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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를 세우는 섬:
휴식·휴양·치유의 제주를 향한 제도(濟島)의 길"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고요에서 지속가능한 제주의 답을 찾다

지속가능한 제주란 무엇인가? 개발과 성장의 언어로만 설명되는 섬은 더 이상 제주답지 않다. 필자가 서귀포에서 3년 반을 살아오며 얻은 결론은 단순하다. 제주의 힘은 속도가 아니라 고요에 있다는 사실이다. 고요는 멈춤이 아니라 균형이며, 비어 있음이 아니라 충만이다. 제주사색의 연제(然濟)·제연(濟然)·제인(濟人)·제문(濟文)·제도(濟島)는 서로 다른 차원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고요라는 공통의 질서가 흐른다.
'휴식·휴양·치유의 제주'라는 비전 역시 이 고요 위에서 가능하다. '찾아오는 제주', '머무는 제주', '살아가는 제주'는 모두 고요를 전제로 한다. 고요가 흔들리면 제주의 가치도 흔들린다.

고요는 자연의 제주, 연제(然濟)에서 섬의 품격이다

제주의 고요는 자연에서 시작된다.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은 바람이 멎으면 하늘을 고스란히 비춘다. 그 적막은 공허가 아니라 깊은 충만이다. 곶자왈 숲길에서는 발걸음 소리마저 낮아진다. 숲은 인간에게 말하지 않지만, 인간은 그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본다.
연제의 고요는 자연이 스스로의 리듬을 유지하는 상태다. 화산의 격렬함으로 태어난 섬이 오늘은 고요의 풍경을 보여 준다. 격정을 넘어선 고요, 그것이 자연의 제주, 연제가 지닌 품격이다. 휴식과 치유의 가능성은 바로 이 고요 위에서 열린다.

고요는 제주의 자연, 제연(濟然)의 절제된 관리로 지켜진다

제주의 고요는 방치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절제된 관리의 산물이다. 이탈리아 치타슬로에서 시작된 '슬로 시티 운동(Slow City Movement)'이 말하듯, 도시는 속도를 늦출 때 비로소 인간적이 된다. 필자가 오래전 방문했던 슬로 시티에서 받은 달팽이 모형은 지금도 상징처럼 남아 있다. '느리게, 천천히, 조용히, 여유 있게'라는 가치가 곧 고요다. 또한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릅답다(Small is Beautiful)'에서 제시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의 철학은 적합과 적절과 적정을 강조한다. 그냥 확대가 아니라 적합성, 과도한 개발이 아니라 적절성, 그리고 필요한 만큼의 적정성이 공동체를 지켜나간다.
제연의 고요는 개발을 멈추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개발의 방향과 규모와 속도를 조절하자는 제안이다. 돌담 하나를 쌓더라도 풍경을 거스르지 않는 선택, 길 하나를 내더라도 생태의 흐름을 끊지 않는 판단이 제연의 태도다. 그 절제가 누적될 때 고요는 지속가능성으로 전환된다.

고요는 제인(濟人), 고은층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제주를 찾는 이들 가운데 고은층의 세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인생의 속도를 한 차례 조정한 세대에게 제주는 휴식과 휴양, 그리고 치유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그간의  단순한 관광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고요 속의 사유와 관계의 깊이다.
고은층에게 고요는 위축이 아니라 성숙이다. 말수를 줄이고 관계를 깊게 하며, 소비를 줄이고 시간을 음미하는 삶의 태도다. '찾아오는 제주', '머무는 제주', '살아가는 제주'는 모두 이 세대의 필요와 맞닿아 있다. 필자는 제도의 타깃에서 무게의 중심이 고은층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들의 수요를 정확히 읽고 정책을 설계할 때 휴식·휴양·치유의 비전은 현실이 된다. 장기 체류형 주거, 숲길과 올레길 중심의 무장애 환경, 조용한 문화 공간, 소규모 의료·치유 인프라의 구축은 고요를 기반으로 하는 유효한  정책이 된다.
따라서 고요는 복지의 언어이자 도시 설계의 기준이 된다.

고요는 제주의 문화, 제문(濟文) 속에 깊이 스며든 서사이다

서귀포의 미술관과 도서관은 제주 고요의 문화적 표상이다. 이중섭미술관 전시실에서 그림 앞에 서면 말이 사라진다. 김창열미술관의 물방울은 소리 없는 울림으로 남는다.
문화의 고요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깊게 만든다. 고요 속에서 언어는 정제되고 기억은 서사가 된다. 제주 올레길과 둘레길을 걷는 경험 또한 문화적 행위다. 걷는 속도는 생각의 속도를 낮추고, 낮아진 속도는 자신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제문은 바로 이 고요의 차원에서 완성된다.

맺음말
고요를 지속가능한 제주, 제도(濟島)의 정책 기준으로 세우다

지속가능한 제주, 제도는 어떻게 가능한가? 답은 고요를 정책의 기준으로 세우는 데 있다. 고요는 소극성이 아니라 전략이다. 모든 것을 채우려 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개입하는 정책선택이야말로 고요의 행정이다.
최근 논의가 계속되는 제주 제2공항 문제 역시 속도의 관점이 아니라 고요의 관점에서 재접근되어야 한다. 단기적 효율과 성장의 언어만으로는 제주의 미래를 설명할 수 없다. 섬의 생태, 공동체의 목소리, 장기적 균형을 함께 고려하는 조절의 판단이 필요하다. 고요는 멈춤이 아니라 숙고이며, 숙고는 제도의 품격을 높인다.
복잡계 사회에서 조절은 더욱 중요하다. 작은 선택이 큰 파급을 낳는 시대에, 고요는 위험을 관리하는 지혜다. 고요를 잃으면 제도는 조급해지고, 조급함은 난개발과 갈등을 낳는다. 고요를 지키면 제도는 균형을 회복한다.

고요는 제주 미래의 가치자원이다

제주의 가치를 한 단어로 말한다면 그것은 고요다. 고요는 자연의 숨결이고, 인간의 성숙이며, 문화의 깊이이며, 제도의 조절이다.
또한 휴식과 휴양, 그리고 치유의 제주는 고요를 핵심 자산으로 삼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찾아오는 제주'도, '머무는 제주'도, '살아가는 제주'도 모두 고요 위에서 지속될 수 있다. 특히 고은층에게 고요는 삶의 후반전을 품격 있게 만드는 토대다.
고요는 소리 없는 힘이다. 그 힘을 정책의 기준으로 세울 때 지속가능한 제주, 제도는 현실이 된다. 고요를 잃으면 제주를 잃는다. 고요를 세우면 제주다움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이,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제주의 미래다.

용어해설
1) 고요(靜·寂)의 정의와 특징
고요는 감각과 정서, 시간과 공간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 고요는 감정과 환경을 모두 포함한다.
• 고요는 반드시 구조적 안정이 없어도 가능하다.
• 고요는 말이 있어도 유지될 수 있는 분위기다.
• 고요는 내적 질서까지 포괄한다.
• 고요는 회복과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다.
따라서 고요는 결과가 아니라 조건이며, 상태가 아니라 관계의 균형이다.
2) 제주사색에서의 적합성
제주사색의 구조에서 연제(然濟)는 자연의 근원성을, 제연(濟然)은 관리된 자연의 질서를, 제인(濟人)은 삶의 태도를, 제문(濟文)은 의미의 재구성을, 제도(濟島)는 지속가능한 체계를 지향한다.
이 다섯 축을 관통하는 공통 감각이 바로 고요다.
한라산의 능선, 오름의 바람, 곶자왈의 숲길은 외적 고요를 제공하고, 해녀의 호흡과 섬사람의 생활 리듬은 내적 고요의 전통을 보여준다.
제주는 빠름보다 느림을, 소음보다 여백을, 과잉보다 절제를 선택해 온 공간이다.
따라서 고요는 제주사색의 미학이자 윤리가 된다.
3) 지속가능한 제주와 정책 키워드로서의 타당성
지속가능한 제주는 성장의 속도보다 삶의 질을 우선하는 정책 방향을 요구한다.
휴식과 휴양, 그리고 치유의 제주는 체류의 질을 높이는 전략을 필요로 한다.
이때 고요는 핵심 설계 원리로 활용할 수 있다.
고요의  정책 키워드는
고요가 물리적 인프라 설계의 기준이 되고, 문화 프로그램 기획의 방향이 되며, 웰니스·치유 산업의 브랜드 가치가 된다.
특히 고은층에게 고요는 삶을 재조정하는 시간이다.
은퇴 이후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자극이 아니라 균형이며, 속도가 아니라 성찰이다.
제주는 고요를 통해 ‘치유의 섬’이라는 상징 자본을 축적할 수 있다.
4) 요약
고요는 소극적 가치가 아니라 적극적 선택이다.
고요는 제주 자연의 특성이고, 제주 문화의 전통이며, 제주 제도의 미래 전략이 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제주는 결국 고요를 보존하고 확장하는 섬이다.
고요를 잃으면 제주의 정체성도 희미해진다.
고요를 세울 때, 지속가능한 제주,  제도는 휴식·휴양·치유의 섬으로 구조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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