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기에 담긴 일상 속 이야기: 오리, 소, 돼지, 닭, 양, 개에 얽힌 전통 이야기와 현대적 의미를 중심으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글을 시작하며
고기는 단순한 음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고기를 먹는 방식, 고기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삶과 문화를 담아왔다. 나라별로, 지역별로, 때로는 가정마다 고기에 얽힌 이야기는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로 ‘좋아하는 고기’, ‘기피하는 고기’, ‘금기하는 고기’에 대한 인식은 사회의 가치관과 음식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건강과 윤리, 환경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전해 내려오는 고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최근 제자들과 이실연 파크골프 모임을 마친 후 들른 오리고기 식당에서, 나는 다시금 이러한 문화적 함의를 떠올리게 되었다. 김 의장이 들려준 다음과 같은 말이 인상 깊었다.
"오리고기는 제 돈 주고 사 먹고, 소고기는 사주면 먹고, 돼지고기는 사줘도 안 먹는다. 돼지고기는 먹고 싶으면 따라가야 하고, 잘 먹어야 본전을 친다."
언뜻 농담처럼 들리지만, 이 표현에는 고기 종류에 따른 선호도, 건강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회적 관계까지 아우르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전통적으로 고기에 얽힌 이야기를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음식에 담긴 문화적 의미는 물론, 오늘날 식생활에 대한 지혜도 함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리고기는 제 돈 주고 사먹는 귀한 보양식이다
오리고기는 예로부터 건강식으로 여겨져 왔다. 한방에서는 오리를 ‘천연 보약’으로 칭하며, 기혈을 보충하고, 체내 열을 내려주며, 독소를 해독하는 효능이 있다고 믿어왔다. 여름철 복날에 삼계탕 대신 오리백숙을 찾는 전통은 무더위에 지친 기운을 보충하려는 지혜의 발로였다.
"제 돈 주고 사 먹는다"는 표현은 오리고기의 건강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가격대가 다소 높은 편이지만, 그만큼 건강을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기꺼이 지갑을 열게 하는 귀한 음식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소고기는 사주면 고맙게 먹는 귀한 대접 음식이다
소고기는 전통적으로 가장 귀한 고기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소가 농경 사회의 필수 가축이었던 탓에 도축이 엄격히 제한되었고, 이에 따라 소고기는 명절이나 잔치 같은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었다.
"사주면 먹는다"는 말은, 스스로는 부담스러워 선뜻 사먹지 못하지만, 누군가 대접해 준다면 감사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표현한다. 오늘날에도 소고기는 '한우'라는 이름만으로도 여전히 ‘귀한 대접’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돼지고기는 사줘도 꺼린다
돼지고기는 서민들의 일상 식탁을 책임져 온 가장 대중적인 고기였다. 그러나 위생 관리가 지금처럼 철저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돼지고기의 특유한 누린내나 지방 함량 때문에 기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줘도 안 먹는다"는 표현은 다소 과장된 풍자지만, 돼지고기에 대한 미묘한 거리감을 드러낸다. 또한 이슬람교와 유대교를 비롯한 일부 종교권에서는 돼지고기를 부정한 음식으로 간주하여 철저히 금기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는 품질 관리와 다양한 조리법의 발달로 삼겹살, 목살, 갈비살 등 부위별로 인기가 높아지면서, 돼지고기는 대중적인 고기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닭고기는 병을 이겨내는 영양식이다
닭고기는 예로부터 ‘약식’으로 여겨졌다. 병약한 이들이 회복을 위해 먹는 삼계탕이나 백숙이 그 대표적인 예다. 닭은 소에 비해 사육과 도축이 간편하고, 경제성도 뛰어나 농가에서도 쉽게 길러 소비할 수 있었다.
"아픈 사람에게 닭을 끓여 먹인다"는 속담은, 닭고기가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치유와 회복을 돕는 음식으로 인식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삼복더위에 닭을 먹는 '복달임' 풍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양고기는 지역에 따라 귀하거나 꺼려한다
양고기는 지역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고기다. 중동, 중앙아시아, 몽골, 뉴질랜드 등에서는 양고기가 단백질 공급의 주요원이자 귀한 대접 음식으로 여겨진다. 이들 지역에서는 양의 번식력과 적응력을 높이 평가하고, 종교적 의례나 축제에도 양고기를 사용한다.
반면 동아시아 문화권,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는 양고기의 특유한 냄새 때문에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최근에는 냄새를 줄인 양고기 품종과 다양한 요리법이 보급되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수요가 다시 증가하고 있다.
개고기는 문화에 따라 성찬이거나 금기시 한다
개고기에 대한 인식은 나라와 문화에 따라 가장 첨예하게 갈린다. 한국, 베트남, 중국 일부 지역에서는 개고기를 보신(補身) 음식으로 여겨 여름철에 먹는 풍습이 있었다. 개는 충성심과 용기를 상징하는 동물로, 몸에 좋은 기운을 준다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서구권을 중심으로 반려동물 문화가 확산되면서, 개를 식용하는 행위는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도 개고기 식용 문화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으며, 법적 규제와 사회적 인식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음식문화는 시대와 가치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고기에 담긴 일상 속 이야기와 음식문화의 재정립
이처럼 고기 음식에는 단순한 맛이나 영양을 넘어서는 문화적 맥락과 삶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오리는 건강의 상징으로, 소는 귀한 대접으로, 돼지는 일상의 친근함과 동시에 미묘한 거리감으로, 닭은 치유와 보살핌의 상징으로, 양은 지역에 따라 귀함과 기피를 동시에 안은 존재로, 개는 문화적 경계선을 드러내는 존재로 자리해왔다.
현대사회는 건강, 환경, 윤리라는 새로운 기준 위에서 음식문화가 재정립되고 있다. 지나친 육식은 지양하고, 적정 섭취와 균형 잡힌 식생활이 권장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고기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를 제공한다.
어떤 고기를 선택하든, 어떤 음식을 입에 넣든, 그 속에는 수백 년을 이어온 인간의 삶, 생존의 지혜, 그리고 문화적 축적이 깃들어 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건강하고 품격 있는 식생활을 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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