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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닥꼬닥 걸어가는 삶: 제주 올레길에서 읽는 ‘점진형 인간’과 인생여정의 방식"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길을 걷는 방식이 곧 인간형이다

제주에서 ‘길’은 단순한 이동의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태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또한 인간이 자연과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위치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천 형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주 올레길은 단순한 탐방 경로가 아니라 인간형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걷는 방식은 곧 살아가는 방식이며, 걸음의 리듬은 삶의 구조를 반영한다.
제주 사람들이 말하는 ‘꼬닥꼬닥’은 느리게 걷는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 삶의 태도를 담고 있다. 이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지향 가치의 문제이며, 삶을 구성하는 접근 방식의 선택이다.
필자는 신서귀포인으로 사 년여를 살아왔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정책계획이론가로서  이 분야의 강의와 연구를 수행하고, 정책자문에도 참여해 왔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필자는 스스로를 점진형 또는 점증형 인간, 곧 점진주의자(incrementalist) 혹은 점진적 개선주의자로 이해해 왔다. 이는 이론적 개념이기 이전에 삶의 방식으로서 체득된 자기 인식이다.
이 글은 제주 올레길을 매개로 ‘꼬닥꼬닥’이라는 제주적 삶의 방식을 해석하고, 이를 ‘점진형 인간’이라는 인간 유형과 연결하여 인생여정의 구조를 읽어보고자 한다.

제주 언어 ‘꼬닥꼬닥’에 담긴 삶의 방식

‘꼬닥꼬닥’이라는 제주어는 단순한 느림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꾸준함과 지속성, 그리고 멈추지 않는 움직임을 포함하는 복합적 개념이다. 이 표현은 ‘놀멍 쉬멍 걸으멍’이라는 말과 결합될 때 더욱 분명해진다. 놀고, 쉬고, 걷는 행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리듬으로 이어질 때, 삶은 속도의 경쟁에서 벗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제주어는 단순한 방언이 아니라 삶의 구조가 언어로 형상화된 문화적 형식이다. 바람과 돌, 바다라는 환경 속에서 형성된 제주인의 삶은 단절이 아니라 이어짐의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 결과 ‘꼬닥꼬닥’이라는 표현은 시간의 흐름과 삶의 축적 방식을 동시에 담아내는 언어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점에서 ‘꼬닥꼬닥’은 단순한 행위의 묘사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형을 제시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빠름을 지향하는 인간이 아니라 지속을 선택하는 인간, 한 번의 성취가 아니라 반복을 통해 삶을 만들어가는 인간을 의미한다.

제주 올레길과 인간형의 전환: 탐방에서 삶으로

제주 올레길은 단순한 프로젝트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걷기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하나의 문화적 실험이다. 길은 원래 이동을 위한 것이었지만, 올레길은 이동을 체험으로, 체험을 성찰로 전환시켰다.
올레길의 핵심은 속도를 늦추는 데 있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서 머물고 느끼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전환은 지역 탐방의 방식을 바꾸는 동시에, 인간이 삶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변화시킨다.
고 서명숙 이사장은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제안하였다. 올레길은 물리적 경로가 아니라 하나의 삶의 모델이다. 걷는 행위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은 소비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 공간 또한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장으로 전환된다. 1)

점진형 인간의 이론적 배경과 제주적 해석

점진형 인간은 사회과학에서 제시된 점진주의의 개념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C. E. Lindblom은 정책 결정이 합리적 완전성에 기반하기보다 ‘진흙밭을 건너듯(muddling through)’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2) 이는 인간이 제한된 정보와 조건 속에서 작은 단계를 통해 현실을 조정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A. Wildavsky는 정책 과정이 반복과 학습을 통해 진화한다고 보았으며, 3) A. Faludi는 계획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4) 또한 H. A. Simon의 만족화(satisficing) 개념은 완전한 최적이 아니라 현실적 선택을 통해 균형을 이루는 인간의 특성을 설명한다. 5)
이러한 이론은 제주적 삶의 방식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제주에서의 삶은 자연의 제약 속에서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과 조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바람을 막기 위한 돌담, 물을 저장하는 방식, 생업의 선택 등은 모두 단계적 적응의 결과이다.
따라서 점진형 인간은 단순한 이론적 개념을 넘어, 제주라는 환경 속에서 실제로 형성된 삶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꼬닥꼬닥’이라는 언어는 이러한 인간형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화적 표현이다.

꼬닥꼬닥 걷기와 점진형 인간의 삶의 구조

꼬닥꼬닥 걷는다는 것은 한 걸음씩 나아가는 점진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 점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매 단계에서의 조정과 선택을 포함한다. 부분 적정화가 축적되어 전체의 성취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인간은 한 번의 결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대신 작은 선택을 반복하며 방향을 수정해 나간다. 이러한 과정은 안정성을 확보하면서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한다.
올레길에서의 걷기는 이러한 삶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길은 직선이 아니라 굴곡을 가지며, 속도 또한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느리더라도 지속되는 움직임은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흙밭을 건너는 삶’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은 완벽을 지향하기보다 현실 속에서 가능한 최선의 경로를 선택하는 인간의 지혜이며, 제주 올레길은 이를 체험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제주 사람 ‘제인(濟人)’으로서의 점진형 인간

제인(濟人)은 자연과 사회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형이다. 그는 자연을 지배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수동적으로 순응하지도 않는다. 그는 관계 속에서 균형을 찾으며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
점진형 인간은 이러한 제인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는 속도를 줄이고 관계를 깊게 하며, 경쟁보다는 지속을 선택하고 성취보다는 과정의 의미를 중시한다.
특히 고은층의 삶은 이러한 점진적 성숙을 잘 보여준다. 고은은 단순한 연령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와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삶을 서두르지 않고 경험을 축적하며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점진적으로 성숙한다.
따라서 ‘꼬닥꼬닥’은 단순한 걷기의 방식이 아니라, 제인으로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는 핵심 개념이다.

길과 인생여정: 점진적 접근의 삶의 방식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경로이다. 그것은 미리 정해진 하나의 선이 아니라 선택과 경험이 축적되며 형성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목표의 크기가 아니라 지속의 힘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장 7절)는 점진적 축적의 가치를 보여준다. 작은 시작이 반복과 지속을 통해 큰 결과로 이어진다는 의미이다.
동양의 사유에서도 ‘이소성대(以小成大)’와 ‘대기만성(大器晩成)’은 점진적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제주적 삶의 방식과 깊이 연결된다. 제주 사람들은 자연의 조건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삶을 축적해 왔다.
따라서 점진적 접근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인간이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확장해 나가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이다.

맺음말
느림의 힘과 지속가능한 인간형

오늘날 우리는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빠름은 효율로, 경쟁은 필수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지속가능성을 약화시키고 인간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시대에 ‘꼬닥꼬닥’은 하나의 대안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느림을 통한 회피가 아니라 지속을 위한 전략이다. 점진형 인간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가장 현실적인 인간형이며, 제주 올레길은 이러한 인간형을 체험적으로 제안하는 문화적 장치이다.
길은 속도가 아니라 방식이다. 삶 또한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씩 전진하는 과정이다. ‘꼬닥꼬닥’은 바로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제주적 지혜이며, 지속가능한 삶을 향한 하나의 길이다.


1) 서명숙,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북하우스, 2010.
2) Lindblom, C. E. (1959). The Science of Muddling Through, Public Administration Review.
3) Wildavsky, A. (1979). Speaking Truth to Power: The Art and Craft of Policy Analysis, Little, Brown.
4) Faludi, A. (1973). Planning Theory, Pergamon Press.
5) Simon, H. A. (1957). Models of Man: Social and Rational, Wi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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