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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으로 살아온 시간, 이름으로 다시 걷는 길"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이름은 불리는 말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이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갖지만, 그 이름이 의미를 얻는 순간은 불려질 때가 아니라 살아갈 때이다. 우리 전통이 이름에 뜻과 바람, 때로는 운명까지 담아 온 이유는,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향해야 할 방향을 암시하는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아명과 본명, 자(字), 별칭과 직함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생애에는 여러 이름이 겹겹이 쌓인다. 나는 고은층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이름들이 각각의 시절과 역할, 그리고 내가 선택해 온 삶의 태도를 비추는 거울이었음을 또렷이 마주하게 되었다.

‘판지’라는 아명은 사리와 지혜의 첫 흔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에게도 아명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판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정확한 유래를 들은 적은 없으나, 아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이름을 낮추거나 숨기던 민속적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름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나는 이 이름을 스스로 判(사리)과 智(지혜)의 결합으로 해석해 왔다. 돌이켜보면 이 해석은 삶의 방향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사리를 따지는 判의 의미는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 지역개발학이라는 평생의 전공으로 이어졌고, 智의 의미는 어린 시절 놀이에서조차 자연스럽게 판단자 역할을 맡았던 기억과 겹쳐진다. 이름이 삶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기운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 이름이지만, 고향의 연로한 친지와 몇몇 지인이 여전히 ‘판지도령’이라 불러 주던 기억은,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사람의 결을 따라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성근’이라는 이름은 뿌리를 가진 성장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이성근’이라는 이름에 분명한 자긍심을 느꼈다. 오얏 이(李), 성할 성(盛), 뿌리 근(根)이라는 이름은 「용비어천가」의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라는 구절과 자연스럽게 겹치며, 흔들리지 않는 기초와 지속적인 성장을 삶의 기준으로 삼게 했다.
작은 숙부께서 지어 주신 자(字) ‘동주(東柱)’ 역시 동쪽의 기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항렬을 따르는 전통 속에서 이 이름은 개인의 소망을 넘어, 가문과 공동체가 기대하는 역할과 책임을 함께 일깨워 주었다.

이름의 재해석과 제안, ‘신영’의 의미

영주의 한 사찰에서 만난 주지 스님은 ‘성근’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해석했다. 성할 성(盛)을 피 혈(血)의 상형과 연결해, “이루되 피 터지게 이루는 이름”이라는 풀이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 이름을 대신 해 신뢰할 신(信), 읊을 영(詠)의 이름, ‘신영(信詠)’을 지어 주었다.
교수라는 직분에 걸맞게, 말은 학생에게 남고 글은 사회에 울림으로 남아야 한다는 설명은 깊은 공감을 주었다. 그러나 가족들의 “여성스럽다”는 반응 속에서 실제 사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 경험은 이름이 뜻만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수용될 때 비로소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잘못 불린 이름이 다듬어 준 삶의  태도

‘성근’이라는 이름은 종종 발음 오류로 ‘승근’이나 ‘선근’으로 잘못 불렸다. 그때마다 나는 성할 성(盛)과 뿌리 근(根) 대신, 성실할 성(誠)과 부지런할 근(勤)으로 뜻을 설명하며 이름의 의미를 스스로 갱신해 왔다.
지역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내 이름이 ‘이성조’로 오기된 경험 이후에는, ‘근(根)’ 자를 더욱 반듯하게 쓰는 습관이 생겼다. 이 사소한 태도는 이름을 바로 세운다는 것이 곧 삶의 자세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상징적 기억으로 남았다.

직분과 관계 속에서 새로 얻은 이름들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님은 나를 “인간 이성근”이라 불렀다. 이는 학문 이전에 사람으로서의 태도를 먼저 묻는 호명이었다. 서예가 여초 권 선생님이 써 준 ‘여송지성(如松之盛)’은 소나무처럼 곧고 무성한 지성을 향한 기대를 담고 있었다.
학교법인 총장과 여러 선배 교수들이 소나무에 비유해 준 글과 평가는, 학문적 성과보다 성실함과 지속성을 중시해 온 나의 삶의 방식이 하나의 이름처럼 굳어졌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여든을 넘긴 이 교수님의 “부지런히 다니고, 부지런히 쓰고, 부지런히 연구하는 삼근(三勤)”이라는 평은 가장 현실적인 이름으로 다가온다.

이름과 계획은 같은 합목적성의 언어이다

계획이란 원형, 즉 제노타입과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 곧 페노타입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과정이다. 그 핵심에는 합목적성이 있다. 이는 방향성과 의지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기나긴 인생의 여정에서 방향과 의지는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이름 또한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벡터이자, 그 방향을 포기하지 않게 붙드는 의지의 언어로 기능해 왔다. 성장의 시기에는 ‘성할 성’과 ‘뿌리 근’이 중요했다면, 지금의 고은층 시기에는 끝까지 견디는 근성(根性)이 이름의 중심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은층의 시간에 새롭게 불리고 싶은 이름

이제 남은 삶에서 내가 바라는 이름은 하나의 호칭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에 가깝다. 소나무처럼 바르게 서되 관용과 인내를 잃지 않는 삶으로서의 ‘여송(如松)’이라는 이름, 고향 자연부락 이름처럼 가족과 선한 이웃과 어울리며 조화와 평화를 이루는 ‘어울’이라는 이름, 사리와 지혜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으로서의 ‘판지’라는 이름, 성실과 근면을 일상의 기본값으로 삼는 ‘성근’이라는 이름, 그리고 말로는 신뢰를 얻고 글로는 선한 영향을 남기겠다는 약속으로서의 ‘신영’이라는 이름이다.

이름은 남기기 위한 호칭이다

이름은 나를 부르기 위한 말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남길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인사유명 호사유피(人死留名 虎死留皮)의 말은, 삶의 끝에 남는 것이 소유도 지위도 아니라 태도와 흔적임을 일깨운다. 고은층의 삶에서 이름은 더 이상 성취를 증명하는 표식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 나는 앞으로도 여러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이 하나의 삶으로 수렴되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삶의 결과보다 삶의 자세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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