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산에서 만난 추사:
유배의 산에서 문화의 길이 되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작은 산을 향한 호기심과
단산 탐방의 시작
제주에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낯선 풍경이 질문이 되고, 그 질문이 사색이 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필자는 서귀포에 거처를 둔 지 여러 해가 지나면서 제주 곳곳을 탐방하게 되었고, 한림 금능에 있는 근석농장을 오가며 자연과 삶을 함께 사유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학에서의 긴 학문 생활을 마친 뒤 "인생사색"을 집필하며 삶을 돌아보았고, 지금은 "제주사색"을 집필하며 제주라는 섬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서귀포 지인 모임인 서귀복연의 은 선생이 단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단산이 단순한 오름이 아니라 대정 지역의 지리·역사·문화가 함께 하는 산이라고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단산'이라는 이름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최근 화순과 산방산 일대를 유람하며 바다에서 제주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평야 위로 낮게 솟아 있는 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단산(簞山)이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산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호기심은 곧 발걸음이 되었다. 그날 오후, 필자는 단산 탐방길에 올랐다.
제주 서남부 풍경을 이루는 단산의 자연, 연제(然濟)
단산은 제주 서남부 대정과 화순 사이의 평야 지대에 자리한 낮은 화산체이다. 높이는 약 160m 정도로 제주 오름 가운데서도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주변이 넓은 평야와 바다로 열려 있기 때문에 단산은 멀리서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산의 정상은 비교적 평평하며 일부 구간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은 제주 화산 지형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뒤로는 한라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진다.
이러한 풍경 속에서 단산은 거대한 산이 아니라 풍경의 좌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오래전부터 대정 지역 사람들은 들판을 거닐거나 바다를 바라볼 때 단산을 자연스럽게 시야 속에 담아 왔다. 작은 산이지만 주변 풍경 속에서 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산이었다.
그래서 단산은 단순한 오름이 아니라 제주 서남부 자연경관의 균형을 이루는 상징적인 산이라 할 수 있다.
제주 자연을 바라보면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거대한 자연만이 아니라 작은 지형 하나도 전체 풍경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단산은 바로 그런 자연의 질서를 보여 주는 산이다.
향교와 학문이 머문 자연의 공간, 제연(濟然)
단산 주변에는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이었던 대정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유학의 성현을 모시고 지역 유생을 교육하던 공간이었다. 조선 시대 지방 사회에서 향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도덕과 학문의 중심 공간이었다.
대정향교 역시 제주 남서부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생들은 이곳에서 경전을 공부하고 글을 읽으며 학문을 이어 갔다.
그러나 학문은 강의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유생들은 향교 주변의 자연 속에서도 사색과 훈육의 시간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단산 일대 역시 그러한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자연 속에서 학문을 닦는 전통은 동양 사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자요수 인자요산
(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산과 물은 인간의 정신을 맑게 하는 공간이다. 단산은 바로 그러한 장소였다. 자연이 학문의 배경이 되고, 학문은 다시 자연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 "제주사색"의 시각에서 보면, 이는 연제(然濟)의 공간이 인간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제연(濟然)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유배지에서 학문을 이어 간 추사 김정희, 제인(濟人)
단산과 대정향교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 후기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이다.
추사는 1840년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약 8~9년 동안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유배는 한 인간에게 매우 가혹한 운명이다. 그러나 추사는 그 시간을 절망으로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 학문과 예술을 더욱 깊이 탐구하였다.
그는 제주에서 학문을 계속 이어 갔고, 찾아오는 유생들에게 글과 사상을 가르쳤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여전히 스승이었고 학자였다.
이 대목에서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몸은 유배지에 있었지만 학문과 정신은 자유로웠다.
필자는 단산을 오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사는 유배지에서도 학문의 끈을 놓지 않았고, 필자는 대학 정년 이후 서귀포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이어 가고 있다. 삶의 조건과 깊이는 감히 견줄 수 없으나, 사유를 놓지 않는 삶이라는 점에서 어느 지점이 은근히 겹쳐 보였다.
아마 그래서 단산이 필자에게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세한도와 추사체가 남긴 문화, 제문(濟文)
추사의 제주 유배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세한도(歲寒圖)이다.
이 그림에는 겨울 풍경 속에 작은 집과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동양 문화에서 소나무는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다.
이 그림의 의미는 "논어"의 한 구절에서 비롯된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어려움 속에서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필자에게도 세한도는 오래된 기억을 가진 그림이다. 젊은 시절 아파트 거실 벽에 세한도 그림을 오래도록 걸어 두고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다. 그 그림 속 소나무는 늘 묵묵히 서 있었고, 그 모습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단산과 대정 일대에서 추사의 흔적을 직접 마주했을 때 그 느낌은 더욱 깊었다. 책이나 그림 속에서 보던 세계가 아니라 현장에서 체감하는 역사와 문화의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추사의 서체인 추사체(秋史體)는 기존의 서체와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강건하면서도 절제된 필획, 자유로우면서도 엄격한 구조가 동시에 나타난다.
학자들은 제주 자연의 거친 바람과 현무암 풍경이 이러한 서체 변화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단산의 절벽과 바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말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자연은 인간의 예술에 영향을 주고, 예술은 다시 자연의 의미를 해석한다. 그래서 문화는 자연과 인간의 만남 속에서 탄생한다.
단산 탐방길과 문화 경관의 미래
오늘날 단산 일대에는 탐방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 길은 단산과 대정향교, 그리고 추사 유배지의 흔적을 연결하는 역사 문화 탐방 코스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밭담길 곳곳에서 추사의 자(字)와 호(號), 그리고 글귀를 발견할 수 있다.
그 글씨를 바라보며 걷다 보니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서예가 초정 권창륜 선생이 필자에게 써 준 글귀가 있었다.
“여송지성(如松之盛)”
소나무처럼 꿋꿋하고 변함없이 자신의 길을 걸으며 내면의 기운을 끊임없이 키워가는 삶을 지향하라는 뜻의 글귀였다.
밭담에 새겨진 추사의 글씨와 소나무의 상징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필자도 ‘여송(如松)’을 아호로 삼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삶이 아마 세한도의 정신과도 통하는 삶일 것이다.
단산 탐방길은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다. 자연과 역사, 그리고 문화가 결합된 문화 경관의 길이다.
앞으로 단산은 자연경관을 보존하면서도 역사와 문화 자원을 연결하는 중요한 공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제주의 미래는 단순한 관광 개발이 아니라 문화와 자연이 함께 살아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맺음말
작은 산이 들려주는 큰 이야기
단산은 결코 높은 산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산에는 여러 층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연이 있고, 학문이 있으며, 유배 학자의 삶이 있고, 예술이 있으며, 오늘날의 문화 탐방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단산은 단순한 오름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사유가 만나는 산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사람을 완성시키고, 사색은 사람을 깊게 만든다.”
단산을 걷는 길은 단순한 등산이 아니라 사색의 길이다.
그 길을 걸으며 우리는 자연을 보고, 역사를 떠올리며, 인간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된다.
작은 산 하나가 한 지역의 문화와 정신을 담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그것이 단산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깊은 이야기일 것이다.
참고자료
• 김정희, 『완당전집(阮堂全集)』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의 오름과 자연경관』
• 대정향교 자료집, 제주향교재단
•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 해설 자료
• 문화재청, 「추사 김정희와 제주 유배 문화」 자료
• 제주올레 및 제주 문화탐방길 관련 안내 자료
• 『논어(論語)』
• 성경, 요한복음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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