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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낯선 이국땅에서 검소한 생활과 소신있는 삶으로 평생을 사신 아더 J. 맥타가트 박사님을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80년대 초 영남대 초임교수 시절 맥타가트 교수님의 영어회화 모임에 수년간 참가하였고, 가끔 아파트에도 초대받아 식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소중한 가르침을 받은 인연이 있다.

우리는 맥타가트 교수님과 관련한 언론의 기사제목으로 교수님의 삶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ㆍ한국 땅에 참교육 심은 맥타가트 교수(시사저널, 1997)
ㆍ영남대 성인 맥타가트 교수(조선일보, 1996)
ㆍ아낌없이 주고 간 참 스승, 영남대 고 맥타가트 교수 흉상 설립(경북일보; 대구 CBS, 2012)
ㆍ미국인 맥타가트 전 교수 자랑스런 영대인상 수상(중앙일보,1998)

필자는맥타가트 교수님의 삶을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고 대의를 지키는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과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아더 J. 맥타가트 교수님은 1976년 영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라는 신분으로 대구에 정착하기 전까지 그의 삶은 상당히 역동적이었다.

그는 1915년 미국 인디애나 주 로간스포트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약 4년간 일을 하다가 교사가 되기 위해 펴듀 사범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장학금으로 코넬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하여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2차대전 중 교관으로 근무하였다가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스탠포드 대학에 들어가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미 국무성 공무원 신분으로 이탈리아, 폴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근무했고, 베트남에서 미국문화원장도 10여 년간 역임하였다.

한국과의 인연은 1953년 미재무관으로 부산에서 근무하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러면서 서울대, 고려대, 경희대 등에 출강해 미국문학과 미술평론 등을 강의했다.
대구와의 첫 만남은 1956년 그가 대구의 미공보원장으로 오면서부터이다. 나중에 그는 대구시 명예시민증도 받게 된다.

맥타카트 교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존경과 무한한 감사를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한 것은 물론이고, 투병 중인 제자의 수술비와 생활비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제자들의 취직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며 입사 면접 때 자신의 옷을 입혀 보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가르침에 대한 열의도 대단했다. 10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매주 작성한 작문을 빠짐없이 꼼꼼히 수정하여 다시 나눠 주는 일을 반복했고, 경북대와 영남대 영자신문사의 영어 고문으로 활동했다.
수술비 대신 경북대 의사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영어 강의는 단 한번의 시간도 어김없이 수년간 지속하였다. 약속시간과 강의시간은 철저히 지켰고, 새벽이든 저녁이든 고된 여건에 상관없이 주어진 강의에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강의는 영어가 필요한 동료교수 및 대학원생에게도 이어졌다. 이 외에도 각종 영어모임, 강좌 등 자신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검소하고 청렴한 맥타카트 교수님의 삶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학에서 제공한 14평짜리 교수아파트에서 지내기 전까지 그는 초라한 여관 2층의 방 한 칸을 얻어 생활했다.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교수아파트에서 생활할 때에도 불필요한 전기와 난방은 전혀 없었고, 월 30만원 정도의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심지어 이 작은 아파트마저도 방을 구하지 못한 제자를 불러 함께 생활했다. 곰팡이가 핀 식빵을 털어서 먹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며 교통비를 절약했던 그는 본가에 소장하고 있던 이중섭의 그림마저도 학생들의 장학금에 보태기 위해 팔정도로 자신을 위한 것은 남겨두지 않았다.

그는 특히 사람을 좋아해 많은 사람들과 폭넓은 교제를 이어간 것으로 유명하다. 문화예술적 소양이 깊고, 인문 및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가 높은 그였기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면서 풍부한 화제로 분위기를 이끄는 분이었다.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그의 작은 아파트에 동료교수나 제자들을 초대해 식사하기를 즐겼다. 그때마다 식사는 손수 준비했다. 평상시에도 혼자서 밥을 먹는 일이 잘 없을 정도로 사람을 좋아했고 진심으로 관계 맺기를 즐겼다.

맥타카트 교수님이야 말로 평생을 아낌없이 사람들에게 베푼 참 스승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성애·이성근, “맥타카트 교수”, 「사회정의멘토」, 대구경북연구원, 2013. 3/ 일부 수정

故 맥타카트 교수 / 영남대학교 인문관 1층 로비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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