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120세 시대, 제주가 들려주는 고은층의 비전과 삶터"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인생 120세 시대, 제주와 고은층은 왜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
인생 백세 시대라는 말도 이제는 익숙한 표현이 되었다. 의학과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평균수명을 꾸준히 연장시키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인생 120세를 이야기하는 것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생이 길어질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어디에서 삶을 아름답게 완성할 것인가이다.
젊은 시절에는 직장이 삶의 중심이었고, 중년에는 가정이 삶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고은층에 이르면 삶터가 곧 인생의 품격을 결정한다. 삶터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자연과 사람, 공동체와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삶을 완성해 가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생사색』에서 고은층의 삶을 성찰해 왔고, 『제주사색』에서는 제주의 자연과 사람을 사유해 왔다. 이제 이 두 사색은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 인생의 후반전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과 가장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제주이다. 제주는 오래 머무는 관광지가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터전이며, 제주사람과 새롭게 제주를 선택한 신제주인 모두에게 새로운 고은층의 삶을 열어 주는 공간이다.
인생 120세 시대, 노계(老計)와 사계(死計)를 준비하는 지혜
사람은 인생의 단계마다 서로 다른 준비를 하며 살아간다. 젊은 시절에는 생계를 준비하고, 중년에는 가정을 세우며, 고은층에 이르러서는 노후를 준비한다. 그러나 노계(老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계와 함께 사계(死計)를 준비하는 지혜 또한 필요하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은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편 12절)라고 말씀한다. 삶의 끝을 의식하는 사람일수록 오늘의 시간을 더욱 귀하게 살아간다.
제주의 자연은 이러한 삶의 태도를 조용히 일깨워 준다. 바다는 밀려왔다가 다시 물러가고, 오름은 묵묵히 계절을 맞이하며, 곶자왈은 수천 년 동안 생명을 품어 왔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고, 억지로 붙잡지도 않는다. 고은층 또한 자연처럼 살아갈 때 가장 아름답다.
고은층의 세 가지 비전: '나누고 남기고, 버리고 비우고, 자연으로 돌아가다'
필자는 『인생사색』에서 고은층의 삶을 나남(나누고 남기고), 버비(버리고 비우고), 가자(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세 가지 비전으로 정리하였다.
첫째는 나남이다. 인생 후반전은 더 많이 소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더 많이 나누는 시간이다. 경험은 지혜가 되고, 지혜는 다음 세대의 자산이 된다. 공자는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고 하였다. 나눔은 사람을 남기고, 사랑을 남긴다.
둘째는 버비이다. 비움은 상실이 아니라 자유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그릇은 비어 있기 때문에 쓰임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욕심을 내려놓을수록 마음은 넓어지고, 마음이 넓어질수록 삶은 더욱 가벼워진다.
셋째는 가자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제주의 자연은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계절은 순환의 질서를 일깨워 준다.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시를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배우며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성공보다 성숙을 선택하다:
잡는 삶에서 내려놓는 삶으로
젊은 시절에는 성공을 향해 달려간다. 성공은 목표를 이루고 더 많이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전에서는 성공보다 성숙이 더욱 중요하다.
성공은 자기의 성취에 머물 수 있지만, 성숙은 타인을 품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논어』는 "옛사람의 배움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오늘날의 배움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었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고 말한다. 고은층의 삶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넘어 위인지학(爲人之學)의 길을 걸어가는 삶이다.
그래서 고은층은 반드시 이루겠다는 집착을 내려놓는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오래 머물지 않고, 상대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한다. 탈무드에는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고은층의 성숙은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이해하는 데 있다.
완전보다 온전을 이루다:
외형보다 본질을 가꾸는 삶
젊은 시절에는 완전함을 추구한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성과, 더 큰 성공을 꿈꾼다. 그러나 인생 후반전에서는 완전(perfect) 보다 온전(complete)이 더욱 중요하다.
완전은 외형을 말하지만, 온전은 본질을 말한다. 완전은 비교를 낳지만, 온전은 평안을 가져온다.
고은층은 먼저 수분정도(守分正道)를 실천한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바른 길을 걷는 것이다. 또한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자세를 지닌다.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흔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공충실(內功充實)과 귀전선린(歸田善隣)을 실천한다. 배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어 하나님과 자연을 가까이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지향한다. 그리고 유유자작(悠悠自作)의 마음으로 작은 행복에 만족할 줄 안다(小確幸). 노자는 "족함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제주가 고은층의 삶터가 되는 이유: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섬
삶터는 인생의 마지막 품격을 결정한다. 고은층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마음이 편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제주는 화산과 바다, 숲과 오름, 돌과 바람이 함께 살아가는 섬이다. 이러한 자연은 사람에게 느림을 가르치고 절제를 배우게 하며,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일깨워 준다. 제주사람들이 오랫동안 자연과 공존해 온 삶의 방식은 오늘날 신제주인에게도 새로운 삶의 모델이 된다.
인생 후반전은 경쟁보다 공존이 중요하다. 제주는 사람과 자연, 공동체와 문화가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는 곳이다. 이러한 환경은 고령층과 은퇴자, 그리고 고은층에게 육체적 안식뿐 아니라 정신적 평안과 영적 성숙을 함께 제공한다.
세계는 장수사회를 넘어 초고령사회로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제주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고은층의 삶을 설계하는 세계적인 삶터로 자리매김할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맺음글
제주에서 인생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다
인생은 오래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아름답게 완성되는 것이 목표이다. 고은층은 인생의 마지막 세대가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를 간직한 세대이며, 미래세대에게 삶의 방향을 비추는 등불이다.
필자는 『인생사색』에서 사람의 삶을 성찰하였고, 『제주사색』에서는 제주의 자연과 사람을 사유하였다. 그 두 길은 결국 하나로 만난다. 자연을 닮은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사람을 품은 자연이 가장 위대하기 때문이다.
인생 120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제주도는 제주사람과 신제주인을 아우르며 고령층과 은퇴자, 그리고 고은층이 인생 후반전을 품격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경쟁력 있는 삶터가 될 수 있다. 자연은 삶을 치유하고, 공동체는 사람을 따뜻하게 품으며, 시간은 성숙을 선물한다. 그러므로 제주에서의 삶은 은퇴의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며, 인생의 끝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완성이다.
필자는 오늘도 믿는다. 고은층이 행복한 제주가 미래의 제주이며, 제주가 품은 고은층의 삶은 대한민국 인생 120세 시대를 이끌어 갈 새로운 사회모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제주는 단순한 장수의 섬이 아니라 고은층의 세계적인 파라다이스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인생의 마지막 정착지는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라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곳이어야 한다. 그 삶터가 제주라면, 제주는 사람을 품고 사람은 제주를 닮아가며 함께 인생을 완성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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