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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의는 끝나지 않았다(1)
정년에서 고은층까지, 인생 후반전의 철학"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46년의 시간이 다시 나를 교단으로 불러 세웠다


필자는 1980년 3월 영남대 교수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해 처음 맡은 학생들은 1979학번 2학년이었다. 젊은 교수와 젊은 학생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들은 졸업 후 대부분 지방행정직 7급 특별채용을 통해 경상북도와 대구광역시, 여러 시·군, 그리고 일부는 중앙부처에서 평생 공직의 길을 걸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지역사회와 국가를 위해 묵묵히 봉사하다 정년을 맞았다.

세월은 참으로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그들은 공직을 마친 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고, 최근에는 '칠구 파크골프회'를 결성하면서 필자에게 특별회원으로 함께해 달라는 뜻깊은 제안을 보내왔다.

지난 10일, 칠곡 왜관 낙동강변의 파크골프장에서 제자들과 부부동반 모임을 가졌다. 푸른 잔디 위에서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던 스무 살 청년들의 모습과 공직자로 성장해 가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어느새 은퇴한 공직자가 되어 있었고, 나 또한 정년을 맞은 명예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었다.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오래 바라보았다. 강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강을 바라보는 나는 어느새 인생의 후반전에 서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세월이 흐른 것은 제자들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었고, 함께 인생을 걸어왔다.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났던 우리는 이제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동행자가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한 문장이 조용히 떠올랐다.

'마지막 강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교단에서의 강의는 오래전에 끝났지만, 삶은 여전히 나에게 새로운 강의를 맡기고 있었다. 제자들과 다시 만난 그 하루는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다시 배우는 또 하나의 강의였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은 지나간 시간을 회고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세월을 넘어 어떻게 삶의 철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돌아보는 성찰의 기록이다. 바로 그날의 감동과 여운이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

끝을 돌아보니 비로소 시작이 보였다


인생은 앞을 향해 살아가지만, 그 의미는 뒤를 돌아볼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지나온 시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다음 길로 들어설 때가 많다. 그래서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히 남은 시간을 살아가는 시기가 아니라, 앞만 바라보며 달려왔던 삶을 다시 읽고 새롭게 해석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세월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이루어 낸 성과도 주고, 실패와 아쉬움도 남긴다. 그러나 시간이 남기는 가장 큰 선물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경험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같은 사건도 젊은 날에는 성공과 실패로 기억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삶을 가르쳐 준 스승으로 남는다. 그래서 인생 후반전은 더 많은 일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다.

필자 역시 오랫동안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살아왔다. 강의실에서는 학문을 이야기했고, 연구실에서는 정책과 미래를 고민했으며, 공공의 현장에서는 지역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역할을 맡아 왔다. 당시에는 그것이 내 삶의 중심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들은 목적지가 아니라 또 다른 길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정년 이후의 삶은 내게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져 주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가? 직업을 내려놓은 뒤에도 삶은 어떻게 계속 성장하는가?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더 가지기보다 무엇을 더 나누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것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마음속에서 천천히 익어 간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특별한 곳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만남, 자연 속에서의 사색, 그리고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는 일상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물음은 결국 하나의 생각으로 이어졌다. 사람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존재가 아니라 세월을 통해 은혜를 배우는 존재이며, 그 은혜를 다시 이웃과 사회에 나누며 살아갈 때 인생은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삶을 '고은층(高恩層)'이라 이름 붙였다.

고은층은 나이를 구분하는 새로운 세대 개념이 아니다.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며 하나의 철학이다. 높이 오르는 삶보다 깊어지는 삶을, 많이 소유하는 삶보다 많이 나누는 삶을, 경쟁보다 공존을 선택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 글은 정년 이후 비로소 배우게 된 삶의 의미를 기록한 성찰의 여정이며,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작은 이야기이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새로운 길은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다.


제1부
장년 인생의 반추, 정년을 맞이하여며


2017년 가을, 영남대학교에서 「장년 인생의 반추, 정년을 맞이하며」라는 제목으로 정년기념 특강을 마친 날이었다. 강의를 끝낸 뒤 나는 평소보다 천천히 강단을 내려왔다. 학생들과 동료들의 따뜻한 박수를 뒤로한 채 강의실을 둘러보니 익숙한 풍경 하나하나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수없이 오르내렸던 계단, 계절마다 빛깔을 달리하던 캠퍼스의 나무들, 수십 년 동안 드나들었던 연구실 문까지도 그날은 조용한 작별의 인사를 건네는 듯하였다.

연구실로 돌아와 책장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함께한 책들은 그대로였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이전과 달랐다. 책마다 젊은 시절의 열정이 담겨 있었고, 서랍마다 연구와 강의, 행정과 정책을 오가며 보냈던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 권의 책을 펼치면 그 시절의 고민이 떠올랐고, 한 장의 메모를 들여다보면 당시의 다짐이 다시 살아났다. 공간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공간을 살아온 나는 이미 새로운 문턱 앞에 서 있었다.

사람은 장소를 떠날 때보다 그곳에 스며 있는 시간을 떠날 때 더 깊은 울림을 느낀다. 캠퍼스를 천천히 걸으며 나는 비로소 서른여덟 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긴 여정이었는지를 실감하였다. 그 세월은 단순히 강의를 하고 연구를 수행한 시간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배우고, 동료들과 함께 성장하며, 한 사람의 인생을 빚어 온 시간이었다. 그래서 정년은 직장을 떠나는 행정적 절차가 아니라 삶의 한 장을 정성껏 덮는 의식과도 같았다.

그날의 나는 앞으로 펼쳐질 시간을 알지 못했다. 대학을 떠나면 조금은 여유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고, 오랜 책임에서 벗어나 쉼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보다 넓었고, 시간은 계획보다 더 깊은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그날 강의실 문을 닫은 것은 끝을 선언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배움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강단은 떠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배움의 현장이었고, 학생은 더 이상 교실 안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연은 말없는 스승이 되었고, 일상은 새로운 교재가 되었으며, 사람들과의 만남은 또 다른 강의가 되었다. 나는 비로소 삶이 가장 큰 학교이며, 세월이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날의 강의는 끝났지만 배움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 이후부터 나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새로운 공부는 훗날 『인생사색』으로 이어지고, 『제주사색』으로 넓어졌으며, 마침내 '고은층'이라는 인생 후반전의 철학으로 꽃피게 되었다.

이제 나는 그날을 마지막 강의의 날로 기억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다시 배우기 시작한 첫 번째 강의의 날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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