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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권태준 교수님 1주기에 부쳐: 교수 인생의 세 길을 열어 주신 스승을 회상하며”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이 글은 교수 인생의 세 길을 열어 주신 고(故) 권태준 교수님을 추모하며, 생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정리한 회고문이다. 교수님께서는 지난 5월에 별세하셨으며, 올해로 1주기를 맞이하였다. 이에 당초 작성했던 초고와 추도사를 다시 올리며, 학문적 인격적 가르침을 되새기고자 한다.

환경대학원 입학과 재학

교수님과의 만남, 첫인상

나는 1977년 영남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이하 행대원)에 입학원서를 내러 갔다가, 우연히 환경대학원(이하 환대원)을 보고 그 자리에서 마음을 바꾸어 환대원에 지원했다. 마침 시험 과목이 동일했고, 영어가 필수, 선택과목이 그동안 준비한 행정학과 행정법 두 과목이라 무난히 변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3월 입학식에서 권태준 교수님을 처음 뵈었다. 당시 학과장이던 교수님은 대학원을 소개하시며 “대학원은 심오한 학문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신문을 가려 읽는 능력을 키우는 곳”이라고 하셨다. 학부보다 차별적인 지식을 배우러 왔다고 생각하던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말씀이었다.

교수님의 첫인상은, 키는 크지 않으나 자세가 반듯하고 목소리는 낮되 말의 힘이 있으며, 한마디 한마디 빈틈이 없는 아주 논리적인 분이었다. 한마디로 대단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교수님의 ‘계획이론’ 강의

대학원에서 교수님의 첫 강의는 ‘계획이론’이었다. 도시 및 지역계획 전공의 기초 공통과목으로, 행정학의 ‘기획론’과 유사해 내게는 흥미로웠다. 그러나 강의는 이론 중심이라 학생들이 이해하기에 쉽지 않았고, 특히 건축·토목 등 이공계 출신에겐 더 어려웠다. 당시 서울대 토목공학과 출신 복학생 이주홍은 교수님의 강의를 녹음해 반복해서 들었고, 우리는 중간·기말고사 때 각자 필기한 노트를 돌려 보며 공부했다. 그때 전공에 따라 같은 강의를 받아들이는 수준과 정리 방식이 확연히 다름을 깨달았다.

교수님의 조교가 되다

나는 대학원에 온 1차 목적이 공부가 아니라 행정고시였고, 혹시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해 2차 목표로 대학원을 택했다. 그 2차 목표를 충족하려면 지방대보다는 서울대가 낫다고 판단했으나, 이런 구상은 환대원의 학사 운영을 경험하며 빗나갔다. 신림동 관악법우회관에서 고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매시간 출석과 과제, 그리고 발표가 이어지고 교재도 원서 위주여서 곧 딜레마에 빠졌다. 행대원은 행정고시학원, 환대원은 환경고등학교”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두 대학원의 분위기가 달랐다.

결국 고시를 포기하고 상도2동에서 가정교사로 입주하며 대학원 공부에 매진했다. 2학기가 시작되자 뜻밖에도 권 교수님의 조교 기회를 얻게 되었다. 교수님이 숙식 사정을 물으시기에 “하숙 중”이라 답했더니, “2인 1실 하숙비가 얼마냐”고 물으셨다. “2만 5천 원 정도”라고 하자 “그럼 월 5만 원을 주겠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교수님의 조교가 되었고, 교수님은 평생의 스승이 되셨다.

아세아정책연구원 시절

아세아정책연구원에서의 일

조교 업무는 동대문에 있던 아세아정책연구원(이하 아정원)에서 시작됐다. 아정원은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민관식 박사가 설립했으며, 동대문이 지역구였다. 첫해 연구과제는 ‘서울시 도심 기능 분석과 개편 연구’로, 나는 종로구와 중구 사무실 입지와 기능을 수작업으로 분석했다. 또 ‘수도권 집중 억제’ 관련 과제도 수행했다.

이듬해에는 캐나다 IDRC(국제개발연구센터)와 서울시의 지원으로, 개발도상국의 급격한 도시화 과정을 다루는 프로젝트 두 건을 수행했다. 하나는 불량 무허가 주거지 개량사업 평가, 다른 하나는 가정용 고형폐기물 처리 방안 연구였고, 나는 후자를 맡았다.

함께한 소중한 인연

연구원에는 환대원 선배 김원배·홍갑선·이양원 선배가 있었고, 교수진으로 권태준 교수님을 비롯해 환대원의 김형국·임강원 교수님, 건국대 황명찬 교수님이 참여하셨다. 별도로 고려대 최상용 교수님 팀도 있었다.

1년 차가 끝나자 김원배 선배는 미국 하버드대, 이양원 선배는 MIT대, 홍갑선 선배는 태국 AIT대로 유학을 떠났다. 나는 환대원 2년 차가 되었고, 빈자리에는 해군 중위 전역 후 돌아온 박서호 선배, 내가 추천한 한표환 후배, 그리고 황명찬 교수님의 추천으로 건국대 대학원 박종필 씨가 합류했다.

‘인간 이성근’과 아정원의 추억

민관식 국회부의장은 한 달에 한 번 연구원들을 초대해 식사 자리를 가졌고, 권 교수님도 월 1회 중간점검 회의 후 식사를 함께하셨다. 그 자리에서 교수님은 가끔 나를 “인간 이성근”이라 부르셨다. 김원배 박사가 “우리는 인간이 아닙니까?” 하고 웃으면, 교수님은 “인간 이성근은 너희와는 달라”라고 하셨다. 시골 출신인 내게 기를 세워주려는 애정 어린 별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수당을 받는 날이면 홍갑선·김원배 선배와 셋이 회식을 했다. 1차(저녁)는 내가, 2차(신촌 곡차)는 김원배 선배가, 가끔 통금으로 여관에서 묵게 되면 3차는 홍갑선 선배가 계산했다. 소득과 지출 규모를 고려한, 나름 합리적 배분이었다. 한 번은 한 달 용돈이 떨어져 아침에 주방에서 물로 허기를 달래다 여직원에게 “왜 자꾸 주방을 들락거리느냐”는 질문을 듣기도 했다.

교수님의 인간적 배려

한 번은 동생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말씀드렸을 때, 교수님이 내 구두 밑창에 난 구멍을 보시고 구두 값을 건네주셨다. 새 구두를 신고 동생 결혼식에 갔다. 외투가 변변치 않아 동료의 바바리를 빌려 입기도 했다. 당시 내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석사과정 졸업과 서울 생활

종합시험 최고점과 우수논문상

석사과정 종합시험은 공통 1과목과 전공 2과목이었고, 나는 응시자 중 최고점을 받았다는 말을 학과장이신 김 교수님께 들었다. 이후 교수님께 논문 주제를 상의드리자,  “석사논문은 프로세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하는 것이니 주제에 큰 집착을 할 필요는 없다”며, 당시 수행 중이던 ‘가정용 고형폐기물 처리 방안’ 연구를 제안하셨다. 그러나 당시 농촌의 쓰레기 문제가 크지 않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 다시 교수님께 상의드려 ‘불량주택지구 정책평가와 개선방안’으로 바꾸었다. 심사에서 우수논문으로 선정되어 졸업식에서 우수논문상을 받았다.

공무원 진로 탐색

졸업 후 다시 공무원 진로를 고민했다. 민관식 국회부의장 비서실장 이 박사께서 별정직으로 시작해 일반직으로 전직할 길을 제안했지만, 교수님께 말씀드리니 “어머님이 혼자 계시니 모교 영남대에 추천해 보겠다. 가능하면 학교로 가라”고 조언하셨다. 나는 그 뜻을 따르기로 하고 이 박사께 양해를 구했다.

국토연구원 면접

교수님은 “영남대 추천은 다음 해 3월이니 그동안 국토연구원에 잠시 근무하라”고 하셨다. 건국대에서 파견 나온 황명찬 부장님을 찾아가 권원용 박사 과제에 배정되었으나, 노융희 원장님께서 “영남대로 갈 사람을 임시 고용하기 어렵다”며 만류하셨다. 사정을 교수님께 말씀드리니 “그렇다면 아정원에서 UNFPA(유엔인구활동기금) 프로그램을 맡아라” 하셔서, 매월 인구정책 세미나를 운영했다.

영희상업전수학교 영어강사

야간에 일을 하고 싶어 대학 시간강사를 알아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신문에서 시흥 ‘영희상업전수학교’ 영어강사 모집을 보고 면접 후 채용되었다. 영어교사 자격증은 없었으나 석사 학위로 대체했고, 야간 강의를 맡았다. 잠시 3학년 담임도 맡았는데, 평생 교수로 일한 내게 고교 교육을 체험한 소중한 시기였다.

영남대 교수 임용과 결혼

영남대 전임강사 대우 임용

권 교수님은 국무총리실 대학평가단 위원으로 활동
중이셨다. 어느 날 “대구에서 총장을 만나자”고 하셨고, 이미 총장에게 나를 추천하셨다고 했다. 영남대 지역사회개발학과 전임강사 대우, 월 25만 원의 조건이었다. 그 자리에 노융희 원장님도 계셨다. 이후 학부 은사 김종섭 교수님도 같은 말씀을 전하셨다. 나는 1980년 3월 영남대 전임강사 대우로 임용되어 38년간 교수로 봉직하고 2018년 2월 정년퇴직했다.

교수직에 대한 조언

영남대로 발령받기 전 인사드리러 갔을 때 교수님은 세 가지 조언을 주셨다.
첫째, 계획이론은 절차와 방법론 중심이라 연구비를 받기에는 불리해 직업적 전공으로는 기피되지만, 교수는 정해진 봉급과 강의가 있으므로 전공할 수 있다.
둘째, 교수직을 타 직업과 비교하지 말라. 비교는 흔들림과 상대적 박탈감을 낳는다.
셋째, 교수는 글도 말도 잘해야 유능해진다. 글은 연구, 말은 강의와 정책자문에 필수다.

『한국의 지역사회개발』 자료 정리

대구로 내려간다고 인사드린 날, 오래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지원으로 권태준·김광웅 두 분이 공동 집필했으나 출판이 지연된 원고를 정리해 달라 하셨다. 통계를 최신으로 교체하고, 책 제목은 『한국의 지역사회개발』로 바꾸되 이론과 새마을운동 이전의 사례 보완을 부탁하셨다. 나는 200자 원고지를 한아름 받아 나왔다.

이후 여러 차례 자택을 방문해 지도를 받으며 자료를 보완했다. 마침 5·17 이후 대학 휴교로 강의가 없어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고, 1981년 법문사에서
『한국의 지역사회개발』이 출간되었다.

출간, 결혼, 주례사

경북대 보건대학원 설립기념 세미나가 있어 서울대 권이혁 총장과 함께 내려오신 교수님을 동대구역에서 맞았다. 『한국의 지역사회개발』 출간본과 자료수집비를 챙겨 주셨고, 서문에는 내 이름이 감사의 글로 실렸다.

그날 통금시간이 다가와 교수님을 먼저 택시에 모신 뒤 집으로 가려다 같은 택시가 되어 함께 호텔로 돌아가 잠시 더 대화를 나눴다. 그날 밤 나는 대학 동기에게 중매 건을 물었고, 이튿날 바로 선을 보아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당시 아내는 경북대 간호학과 전임강사였고, 나는 영남대 전임강사 대우였다.

교수님은 결혼 전날 대구에 내려오셔서 주례를 서 주셨다. 주례사의 핵심은 “결혼은 하나의 사회학습과정이며, 부부가 한 권의 교과서를 함께 넘기며 상호 학습해야 성공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 말씀처럼 살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지금이라도 상호학습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박사과정 입학과 수료

박사과정 입학

영남대 전임강사 대우로 내려온 지 2~3년 뒤, 서울대 환대원에 박사과정이 개설되었다. 교수님은 원장으로 계시며 입학을 권유하셨다.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다니다 미국으로 가도 무방하다”고 하셨고, 학과장 김형국 교수님은 “미리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셨다. 정원 5명에 25명이 응시해 5:1 경쟁률이었고, 다행히 합격했다. 다만 그 직전 문교부 국비 해외파견 연구교수로 선발되어 연말에 미국으로 출국했고, 등록은 아내가 대신하며 휴학을 신청했다.

국비 해외파견과 일리노이대 생활

영어 공부와 토플을 거쳐 문교부 국비파견 연구교수로 선발되었고, 일리노이대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 김창호(John Kim) 교수님의 초청으로 1984년 12월 31일 미국으로 떠났다. 김 교수님은 현지 박사과정을 권했지만, 나는 다양한 강좌를 폭넓게 수강하며 배움에 전념했다.

귀국을 결심하다

그 무렵 우리 학과 모 교수가 불미스러운 일로 퇴직하게 되어 학교 측에서 귀국을 요청했다. 존경하는 권 교수님께 직접 지도를 받는 길을 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고, 아내 또한 경북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었기에 함께 교수의 길을 이어가기로 마음먹고 귀국했다.

복학, 돌발성 이명, 수료

귀국 후 박사과정에 복학했다. 영남대 강의와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1박 2일 일정으로 서울 수업을 들었다. 무리가 쌓여 돌발성 이명으로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마지막 학기 종합시험(제2외국어 독일어 포함)은 토요일 정오에 문제를 받아 일요일 정오까지 제출하는 방식이었고, 여관에서 밤새 답안을 작성해 제출했다. 다행히 합격해 수료했다.

박사학위 논문 연구와 학위 취득

교통사고로 인한 중단

수료 후 차분히 논문을 쓰려던 중 큰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그동안 밀린 지역 관련 프로젝트 처리로 과로가 겹친 탓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교수님이 전화를 주셔서 죄송하고도 감사했다.

환대원에 국내교류교수로 근무

논문 시간을 확보하려 문교부 국내교류교수로 환대원에 파견되었다. 첫 출근 날 강남 충무상회에서 간단한 환영 식사를 했고, 안동대 총장 제의가 있었으나 사양하셨다는 등 교수님의 말씀도 들었다. 파견 조건상 최소 한 과목 강의를 맡아야 해 김형국 학과장께서 배정을 해 주셨고, 사촌동생이 서울대에 입학해 함께 하숙했다. 한 학기는 서울에서, 한 학기는 대구에서 실증연구를 진행했다.

‘이론과 실천’ 세미나, 논문 연구

교수님은 매월 토요일 ‘이론과 실천’ 세미나를 여셨고, 나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나의 주제는 ‘공동생산적 참여과정’이었고, 교수님의 학위논문 주제(계획 주체와 객체의 상호적응)와 맞닿아 있었다. 이론 연구를 마친 뒤 대구로 내려와 한국토지공사 협조로 택지개발지구 주민 설문을 실시, 분석해 재이론화했다. 1년간 매진했으나 심사는 학기말로 미뤄졌고, 이후 영남대에 복귀해 근무하며 다음 학기에 심사에 들어갔다. 후배들과 토론과 수정을 거쳐 완성도를 높였고, 낙성대 호암교수회관을 자주 이용했다.

학위 취득, 발표와 출판

논문심사를 통과해 졸업했고, 가족이 함께했다. 교수님은 “학위논문 출판”과 “세미나 발표” 두 가지를 당부하셨지만, 큰숙부님의 교통사고 별세로 발표를 못 했고, 자신감이 서지 않아 출판도 하지 못했다. 만약 발표가 호평을 받았다면 출판했을지도 모른다. 이후 교수님이 주관하신 도서에 논문을 싣고, 성곡학술재단 공모에 선정되어 논문을 출판하기도 했다.

영남대 교수로서, 대구경북연구원(이하 대경연) 원장 재임 중의 인연

총장 출마의 세 번의 아쉬움, 그리고 권유

교수님께는 총장 출마와 관련해 세 번의 아쉬움이 있다. 안동대 총장 초빙을 사양하셨고, 충북대 총장 선거에서는 1차 1위였으나 결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 이후 서울대 총장 선거에도 나섰으나 기대만큼 지지가 모이지 않아 중도에 그만두셨다. 어느 날 서울에서 식사 후 대구로 내려오는데, 교수님께서 “이 교수, 영남대 총장 하라”고 전화하셨다.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 정년 1년을 앞두고 총장에 출마, 경영계획서를 성실히 발표했으나 낙선했다. 그래도 대학과 학생, 한국 사학의 현재와 미래를 깊이 성찰한 것은 큰 성과였다.

KPA 학회장 대구 행사와 제자 주례

교수님이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회장으로 대구를 방문하셨을 때, 경북대 김종달 교수·영남대 한동근 교수와 함께 식사를 했다. 또 환대원 제자의 주례를 서시러 대구에 오셨다가 저녁에 곡차자리를 함께하고, 다음 날 우리 집에서 아침 식사와 양복 윗도리 다림질까지 하신 뒤 주례를 보신 일도 있다.

자문과 특강 초청과 사모님 동반

교수님의 제자로서 학문적 성장과 여러 프리미엄을 받았지만, 감사의 뜻을 충분히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경주 행사에 초청해 식사하고 코오롱호텔에서 1박한 일,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상징 조형물 설치 자문에서 국토연 김원배 박사와 함께 모신 일, 교수님 부친(전 서울대 총장) 별세 후 교수님 내외분을 경주와 포항으로 모시고 식사한 일, 행정대학원(이하 행대원) 원장 때 최고위정책리더과정 특강을 모신 일 등은 오래 남는 기억이다. 특별히 행대원 특강을 마치고 저녁식사 이후 가벼운 곡차 자리에서  “내가 교수님께 나의 석ㆍ박사 제자인 대구 카톨릭대 서경규 교수를 소개하자,  내가 할배 교수네”라는 농담도 하셨다.

대경연 원장 재임과 자문

연구원장 재임 중 서울 출장길에 교수님 댁에 들러 사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서초에서 식사했다. 또 경북도 의뢰 ‘새마을국제화재단 설립 타당성’ 자문회의에서 내가 요약정리를 맡았는데, 교수님께서 “요약을 잘했다”고 칭찬하셨다. 칭찬에 인색하신 편이라 내겐 더욱 큰 격려였다. 칭찬은 과하지도 인색하지도 않게, ‘적절함’이 중요함을 다시 배웠다.

정년 이후의 만남

팔공산에서의 회복과 재회

정년을 앞두고 건강에 적신호가 와 제자의 주선으로 팔공산에서 3년을 지냈다. 그 사이 연락을 드리지 못하다가, ‘이러다 영영 소식을 못 전하겠다’는 마음에 전화를 드렸다. 교수님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최근에 교수님과 사모님도 제 이야기를 하셨다며 반가워하셨다. 옛날 같으면 사모님은 인사만 하고 자리를 비우셨지만, 이제는 함께 오래 대화를 나눴다.

동문들과의 모임

이후 가까운 동문들과 교수님 내외분을 모시고 하얏트·강남 호텔에서 식사 자리를 가졌다. 강남 모임 때 교수님이 직접 그린 그림 액자를 사모님의 도움으로 준비해 주셨다. 2~3년 전에는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김원배 박사와 인사동 한식당에서 식사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코로나19로 한동안 뵙지 못했다. 최근 사모님이 건강 문제로 시술을 받으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무거웠다. 따님은 미국 시애틀에, 아들 영훈은 대전 LG연구소에서 서울 사무소로 발령받았다고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군사부일체’라 하지만, 스승·제자 관계보다 부모·자녀 관계가 더 가깝고 실질적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고 권태준 교수님  추모사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
2024. 5. 26 오전 5시 50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권태준 교수님,

언제까지나 저희들 곁에 계시면서 가르침과 사랑을 주실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시다니 우리 모두에게는 너무나 큰 슬픔입니다.


교수님은  우리 모두의 큰 스승이셨습니다.

특별히 저에게 교수님은 세 가지 길을 터주신 스승이셨습니다. 하나는 학문의 길, 다른 하나는 교수의 길, 마지막 하나는 올바른 삶의 길입니다. 교수님은 저의 인생 여정에서 은인이시고 스승이시며 교수 직분의 롤 모델이셨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을 모아 교수님을 추모합니다.

무엇보다 교수님은 선비형 교육자이셨습니다.

교수님은 우리 모두가 본받고 싶어하는 스승이셨습니다. 또한 교수님은 마음으로부터 제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신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셨습니다.


교수님은 학계에서 계획이론과 계획교육에 큰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는 계획이론의  업적입니다. 교수님은 계획분야의 대학자이셨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계획은 교수님의 계획이론에 기반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계획교육의 업적입니다.
교수님은 대한민국에 도시와 환경교육을 개척하시고 세워놓으신 진정한 전문가이시고 어른이셨습니다


교수님은 사회개혁에 기여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셨습니다.

교수님은 서울대에서 사회정의 연구실천 모임을 구성하시어 대표로 활동하셨고
경실련 공동대표를 지내셨으며
환경대학원에 이론· 실천 세미나를 설치하시어 매월 세미나를 통해 이론과 실천을 접목하는 지식 공유를 실천하셨습니다.


교수님은 미래를 보는 선견과 크게 보는 대견으로 반듯한 대한민국이 되는데 길잡이가 되어주셨습니다.

교수님은 대인이자 거인으로 일생을 사셨고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기억될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수님,  

교수님이 남겨놓으신 일들은 이제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저희들이 이루도록 힘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수님,

이제 이 땅에서는 마지막 인사를 올립니다.

 
부디 천국에서 영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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