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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뿌리 괸당문화, 그 의미와 과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제주의 뿌리와 공동체 정신

제주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문화가 바로 ‘괸당문화’이다. 괸당은 본래 혈연적 친척관계를 뜻하나, 제주에서는 마을 단위의 인척과 연고, 그리고 지연을 아우르는 고유한 관계망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혈족의 범위를 넘어서며,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아온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괸당’이라 부르며 긴밀히 얽혀 있다. 그 속에는 피와 땀, 희로애락이 함께 스며 있으며, 이는 곧 제주의 정체성 속에 깊게 자리 잡은 공동체 정신이다.
속담에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이는 어린 시절 형성된 습관이 평생을 지배한다는 뜻이다. 괸당문화 또한 제주사람의 삶에 뿌리내려 오랫동안 이들의 생활양식을 지배해 왔다. 관혼상제의 부조, 농사일의 품앗이, 어업의 협력, 마을의 갈등 해결 등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괸당은 힘이 되었고, 위기 속에서는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러므로 괸당문화는 단순한 지난날의 풍속이 아니라, 제주의 뿌리이자 공동체적 지혜를 담은 산 증인이다.

괸당문화의 의미와 특징: 사회적 자본의 두 얼굴

제주는 섬이라는 지리적 고립속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켰다. 농업과 어업이 생존의 바탕이던 시절, 고립된 섬 주민들은 서로의 노동과 정을 나누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괸당은 이 조건 속에서 탄생한 사회적 관습이었다. 이는 오늘날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첫째, 괸당은 공동체 내부의 신뢰를 강화하는 기능을 했다.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농사일을 거들고, 어업에 나서며, 관혼상제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눔으로써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삶의 방식을 굳혔다. “고난은 친구를 시험한다”는 이솝의 명언처럼, 어려움이 닥칠수록 괸당은 더 강한 결속력을 발휘했다.
둘째, 괸당은 외부와의 울타리였다. 외부의 침입이나 재난 앞에서 마을은 괸당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스스로를 지켜냈다. 특히 조정의 차별적 통치나 외세의 위협 속에서 제주는 이러한 관계망을 통해 공동체를 유지했다.
셋째, 괸당문화는 그 강한 결속으로 인해 배타성과 폐쇄성이라는 그늘도 지녔다. 괸당 내부의 결속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외부인과의 교류가 차단되거나, 내부 갈등이 확대될 때는 심각한 문제를 낳기도 했다. “물도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지나친 순수성이나 배타성은 오히려 공동체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괸당문화의 유래: 섬이라는 위치성과 지혜

괸당문화의 뿌리는 섬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중앙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제주는 차별적 통치와 유배지의 운명을 감내해야 했고, 외세의 침입과 교류의 제약 속에서 스스로 생존의 방식을 모색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혈연과 지연, 그리고 생활 속의 연고가 강화되며 독특한 관계망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괸당문화는 단순히 폐쇄적인 체계가 아니었다. 육지의 유교 중심 문화와 달리, 제주의 괸당은 실질적 생활의 필요에 의해 유연하게 형성되었다. 혼인, 이웃 관계, 협업적 노동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관계망이 확장되었고, 이는 사회적 안전망으로 작용했다. 성경 전도서의 말씀처럼,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도서 4:9)는 지혜가 제주의 땅에서 구현된 셈이다.

괸당문화의 형성과 기능: 빛과 그늘

괸당문화의 형성과 기능은 제주의 마을 공동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농사에서는 품앗이로 노동을 나누고, 어업에서는 협동을 통해 어장을 공유했으며, 생활에서는 공동 우물을 사용하고 관혼상제에서는 상부상조를 실천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괸당문화는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빛과 동시에 그늘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긍정적으로는 첫째, 상호부조의 정신이 뚜렷했다. 누군가 병이 들면 이웃이 대신 농사를 지어주었고, 상을 당하면 마을 전체가 함께 슬픔을 나누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둘째, 경제적 안정의 기능이 있었다. 공동노동과 품앗이를 통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생산성을 높였다. 셋째, 사회적 결속의 힘을 강화했다. 괸당을 중심으로 신뢰와 유대가 형성되었고, 이는 공동체 질서와 안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괸당문화는 그늘도 드리웠다. 배타성과 폐쇄성으로 인해 외부인과의 사회적 융합이 어려웠고, 연고주의는 공적 영역에서조차 불공정과 불평등을 낳았다. 또한 관혼상제의 의례적 부담은 가계 경제에 무거운 짐이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선을 요구하는 문제로 남아 있다. 특히 제주 4·3 사건의 배경에는 괸당의 연고주의적 특성이 얽혀 있었으며, 강한 연대는 공동체를 지키는 힘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갈등의 불씨로 작용하여 제주 현대사의 아픔 속에서도 그 양면성을 드러냈다.
즉, 괸당문화의 형성과 기능은 공동체적 연대의 지혜를 품으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와 과제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 빛과 그늘을 균형 있게 성찰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일이다.

괸당문화의 전망과 과제: 계승과 혁신의 균형

오늘날 고령화와 저출생, 그리고 휴식과 휴양과 같은  라이프 스타일의 확산 속에서 전통적 괸당문화는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앞으로 괸당문화가 나아가야 할 길은 계승과 혁신의 균형이다.
첫째, 전통의 보존과 재해석이 필요하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처럼, 과거를 살리되 시대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품앗이와 상부상조의 정신은 현대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지역 커뮤니티 운동 속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둘째, 배타성을 줄이고 개방과 포용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문화와 이주민이 공존하는 제주에서 괸당이 더 이상 혈연과 지연만이 아니라, 가치와 경험을 공유하는 열린 공동체로 발전할 때, 제주의 사회적 자본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셋째, 디지털 시대의 괸당 정신 창출이 과제다. 온라인 플랫폼, SNS, 지역 네트워크는 새로운 방식의 연대와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에머슨이 말한 “열정은 노력의 어머니"가 제주의 괸당이 “협력은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제주의 괸당 정신은 디지털 기반의 지역 자치, 사회적 기업, 시민 네트워크 속에서도 빛날 수 있다.

제주의 뿌리에서 미래로

괸당문화는 제주의 정체성과 공동체적 지혜를 담은 귀중한 유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과거의 풍속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거울이다. 속담에 “사람이 많으면 길도 넓어진다”는 말이 있다. 괸당문화는 제주인의 삶 속에서 여전히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폐쇄와 배타가 아니라 개방과 협력, 포용과 화합의 길이어야 한다.
그러면 괸당문화는 제주의 뿌리로서 미래에도 살아 숨 쉬며, 한국 사회의 공동체 정신과 세계인과의 연대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괸당은 단순한 지역적 유산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협력과 배려의 보편적 가치로 확장될 수 있다. 제주의 땅에서 뿌리내린 괸당정신이 내일의 지구촌에도 울림을 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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