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를 기다리며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자: 자연의 제주 연제(然濟)가 들려주는 생명의 지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자연은 기다리는 생명을 먼저 살린다
제주의 자연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하나의 공통된 질서가 눈에 들어온다. 자연은 가장 빠르게 달리는 생명을 오래 남기지 않는다. 가장 크게 자라는 존재를 특별히 선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때를 알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생명을 끝내 살아남게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들이 있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바로 그 시간이 생명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씨앗은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무는 겨울 동안 다음 계절을 준비하며 지낸다. 작은 생명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자신의 생존을 위한 에너지를 축적한다. 기다림은 자연에게 결코 멈춤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생명의 전략인 셈이다.
필자는 서귀포 치유의 숲을 거닐다 도토리나무껍질에 조용히 붙어 있는 작은 달팽이를 만났고, 새섬에서는 억새 사이에 몸을 숨긴 또 다른 달팽이를 보았다. 또한 한림 금능 근석농장에서 하귤을 돌보며 작은 초파리들이 환경의 변화를 기다리는 모습도 오랫동안 관찰하였다.
이 작은 생명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한결같은 하나의 메시지를 들려준다. 때를 기다리는 자가 결국 살아남는다. 이것이 자연의 제주가 오랜 세월 동안 보여 준 연제(然濟)의 첫 번째 생명의 철학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오래 살아남는다: 서귀포 치유숲 도토리나무 달팽이가 보여 주는 절제의 질서
치유숲의 도토리나무를 유심히 바라보지 않으면 달팽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나무껍질과 거의 같은 색을 띠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야 비로소 그 작은 생명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햇볕이 강한 날에는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은 채 조용히 몸을 붙이고 있다가, 비가 내리거나 숲 속의 습도가 높아질 때에야 비로소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생명을 포기한 정지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제이다. 자연은 모든 순간 움직이는 생명보다 움직여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생명을 더 오래 살게 한다. 불필요한 에너지의 소비를 줄이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자연이 선택한 생존의 방식인 것이다.
오늘날 인간 사회는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을 성실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연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멈출 줄 아는 사람, 자신의 힘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오히려 더 멀리, 더 오래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연의 절제는 소극성이 아니라 생명의 지혜이다.
가장 느린 것이 가장 오래간다:
새섬 억새숲의 달팽이가 들려주는 삶의 속도
새섬의 억새숲에서도 작은 달팽이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시간표를 따라 움직인다. 햇볕이 뜨거운 한낮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슬이 맺히는 새벽이나 비가 오는 날이 되어야 비로소 천천히 길을 나선다.
사람들은 흔히 달팽이를 느림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연에서 느림은 결코 뒤처짐이나 무능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 리듬을 끝까지 지켜 내는 가장 안정적인 속도이다. 달팽이는 결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생명과 경쟁하기 위해 무리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맞는 리듬을 끝까지 유지할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달팽이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슬로시티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슬로시티가 말하는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삶을 다시 연결하려는 철학이다. 빠르게 소비하고 빠르게 버리는 사회보다 오래 지속되는 사회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자연은 달팽이를 통해 인간에게 한 가지를 말한다. 속도를 높이는 것보다 자신의 속도를 잃지 않는 일이 더 중요하다.
자신의 때를 아는 생명이 살아남는다: 배추밭 달팽이의 시간 전략
배추밭의 달팽이는 해가 뜨기 전 새벽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밤사이 맺힌 이슬을 이용하여 먹이를 찾고 활동을 마친 뒤, 햇볕이 강해지기 시작하면 다시 조용히 몸을 숨긴다. 인간의 눈에는 게으른 생명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자연의 관점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생존 전략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시간을 억지로 견디지 않고, 가장 유리한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자연은 무조건 빨리 움직이는 생명을 선택하지 않는다. 자신의 때를 알고 움직이는 생명을 오래 남긴다.
인생 또한 다르지 않다. 성공은 먼저 출발하는 사람의 몫이라기보다, 자신의 때를 알고 준비하는 사람의 몫일 때가 많다. 자연은 달팽이를 통해 서두름보다 시기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르친다.
작은 존재일수록 더 오래 기다린다: 근석농장의 하귤과 초파리가 들려주는 숙성의 철학
필자는 한림 금능의 근석농장에서 하귤을 재배하며 작은 초파리들을 자주 관찰하였다. 언뜻 보면 그들은 아무 과일이나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초파리는 과일이 충분히 익고 발효가 시작되어 향이 퍼질 때까지 조용히 주변 환경을 살핀다. 자연은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때를 알려 준다.
하귤 역시 마찬가지이다. 겨울의 차가운 시간을 견디고 봄의 햇살을 받아야 비로소 깊은 단맛과 향을 품게 된다. 익지 않은 열매는 아무리 커도 제맛을 낼 수 없지만, 충분한 시간을 견딘 열매는 크기가 조금 작더라도 깊은 향기를 간직한다.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숙성의 과정이다. 자연은 서두르는 열매보다 충분히 익은 열매를 더 오래 기억한다.
자연은 참고 견디는 생명을 선택한다
제주의 자연은 결코 온화하기만 한 환경이 아니다. 거센 바람과 강한 햇빛, 집중호우와 긴 가뭄이 반복되는 섬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힘으로 이기는 일이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는 일이다. 그래서 제주의 자연은 가장 강한 생명보다 가장 잘 견디는 생명을 선택한다.
참는 것은 패배가 아니며, 견디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내부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씨앗은 땅속에서 뿌리를 먼저 내리고, 나무는 겨울 동안 봄을 준비하며, 달팽이는 비를 기다리고, 초파리는 익음을 기다리며, 하귤은 계절을 기다린다.
겉으로는 모두 조용해 보이지만, 그 침묵 속에서는 생명의 질서가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자연은 조급한 생명보다 준비된 생명을 오래 남긴다.
맺음말
자연은 기다림을 생명의 법칙으로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빠름을 경쟁력이라 말하고, 성과를 속도로 평가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제주의 자연은 그와는 다른 삶의 원리를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기다릴 줄 아는 자가 결국 살아남고,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생명이 오히려 가장 오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달팽이는 자신의 속도를 잃지 않는다. 초파리는 자신의 때를 놓치지 않는다. 하귤은 계절을 서두르지 않는다. 이 작은 생명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보다 먼저 자연의 질서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왔다.
연제(然濟)는 바로 이러한 자연의 자기 조직화와 생명의 질서를 읽어 내는 철학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경쟁보다 기다림을, 지나침보다 절제를, 속도보다 균형을 가르친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단순한 생존의 기술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기다림은 가장 소극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자연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생명의 전략이다. 참고 견디며 자신의 때를 준비하는 자,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 내는 자를 자연은 끝내 살아남게 한다. 그것이 제주의 자연이 오랜 세월에 걸쳐 들려주는 연제(然濟)의 가장 깊고도 변함없는 지혜이다.
이 글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연은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자를 살린다."
참고자료
1)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2023). 제주 생태환경 조사보고서.


사진. 서귀포 새섬의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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