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행정의 신뢰를 세우는 힘: 공직자의 소통역량과 LIKE 모델"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신뢰의 시대, 소통이 행정의 경쟁력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정보환경 속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신뢰는 오히려 약화되고 있다.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심리적 거리는 멀어졌고, 정보는 넘쳐나지만 이해와 공감은 부족해졌다.
행정환경 역시 크게 변화하였다. 시민들은 더 이상 행정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다. 정책의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고, 정책 집행과 평가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실시간으로 행정을 평가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변화는 행정을 규정과 절차 중심의 운영체계에서 시민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관계 중심의 체계로 전환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공직자의 전문성이 법령과 행정지식에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시민과 소통하고 갈등을 조정하며 공감과 신뢰를 형성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한 역량으로 부상하고 있다. 행정의 성공 여부는 정책의 우수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정책이 얼마나 시민들에게 이해되고 공감받으며 협력을 이끌어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결국 행정의 품질은 소통의 품질이며, 행정의 신뢰는 공직자의 소통역량에서 비롯된다.
공직자의 소통역량은 행정 신뢰의 출발점이다
정약용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제시하였다. 몸가짐과 말, 글과 판단력을 의미하는 이 개념은 오늘날 공직자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신(身)과 언(言)을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태도와 의사소통이 모든 능력의 기초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라도 시민이 이해하지 못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사업이라도 시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행정의 목적은 단순히 정책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시민과의 소통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정부혁신과 공공서비스 평가에서도 공직자의 친절성, 설명능력, 공감능력, 민원응대 역량은 핵심 평가요소로 활용되고 있다. 이는 행정의 신뢰가 제도 자체보다 공직자의 태도와 행동을 통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공직자의 말 한마디는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기관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진다. 민원인을 대하는 태도는 곧 행정기관의 이미지가 된다. 따라서 소통은 단순한 대화기술이 아니라 행정신뢰를 형성하는 핵심 역량이며 공직자의 중요한 전문성이다.
왜 지금 소통역량 교육이 중요한가?
오늘날 공직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변화는 행정환경의 복잡성 증가이다. 하나의 정책에도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존재한다. 개발과 보전, 효율성과 형평성, 성장과 복지 사이의 갈등은 점점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시민들의 교육 수준과 권리 의식이 높아지면서 단순히 "법에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시민들은 정책의 배경과 과정, 근거와 대안을 알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직자에게 필요한 것은 설득력이 아니라 이해를 만드는 능력이다.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이 아니라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는 능력이다.
미국의 행정학자 드와이트 왈도는 "행정은 가치와 인간관계의 활동"이라고 말했다. 현대 행정은 단순한 기술적 관리가 아니라 시민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소통역량 교육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조직의 경쟁력이 디지털 기술에 있다면 행정의 경쟁력은 소통역량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LIKE 모델: 공직자 소통역량의 실천 프레임
필자가 제안하는 LIKE 모델은 공직자의 소통역량을 체계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실천적 프레임이다.
LIKE는 Listening(새겨듣기), Identifying(분석·진단하기), Kind(친절하기), Explanation(설명하기)의 네 요소로 구성된다.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말하는 능력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소통은 듣기에서 시작된다. 또한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들은 내용을 분석해야 하며, 분석한 내용을 친절한 태도로 전달하고 마지막으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
즉 LIKE 모델은 소통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듣고, 분석하고, 배려하며, 설명하는 일련의 흐름이 완성될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Listening : 새겨듣기는 모든 소통의 시작이다
공직자의 첫 번째 소통역량은 새겨듣기이다.
새겨듣기는 단순히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말 속에 담긴 감정과 상황, 배경과 기대를 함께 이해하는 과정이다. 같은 민원이라도 표현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격앙된 목소리 뒤에는 억울함이 있을 수 있고, 반복되는 불만 뒤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숨어 있을 수 있다.
경청은 상대방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심리학 연구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고 느낄 때 결과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공직자가 시민의 말을 충분히 듣는 것은 갈등을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실제로 많은 민원은 정책 내용보다 소통 부족에서 발생한다.
귀를 열면 문제의 본질이 보인다. 새겨듣기는 행정 신뢰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Identifying : 분석과 진단은 전문성을 만든다
듣는 것만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경청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진단해야 한다.
분석·진단은 현상을 사실로 정리하고 문제의 원인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 SWOT 분석, 이해관계자 분석, 원인분석 기법, 브레인스토밍, 브레인라이팅,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행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문제를 충분히 진단하지 않고 해결책부터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진단 없는 처방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의사는 환자의 증상을 듣고 진단한 후 처방한다. 행정도 마찬가지이다. 시민의 요구를 듣고 분석하며 원인을 파악한 뒤 해결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분석·진단은 행정을 경험과 직관 중심에서 데이터와 근거 중심의 과학적 행정으로 발전시키는 핵심 역량이다.
Kind : 친절은 행정의 품격이다
친절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다. 친절은 공직자의 인격과 전문성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더라도 태도에 따라 시민의 반응은 크게 달라진다. 불친절한 설명은 갈등을 유발하지만 친절한 설명은 이해와 협력을 만든다.
친절은 비용이 들지 않는 최고의 행정서비스다. 미소와 눈맞춤, 존칭 사용, 경청하는 자세는 시민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한다.
공자는 "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리라"고 하였다. 행정에서도 법과 규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민을 존중하는 태도가 함께해야 한다.
특히 갈등 상황에서는 친절이 더욱 중요하다. 친절은 감정을 완화하고 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시민은 행정기관을 기억하기보다 자신을 응대한 공직자를 기억한다.
결국 친절은 행정의 품격이며 신뢰를 형성하는 감성적 기반이다.
Explanation : 설명은 이해를 만드는 기술이다
설명은 LIKE 모델의 마지막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결과물이다.
많은 공직자들이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만 시민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설명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시키는 것이다.
좋은 설명은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정확해야 한다. 둘째, 간결해야 한다. 셋째,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아야 한다.
영국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줄리언 트레저는 효과적인 소통의 원칙으로 HAIL을 제시하였다. 정직(Honesty), 진정성(Authenticity), 일관성(Integrity), 배려(Love)이다.
공직자의 설명 역시 이 네 가지 원칙을 따라야 한다. 시민은 복잡한 행정용어보다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설명에 신뢰를 보낸다.
설명은 결과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이유를 공유하는 것이다. 정책의 필요성과 기대효과를 이해할 때 시민은 행정의 동반자가 된다.
LIKE 모델의 확장: 조직과 사회를 연결하는 소통 플랫폼
LIKE 모델은 민원응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정책홍보, 갈등관리, 조직협업, 주민참여, 위기관리 등 모든 행정영역에 활용할 수 있다.
조직 내부에서는 부서 간 협업을 촉진하고, 조직 외부에서는 시민과의 신뢰를 형성한다. 또한 디지털 행정환경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발전할수록 오히려 인간적 소통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기술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지만 신뢰를 형성할 수는 없다. 신뢰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만들어진다.
LIKE 모델은 공직자의 소통을 개인의 재능이 아닌 학습 가능한 전문역량으로 전환시키는 교육훈련 체계이자 실천 프레임이다.
맺음말
신뢰받는 행정은 소통하는 공직자에게서 시작된다
행정의 궁극적 목적은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의 우수성뿐 아니라 시민과의 신뢰가 필요하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경청하고, 분석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반복된 소통 속에서 만들어진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갈등과 불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공직자의 소통역량을 높이는 일이다. 행정의 품격은 공직자의 품격에서 비롯되고, 공직자의 품격은 소통의 품격에서 드러난다.
필자는 늘 "행정의 역량은 결국 사람의 역량이며, 사람의 역량은 소통의 역량에서 시작된다"고 말해 왔다. LIKE 모델은 단순한 소통기법이 아니라 공직자가 시민과 함께 신뢰를 만들어 가는 실천철학이다.
신뢰받는 행정은 거창한 제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시민의 목소리를 새겨듣고,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며, 친절하게 응대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공직자 한 사람의 실천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바로 한국 행정의 미래를 밝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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