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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의는 끝나지 않았다(3): 정년에서 고은층까지, 인생 후반전의 철학"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제4부
고은층이라는 새로운 이름:
인생 후반전을 다시 정의하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이름을 얻는다. 어린 시절에는 아이였고, 학교에서는 학생이었으며, 사회에 나와서는 직업과 직책으로 불린다. 나 또한 교수였고 연구자였으며, 지역개발학자이자 국가와 지역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정책계획가로 살아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 이름들은 모두 삶의 한 시기를 설명할 뿐, 삶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직책은 시대가 맡겨 준 역할이고 직업은 일정한 기간 감당하는 책임이다. 때가 되면 누구나 그것을 내려놓는다. 그러나 사람을 오래 기억하게 하는 것은 직책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며, 업적보다 인격이고, 성취보다 품격이다.

정년 이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고령자, 노년층이라 불렀다. 틀린 표현은 아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아쉬움이 남았다. 그 말에는 지나온 세월은 담겨 있었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은 충분히 담겨 있지 않았고, 경험은 있었지만 희망은 부족하였다. 노년이라는 이름은 삶을 정리하는 언어에는 익숙했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언어는 아니었다.
나는 인생 후반전을 조금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다. 가장 깊이 배우고, 가장 넓게 이해하며, 가장 따뜻하게 사랑하고, 가장 아름답게 나누는 삶으로 새롭게 정의하고 싶었다.
이 생각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 오랜 독서와 글쓰기, 자연 속에서 이어진 사색, 사람에게서 배운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온 감사가 긴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하나의 이름으로 익어 갔다.

그 이름이 바로 고은층(高恩層)이다.

고은층은 단순히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노년을 미화하기 위해 만든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인생 후반전을 바라보는 새로운 철학이며, 삶을 완성해 가는 하나의 길이다.

나는 고은층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고은층은 세월이 준 은혜를 깊이 새기고, 그 은혜를 다시 세상과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고은층은 나이로 결정되지 않는다. 사람을 고은층으로 만드는 것은 연령이 아니라 성숙이며, 시간이 아니라 삶의 자세이다.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나누는 사람, 많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귀 기울여 듣는 사람, 자신의 성공보다 다른 사람의 성장을 더 기뻐하는 사람이 바로 고은층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모든 사람을 같은 모습으로 성숙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따뜻해지고, 어떤 이는 과거의 성공 속에 머문다. 결국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살아온 삶의 방식이다.
나는 언젠가 우리 사회가 '초고령사회'라는 표현보다 '고은층 사회'라는 말을 더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오래 사는 사회보다 품격 있게 살아가는 사회가 훨씬 건강하기 때문이다.

고은층을 세우는 다섯 개의 기둥

오랜 사색 끝에 나는 인생 후반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다섯 가지 원리를 발견하였다.
첫째는 생각하는 삶이다. 배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질문을 잃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내일을 살아간다.
둘째는 의미 있는 삶이다. 직업은 끝나도 사명은 끝나지 않는다. 정년은 직장의 마침표일 뿐, 인생의 종착역은 아니다.
셋째는 성숙하는 삶이다. 한 권의 책, 한 줄의 글, 한 번의 산책, 한 사람과의 대화가 쌓여 한 사람의 품격을 만든다.
넷째는 성찰하는 삶이다. 성찰은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일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다.
다섯째는 품격을 남기는 삶이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업적보다 인품이 오래 기억된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가보다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더 오래 기억한다.
이 다섯 가지는 책에서 얻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 오랜 세월 동안 내게 가르쳐 준 다섯 가지 진실이다.

고은구덕과 기기, 삶을 완성하는 실천 철학

철학은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고은층의 실천 원리를 고은구덕(高恩九德)이라 이름하였다.

고은구덕은 감사, 겸손, 배려, 절제, 신의, 나눔, 성찰, 품격, 희망이다.

이 아홉 가지는 거창한 덕목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가는 작은 선택이다. 이와 같은 작은 선택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을 만들며, 인격은 마침내 품격으로 완성된다.

또 하나 내가 오래도록 붙들어 온 삶의 화두가 있다. 바로 기기(冀棄)이다. 기기(冀棄)는 바랄기와 버릴기를 의미한다.

기기(冀棄)는
"희망은 끝까지 품되 욕심은 내려놓고, 사랑은 키우되 미움은 버리며, 감사를 쌓되 원망은 흘려보내는 삶이다."

인생 후반전은 더 많이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품을 것인가를 배우는 시간이다. 비움은 상실이 아니라 자유이며,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니라 성숙이다.

우리 사회가 맞이해야 할 새로운 세대

나는 고은층을 우리 사회가 오랜 세월 축적해 온 경험과 지혜가 융합된 가장 소중한 사회자본으로 바라본다.
젊은 세대가 새로운 길을 여는 사람이라면, 고은층은 그 길을 오래도록 비추는 등불이다. 경험은 과거를 과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더 나은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정표가 되기 위해 존재한다.
앞에서 박수를 받는 사람보다 뒤에서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더욱 아름답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고은층의 모습이다.
돌이켜 보면 이 철학은 연구실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온 시간 속에서 조금씩 익어 온 삶의 결실이었다.
철학은 책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성숙한다.
그리고 그 삶은 내게 마지막 질문 하나를 남겼다.

인생이 결국 내게 남긴 가장 소중한 선물은 무엇이었는가?

그 질문의 답이 바로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려는 세 가지 선물이다.

제5부
인생이 내게 남긴 세 가지 선물:
후회가 아니라 성숙의 열매


사람은 어느 나이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앞만 바라보고 달린다.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었고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며 쉼 없이 걸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은 언젠가 사람을 조용히 멈춰 세우고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결과하였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 또한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오랜 사색 끝에 세 가지를 발견하였다.

건강이었다.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정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후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후회가 아니라 세월이 마지막에 내게 건네준 가장 귀한 선물임을 깨닫게 되었다. 후회는 과거를 붙잡지만, 깨달음은 남은 삶을 바꾼다.

첫 번째 선물, 건강:
몸은 인생을 담는 그릇이다


젊은 시절 나는 건강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몸은 언제나 나를 따라와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세월은 몸이 일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 나는 건강을 관리하기보다 몸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음에 감사하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한다.
건강은 성공한 뒤에 챙기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오래 지켜 주는 삶의 토대이다.

두 번째 선물, 사람:
인생의 마지막에는 사람이 남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분명해진 사실이 있다.
사람은 함께 일한 시간보다 함께 마음을 나눈 시간으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전해 오는 제자의 안부, 함께했던 동료의 따뜻한 인사, 오래전 정책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미소는 내가 받은 가장 큰 훈장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먼저 안부를 묻고, 먼저 손을 내밀며, 먼저 감사의 말을 전하려 한다.
인생 후반전의 가장 큰 자산은 재산이 아니라 사람이다.

세 번째 선물, 가정:
가장 늦게 깨달은 가장 큰 축복


내가 가장 늦게 깨달은 선물은 가정이었다.
사회에서는 성실한 교수였고 연구자였으며 정책계획가였을지 모르지만, 가정에서는 늘 부족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다.
젊은 시절의 나는 성실과 근면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큰 덕목이라 믿었고, 쉼 없이 달려가는 삶이 곧 가족을 위한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야말로 가족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남은 시간만큼은 가족과 함께 더 많이 걷고, 자녀들과 더 자주 마음을 나누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일상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싶다.

성찰은 남은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한다

나는 이제 나이가 들수록 후회보다 성찰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건강을 잃기 전에 몸을 사랑하고, 사람을 잃기 전에 마음을 전하며, 가정을 잃기 전에 함께하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삶이다.
이것이 세월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지혜이다.
돌이켜 보면 세월은 성공보다 더 귀한 것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늙는 존재가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성숙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성숙은 마침내 고은층이라는 삶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이제 나는 이러한 성찰을 하나의 삶의 선언으로 정리하며,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는 모든 이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그 길의 이름은 '고은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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