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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 곶자왈에서 만난 백서향:
향기로 이어지는 숲의 생태와 사람의 기억"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화산섬 제주가 만든 숲, 연제(然濟)로서의 곶자왈 생태

제주 서부 한경면 저지리에 위치한 저지 곶자왈은 화산섬 제주가 만들어낸 독특한 자연 생태 공간이다. 이 숲은 도너리오름1)에서 분출한 용암이 식어 굳어 형성된 현무암 바위 지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흙이 거의 없는 바위 지형 위에 숲이 형성된 생태계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자연환경이다.
곶자왈은 제주 자연의 근원적 질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제(然濟)의 공간이다. 바위와 덩굴, 상록활엽수들이 뒤엉켜 형성된 숲은 인간의 계획이나 개입 없이 오랜 시간 자연의 자기 조직적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곶자왈에는 ‘숨골’이라 불리는 용암 틈이 발달해 있다. 이 틈 사이로 공기가 흐르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미기후2)가 형성된다. 이러한 환경은 수분을 유지하고 온도를 완충하여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이 함께 자라는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게 한다.
바로 이러한 자연조건 속에서 제주 봄을 알리는 향기 식물 백서향이 자라난다. 곶자왈의 돌과 바람, 습기와 숲의 그늘이 만들어낸 생태적 조화가 이 작은 꽃을 길러낸 것이다.

자연을 지키는 사회의 지혜, 제연(濟然)으로서의 곶자왈 관리

곶자왈은 단순한 자연 공간이 아니라 인간 사회 속에서 보호되고 관리되는 제연(濟然)의 공간이기도 하다.
과거 곶자왈은 마을 공동목장으로 이용되며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된 공간이었다. 이후 곶자왈의 생태적 가치가 알려지면서 보호 지역으로 관리되기 시작하였다. 탐방로를 설치하고 무분별한 채취를 금지하며 생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자연을 공공 자산으로 관리하려는 사회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저지 곶자왈 역시 이러한 관리 체계 속에서 보호되고 있다. 탐방로를 따라 숲을 걸으며 방문객들은 자연을 가까이 경험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자연 훼손은 최소화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특히 매년 3월경 열리는 ‘저지 백서향 축제’는 자연 생태와 지역 사회가 결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연의 꽃이 지역 공동체의 문화 자원이 되고, 이를 통해 생태 보전의 가치가 널리 공유된다.
이러한 관리와 활용의 과정은 자연을 단순히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설계하는 제연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숲을 걷는 사람들, 제인(濟人)으로서의 백서향 탐방

필자가 서귀포에 거처를 정한 지도 어느덧 사 년째가 되었다. 그동안 제주 여러 지역의 곶자왈을 탐방하였다. 영어교육도시 인근의 곶자왈과 한림·안덕 일대의 곶자왈을 여러 차례 걸었지만, 정작 필자의 근석농장이 있는 한림 금능과 가까운 저지 곶자왈은 방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26년 3월 12일 오전, 필자는 한림 금능에 있는 근석농장에서 봄맞이 농사 단장을 마친 뒤 서귀포 지인 모임인 ‘서귀삼연’의 김 선생과 함께 백서향을 탐방하기 위해 저지 곶자왈을 찾게 되었다.
곶자왈 입구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숲 속에서 퍼지는 향기를 먼저 느꼈다. 그리고 곧 가지 끝에 둥글게 모여 핀 하얀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백서향이었다.
꽃은 작지만 향기는 강했다. 숲길을 걷다가 향기를 맡으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추었다. 우리는 꽃을 바라보고 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숲을 걸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스스로 사진을 찍으며 숲 속에서 잠시 머무르는 시간을 가졌다.
탐방을 마친 뒤 우리는 인근 오설록 티 뮤지엄에 들러 녹차 아이스크림과 녹차를 마셨다. 그리고 녹차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 하루의 경험은 자연과 사람, 그리고 관계가 이어지는 제주의 일상적 풍경이었다.

향기로 남는 자연의 문화, 제문(濟文)으로서의 백서향

백서향은 제주에서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향기 식물이다. 이 식물은 팥꽃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관목으로 이른 봄 가지 끝에 둥글게 모여 꽃을 피우며 강한 향기를 낸다.
많은 사람들은 제주 백서향을 육지에서 말하는 천리향과 같은 식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식물학적으로 두 식물은 서로 다른 종이다.
백서향의 학명은 Edgeworthia chrysantha, 천리향의 학명은 Daphne odora이다. 같은 팥꽃나무과에 속하지만 꽃의 색과 형태가 서로 다르다.
이름이 혼동되는 이유는 두 식물 모두 강한 향기를 지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는 향기의 강도를 기준으로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제주에서도 백서향을 천리향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향기와 관련된 말로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의 향기는 천 리를 가며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
이는 사람의 인품과 덕망이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곶자왈 숲 속의 백서향 향기는 자연의 향기이지만, 그 향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하나의 문화적 기억으로 남는다. 자연의 향기가 인간의 기억과 상징 속으로 들어갈 때 그것은 곧 제문(濟文)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향기의 숲을 지키는 길, 제도(濟道)로서의 지속가능한 과제

저지 곶자왈의 백서향은 제주 자연이 만들어낸 향기의 생태 자산이다. 동시에 이는 제주 사회가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공공 자산이기도 하다.
곶자왈과 백서향을 지속가능하게 보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곶자왈 생태계에 대한 보호 정책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둘째, 백서향 자생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학술 연구가 필요하다.
셋째, 생태 탐방과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자연의 가치를 시민들과 공유해야 한다.
넷째, 곶자왈·오름·올레길·녹차밭 등 주변 자원과 연계한 생태 네트워크형 관광 모델을 발전시켜야 한다.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 속에는 오래 남는다.
저지 곶자왈에서 맡았던 백서향의 향기는 제주 자연이 가진 조용한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향기는 숲을 걸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오래 머물게 된다.
자연의 향기가 사람의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다시 제주를 지키는 힘이 될 때 비로소 연제–제연–제인–제문–제도로 이어지는 제주사색의 구조는 완성된다.

참고자료
1) 도너리오름
도너리오름은 돌오름, 돝내린오름, 돌체오름, 도을악으로도 불리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에 있는 기생 화산으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와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있는 오름으로 사유화가 되어 있다./
위키백과
2) 미기후(Microclimate)는 지표면 근처(보통 수 미터 이내)나 건물, 나무, 계곡 등 특정 요인에 의해 주변과 다르게 나타나는 국지적이고 작은 범위의 기후를 말합니다. 햇빛, 바람, 습도 등이 장소마다 달라 잔디 상태, 식물 생육, 도시 열섬 현상 등 실질적인 환경 차이를 만들어냅니다./위키피디아
3) 참고자료
• 제주특별자치도, 「곶자왈 생태 조사 보고서」
• 제주곶자왈도립공원 관리자료
• 국립생물자원관, 「한국 식물도감」
• 제주특별자치도 관광자료
• 제주올레 공식 홈페이지 탐방 자료
• 지역 생태관광협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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