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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인생 순행파와 고행파에 대한 논의"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비슷하게 태어나, 다른 길을 걷다, 다시 비슷하게 마무리되는 삶

우리는 태어날 때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세상에 온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각자의 길은 다르게 펼쳐진다. 어떤 이는 평탄하고 여유로운 길을 걷고, 또 어떤 이는 굽이치고 험한 길을 헤쳐 나간다. 그 길의 끝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는 다시 비슷한 형색으로 돌아가지만, 그 여정은 결코 같지 않다.
나는 평생 가족으로부터 “왜 당신은 고생을 사서 하나요?”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고, 최근 서귀포에서 차담을 나누던 여유로운 시간에 지인으로부터 “선생님은 늘 많은 생각을 품고 사시지요”라는 말을 들었다. 이 두 말이 내 인생을 돌아보게 했으며,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인생 유형을 단순하게 ‘순행파(順行派)’와 ‘고행파(苦行派)’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차이와 교훈, 그리고 우리가 지향할 바람직한 인생 여정 특히 글의 말미에 고은층의 인생 여정에 대해 논의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개역개정)


순행파는 바람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길을 간다

인생 순행파는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기보다, 흐름을 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사람 참 편하게 산다”, “요령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위기를 맞아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재치 있게 빠져나가고, 사회의 규칙과 사람의 심리를 잘 읽어 미묘한 갈등을 비껴간다.
역사 속 순행파의 대표로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들 수 있다. 그는 식민지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타협과 외교의 달인이었고, 사교성과 유머로 갈등을 풀어가며, 독립전쟁 전후 모두에서 정치적 입지를 잃지 않았다. 그의 유연함은 미국 건국에 필요한 연결 고리가 되었지만, 동시에 일부 동시대인들에게는 ‘원칙 없는 협상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유형은 많다. 조직에서 눈치 빠르게 상대방의 의중을 읽어 갈등을 피하고, 인간관계에서 굳이 부딪히지 않고 원하는 조건을 얻는다.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잠언 25:15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 공자, 『논어 』
"지혜로운 자는 활동적이고, 어진 자는 고요하며,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 갈대 속담 이솝 우화 『참나무와 갈대』에서 유래한 이야기


그러나 순행파의 약점도 있다. 목적 없는 순응은 무책임이 되고, 지혜로운 회피는 비겁함으로 변질될 수 있다. 프랭클린처럼 유연함이 사회적 다리(social bridge)를 놓는 경우도 있지만, 정치사에서 종종 볼 수 있듯, 상황만 좇다 길을 잃는 인물들도 있다.

고행파는 거친 길을 묵묵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걸어간다

고행파는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한다. ‘고생을 사서 한다’는 말을 듣고, 작은 일도 크게 키운다는 ‘침소봉대(針小棒大)’의 기질을 보인다. 그냥 넘어갈 일도 반드시 따지고 넘어가며, ‘대충’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없다.
역사에서 고행파의 전형은 마하트마 간디다. 그는 영국의 강압적 통치 앞에서 무력 투쟁 대신 비폭력 저항이라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그 길은 험했고, 투옥과 단식이 이어졌지만, 끝내 인도를 독립으로 이끌었다. 간디는 정치적 효율성보다 도덕적 정당성을 선택했고, 이는 그를 역사 속 ‘고행파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또 다른 예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들 수 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앞에서 실리적 계산보다는 신념의 선택으로 행동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의 생과 길은 짧았지만, 영혼의 무게와 깊이는 오랜 세월  살아서 이어지고  있다.

“견디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셰익스피어(의역)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누가복음 21:19
“바른 길은 평탄치 않으나, 그 끝은 평화다.”/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역)


고행파는 종종 ‘운이 없다’,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들은 원칙과 신념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다. 권력이나 유행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옳다고 믿는 가치에 자신의 생을 건다.

두 길이 주는 교훈은 바람과 바위와 같다. 바람은 유연하게 흐르고, 바위는 묵직하게 자리를 지킨다

순행파와 고행파는 마치 바람과 바위처럼 다르다. 바람은 유연하게 흐르고, 바위는 묵직하게 자리를 지킨다. 둘 중 어느 길이 옳다고 단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방향과 목적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논어 』〈선진편〉
“올바른 곳에 발을 딛고 단단히 서라”/ 에이브러햄 링컨
“바람은 통제할 수 없지만, 돛은 조정할 수 있다.”/ 선원 속담


순행파가 목적 없이 흐름에만 몸을 맡기면 표류하게 되고, 고행파가 방향 없이 버티기만 하면 고립된다.
정치사에서도 이런 교훈을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윈스턴 처칠은 완강한 고행파였다. 히틀러와의 협상은 ‘명예로운 타협’이라 불릴 수 있었으나,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반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전쟁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유연한 연합과 타협을 중시했다. 두 사람의 길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점이 성공의 열쇠였다.

고은층의 바람직한 인생 여정을 위한 균형과 화해

고은층(高恩層)에 이른 지금, 우리의 인생이 순행파였든 고행파였든 돌아볼 싯점이다. 인생의 후반부는 균형과 화해의 시간이다.
순행파에게 필요한 것은 원칙을 잃지 않는 용기이고, 고행파에게 필요한 것은 부드러움과 유연함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전도서 3:11(개역개정)
“의롭게 살고, 평안히 늙으며, 감사하며 떠나라.” / 삶의 지혜를 요약한 일반 격언
“강한 것은 죽음의 도에 속하고, 부드러운 것은 삶의 도에 속한다.”/ 동양 속담 (노자 『도덕경』제76장 사상과 유사)


결국 인생의 참된 성공은 의롭게 살고, 평안히 늙으며, 감사하며 떠나는 것이다.

순행과  고행의 두 날개로 나는 인생

인생은 항해와 같다. 순풍을 받으면 순행이고, 맞바람을 받으면 고행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풍향이 아니라 나침반이다. 우리는 각자의 성향과 처지 속에서 자신의 나침반을 바로 세워야 한다.
순행파와 고행파는 서로를 완성시키는 두 날개일지도 모른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 없듯, 유연함과 원칙은 함께 있어야 한다.

"이제 고은층으로 살아가는 필자는, 그동안 걸어온 고행파의 길이 아니라 순행파의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다만 그 길은 언제나 하늘을 향하고자 한다. 내가 새롭게 가고자 하는 이 순행파의 길은, 내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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