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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 부부는 왜 사소한 말로 부딪히는가? 과거·습관·역린이 만드는 세 가지 언쟁(言爭)"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오래 함께 살아도 부부는 다르다


부부는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사이다. 젊은 날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며 온갖 희로애락을 함께 겪는다. 그렇게 수십 년을 함께 살다 보면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래 함께 살았다고 해서 생각과 성격, 습관과 취향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맹자』 「등문공상」에는 오륜의 하나로 부부유별(夫婦有別)이 나온다. 본래는 부부 사이에도 지켜야 할 분별과 도리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 오늘의 부부관계에 그대로 옮겨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한 가지 지혜를 새롭게 읽어보고 싶다. 부부는 평생을 함께 살아도 서로 다른 인격과 생각, 취향과 생활방식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다. 가까울수록 그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논어』 「자로」에서 공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했다. 조화를 이루되 반드시 같아지려 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부부야말로 화이부동의 지혜가 가장 필요한 관계가 아닐까? 하나의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서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하되 서로 다를 수 있고, 다르면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고은층에 접어들면 대체로 자녀가 성장하고 사회적 역할에서도 한발 물러나면서 부부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런데 함께하는 시간이 늘수록 아주 사소한 말로 부딪히기도 한다. 큰 사건 때문이라기보다 오래 묵은 과거를 다시 꺼내고, 평생의  습관을 고치려 하며, 상대의 가장 민감한 곳을 건드리는 말 한마디에서 언쟁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말

부부의 언쟁은 흔히 현재의 작은 문제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수십 년 전의 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당신이 그랬잖아”, “평생 당신은 그랬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오늘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사라지고 지난 결혼생활 전체를 평가하는 언쟁으로 번지기 쉽다. 오늘 청소를 할 것인가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신혼 시절의 서운함으로 이어지고, 한 번의 실수가 평생의 잘못처럼 확대되기도 한다.

한자성어에 복수난수(覆水難收)라는 말이 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거두어 담기 어렵다는 뜻이다. 영어에도 “Let bygones be bygones.”라는 표현이 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두자는 뜻이다. 물론 과거를 모두 잊으라는 말은 아니다. 좋은 추억은 오래 간직하고 잘못에서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다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오늘의 다툼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간다고 했다. 본래는 신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것에 붙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은 오랜 부부의 삶에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과거는 교훈으로 남겨야지 원망으로 붙들어서는 안 된다. 오래 살아온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판결문을 다시 읽는 일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일이다.

고치려는 마음이 만드는 갈등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오랜 습관이 그만큼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십 년을 살아온 부부에게는 저마다 몸에 밴 생활방식이 있다. 물건을 놓는 자리도 다르고, 식사하는 습관도 다르다.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과 말하는 방법도 다르다. 한 사람은 무엇이든 미리 준비해야 마음이 놓이지만 다른 사람은 때가 닥쳐야 움직일 수 있고, 한 사람은 정돈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조금 흐트러져 있어도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다.

젊을 때도 쉽게 고치지 못했던 습관을 칠십, 팔십이 되어 바꾸기는 더욱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버릇 좀 고쳐요”,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되나요”라고 쉽게 말한다. 물론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바꾸어야 할 것도 있다. 건강이나 안전에 관계되는 습관, 상대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는 행동이라면 함께 노력해 고쳐야 한다. 그러나 사소한 생활습관과 취향까지 모두 내 방식에 맞추려 한다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어쩌면 문제는 상대의 습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내 방식대로 고치려는 마음에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고은층 부부에게는 무엇을 바꾸어야 하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함께 산다고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다. 부부 사이의 평화는 모든 차이가 없어질 때 오는 것이 아니다. 고쳐야 할 것은 함께 고치되 바꾸기 어려운 차이는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찾아든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건드리는 역린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듣기 싫은 말과 건드리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말도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된 상처를 되살리는 말이 될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고사가 역린(逆鱗)이다. 『한비자』 「세난」에는 용의 목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역린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민감한 부분이나 자존심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부부는 서로의 역린을 누구보다 잘 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 어떤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꺼내면 오래된 상처가 되살아나는지를 안다. 문제는 언쟁이 생겼을 때 바로 그곳을 공격하는 데 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친정이나 시댁, 자녀 문제, 경제 문제, 과거의 실패를 들추기도 하고 때로는 건강이나 외모까지 건드린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약점을 가장 잘 알고,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가장 아픈 곳을 찌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역린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건드릴 권리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커졌다는 뜻일 것이다.

흔히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한다. 싸우더라도 쉽게 다시 풀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부싸움이 칼로 물 베기일 수는 있어도 말로 벤 마음의 상처까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 부부일수록 말의 수는 줄어들지 몰라도 말의 무게는 더 무거워진다. 상대의 아픈 곳을 알고도 피해 말하는 것이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배려이다.

맺음글
가까울수록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고은층 부부의 언쟁은 대개 거대한 문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고, 쉽게 바뀌지 않는 습관을 억지로 고치려 할 때 생겨난다. 그리고 상대가 가장 싫어하는 말과 행동을 건드리는 데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일수록 과거는 오늘의 무기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쉽게 바뀌지 않는 차이는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상대의 역린을 알고 있다면 오히려 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부부는 오래 살았다고 서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함께 살아도 나는 나이고 배우자는 배우자다. 부부유별의 옛 가르침에서 오늘의 다름과 존중을 생각해 볼 수 있고, 화이부동의 지혜에서는 그 다름을 없애려 하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젊어서는 함께 앞을 보며 달려가는 것이 부부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고은층이 된 뒤에는 서로의 속도와 다름을 인정하며 나란히 걸어가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끝까지 가리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남은 날을 어떻게 더 평화롭고 따뜻하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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