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은 짧게, 마음은 깊게:
고은층의 삶에서 다시 배우는 의사소통의 3원칙과 6원칙"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관계의 시간 속에서 다시 발견한 말의 힘
정년 이후 고은층의 삶으로 접어들면서 필자는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가족 사이에서도 의사소통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깊이 느끼게 되었다.
정년 이전에는 비교적 유사한 수준과 문화 속에서 학문과 정책의 언어를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정년 이후의 일상은 사뭇 달랐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 서로 다른 경험과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서 말과 글, 표정과 태도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의 모든 요소가 관계의 질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말은 마음의 거울이 되어 한마디 말이 덕을 세우기도 하고 허물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옛 가르침처럼,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게 하느니라’(잠언 15:1)는 성경의 말씀은 단순한 교훈을 넘어 삶의 실제 원리로 다가온다.”
짧게·쉽게·알게: 의사소통의 기본 3원칙
모든 의사소통의 출발점은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좋은 의사소통은 ‘짧게, 쉽게, 알게’라는 세 가지 원칙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짧게’는 단순히 말을 줄이라는 뜻이 아니라 핵심을 분명히 하라는 의미이다. ‘쉽게’는 상대의 수준과 상황에 맞게 표현하라는 뜻이며, ‘알게’는 말한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실제로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오랜 학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일수록 개념과 논리를 충분히 설명하려는 습관 때문에 말이 길어지기 쉽다. 그러나 긴 설명이 곧 깊은 이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말은 소통의 장벽이 될 수 있다.
공자의 말처럼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낫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의사소통에서도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짧고 쉬운 표현은 얕은 말이 아니라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지식은 어렵게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쉽게 전하는 능력에서 드러난다.
편하게·공감하게·생각하게: 관계를 여는 6원칙
의사소통은 단순한 정보 전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를 여는 과정이다. 따라서 ‘짧게, 쉽게, 알게’라는 기본 3원칙 위에 ‘편하게, 공감하게, 생각하게’라는 세 가지 원칙이 더해질 때, 소통은 비로소 살아 있는 관계로 확장된다.
‘편하게’는 상대가 긴장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표정과 태도, 말의 속도와 어조에서 비롯된다.
‘공감하게’는 상대의 입장에서 듣고 반응하는 것이다. 논리만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신뢰와 감정의 연결이 함께할 때 말은 비로소 마음에 닿는다.
‘생각하게’는 상대를 단순히 설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깨닫도록 돕는 과정이다. 노자의 “큰 말은 드물게 들린다”는 뜻처럼, 때로는 지나친 설명보다 여백 있는 말이 더 깊은 사유를 이끌어낸다.
이처럼 3원칙과 6원칙이 결합될 때, 의사소통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관계를 열고 생각을 확장하는 삶의 지혜로 자리 잡는다.
가정에서 배우는 의사소통: 가장 가까운 관계의 어려움
가정은 가장 가까운 관계의 공간이지만, 때로는 가장 의사소통이 어려운 공간이기도 하다. 오래 함께 살아온 가족일수록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익숙함 때문에 말은 줄어들고 표현은 단정적으로 변하기 쉽다.
작은 말투 하나, 무심한 표정 하나가 오해를 만들고, 그 오해가 쌓이면 관계의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고은층의 삶에서는 그래서 ‘잘 말하는 것’보다 ‘다시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특히 자녀 세대와의 관계에서는 세대 간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관계의 지속을 위한 기본 조건이다.
가정에서의 의사소통은 지시나 설득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의 과정이어야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를 지켜야 한다는 오래된 가르침은 오늘날의 가족관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 속의 의사소통: 다양성 시대의 소통 전략
정년 이후 새롭게 마주하는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서로 다른 배경과 생각, 언어와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일방적으로 말하는 방식보다 서로의 맥락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자신의 기준만을 앞세우면 말은 전달될 수 있지만 마음에는 닿지 않는다.
상대가 어떤 경험을 해왔고, 어떤 생각의 틀 속에서 말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피지기’라는 말처럼 상대의 관심을 이해하는 일은 소통의 절반을 이루는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그 이해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단순히 말을 잘하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를 읽고 상황을 판단하며,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능력이다. 다양성의 시대일수록 소통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고은층의 의사소통: 말의 무게를 덜고 의미를 더하다
고은층의 의사소통은 점점 단순해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오랜 경험은 불필요한 말을 덜어내고 본질을 보게 한다.
말은 줄어들지만 뜻은 더욱 선명해지고, 관계는 더욱 안정된다. 제주 말로 ‘꼬닥꼬닥’ 걸어가듯 천천히 이어지는 대화는 급하지 않지만 오래 지속되는 신뢰를 만들어 낸다.
논어의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려 한다”는 가르침 역시 말의 양보다 말의 품격을 강조한다.
고은층의 말은 더 이상 주장과 설득에 머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삶의 태도와 존재의 깊이를 통해 조용히 전달되는 영향력이 중요하다. 적게 말하되 깊이 듣고, 짧게 말하되 마음을 담는 것이 고은층 의사소통의 성숙한 모습이다.
맺음말: 말은 관계를 만들고 삶을 남긴다
의사소통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특히 고은층의 삶에서는 말 한마디, 표정 하나, 작은 태도 하나가 관계의 깊이를 결정한다.
필자가 정년 이후의 삶 속에서 다시 확인한 것은, 좋은 의사소통이란 많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 전하고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짧게, 쉽게, 알게’라는 3원칙과 ‘편하게, 공감하게, 생각하게’라는 6원칙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 원칙은 가정과 사회, 그리고 삶의 모든 관계 속에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지혜이다. 성경 잠언 25장 11절의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는 말씀은 이러한 지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의 기술을 넘어 말의 품격을 생각해야 한다. 말은 짧게 하되 마음은 깊게 담을 때, 의사소통은 관계를 살리고 삶을 아름답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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