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등을 성장으로 바꾸는 힘: 공공행정에서 갈등관리의 가치와 협력적 거버넌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갈등의 시대,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역량
오늘날 우리는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역개발사업, 환경관련시설 및 사업, 국방시설 설치, 도시재생사업, 교통인프라 구축 등 공공영역의 거의 모든 정책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만나며 갈등을 수반한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신속한 정책결정과 효율적 집행이 행정의 핵심 가치였다. 그러나 민주화와 지방화, 정보화가 진전된 오늘날에는 정책의 효율성 못지않게 정책의 정당성과 수용성이 중요해졌다.
주민들은 더 이상 정책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다.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며, 행정에 대해 설명과 설득, 그리고 공정한 절차를 요구한다. 따라서 현대 공직자는 단순한 정책 집행자가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를 조정하고 협력을 이끌어 내는 갈등관리자이자 소통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제 행정의 성공은 정책의 내용뿐 아니라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신뢰와 공감을 얻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갈등은 실패의 징후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결과이다
많은 사람들은 갈등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갈등이 발생하면 실패하거나 문제가 생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 갈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오히려 건강한 사회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회가 획일화되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은 갈등을 사회발전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활력이 없는 사회일 수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갈등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있다. 갈등을 억누르면 불만과 불신이 누적되어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반면 갈등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면 새로운 대안을 찾고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많은 지역 갈등 사례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나 충분한 대화와 협의를 거쳐 지역발전의 새로운 기회로 전환된 경우가 적지 않다. 갈등은 위기인 동시에 성장의 기회인 것이다. 따라서 공직자는 갈등을 두려워하기보다 사회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갈등관리의 본질은 이해관계의 조정에 있다
행정 현장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주민은 생활환경과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업은 경제성과 효율성을 중시한다. 시민단체는 환경과 공익적 가치를 강조하며 행정은 공공성과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주체들은 각기 다른 가치와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느 한쪽만 옳고 다른 쪽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갈등은 서로 다른 정당성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갈등관리란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과정이 아니라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모두가 수용 가능한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행정은 법과 제도를 바탕으로 공익을 추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경청은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을 때 비로소 신뢰가 형성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결국 갈등관리의 핵심은 사람을 설득하기 이전에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다.
협력적 거버넌스가 새로운 행정 패러다임이다
과거의 행정은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고 국민이 이를 따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문제는 복잡하고 이해관계가 다양해 정부 혼자 해결할 수 없다. 기후변화, 저출생, 지역소멸, 환경문제, 복지문제와 같은 현대적 과제는 정부와 주민, 기업, 전문가, 시민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개념이 협력적 거버넌스이다. 협력적 거버넌스는 정부와 시민사회, 민간부문이 동등한 파트너로 참여하여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최근 성공적인 정책 사례들은 대부분 협력적 거버넌스의 원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협력적 거버넌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이해관계자의 조기 참여이다. 정책이 거의 결정된 이후 의견을 듣는 것은 참여가 아니라 통보다. 둘째, 정보의 투명한 공개이다. 정보가 공유될 때 불필요한 오해와 의심을 줄일 수 있다. 셋째, 공정한 의사결정 구조이다. 모든 참여자가 동등하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결국 협력적 거버넌스는 갈등을 줄이는 제도적 장치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높이는 민주적 행정의 핵심 원리라 할 수 있다.
신뢰는 갈등관리의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공공갈등을 연구한 학자들은 갈등의 상당 부분이 정책 내용 자체보다 신뢰 부족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동일한 정책이라도 주민이 행정을 신뢰하면 수용 가능성이 높아지고, 신뢰하지 못하면 강한 저항이 발생한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는 사회적 자본이다. 행정이 주민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정보 공개, 절차적 공정성, 약속 이행, 지속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특히 공직자는 정책을 설명할 때 단순히 결과만 전달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결정이 내려졌는지 과정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
신뢰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행정 자산이다. 높은 신뢰는 정책 추진 비용을 줄이고 갈등 발생 가능성을 낮춘다. 반대로 신뢰가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성공하기 어렵다. 결국 행정의 경쟁력은 예산이나 권한이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방적 갈등관리가 최고의 행정이다
의학에서 예방이 치료보다 중요하듯이 갈등관리에서도 예방이 사후 대응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갈등이 심화된 이후에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반면 초기 단계에서 충분한 설명과 대화가 이루어지면 갈등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최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갈등영향분석, 주민참여제도, 공론화위원회, 숙의민주주의 제도 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들은 갈등이 발생한 이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 가능성을 사전에 점검하고 예방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공직자는 정책을 추진하기 전에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이해관계자는 누구인가? 어떤 우려가 예상되는가?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었는가? 주민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이 생활화될 때 예방적 갈등관리가 가능해진다.
갈등을 사전에 예방하는 행정은 단순히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을 넘어 주민의 신뢰를 높이고 정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가장 현명한 행정 방식이다.
맺음말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정이 미래를 만든다
갈등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갈등을 억압하면 불신이 쌓이고 사회적 분열이 심화된다. 반대로 갈등을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해결하면 공동체의 신뢰와 역량이 강화된다.
앞으로 공직자에게 필요한 역량은 명령하는 힘이 아니라 조정하는 힘이다.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협력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다. 또한 정책을 설명하는 능력을 넘어 상대방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행정은 주민을 위한 것이며 주민 속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미래 행정의 경쟁력은 갈등을 성장의 자산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뢰와 협력으로 풀어 가는 행정, 그것이 지속가능한 지역발전과 성숙한 민주사회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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