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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의는 끝나지 않았다(2): 정년에서 고은층까지, 인생 후반전의 철학"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제2부
대학에서 세상으로:
학문은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지난날 내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행정학과 지역개발학을 전공한 것도 공간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게 학문은 직업이 아니라 사명이었고, 연구는 업적을 쌓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책임이었다. 영남대에서 보낸 삼십팔 년은 교수로 살아온 시간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성장한 시간이었다. 강의실에서는 학생들과 생각을 나누었고, 연구실에서는 시대가 던지는 질문을 붙들고 답을 찾고자 했다. 캠퍼스는 지식을 쌓는 공간이 아니라 생각을 깊게 하는 공간이었으며, 대학은 직장이 아니라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였다.

많은 사람들은 교수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강단에 서 보니 오히려 나는 학생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젊은 세대의 열정은 나를 끊임없이 새롭게 했고, 그들의 관심은 익숙한 사고의 틀을 흔들어 놓았다. 학생들이 있었기에 나 역시 평생 배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강의는 서로의 삶을 비추는 대화였고, 지식을 주고받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과정이었다.

강의를 준비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곤 했다.

"이 강의는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가?"

나는 지식을 많이 전달하는 강의보다 생각의 폭을 넓혀 주는 강의가 오래 기억된다고 믿었다. 지식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공동체의 가치, 공공의 책임을 함께 이야기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학은 직업인을 길러 내는 곳이기 이전에 시대를 책임질 사람을 키우는 곳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연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논문을 위한 연구보다 현실과 호흡하는 연구를 지향하였다. 지역개발과 지역경제, 지방재정과 공공투자,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연구하면서도 늘 마음속에 하나의 기준을 품고 있었다.

"이 연구가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하는가?"

그 질문은 나를 연구실 밖으로 이끌었다. 정부위원회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자문, 각종 정책계획의 수립과 심의에 참여하면서 학문과 현실은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관계임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학문은 현실을 이해할 때 생명력을 얻고, 정책은 철학을 품을 때 지속 가능한 힘을 갖게 된다.

수많은 회의와 현장조사, 정책 심의와 토론의 과정에서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원칙은 하나였다. 정책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제도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계획은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존재하며, 행정은 국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아무리 정교한 제도와 훌륭한 정책이라도 사람의 삶을 따뜻하게 하지 못한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숫자보다 사람을 먼저 보려고 노력하였다. 지역을 계획할 때에도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고, 지역발전을 논의할 때에도 주민들의 일상을 먼저 생각하였다. 정책은 보고서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수많은 현장이 가르쳐 주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수와 연구자, 정책계획가와 정책 자문위원이라는 여러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직함보다 사람들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기억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제자들이 찾아와 "교수님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해 줄 때, 함께 연구했던 동료들이 변함없는 우정을 전해 줄 때, 정책을 함께 만들었던 행정 실무자들이 따뜻하게 손을 잡아 줄 때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업적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됨으로 기억된다는 사실이었다.

논문은 또 다른 논문으로 이어지고 정책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진심으로 맺은 인연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삼십팔 년의 교수 생활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수많은 업적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신뢰와 따뜻한 인연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또 하나의 문이 내 앞에 다가왔다. 그 문은 '정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긴 여정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문이었다.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가?"라는 질문이 더 깊게 다가왔다.

그 질문은 성취보다 존재를 돌아보게 하였다. 교수라는 이름은 내 삶의 중요한 한 장이었지만 삶 전체는 아니었다. 직책은 내려놓을 수 있어도 사람됨은 끝까지 남는다는 사실을, 그 무렵 비로소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제3부
은퇴가 아니라 사색의 시작이었다: 삶의 속도를 늦추자 비로소 인생의 깊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년을 맞은 사람들은 흔히 묻는다.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오랫동안 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은퇴는 단순히 역할을 내려놓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묻는 시간이다. 익숙했던 일정이 사라지고 사회가 부여한 직책을 내려놓는 순간, 누구나 한 번쯤 자기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강의와 연구, 정책 현장과 학회를 쉼 없이 오가던 삶이 멈추자 넉넉한 시간은 오히려 낯설게 다가왔다. 바쁘게 살아온 사람에게 여유는 처음에는 축복이 아니라 어색한 침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침묵은 서서히 사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삶의 터전을 제주 서귀포로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제주를 선택했느냐고 묻지만, 내게 더 큰 이유는 천천히 살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늘 시간을 따라 달렸다면, 인생 후반전만큼은 시간을 앞세우기보다 시간을 품으며 살아가고 싶었다. 서귀포는 그런 나의 삶을 조용히 품어 주었다.

아침이면 하늘과 바람을 벗 삼아 하루를 시작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썼다. 오후에는 숲길과 바닷길을 걸으며 자연과 대화를 나누었고, 때로는 파크골프장에서 사람들과 웃음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은퇴 후의 여유라고 말했지만, 내게는 삶을 다시 배우는 또 하나의 학교였다. 독서의 의미도 달라졌다. 젊은 시절에는 연구를 위해 책을 읽었다면 이제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 읽었다.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글을 쓰던 시간은 사람들과 삶을 나누기 위한 글쓰기로 이어졌다. 책은 정보를 얻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고, 글쓰기는 성과를 남기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을 다듬는 수행이 되었다.

자연은 또 다른 스승이었다. 숲은 공존의 질서를, 바다는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삶을 가르쳐 주었다. 오름은 기다림을, 바람은 자유를, 화산은 긴 시간을 견디는 인내를 말없이 일깨워 주었다. 그때부터 제주는 더 이상 거처가 아니라 삶을 성찰하게 하는 철학의 공간이 되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달라졌다. 함께 일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던 시간은 함께 걷고 함께 즐기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경쟁보다 동행이, 성취보다 관계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하루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삶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졌다. 성과를 좇던 삶은 의미를 찾는 삶으로, 속도를 중시하던 삶은 깊이를 가꾸는 삶으로, 성공을 향하던 삶은 품격을 완성하는 삶으로 조용히 옮겨 갔다.

어느 날 문득 그동안 써 온 글들을 다시 펼쳐 보았다. 감사와 생각, 믿음과 관계, 품격과 희망에 관한 글들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수필도 회고록도 아니었다.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깨달음의 기록이었다. 그 기록은 『인생사색 1-3권(2023); 4-7권(2025).  교보문고』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제주에서 만난 자연과 역사, 문화와 사람들도 또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다. 그것이 『제주사색 1-5권. 발간예정. 2026』이다. 하나는 사람을 향한 사색이고, 다른 하나는 제주를 향한 사색이었지만, 결국 두 흐름은 모두 삶의 본질을 향하고 있었다. 그 오랜 사색의 시간은 내 삶을 조금씩 변화시켰고, 마침내 인생 후반전을 새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철학으로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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