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 명예교수회지 게재원고
21/Aug/2020
나의 교수인생과 영남대
이성근 명예교수 글로벌인재대학
나와 영남대는 학부학생과 대학교수로 두 번의 소중한 인연을 가졌다. 학부 행정학과를 졸업했고 38년간 지역개발학과/ 지역및 복지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교육부 해외파견 연구교수로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1년, 국내교류교수로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1년, 대구경북연구원장으로 2년, 안식년 1년의 5년을 제외하고는 40여 년을 영남대에서 지냈다. 영남대가 내 인생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삶에서 세 가지 프라이드를 갖고 있다. 하나는 교수라는 직분이고 둘은 영남대 교수라는 지위이며 셋은 나의 전공이 지역개발학이라는 것이다. 이 모두는 영남대와 불가결한 관계로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교수는 분명히 다른 직업과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나는 오랜 교수직을 지내면서 나름대로 네 가지 교수 원형(prototype)을 설정하고, 이를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교학형(敎學型), 탐구형(探究型), 후생형(厚生型), 자조형(自助型) 교수이다.
교학형 교수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좋아하는 교수이다. 탐구형 교수는 지적 호기심이 많은 연구하는 교수이다. 후생형 교수는 공유와 협업을 잘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실사구시 교수이다.
자조형 교수는 의지와 열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교수이다.
최근 나의 인생을 가정법으로 되돌아본다. 만약 내가 교수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지금보다 못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에게 교수직은 운명이라 생각한다.
다음은 영남대의 교수지위이다. 나는 영남대가 갖는 세가지 비교우위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는 대학평판과 자유스런 분위기, 그리고 안정적 대학경영이다.
학생시절에는 천마뱃지가 자랑스러웠다. 또한 70년대 행정고시 합격자 순위가 전국 3~4위로 행정학과 학생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교수가 되어서는 대학평판으로 득을 많이 보았다. 국내에서는 지방대학이지만 영남대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었다. 해외에서 영남대를 소개할 때 설립자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말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대학평판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무형의 편익이었다.
영남대는 정확히 사립대학이다. 그러나 여느 사립대와는 다르다. 국공립대의 엄격함도 없고 오너십이 확실한 사립대의 구속도 없는 자유스런 대학이다. 이와 같은 대학분위기는 구속없는 오랜 관선재단과 대학구성원의 투표로 선출된 총장체제가 가져다 준 독특한 대학문화이었다. 만약 자유스런 대학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교수활동에 다소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립대학들은 역사가 일천하여 국·공립대학에 비해 교수지원과 학생선발, 재정운영 등과 같은 대학경영에서 안정적이지 못하다. 대학경영이 불안정하면 구성원인 교수들도 여러 가지 불편한 영향을 받게 된다. 영남대학은 내가 재직하는 동안 이런 것에서 안정적이었다. 따라서 비교적 안정된 대학환경에서 교수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마지막은 나의 전공이 지역개발학이라는 점이다. 지역개발학은 지역의 발전을 탐구하는 분야로 응용사회과학과 종합과학, 그리고 실천지향적 학문의 성격을 지닌다.
70년대 중반에 영남대 지역개발학과는 전국에서 선두로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졸업생 대부분이 지방 7급 행정직 공무원으로 경상북도 시·군에 임용되었다. 나는 정책자문과 심의로 이들과 평생 교류하고 소통하는 교학상장과 사제동행의 시간을 보냈다.
90년대 들어서는 지방자치의 부활로 지역개발의 수요가 많아 중앙과 지방의 정부와 여러 기관·단체에서 정책계획과 정책자문의 기회도 가졌다. 나에게 지역개발학 전공은 인생에서 소중한 자부심이자 자산이었다.
최근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자주 갖는다. 그간 앞만 보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을까?'하고 자문해 본다. 나는' 바쁜 교수'이었다. 영국에서 "바쁜 사람하면 나쁜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사업가(Businessman)'의 어원이 '바쁜(busy)'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농업사회와 달리 산업사회에서 사업가는 일하는 방식이 정신없이 분주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국에서 "바쁜 사람은 무계획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에서는 바쁜 교수로, 가정에서는 바쁜 아버지로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지역개발전문가로서 다양한 일에 참여하면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나를 네트워크가 강한 교수로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관계 지향적(relation- oriented)'이기 보다는 '일 지향적(task-oriented)' 삶을 산 교수이다. 일이 먼저고 관계는 일로 얻은 또 다른 결과이다. 이런 교수활동이 대학의 타분야 전공교수들의 눈에는 이곳 저곳 넘나드는 교수로 비치는 오해와 편견이 있었을성도 싶다.
평생동안 지역개발학 전공 교수로서 다양한 계획작업에 참여하였다. 많은 교수들은 "나를 기획력이 뛰어난 기획통 교수"로 불렀다. 대체로 기획력은 숲도 보고 나무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숲은 전략에 해당하고 나무는 전술에 해당한다. 전략에 강한 사람은 전술에 약하고 전술에 강한 사람은 전략에 약하다. 나는 전략과 전술, 거시와 미시, 프레임과 디테일의 역량을 조화롭게 갖추려고 평생 노력해 왔다.
내가 대학에서 한 특별한 기획작업으로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류창우 총장 재임시에 테크노파크 추진기획단 단장으로 산업자원부 국가시범 테크노파크 공모사업에서 경북테크노파크를 선정·유치한 일이다. 국비 250억원(당초 500억원)지원과 자체재원 250억원 규모의 사업이다. 영남대가 주관한 경북테크노파크가 '한국 테크노파크의 기원(origin)'으로 산업자원부의 국책사업화와 전국 테크노파크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둘은 이효수 총장 재임시에 행정대학원장으로 행정대학원 부설로 최고위정책리더과정을 기획하여 설치하고 운영한 일이다. 1년 과정으로 30명 내외의 소규모로 1년에 2회 모집하였다. 수료시 오백만원의 대학발전기금을 내어 10년만에 1억원 이상을 적립하였다.
셋은 우동기 총장 재임시에 정치행정대학장 겸무로 제2 창학추진단장으로 여러 위원들과 함께 대학의 미래 비전과 추진전략, 그리고 실천과제를 마련하고, 선포식을 가진 일이 기억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소중한 가족들로부터는 "내가 비계획적으로 가정생활을 한다"고 종종 비판받아왔다.
인간은 평생을 살다보면 항상 좋은 일만 전개되지는 않는다. 나 또한 70 평생의 삶에서 두 세번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런 일을 겪은 이후 나 자신을 다잡는 네 가지 생활기준을 만들고 이를 지키려 노력했다.
첫째는 수분정도(水分正道)이다. 이는 분수를 알고 바른 길을 가야 함을 뜻한다. 교수직분은 강의와 연구, 그리고 봉사의 책무가 주어진다. 이들 세 가지 책무를 균형되게 수행해야 하나 나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교수라는 사회적 책임성에 맞게 정직성과 투명성, 그리고 도덕성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둘째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이는 타인에게 겸손하고 자신에게 엄격함을 뜻한다. 나는 원래 천성이 온순한 편이다. 그러나 학생지도, 공동연구, 학술발표와 토론 등에서는 주의주장이 강한 편이다. 이로 인해 학생들에겐 마음의 상처, 공동연구자들에겐 불편한 마음, 발표자와 토론자에겐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셋째는 자중자존(自重自尊)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존감을 가진다. 교수는 가르치는 일과 정책자문 활동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일정한 선을 넘는 언행을 할 경우가 생긴다. 이는 자신을 가볍게 하고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 나는 교수로서 자존감을 갖기 위해 스스로 프라이드를 가지고 타인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균형되게 설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개념과 상식, 그리고 공의에 합당하지 않으면 타협하지 않았다.
넷째는 심지강건(心志剛健)이다. 이는 자신을 평안하게 하고 굳게 하는 마음의 다스림을 뜻한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율은 OECD 국가 가운데 1위이고 증가율은 지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유명인사들의 자살 소식을 종종 접하게 된다. 나도 오랜 교수생활에 주위의 오해와 편견으로 마음 상할 때가 있었다. 이럴 때 마다 심지강건을 외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정년을 앞두고 정말 오랜만에 안식년을 가졌다. 이즈음 건강도 이상신호가 왔다. 이 기간 동안에 정년 이후의 내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크게는 귀전선린으로 정했다. 이는 자연과 친하고 소중한 이웃과 좋게 한다는 뜻이다. 이의 실행으로 건강제일과 가정우선, 그리고 내공충실로 정하였다.
첫째는 건강제일이다. 어릴 때는 의지정도가 성공의 결정요인이나 나이 들어서는 건강여부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건강이 따르지 못하면 불가한 것이다.
둘째는 가정우선이다. 젊은 시절에는 가정을 그냥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가정의 가치와 소중함을 몰랐다. 자녀출산과 양육과정에 부부의 의논과 역할분담이 중요함을 이제사 깨닫게 되었다.
셋째는 내공충실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훈육의 습관은 대단히 중요한 성공요인이다. 정년 이후의 내공충실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느슨한 마음으로 편하게 하는 것이다. 정년 이전에는 앞의 네 기준이 중요했으나, 정년 이후에는 뒤의 세 기준에 더욱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며칠 전 금년 2월과 8월에 정년을 맞은 두 분 교수와 식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들은 나에게 정년 이후 요즘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고 물었다.
먼저 정년 이후 나의 일상의 변화를 얘기했다. 정년과 함께 부닥친 것이 연구실과 조교, 그리고 캠퍼스의 쾌적한 환경이 없어진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연구실은 집 근처에 조그만 사무실을 임대하여 마련하였다.
조교의 도움을 대신하는 방안은 휴대폰으로 책쓰기, 글쓰기 배움에 도전하고 있다.
캠퍼스의 쾌적한 환경의 대체는 일주일에 하루를 가족의 날로 정하고 인근의 산과 공원을 찾아 걷기를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대학캠퍼스가 문을 닫았을 때는 영남대 캠퍼스 산책도 가끔하였다. 신입생 면접에서 영남대를 지원한 동기를 물었을 때 "캠퍼스가 좋아서"라고 대답하는 학생도 종종 있었다.
나는 대학의 소중한 여러가치를 가정처럼 그냥 주어진 것으로 무의식 속에서 근무하였다. 정년에 이른 지금 생각해 보니 대학의 하나 하나가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글을 맺으면서 명나라 때 문학가겸 서화가인 진계유(1558-1639)의 "연후(然後)"를 소개하고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자신을 돌아본다.
연후(然後)
진계유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 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 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 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의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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