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 법환포구 남쪽 바다에 자리한 범섬을 만나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범섬은 바다 위 호랑이처럼 깨어 있는 섬이다
제주 서귀포시 법환동 앞바다에 푸른 물결을 가르며 솟아오른 ‘범섬’은 이름 그대로 거대한 호랑이가 엎드려 바다를 응시하는 형상이다. 법환포구 해안에서 처음 마주한 범섬은 단순한 암석 덩어리가 아니었다. 어미 범이 새끼를 품은 듯 고요하면서도, 파도에 맞서
정중동(靜中動)으로 살아 있는 존재처럼 다가왔다.
범섬은 서귀포항과 법환포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에 떠 있는 무인도로, 북위 33.237도, 동경 126.542도에 위치한다. 현무암질의 지질을 기반으로 해식 절벽과 해저 암반이 어우러져 독특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다양한 생물종의 서식지이자 지질학적 가치가 많은 섬이다.
특히 범섬은 풍수지리적으로도 중요한 장소성을 지닌다
한라산의 기운이 뻗어 내려오다가 고근산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 후, 바다 위 범섬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서귀포 혁신도시가 입지하게 되었고, 신시가지가 조성되었으며, 서귀포 월드컵경기장도 들어섰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러한 곳을 ‘길지(吉地)’라 부른다.
필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 국토교통부의 국가공공기관 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위원 및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10개 혁신도시 마스터플랜 심의 중 8곳의 위원장 역할을 맡은 경험이 있다. 또한 충청남도 신도청 이전지인 내포신도시 선정 과정에서도 위원장을 맡았으며, 경상북도 신도청 이전지 선정위원과 신도시 건설 심의위원장으로 활동한 경험도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입지 선정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편이다.
범섬의 굴과 동굴은 생명처럼 살아 숨 쉬는 지형이다
범섬은 ‘큰섬’과 ‘작은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파식 작용으로 형성된 해식 동굴들이 있다. 주민들은 이 동굴들을 ‘큰굴’과 ‘작은굴’, 또는 ‘큰항문’과 ‘작은항문’이라 부르고, 섬의 함몰 지형은 ‘콧구멍’이라 이름지었다. 이는 범섬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하는 제주 사람들의 자연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어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북쪽에는 나란히 뚫린 쌍둥이 동굴이 있어 마치 생명체의 숨구멍처럼 보인다. 파도에 실려 동굴 안으로 들어간 물소리가 메아리칠 때면, 범섬이 마치 숨을 쉬고 울부짖는 듯한 환청이 들린다고 한다. 유람선을 타고 이 장면을 마주한 순간, 자연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닌 ‘주체’가 되었다.
유람선 위에서 범섬의 실체를 바라보다
오늘 아침, 아파트 뒤창 밖으로 유난히 맑게 드러난 한라산을 바라보며, 그간 미뤄온 범섬 유람에 나섰다. 서귀포항을 출발한 유람선은 문섬과 섶섬 사이를 지나고, 해안절벽과 정방폭포와 외돌개를 지나면서 범섬으로 향했다. 바다 위에서 마주한 범섬은 육지에서 보던 모습보다 훨씬 친밀감이 갔고, 더욱 거대함으로 다가왔다.
검은 현무암 절벽은 잔잔한 바다와 극적인 대비를 이루었고, 남쪽 암벽 위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마치 돌부처처럼 앉아 유유자적으로 세상을 낚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아래 바다는 스쿠버다이빙의 명소라고 한다. 과거에는 섬주변에 산호와 어종이 풍부했지만 최근에는 수온 상승과 해양 오염으로 생태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와 섬은 어쩌면 지금, 조용히 그들만의 몸짓으로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범섬은 자연과 인간, 바다와 도시,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있다
유람선이 범섬을 돌며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한라산이 웅장하게 서귀포를 감싸 안고 있다. 그 아래에는 고근산과 함께 서귀포 혁신도시와 신시가지의 현대적 건물들이 질서 있게 자리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강정 해군기지가 이어지고, 그 너머로는 산방산과 송악산이 솟아 있다. 가파도와 마라도도 시야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문섬과 섶섬이 어깨를 나란히 사이좋게 있는 듯하고, 서귀포항과 새섬, 그리고 새연교가 이를 잇고 있다. 이 모든 경관의 중심에 범섬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서귀포의 자연에서 한라산이 육지의 중심축이라면, 범섬은 바다의 중심축이 된다. 범섬은 자연과 인간, 바다와 도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범섬은 일상의 섬이자 사유의 섬이다
나는 서귀포 혁신도시에 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범섬을 바라본다. 법환포구 올레길을 걷다가, 단골 카페 창밖을 바라보다가, 강창학 파크골프장의 즐거움과 아쉬움 속에서도, 국민체육센터의 러닝머신 위나 복지관 휴게실에서도 범섬은 늘 나의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는 어느 쪽이 중심인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내가 범섬을 따라다니는 것인지, 범섬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범섬은 서귀포의 눈동자다. 그 눈으로 한라산을 보고, 도시를 보고, 바다를 본다. 그 시선은 따뜻하며, 침묵 속에서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범섬은 단순한 섬이 아니다. 서귀포의 숨결이며, 그 안에 깃든 이야기의 중심이다.
필자는 우리가 범섬을 어떻게 바라보고 보전하느냐에 따라, 이 섬은 더 큰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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