. 함께 일하고 배우며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남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기억하는 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 온 발자취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기억 속에 남겨진 또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필자는 최근 우리 사회의 원로 인사들이 평생의 활동과 업적으로 남긴 이름과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인사유명(人死留名)’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세월의 흐름과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한평생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어떤 일을 하였으며,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가는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서 2020년 12월 펴낸 회상록 『신영 이성근 교수를 생각하다』를 다시 펼쳐 보았다.
이 회상록은 필자와 소중한 인연을 맺은 221명의 지인이 남긴 회상의 글을 엮은 것이다. 스승과 선배, 동료와 동문, 제자와 연구자, 정책활동의 동반자, 이웃과 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계에서 만난 사람들이 필자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 회상록은 고교계명(高敎啓明), 진덕수업(進德修業), 교학상장(敎學相長), 사제동행(師弟同行), 근학무실(勤學務實), 학해무변(學海無邊), 후생치용(厚生治用), 귀전선린(歸田善隣)의 여덟 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필자가 걸어온 교육과 연구, 사회활동과 인간관계의 발자취이면서 함께한 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이번에 필자는 회상록의 서문과 지인들이 남긴 글 제목을 다시 살펴보면서 자신의 삶을 특징짓는 다섯 가지 핵심 개념을 정리하였다. 첫째는 성실과 원칙, 둘째는 탐구와 배움, 셋째는 창의와 실천, 넷째는 조정과 협력, 다섯째는 배려와 동행이다. 이 다섯 가지는 각각 삶의 중심을 지키는 태도, 학문과 교육을 향한 열정,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로 연결하는 실행력, 사람과 조직을 이어 주는 조정능력, 소중한 인연을 가꾸는 인간적 따뜻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는 필자가 스스로 내세우는 자랑이나 이미 완성한 덕목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인연 속에서 형성된 타인의 기억을 통해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새롭게 가꾸기 위한 다섯 개의 성찰의 거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의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며, 각각의 삶의 모습이 지닌 의미와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실과 원칙의 사람:
삶의 중심을 지키는 꾸준함과 책임감
성실은 맡은 일을 꾸준히 수행하는 태도이며, 원칙은 선택과 판단에서 지켜야 할 기준이다. 성실이 행동의 지속성을 의미한다면 원칙은 행동의 방향을 결정한다.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사람의 삶에는 신뢰와 책임이 쌓인다. 회상록에서 이문조 학장님은 「성실과 근면 그리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이덕복 박사는 「선배 이성근 교수는 성실함의 본보기였다」라는 제목으로 필자를 기억하였다. 이주석 행정부지사 겸 원장은 「소신과 원칙이 뚜렷한 학자」라는 제목을 남겼다. 서로 다른 시기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성실과 원칙을 공통적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은 필자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필자는 1980년 3월 영남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2018년 2월 정년을 맞기까지 38년 동안 교육과 연구에 종사하였다. 그동안 대학의 보직과 연구기관 운영,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자문 등 여러 역할을 맡았다. 활동 영역과 일의 성격은 달라졌지만, 맡은 일에는 책임을 다하고 처음 세운 목표를 끝까지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때로는 여러 과제가 동시에 주어지기도 하였으나, 주어진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시간과 역량을 쏟았다. 이러한 자세가 지인들에게 성실과 원칙의 모습으로 기억되었다면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성실과 원칙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일에 대한 높은 기준은 자신에게 과도한 부담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함이나 완고함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일의 성과에 몰두한 나머지 상대방의 사정과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원칙을 지키는 것과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서로 배치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성실함이 지나친 집착이 되지 않고, 원칙이 경직된 고집으로 흐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생 후반기에 성실과 원칙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젊은 시절에는 직업적 성취와 사회적 책임을 위한 자세였다면, 이제는 자신의 건강과 생활을 스스로 관리하고 삶의 중심을 지키는 태도가 된다. 정해진 생활의 리듬을 유지하고, 몸과 마음을 돌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도 성실의 실천이다. 무엇보다 성실하되 무리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되 유연함을 잃지 않는 삶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고은층이 지향하는 균형 잡힌 생활의 기본이기도 하다.
탐구와 배움의 사람:
가르치면서 배우고 함께 성장한 교학상장
교수의 직분은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지만, 그 바탕에는 끊임없는 탐구와 배움이 자리하고 있다.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지식을 다시 확인하고, 제자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며, 연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시야를 넓혀 가기 때문이다. 배움은 가르침의 준비이면서 가르침을 통해 더욱 깊어지는 과정이다. 회상록에서 허재원 선생은 「천생(天生) 교수이신 나의 지도교수님」이라는 제목을, 곽명희 선생은 「늘 공부하시던 선생님」이라는 제목을 남겼다. 김길곤 교수 겸 목사의 「배우고 가르치고 배우는 인생 여정」과 윤성현 선생의 「지역개발학의 발전을 꿈꾸는 소년, 이성근」이라는 제목에서도 학문적 탐구와 교육에 대한 필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필자는 젊은 시절부터 행정학과 도시 및 지역계획학, 지역개발학 등을 공부하면서 교육과 연구를 삶의 중요한 축으로 삼았다. 대학 강의와 학술연구를 수행하는 한편, 대학원생들의 학위논문을 지도하면서 수많은 제자와 인연을 맺었다. 특히 일반대학원과 행정대학원, 환경대학원 등에서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는 대학원생들을 지도하던 시간들은 지금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때로는 이른 아침이나 주말에도 만나 연구과제를 논의하고, 이론과 현장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였다. 제자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현장의 경험과 새로운 시각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는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를 성장시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실천이었다.
학문적 탐구에는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함께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확인하는 과정도 따른다. 연구를 거듭할수록 세상은 단순한 이론이나 하나의 관점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제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성장을 돕는 과정임을 배우게 된다. 회상록의 교학상장, 사제동행, 학해무변이라는 부제에도 이러한 교수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배우고 성장하며, 학문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정신이다.
정년 이후에도 탐구와 배움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직업적 의무에서 벗어난 배움은 새로운 자유와 즐거움을 준다. 필자가 인생 후반기에 사색과 글쓰기를 이어 가는 것도 배움의 연장이다. 이제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일 못지않게 오랜 경험을 성찰하고 지혜로 전환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젊은 시절의 배움이 전문성과 성취를 위한 것이었다면, 인생 후반기의 배움은 자신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하는 과정이다. 배움이 지속되는 한 인생의 성장 또한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창의와 실천의 사람: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현실로 연결하는 실행력
창의는 기존의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실천은 그 가능성을 구체적인 행동과 성과로 연결하는 힘이다. 창의가 새로운 길을 구상하는 일이라면 실천은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일이다. 두 가지가 결합할 때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이 열린다. 회상록에서 최용호 교수 겸 이사장님은 「창의적이고 기획력이 강한 이성근 교수」라는 제목을 남겼다. 이재훈 원장 겸 교수는 필자를 한국 테크노파크의 「기획자이자 산파(産婆)」로 기억하였으며, 윤광재 학장은 「이성근 교수님은 행동가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나중규 박사의 「항상 새로운 것을 준비하고 계획하던 원장님을 기억하며」라는 제목도 이러한 특징과 맞닿아 있다.
필자는 학문적 연구성과가 현실의 문제 해결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다. 행정학과 지역개발학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와 지역의 발전을 위한 정책과 제도를 연구하는 응용사회과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와 교육뿐 아니라 정책의 기획과 실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였다. 대구경북연구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지역발전 정책을 연구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여러 위원회에서 정책자문과 심의활동에 참여한 것도 이러한 학문적 지향의 연장선이었다. 새로운 정책과 사업을 구상하고, 여러 대안을 비교하며,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은 학문과 실천을 연결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과정이 언제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정책환경의 변화와 이해관계의 대립, 제도적 제약과 자원의 부족 등으로 계획이 기대만큼 실현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구상이라도 현실의 여건과 사람들의 공감을 충분히 얻지 못하면 지속적인 성과로 이어지기 어렵다. 이러한 경험은 창의와 실천에 도전하는 용기뿐 아니라 현실을 이해하는 지혜와 결과를 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능력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조정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도 중요하다.
인생 후반기의 창의와 실천은 반드시 큰 사업이나 사회적 성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맞는 생활방식을 설계하고, 새로운 취미를 개발하며, 일상에서 작은 목표를 세워 실천하는 것도 창의적인 삶이다. 필자가 제주에서 농장생활과 파크골프, 산책과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일상을 가꾸어 온 것도 이러한 실천의 한 모습이다. 필자가 추구하는 유유자작(悠悠自作)의 ‘자작’에는 스스로 삶을 설계하고 새로운 의미와 보람을 만들어 가는 능동적 실천의 철학이 담겨 있다. 이제 창의와 실천은 무엇인가를 크게 이루기 위한 수단을 넘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새롭게 가꾸는 생활의 지혜가 되고 있다.
조정과 협력의 사람:
다름을 연결하고 공동의 길을 찾아가는 지혜
사회는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차이는 때로 갈등의 원인이 되지만, 이를 인정하고 공동의 해법을 찾아갈 때 새로운 협력의 가능성이 열린다. 조정은 대립하는 입장을 이해하고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는 과정이며, 협력은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지혜와 역량을 모으는 활동이다. 회상록에서 김혜천 교수 겸 이사장은 필자를 「타고난 갈등조정자」라는 제목으로 기억하였다. 김남일 부시장은 국토균형개발 과정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가교역할을 수행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제목을 남겼다. 우동기 총장 겸 교수, 교육감 겸 위원장의 「30년간 함께 한 협업의 동반자」라는 제목도 사람과 조직을 연결해 온 필자의 활동을 돌아보게 한다.
필자는 대학과 연구기관, 공공부문의 여러 활동을 통해 다양한 사람과 조직을 만났다. 지역개발과 지방자치, 국토균형발전 등의 정책과제는 특정 기관이나 전문가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중앙과 지방, 공공과 민간, 전문가와 주민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필자는 정책의 합리성과 실현 가능성을 함께 고려하면서 서로 다른 의견을 듣고 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갈등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각자의 입장이 형성된 배경을 이해하고 공동의 이익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서로 다른 사람과 조직을 연결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신뢰와 공정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실천이다.
그러나 조정이 언제나 합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때는 어느 쪽도 충분히 만족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있으며, 조정자의 판단 자체가 새로운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지나치게 합의를 중시하면 필요한 결정을 미루거나 원칙을 희생할 위험도 있다. 따라서 조정과 협력에는 전문적 지식과 합리적 판단뿐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듣는 인내, 공정한 태도, 결과에 책임지는 자세가 요구된다. 갈등을 없애는 것만이 조정의 목적은 아니다. 서로 다른 입장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경험은 인생 후반기의 인간관계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가족과 친구, 이웃 사이에서도 생각과 생활방식의 차이는 존재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경험과 판단만을 앞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젊은 시절의 조정과 협력이 정책과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역량이었다면, 인생 후반기에는 인간관계의 평화와 조화를 이루는 생활의 지혜가 된다. 서로를 이기려 하기보다 이해하고, 자신의 주장만 관철하기보다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는 태도가 고은층의 품격을 높여 준다고 생각한다.
배려와 동행의 사람
사람을 아끼고 소중한 인연을 이어 가는 따뜻함
배려는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헤아리는 마음이며, 동행은 그 마음을 지속적인 관계와 행동으로 이어 가는 일이다. 배려가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라면 동행은 삶의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실천이다. 인간관계는 일시적인 만남에서 시작되지만, 서로에 대한 관심과 신뢰가 쌓일 때 오래 지속되는 소중한 인연으로 발전한다. 회상록에서 염태정 논설위원은 「부드러움과 배려」라는 제목을, 신순식 부군수는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의 교수님」이라는 제목을 남겼다. 황성수 교수는 「사람을 아끼시는 이성근 교수님과의 인연」을, 김영수 학장은 「떠난 자리가 그리운 사람」을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기억들은 필자가 사람들과 맺어 온 관계의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필자는 회상록의 서문에서 자신의 삶이 사람 중심의 관계 지향적이라기보다 일 중심의 과업 지향적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실제로 오랜 교수생활과 연구활동, 정책자문을 수행하면서 일에 몰두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러 지인이 배려와 동행의 모습을 기억해 주었다는 사실은 감사한 일이다. 돌이켜 보면 교육과 연구, 사회활동을 통해 맺은 인연들은 단순한 업무 관계에 머무르지 않았다. 함께 공부하고 일하며 어려움을 나누는 과정에서 신뢰가 쌓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스승과 제자, 선후배와 동료를 넘어 삶의 동반자로 이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필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함께 만들어 가는 살아 있는 인연을 ‘생연(生緣)’이라고 부른다. 지역을 매개로 형성되는 지연(地緣)과 학교를 매개로 맺어지는 학연(學緣)이 있다면, 생연은 삶의 과정에서 서로의 경험과 마음을 나누며 지속적으로 가꾸어 가는 인연이다. 따라서 생연은 단순히 과거의 만남으로 주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관심과 실천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관계이다. 정년 이후 제주와 대구를 오가며 산책과 산행, 파크골프와 농장생활을 즐기는 동안에도 이러한 생연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함께 자연을 걷고 운동하며, 농작물을 가꾸고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직업과 지위를 넘어선 새로운 인간관계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에 배려와 동행의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젊은 시절의 인연이 일과 성취를 함께하는 관계였다면, 이제는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살피고 삶의 기쁨과 어려움을 나누는 관계로 변화한다. 오래된 인연을 소중히 지키면서 새로운 만남에도 마음을 열고,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기보다 서로에게 편안한 동반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돌이켜 보면 성실과 원칙, 탐구와 배움, 창의와 실천, 조정과 협력은 필자의 공적인 삶을 이루어 온 중요한 특징이었다. 그러나 배려와 동행은 그러한 삶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따뜻하게 남게 하는 인간적 토대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일의 성취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함께하는 기쁨과 나눔의 가치를 깊이 실천하고자 한다.
맺음말
타인의 기억에서 삶의 지혜로, 유유자작의 길을 가다
인생을 돌아보면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니고 살아간다. 가족에게 보이는 모습과 제자가 기억하는 모습이 다르고, 동료와 친구가 바라보는 모습도 서로 다르다. 어느 하나의 모습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기억과 평가가 모일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삶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회상록 『신영 이성근 교수를 생각하다』에 담긴 221명의 소중한 인연을 다시 돌아보면서 성실과 원칙, 탐구와 배움, 창의와 실천, 조정과 협력, 배려와 동행이라는 다섯 가지 삶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성실과 원칙은 삶의 중심을 지키는 바탕이었고, 탐구와 배움은 학문과 교육의 길을 이어 가는 원동력이었다. 창의와 실천은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도전하는 힘이었으며, 조정과 협력은 사람과 조직을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배려와 동행은 그 모든 활동을 소중한 인연으로 남게 하는 인간적 가치였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는 필자가 완성한 덕목이 아니다.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기억해 준 모습이면서 앞으로 더욱 가꾸어야 할 삶의 과제이다. 지나온 삶의 장점에 감사하되 부족했던 점도 함께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의 성취를 인정하는 일과 한계를 성찰하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삶의 이해는 더욱 깊어진다.
필자는 인생 후반기를 주체적이고 품격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은층(高恩層)이라 부르고, 그들의 생활철학을 유유자작(悠悠自作)으로 설명해 왔다. 유유는 여유와 평정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삶을 음미하는 태도이며, 자작은 스스로 삶을 설계하고 실천하면서 새로운 의미와 보람을 만들어 가는 자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섯 가지 삶의 모습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성실과 원칙은 건강하고 균형 잡힌 생활의 중심이 되고, 탐구와 배움은 인생 후반기의 성장을 이어 가게 한다. 창의와 실천은 새로운 일상을 설계하는 힘이 되며, 조정과 협력은 관계의 조화를 이루게 한다. 배려와 동행은 삶을 따뜻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바탕이 된다.
이제 필자는 평생의 직업적 역할에서 벗어나 또 다른 삶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중요했다면, 인생 후반기에는 어떻게 살아가고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졌다. 사회적 지위와 성취보다는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소중히 여기고, 일의 결과만큼이나 사람들과 나누는 정과 신뢰의 가치를 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221명의 지인이 남긴 회상의 글은 필자에게 단순한 정년 기념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기억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자화상이자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일깨우는 삶의 이정표이다. 그 속에는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할 평가도 있고, 더 깊이 성찰하고 보완해야 할 과제도 담겨 있다.
사람은 세월 앞에서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삶의 품격까지 저절로 늙어 가는 것은 아니다.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 새로운 배움을 이어 가며, 소중한 인연을 가꾸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살아갈 때 인생 후반기는 또 다른 성숙의 계절이 된다. 필자는 앞으로도 성실하게 살되 유연함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되 겸손함을 지키며, 새로운 일을 실천하되 무리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오래된 인연과 새로운 생연을 소중히 가꾸면서 유유자작의 삶을 이어 가고자 한다. 인생의 참된 자화상은 혼자 그리는 그림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온 발자취 위에 함께한 사람들의 기억과 사랑이 더해져 완성되어 가는 그림이다.
[글의 바탕이 된 자료]
이성근(2020). 『신영 이성근 교수를 생각하다』. (사)한국지역균형연구원.
[참고사항]
본 칼럼의 다섯 가지 핵심 개념은 회상록의 서문과 8개 부에 수록된 221명 지인의 회상 글 제목에 나타난 특징을 필자가 해석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221명 전원의 회상 글 전문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내용분석이나 객관적인 성격검사의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https://www.idaegu.com/news/articleView.html?idxno=414364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이성근 교수를 생각하다’ 회상록 출간
◆이성근 교수를 생각하다이성근 지음/한국지역균형연구원/419쪽영남대 명예교수인 이성근 교수가 221명의 지인들로부터 글을 받아 자신의 인생여정을 돌아보는 회상록을 출판했다.글 전체가
ww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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