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靈)으로 이어진 두 산:
영주산을 오르며 영축산을 떠올리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이름이 먼저 길을 열다
산을 오르기 전, 먼저 다가오는 것은 지형이 아니라 이름이다. 제주 영주산을 향한 발걸음보다 앞서 필자의 기억은 고향 창녕 영산면의 주산, 영축산으로 향했다. ‘영(靈)’이라는 한 글자는 신령함의 의미를 넘어, 삶의 시간과 장소를 잇는 보이지 않는 실처럼 작용했다.
영산(靈山)은 산줄기와 물길이 만나는 터전의 기운을 이름에 담아 온 고장이다. 그 중심에 자리한 영축산은 오랜 세월 마을의 일상과 관습을 내려다보며 사람들의 삶을 품어왔다.
영축산의 풍수는 붓을 든 산신
영축산을 둘러싼 전승은 산을 하나의 문필 공간으로 읽는다. 산 앞 좌편의 연지못 ‘먹통’과 넓은 들판 ‘화선지’는 산신령이 붓을 적셔 글을 쓰는 형국으로 전해진다. 이는 자연을 문자처럼 읽고, 삶을 기록하듯 살아온 지역민의 태도를 상징한다.
산신이 목마를 때면 왼편 함박산 약수터의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산과 물, 의례와 생계가 분리되지 않았던 세계관을 드러낸다. 사월초파일이면 약수를 마시러 오르던 행렬과 만개한 벚꽃의 풍경은 공동체가 자연의 리듬으로 살아왔음을 나타낸다.
함박산 약수터와 성장의 계단
함박산 약수터로 오르던 계단은 필자에게 단순한 길이 아니었다. 영산 초중고 재학 시절, 거의 매일 아침 주전자를 들고 오르내리며 공부하던 시간은 성장의 시간표로 남아 있다. 방과 후와 시험 기간에 계단을 오르내리며 노트를 외웠던 기억은 산의 그림자처럼 오래도록 따라왔다.
차가운 약수의 맛과 계단을 오르내리던 호흡은 배움이 교실을 넘어 일상 속에서도 이어질 수 있음을 몸으로 깨달았다. 산은 그렇게 생활의 배경이자 학습의 동행자가 되었다.
신선의 오름과 영주산의
방식
제주 표선면 성읍리에 자리한 영주산은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오름이다. ‘영모루–영지–영주’로 이어진 이름의 변화는 신령함을 장소에 새겨 온 기록이다. 남동으로 트인 말굽형 분화구와 완만한 초지 능선은 오름의 방식을 가장 친절하게 보여준다.
‘천국의 계단’이라 불리는 곧은 탐방로를 따라 오르면 정상에서 성산일출봉과 동부 오름 군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침 안개가 끼면 비가 온다는 구전은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온 제주 사람들의 생활지식이 산에 스며 있음을 알려준다.
다른 높이와 같은 눈높이
영축산이 해발 681.5m로 고을을 굽어보는 주산의 위엄을 지녔다면, 영주산은 해발 326.4m, 비고 176m 1)의 기생화산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접근성을 지닌다. 이 차이는 높이의 대비가 아니라, 삶의 속도를 조절하는 서로 다른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공동체의 기원을 지키는 배후의 산으로, 다른 하나는 일상 속 쉼과 조망을 허락하는 오름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두 산은 모두 ‘영(靈)’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의 태도를 가다듬게 한다는 점에서 같은 눈높이에 선다.
오름 위에서 만난 시간의 합류
서귀포에서 삼 년 반을 살아온 뒤 오른 영주산에서, 필자의 발걸음은 현재의 호흡과 과거의 기억을 함께 하며 올라갔다. 능선의 바람은 영산의 약수 냄새와 섞여 오래된 계단의 감각을 되살렸다.
이 순간, 산은 지리적 대상이 아니라 시간의 매개체가 되었다. 이름이 닮은 두 산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삶의 연속성을 조용히 확인시켜 주었다.
산과 함께 살아온 제인(濟人)의 태도
영축산과 영주산은 모두 사람을 중심에 두는 산으로 기억되어 왔다. 전자는 지역의 주산으로서 공동체의 질서를 길러냈고, 후자는 일상의 오름으로서 쉼과 관찰의 습관을 키워 왔다. 이 차이는 제주 사람, 곧 제인(濟人)의 삶의 태도를 또렷하게 드러낸다.
제인은 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의 동반자로 대한다. 오름의 계단을 학습과 성찰의 시간으로 전환하며,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지속의 가치로 묶어 왔다.
전설과 이름이 만든 제문(濟文)의 의미
두 산을 둘러싼 전설과 이름은 자연을 설명하는 장치이자 문화를 축적하는 기제로 작동해 왔다. ‘먹통–화선지’의 풍수 은유와 ‘영모루–영지–영주’의 명칭 변화는 산을 텍스트로 읽는 문화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제문은 이러한 이야기를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으로 담아낸다. 산을 오르는 행위는 곧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기억은 지역의 스토리로 자연스럽게 기록된다.
영과 기억과 의미로 걷는 산행
영주산과 영축산은 서로 다른 섬과 내륙에 놓여 있다. 그러나 신령함을 삶의 질서로 받아들여 온 사람들이 만든 기억의 지도 위에서는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
산을 오르는 일은 높이를 정복하는 행위가 아니다. 산의 이름과 전설, 생활의 의미를 떠올리며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다시 읽는 일이다. 그 읽기의 끝에서 필자는 같은 ‘영(靈)’의 결을 지닌 두 산 앞에 나란히 선다.
용어해설
1) 산의 표고(標高, Elevation)와 비고(比高, Relative Height)는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에 따른 차이를 뜻한다. 표고는 평균 해수면(바다)에서부터 산 정상까지의 높이(해발고도)를, 비고는 산의 밑동(산 아래)에서 정상까지의 실제 높이(상대적 높이)를 의미한다.
참고자료
• 창녕군 영산면 지명·지리 자료(영산천, 영축산·함박산 전승)
• 영축산·함박산 관련 지역 전설 및 약수터 구전
•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영주산 오름 해설 자료
• 홍병두, 「오름이야기–영주산」, 2018
• 제주 오름 일반 지형 자료(말굽형 분화구, 비고·둘레·면적)



사진. 서귀복연의 은 선생이 보내온 것임. 2026. 2. 1.



사진. 윤판덕. 창녕 영산 연지못 야경. 2026. 3. 29.
“내일 강한 바람과 비 소식이 있어,
연지의 수양벚꽃이 꽃비처럼 떨어질까 안타까운 마음에
방금 셔터를 열심히 눌렀습니다.
따끈따끈한 연지와 만년교 사진, 감상해 보세요.” 윤판덕
( 윤판덕 선생과 필자는 영산 초등학교 49회 동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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