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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인간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생명과 마음의 중심인 심장의 비유적ㆍ은유적 의미에 대한 논의"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심장은 생명과 마음의 중심이다

심장은 육체의 기관이자, 인간 존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생물학적으로는 혈액을 순환시키는 펌프 역할을 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마음, 감정, 의지, 윤리의 집약적 상징으로 작용해왔다. 문화권을 막론하고 우리는 용기를 낼 때 “심장을 부여잡는다”고 하고, 진심 어린 말을 “가슴에서 우러났다”고 표현한다. 실제로 ‘심장’은 ‘마음’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며, 감정과 도덕, 신념과 정서를 아우르는 메타포로 자리 잡고 있다.
이 글에서는 ‘심장’이라는 개념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나누어 고찰한다. 각 주제마다 성경 말씀, 고사성어, 명언, 속담 등을 곁들여 삶의 방향성과 교훈을 제시한다.

심장은 내면의 용기를 상징한다: 일심불란(一心不亂)과 두려움의 초월

심장은 두려움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가장 먼저 반응하는 기관이다. 공포를 이겨내고 결단을 내릴 때 사람은 머리보다 먼저 ‘가슴’을 다잡는다. “저 사람은 강심장이야”, “심지가 굳어”라는 말은 이 내면의 용기를 가리킨다.
고사성어 일심불란(一心不亂)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뜻하며, 위기 앞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는 태도를 강조한다. 성경 "여호수아" 1장 9절은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라며, 심장의 결단과 신념이 신앙과 연결될 때 더욱 강력해짐을 보여준다. 넬슨 만델라도 “용기란 공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이겨내는 것이다”라며 심장의 용기를 기렸다.

심장은 공감의 발원지다: 마음의 소통과 진심(眞心)의 상징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필이 간다”, “필이 통한다”는 표현이 유행한다. 진정한 공감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지며, 마음과 마음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우리가 말하는 ‘따뜻한 심장’은 타인을 향한 연민과 이해에서 비롯된다. “마음에서 우러난 말은 마음을 울린다”는 속담처럼, 진심은 심장의 떨림에서 시작된다.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하여 사랑과 공감이 인간 존재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마더 테레사는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공감은 진심의 가장 따뜻한 실천이다.

심장은 정직과 양심의 상징이자 삶의 기준이다

심장은 오랫동안 도덕적 판단의 중심지로 상징되어 왔다. “저 사람은 양심가다”, “양심을 팔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는 말은 양심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있다는 문화적 인식을 보여준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마음(心)은 인간됨의 중심이다. 진정한 정직은 가슴에서 비롯된다. '양심을 팔지 마라'는 양심불가매(良心不可賣)는 양심은 팔아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돈이나 권력보다 진실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칸트는 “양심은 우리 안의 법정이다”라고 했으며, 그 법정의 심판관은 머리가 아니라 바로 마음이다. 정직은 외부의 규율이 아닌 내면의 심장이 지켜내는 것이다.

심장은 인내의 상징이고 견딤의 미학이다

심장은 하루도 쉬지 않고 뛴다. 그 끊임없는 박동은 곧 인내의 상징이다. 삶의 고난은 가슴 깊이 침전되고, 그 시간을 견뎌낸
사람은 더욱 깊어진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은 인내가 얼마나 큰 자제를 요구하는지를 보여준다. 성경 "로마서" 5장 3~4절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라고 말한다. 고통은 심장을 단단하게 만들고, 그 심장을 통해 희망이 피어난다.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는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오직 빛만이. 증오는 증오를 몰아낼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라고 말했는데, 그 빛과 사랑은 바로 인내하는 심장에서 솟아난다.

심장은 평안과 내면의 쉼이고 마음의 고요함이다

마음이 편안할 때 심장은 조용히 고동친다. 반대로 불안, 분노, 죄책감에 시달릴 때 심장은 불규칙하게 요동친다. “심장이 아프다”, “억장이 무너진다”, “마음이 뻥 뚫린다”는 표현은 마음과 몸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한자성어 심경여수(心如流水)와 심여지수(心如止水)는 모두
마음이 고요하고 중심이 잡힌 상태를 뜻하며, 진정한 휴식과 내적 안정이 심장의 고요함에서 비롯됨을 상징한다. 성경 "빌립보서" 4장 7절은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말씀한다. 마음의 평온이 심장을 지키고, 심장의 평온이 삶을 지켜낸다. 소크라테스도 “진정한 평화는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면의 질서에서 온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심장은 내면의 교향악이다

심장은 물리적 기관을 넘어, 감정과 도덕, 결단과 쉼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삶이 흔들릴 때 우리는 머리보다 가슴에 물어야 한다. 성경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심장을 삶의 중심에 두라는 메시지이다.
심장은 조용히 말하지만, 그 언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용기와 공감, 정직과 인내, 그리고 평안이 깃든 그 울림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실한 삶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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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브릿지와 삶의 다리: 연결의 철학에서 배우는 인생의 통찰"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인간의 몸에는 여러 개의 '브릿지(Bridge)'가 존재한다. 이들은 단순한 관절이나 연결 조직이 아니라, 인생의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상징적 구조물이다. 그 중에서도 목, 어깨와 손목, 고관절, 발목은 각기 독립된 역할을 하면서도 유기적으로 하나의 삶을 지탱한다. 이 네 개의 신체 브릿지를 통해 우리는 생각과 행동, 책임과 실천, 중심과 균형, 전진과 전환이라는 삶의 네 가지 본질을 깨닫게 된다.

목(頸)은 머리와 몸을 연결하는 통로로, 생각과 행동을 이어주는 가교이다

머리에서 시작된 결단이 목을 통해 몸으로 흐를 때 비로소 삶은 움직인다. “목이 부러져도 고개는 숙이지 않는다”는 속담은 자존과 결기의 상징이며, “고개 숙인 벼가 익는다”는 표현은 겸손이 성숙의 조건임을 일깨운다. 성경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구절처럼, 변화는 머리에서 시작되지만 몸으로 실현될 때 완성된다. 생각을 억지로 행동에 꿰맞추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오류를 피하고, 올바른 실천으로 이끄는 ‘목의 통로’를 우리는 내면에 지녀야 한다.

어깨와 손목은 책임과 실천의 브릿지다

어깨는 삶의 짐을 지는 기반이며, 손목은 그 짐을 손끝으로 풀어내는 섬세한 도구이다. 어깨에 짊어진 책임은 종종 '무거움'으로 다가오지만, 그것은 자유의 반증이기도 하다. 조지 버나드 쇼는 “자유는 책임을 뜻한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책임 없는 자유는 허상이다. 손목의 섬세한 움직임은, 우리가 맡은 일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경 "잠언" 16장 3절에서 “네 손이 하는 모든 일을 여호와께 맡기라”는 책임의 무게를 신뢰로 승화시킬 것을 권면한다. 하지만 아무리 어깨와 손목이 튼튼해도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고사성어처럼, 힘의 균형을 잃고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면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책임은 분산되고 실천은 협력으로 완성된다.

고관절은 상체와 하체를 연결하는 중심축이자 균형의 축이다

관절이 튼튼하고 유연할수록 우리의 몸은 민첩하고 안정되며, 삶 또한 유연하고 단단해진다. “허리가 휘다”는 속담이 말하듯, 중심이 무너지면 전체가 흔들린다. 그래서 ‘중용지도(中庸之道)’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강조하며, 고관절처럼 유연하되 흔들림 없는 삶의 자세를 요구한다. 존 밸런타인은 “삶은 균형의 예술이다”라고 했다. 이는 단순한 중간 지점의 유지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조정하는 능동적 중심잡기다. 고관절은 외적 구조뿐 아니라 내적 인격의 균형감각을 상징한다.

발목은 인생의 전진과 전환을 결정짓는 마지막 브릿지다

발목은 작은 관절이지만, 이 관절이 흔들리면 큰 길도 넘어질 수 있다. “발이 곧 마음이다”라는 속담은, 우리의 걸음과 방향이 결국 내면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성경 "시편" 119장 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라고 하여, 인생의 걸음을 비추는 내적 기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행불유경(行不由徑)이라는 지름길을 피하고 정도를 걷는 삶의 자세와도 일맥상통한다. 삶은 요령보다 방향이 중요하고, 속도보다 정직함이 더욱 멀리 가는 법이다.

우리의 몸속 브릿지들은 곧 삶의 연결고리이며, 철학적 은유이기도 하다

생각과 행동 사이에는 목이라는 다리가, 책임과 실천 사이에는 어깨와 손목이라는 지지대가, 중심과 유연함 사이에는 고관절이라는 축이, 그리고 전진과 전환 사이에는 발목이라는 관문이 있다. 이 네 개의 브릿지가 튼튼할 때, 인생이라는 유기체는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바라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고사성어는, 연결 구조가 튼튼해야 매일의 새로움도 지속된다는 점을 내포한다. 연결이 약하면 구조는 무너지듯, 우리 삶의 브릿지가 약해질 때 인생은 흔들린다. 그러므로 성경 "잠언" 4장 23절에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는 단지 내면의 평정뿐 아니라 삶의 모든 연결점을 지키는 윤리적 명령이기도 하다.
브릿지를 세우는 자만이 인생의 강을 건너며, 그 맞은편에 있는 꿈의 대지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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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맛과 오살의 노래"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인생은 맛으로 빚어지고,
살맛으로 꽃을 피운다.
맵다, 쓰다, 시다, 짜다, 달다.
오맛으로 삶은 익어간다.

맵씨는 나의 품격,
가슴 펴고 한 걸음씩,
내 삶에 불꽃을 입힌다.
오늘도 당당히, 멋을 낸다.

쓴맛은 상처의 기억,
쓰다듬고 안아주니
묵은 마음 털어내고
다시 또 일어선다.

시원한 맛은 바람이다,
답답한 날 밀어내며
웃음이 터지고 눈물이 맺히고
상쾌한 숨결이 돈다.

짜디짠 삶이여, 고맙다.
너는 나의 단단한 스승.
욕망의 소금을 덜어내며
절제와 조절과 균형을 배운다.

달달한 기쁨의 순간들,
작은 씨앗이 향기를 틔우고
한 송이 웃음 속에서
하루가 꽃을 피운다.

이 맛, 저 맛 다 맛보았으나,
진짜 인생은 오맛이다.
그 맛을 오롯이 살며 사는 것,
그게 바로 오살이다.

누가 뭐래도 괜찮다.
나는 오늘도 오맛을 익히며
오살로 삶을 다진다.
그 길이 곧, 나의 인생이다.


용어해설
1) '오맛/오미(五味)"는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 맛을 뜻하는 한자어이다. 구체적으로는 단맛/감미(甘味) , 짠맛/함미(鹹味), 매운맛/신미(辛味), 신맛/산미(酸味), 쓴맛/고미(苦味, 쓴맛)이다.
이러한 오미는 음식의 맛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한의학에서는 인체 오장육부와 연결되어 건강과 질병 치료에도 중요한 개념으로 활용됩된다.
예를 들어, 오미자의 경우 껍질과 과육은 달고 시며, 씨는 맵고 쓰며, 전체적으로 짠맛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오미는 식재료의 맛을 넘어 약재의 성질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맛은 간에 작용하고, 쓴맛은 심장에 작용하는 등 각 맛이 인체 특정 부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여기에서 매운맛은 산미이나 특별히 맵시로 변형하여 사용하였다.
2) ‘오살(五煞)’은 전통적 의미와 달리, 다섯 가지 인생의 맛을 강도 높게 체험하고, 이를 내면화하여 자아를 연성(練成)하는 경지로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다. 파괴나 재난의 의미가 아닌, 존재의 통합과 균형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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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오살(五味五煞)은 다섯 맛을 오롯이 살아낸 삶의 지혜이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ㆍ행정학박사



인생은 다섯 가지 맛으로 살아가는 여정이다

인생은 하나의 맛으로 익지 않고 '맵고, 쓰고, 시고, 짜고, 달고'의 다섯 가지 맛으로 살아가는 여정이다. 인생여정에서 만나는 다섯 가지 맛은 삶이 던지는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자극이며, 동시에 성숙의 과정이다.
이 글은 다섯 가지 인생의 맛을 ‘오미(五味)’로 정리하고, 그 맛을 온전히 체득하고 내면화하여 삶의 깊이와 균형을 이루는 성숙의 태도를 ‘오살(五煞)’이라 명명하여 논의하고 있다.
‘오살(五煞)’이라는 말은 본래 풍수나 도교, 명리학 등에서 부정적 기운을 상징하지만, 여기에서는 고통과 감정의 깊이를 통과해 ‘스스로’를 연성(練成)하는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살(煞)’은 파괴가 아니라 숙성이고, 내면의 깊이이며, 통찰의 다른 이름이다. 삶의 다섯 가지 맛을 오롯이 살아낸 자는 결국 자신만의 고유한 빛과 향기로 인생을 피워낸다.

매운맛은 삶의 열정이자 나를 세우는 맵시이다

맵다는 것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열정이며, 나를 단련하는 연단(鍊鍛)의 도가니다.
성경 "잠언' 17장 3절은 말한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실패와 상처, 좌절의 불길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맵시’있는 존재로 태어난다. 맵다는 건 깨어짐을 통과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존재의 결’을 드러내는 품격이다.

쓴맛은 묵연히 녹아내는 인내의 시간이다

쓴맛은 깊고 오래된 감정이 가라앉은 침전(沈澱)이다. 말없이 견딘 시간, 묵연(默然)한 인내의 기록들이 쓴맛의 정수다. 하지만 바로 그 쓴맛에서 진정한 단맛이 움튼다.
고사성어 ‘고진감래(苦盡甘來)’는 말한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넬슨 만델라의 말도 이와 닿아 있다. “고난을 이겨낸 사람만이 자유의 참된 가치를 안다.”
쓴맛은 인생의 필수 성분이다. 그것 없이는 진짜 기쁨은 얕다.

신맛은 감정을 여는 자극이고 유쾌한 해방이다

신맛은 눈물처럼 시린 자극이다. 찬바람처럼 스며들어 억눌린 감정을 끌어낸다. 감정은 통과되어야 한다. 신맛은 울음을 웃음으로, 고통을 치유로 전환시키는 감정 해방의 열쇠다. 속담은 말한다. “슬픔도 웃으면 넘는다.”
신맛은 감정의 정화이며, 솔직함의 유쾌한 도약이다.

짠맛은 절제와 조절, 그리고 균형을 배우는 기준이다

짠맛은 인생의 욕망이 짙게 농축된 맛이다. 지나치면 병이 된다. 그래서 짠맛은 삶을 절제하고 조절하며 균형되게 하는 맛이다.
성경 "전도서" 7장 18절은 말한다.
“이것도 붙들고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니라.” 또한 고사성어 ‘지족상락(知足常樂)’은 우리를 깨우친다. “만족할 줄 아는 자는 항상 즐겁다.”
짠맛은 삶에 긴장과 윤리를 더한다. 절제는 자유로 가는 다리이다.

단맛은 삶을 선물처럼 주는 향기이다

단맛은 인생이 주는 사물(賜物), 즉 소소하지만 진한 기쁨이다. 웃음, 다정한 말, 한 송이 꽃 같은 일상의 선물이다.
헬렌 켈러는 말했다. “인생은 크고 위대한 기쁨보다, 작고 소박한 행복으로 이루어진다.”
단맛은 욕심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선물처럼 건네는 향기이며, 우리가 감사를 배울 수 있는 순간이다.

오미오살은 삶을 연성하는 다섯 맛의 내면화이다

우리는 맵게 타오르며 존재를 새기고, 쓰게 침잠하여 인내를 배우며, 시게 울컥해 감정을 열고, 짜게 조절하여 균형을 찾으며, 달게 웃으며 삶을 꽃피운다.
이 다섯 가지 맛을 감각으로만 겪지 않고, 존재의 깊이로 씹고 저작(咀嚼)하여 숙성시키는 태도가 이 글에서 말하는 ‘오살(五煞)’이다.

오미오살은
삶을 성숙하게 하는 다섯 가지 맛의 지혜이다


결국 인생은 다섯 가지 맛을 ‘나답게’ 경험하고, 그 맛의 농도만큼 내면을 성숙시켜 가는 여정이다. 그 맛을 오롯이 살아낸 사람만이, 삶을 더 깊고 넓게, 그리고 품격 있게 맛볼 수 있다.


참고자료
1) 오미(五味)의 개념
오미(五味)는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 맛을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단맛/감미(甘味) , 짠맛/함미(鹹味), 매운맛/신미(辛味), 신맛/산미(酸味), 쓴맛/고미(苦味, 쓴맛)이다.
이러한 오미는 음식의 맛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한의학에서는 인체 오장육부와 연결되어 건강과 질병 치료에도 중요한 개념으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오미자의 경우 껍질과 과육은 달고 시며, 씨는 맵고 쓰며, 전체적으로 짠맛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오미는 식재료의 맛을 넘어 약재의 성질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신맛은 간에 작용하고, 쓴맛은 심장에 작용하는 등 각 맛이 인체 특정 부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2) 오살의 개념
본문에서 사용한 ‘오살(五煞)’은 전통적 의미와 달리, 다섯 가지 인생의 맛을 강도 높게 체험하고, 이를 내면화하여 자아를 연성(練成)하는 경지로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다. 파괴나 재난의 의미가 아닌, 존재의 통합과 균형을 뜻한다.
3) 속담
•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슬픔도 웃으면 넘는다, 짜게 먹으면 병 된다
4) 한자성어
• 고진감래(苦盡甘來), 지족상락(知足常樂), 연성(練成), 저작(咀嚼)), 사물(賜物), 묵연(默然), 교향(交響), 침전(沈澱)
5) 성경 구절
• 잠언 17:3, 전도서 7:18
6) 명언
• 넬슨 만델라: “고난을 이겨낸 사람만이 자유의 참된 가치를 안다.”, 헬렌 켈러: “인생은 크고 위대한 기쁨보다, 작고 소박한 행복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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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지키는 ‘거리두기’의 지혜: 물러서야 할 인간관계의 경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러나 모든 만남이 다 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관계가 상처가 되기도 하고, 그릇된 인연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곁에 두어야 할 사람과 멀리해야 할 사람을 분별하라”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단순한 물리적 간격이 아니라, 인격과 품성의 경계를 확인하는 지혜의 척도이다.

이 글은 삶을 지키는 ‘거리두기’의 지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물러서야 할 사람들에 대한 속담, 고사성어, 성경구절, 위인의 명언으로 배우는 인간관계의 경계를 다루고 있다.


“군자는 가까이하되 붕우는 되지 않는다” 인격의 필터를 갖추라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무소쟁야(君子無所爭也)”라고 말하였다. 군자는 함부로 다투지 않는다. 이는 곧 품격 있는 사람은 자존심을 걸고 불필요한 싸움에 나서지 않으며, 감정의 소모를 일으키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뜻이다. 특히 “예의가 없는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말라”는 공자의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예의란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이자 타인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다. 예의를 무시하는 이는 결국 타인의 경계도, 고통도, 존재도 무시한다. 이런 사람은 가까이할수록 자신을 깎아먹게 된다.

“못된 이와 벗하면, 덕이 줄고 근심은 는다” 덕없는 자와의 관계는 독이다

한국 속담에는 “나쁜 친구 하나가 열 좋은 친구를 망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인간관계의 전염성에 대한 경고다. 행동이 무례하고, 말이 지나치고, 책임은 남에게 돌리며, 자신의 잘못을 돌이킬 줄 모르는 사람은 한 마디로 ‘독이 되는 사람’이다. 성경에서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3절에서 “속지 마라. 나쁜 친구가 선한 행실을 망친다.” 라고 분명히 말한다
관계는 선택이며, 그 선택은 곧 자신의 인생을 빚는 도구가 된다. 악한 이와의 동행은 절대 선한 길을 함께 갈 수 없다.

“근묵자흑 근주자적”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닮아간다

고대 중국의 교훈적 성어로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지고, 붉은 단지를 가까이 하면 붉어진다(近墨者黑, 近朱者赤)"가 있다. 이는 환경과 사람의 영향을 강조하는 말이다. 일상의 대부분을 함께하는 사람이 부정적이고 왜곡된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색에 물들기 쉽다. 잦은 비난, 끊임없는 불평, 음해와 음모를 즐기는 사람은 곁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병들게 만든다. 정신의 건강을 지키고자 한다면, 이런 이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상책이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혜롭고, 감정을 다스리는 자는 강하다” 언행이 경솔한 자를 경계하라

성경 "잠언" 29장 11절에는 “어리석은 자는 자기 분을 다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감정을 함부로 쏟아내며, 남을 상하게 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이며 성장하지 못한 인격을 드러낸다. 격언에 이르기를 “화는 입에서 나오고, 몸은 말로 망한다(禍從口出, 身由言敗)” 했다. 말을 가리지 않고 뿜어내는 이는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언젠가 자신도 그 말에 의해 넘어질 수 있다. 감정과 말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혼란을 주변에 전이시키는 존재가 되기 쉽다.

“사람을 보면 길을 바꾼다” 피하는 것도 지혜다

"맹자"에는 “인사불성즉퇴(人事不成則退)”, 사람과 일이 도리에 맞지 않으면 물러나는 것이 도리라는 말이 있다. 이는 곧, 인간관계에서 맞지 않는 사람,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거나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사람과의 관계는 무리해서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때로는 ‘함께하지 않음’이 최선의 배려이자 자기 보호일 수 있다. “마주쳐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마주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기 경계의 표현이다.

피해야 할 사람과의 거리를 지키는 것은 현명한 지혜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지만, 모든 관계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무례한 자와는 친구가 되지 말고, 불의한 자와는 함께하지 말라.” 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마음이 닳고, 삶의 방향을 잃어가기도 한다. 그런 때일수록 우리는 고전과 성경, 위인들의 지혜를 통해 어떤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거절은 무례가 아니다. 때로는 나를 지키는 가장 깊은 예의다. 당신의 인격과 평화를 위해, 피해야 할 사람과의 거리를 지키는 것이 삶의 품격이자, 지혜가 된다.

사진/이성근. 서귀포 법환포구 앞에 자리한 범섬의 해무(202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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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말한다(Money Talks)는 동서양 속담이 가진 함의"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ㆍ행정학박사


‘돈이 말한다(Money Talks)’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속담이다. 돈은 언어처럼 작동하며, 말보다 빠르고 강하게 의사를 전달한다. 이 말 속에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냉철한 통찰이 담겨 있다. 세상은 자본의 흐름을 중심으로 움직이며, 돈이 의사결정을 이끌고, 관계의 위계를 정하며, 소비의 경험을 차별화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 글은 “돈이 말한다”는 표현의 기원과 문화적 의미에서 시작하여, 소비 기준에 따른 차별적 서비스의 현실, 그 긍정과 부정의 효과, 그리고 사회적 영향까지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논의하고 있다.

돈이 말한다는 속담의 의미와 유래

‘Money talks’라는 영어 속담은 고대 로마 시대의 '돈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에서 기원한 돈의 가치중립성과도 맞닿아 있다. 이 속담은 “돈만 있으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풍자하거나 직시하는 말로, 언행보다 자본이 더 결정적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국에서도 “돈 앞에 장사 없다”, “돈이 힘이다”라는 표현이 유사하게 사용된다.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니라, 힘의 상징이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관념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더욱 뚜렷해졌다. 소비자 자본주의 시대, 우리는 ‘돈의 언어’를 통해 사람을 대하고, 공간을 설계하며, 시간을 조절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과연 돈은 어디까지 말하고 있으며, 그 말은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가?

현대사회는 소비자의 지출 규모가 서비스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현대 사회는 일정 규모 이상의 지출을 한 소비자에게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항공사에서는 비즈니스 클래스와 퍼스트 클래스 고객을 일반석보다 먼저 탑승시키고, 호텔은 VIP 회원에게 업그레이드된 객실과 전용 라운지 이용권을 제공한다. 백화점이나 프리미엄 쇼핑몰에서는 구매 이력이 많은 우수고객에게 사은품, 전담 상담, 발렛파킹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한 고객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보상의 원칙과 경제적 효율성에 부합한다. 그러나 이 구조가 반복되면, 돈의 양에 따라 ‘사람의 격’이 매겨지고, 서비스의 품질이 결정되는 차별적 환경이 고착된다. 환경과 시간, 배려의 자원들이 돈의 크기에 따라 계층화되는 것이다.

돈이 만든 혜택과 불균형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가진다

‘돈이 말하는 사회’는 확실히 높은 서비스 품질을 만들어낸다. 우수고객 관리 차원에서 기업들은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별 맞춤형 경험을 제공하고, 이는 소비자 만족도를 높이며 경제를 순환시킨다. 예컨대 항공사 마일리지 프로그램은 소비자에게 선택권과 편의를 제공하며, 프리미엄 호텔의 등급별 회원 시스템은 고객 충성도를 유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이 지속될수록 소비자는 ‘비용 없는 인간관계’나 ‘돈과 무관한 배려’를 점차 잃어간다. 공공성과 평등의 가치는 소비 환경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고, ‘지갑의 무게’가 곧 ‘존재의 무게’로 인식되는 왜곡된 현실이 반복된다. 결국 돈은 편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사회적 차별과 상대적 박탈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영향과 가치 기준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돈이 말하는 사회는 강력한 유인책과 동시에 은밀한 경고를 내포한다. 소비의 힘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될 때 사회는 피로감을 느낀다. 환경에 대한 책임, 지속가능성, 공동체적 배려는 돈의 언어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가치들이다.
소비의 기준이 단지 금액과 등급으로만 환산된다면, 인간적 배려나 윤리적 판단은 설 자리를 잃는다. 특히 최근에는 ESG 경영이나 착한 소비 운동, 친환경 캠페인 등이 돈의 언어에 대항하는 새로운 윤리로 떠오르고 있다. “돈이 말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돈이 ‘모든 것을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반성적 시각이 필요한 싯점(時點)이다.

돈의 시대에 가치의 균형을 묻다

‘Money talks’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분명한 언어다. 그러나 그 말이 언제나 정답이 되지는 않는다. 돈이 말할 수 없는 인격, 배려, 환경, 공동체 가치들이 바로 인간 사회가 지켜야 할 진짜 목소리다. 우리는 지금, 돈의 언어와 더불어, 그 이면에서 조용히 말하고 있는 다른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사진/2025 한국지역정책학회 춘계 학술대회(전남대ㆍ2025.6.27)

사진/광주 영풍문고(202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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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층의 사계절에 대한 단상:
일, 관계, 자산, 감정에 대하여"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면, 지금 나는 그 가을의 가장 깊은, 이른바 ‘고은층’이라 불리는 시간을 걷고 있다. 필자가  ‘고은층’이라 이름부친 이 시기는 고령과 은퇴 이후의 삶을 의미하지만, 그 의미는 단순히 일을 내려놓은 시기를 넘어선다.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욕망과 변화를 마주하며, 필자는 이 사계절의 다른 얼굴과 만나고 있다. 이 글은 그 고은층의 시간 속에서 만난 네 가지 삶의 주제를 성찰하며 써 내려간 작은 단상이다.

일과 끝나지 않은 몰입의 습관을 마주한다

고은층은 ‘끝남’이 아니라 ‘다름’이다. 더 이상 교수로서의 활동은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은 여전히 많다. 젊은 날에 배어든 몰입의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조용하고 한가로울 줄 알았던 하루는 어느새 또 다른 일들로 채워지고,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이 늘어난다. 때로는 기존 출판한 책의 개정판을 펼쳐 들고, 때로는 칼럼 한 줄을 다듬는 데 시간을 보낸다. 마음이 먼저 달리면, 몸도 따라 움직이려 하고, 멈추어야 한다는 이성은 언제나 감성의 반 박자 뒤에 선다. 고은층의 시간은 그렇게 느긋하기보다는 묘하게 분주하다. 다만 이제는 성취보다 의미가 더 중요해졌다는 점에서, 이 일들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관계는 다시 배우는 소통의 기술이다

나이가 들면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사회적 역할이 줄면서 관계의 폭도 좁아지고, 사회에서의 네트워크는 서서히 사라진다. 남은 것은 가족과 몇몇 지인, 그리고 우연히 만난 선한 이웃들이다. 그러나 이 선린관계들마저도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다. 말수가 줄어들면 시간은 고요하고, 애써 표현하려 하면 뜻밖의 상처를 주기도 한다. 관계는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익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섬세한 배려와 표현을 요구한다. 고은층의 관계는 그래서 ‘다시 배우는 소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관계에 있어서 초심자로 돌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자산은 삶의 흔적을 정리하는 용기이다

자산이라 하면 흔히 경제를 떠올리지만, 이 시기의 자산은 그것만이 아니다. 오래도록 쌓아온 물건들, 자료들, 책임들, 그리고 감정들까지 포함된다. 책장을 넘기다 발견한 그어진 낡은 한 줄이 과거의 순간을 불러오고, 서랍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메모지 하나가 오래도록 묻혔던 기억을 흔든다. 정리는 단순한 물리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과거를 마주하고,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내면의 고요한 결단이다. 때로는 버리는 일이 가장 큰 용기가 된다. 그 속에 담긴 기억과 정서의 무게가, 물리적 자산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감정은 나 자신과의 깊은 대화이다

감정은 고은층 시기의 가장 민감한 주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요동치고, 그 파동은 함께 사는 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괜찮은 척하지만 실은 괜찮지 않은 날이 더 많고, 이유 없는 불안이나 외로움, 갑작스러운 짜증이 고요한 일상을 뒤흔든다. 이제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의 내면을 응시하며 ‘왜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를 묻는 일, 그것이야말로 이 시기의 중요한 공부다.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곧 자신과의 대화이며, 그 대화의 깊이에 따라 고은층의 품격도 달라진다.

함께 걷는 사계절은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미래이다

일, 관계, 자산, 감정의 네 가지는 지금 나에게 새롭게 주어진 인생의 과목들이다. 젊은 날 익숙했던 방식으로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숙제들이고, 필자만의 문제라 여겼던 이 고민들이 사실은 우리 모두의 숙제임을 점차 깨닫고 있다. 최근 만난 몇몇 지인들도 비슷한 어려움 속에서 길을 찾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적지 않은 위로와 공감을 얻었다.
이 글이 같은 세월을 걷는 이들에게 작지만 따뜻한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고은층은 외로운 계절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성숙한 사계절임을 말이다. 그리고 그 계절은 혼자가 아닌, 함께 걸어가는 길임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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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사회를 살아가는 ‘중용의 자유인’을 위한 제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중용의 삶과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네 가지 지혜에 대한 논의"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고은층으로 살아가는 지금, 삶의 외형은 어느덧 조용해졌으나 내면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사회적 역할에서 한발 물러난 듯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여전하고, 어느 일에든 쉽게 몰입하는 습관은 나를 다시 일상의 복잡함 속으로 이끈다. 인간관계는 변화한 라이프 사이클에 따라 새롭게 조정되어야 하고, 정리되지 않은 자산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정의 기복은 더욱 예민해져, 하루에도 수차례 일어나는 감정의 파도는 나 자신은 물론 가족과 주변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내가 살아온 길과 고은층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스트레스의 실체를 돌아볼 때, 문득 떠오른 개념이 ‘중용(中庸)’이었다.
이 글은 고은층이 겪는 삶의 네 가지 중심 영역인 일, 관계, 자산, 감정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중용의 지혜로 풀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보다 자유롭고 균형 잡힌 삶을 살기 위한 내적 제언이다.

첫째, 일의 집착에서 벗어나 ‘몰입의 조절’을 배우는 지혜이다. 고은층은 사회적 역할에서 한 발 물러났지만, 과거의 열정과 관성은 여전히 현재를 지배한다.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마음은 과도한 몰입으로 이어지기 쉽고, 이는 곧 에너지 고갈과 좌절감을 불러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은 과도함과 부족함 사이의 중용"이라 하였듯이, 일과 몰입의 관계 또한 지나침 없이 조절해야 한다. 과거의 성취는 내려놓고, 현재의 활동은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절제의 태도가 필요하다. 플라톤은 절제를 자유로 가는 다리라 했고, 성경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도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하였다. 중용은 곧 일에서의 균형이요, 자유이다.

둘째, 관계의 변화 속에서 ‘거리두기와 경청’을 실천하는 지혜이다. 인간관계는 나이를 먹을수록 줄어들기도 하지만, 관계의 밀도는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그러나 고은층의 말은 때로 설교로 들리고, 과거의 경험은 현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이는 자칫 갈등의 씨앗이 된다. 유교의 중용사상은 모든 극단에서 중간의 도를 택하는 삶의 태도를 강조하며, 공자는 “군자는 중용을 따르되, 편협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충고도, 지나친 침묵도 아닌, 필요한 때의 거리두기와 상대에 대한 경청이 중용적 자세다. 세네카는 "절제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했듯이, 관계의 절제는 감정의 평정을 낳고, 결국 사람 사이의 자유로운 소통으로 이어진다.

셋째, 자산 정리의 스트레스 속에서 ‘선택과 단순화’를 추구하는 지혜이다. 고은층은 일생을 모은 물적 지적 자산을 어떻게 정리하고 후대에 전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존하려는 집착은 오히려 짐이 되고, 결정하지 못하는 우유부단은 마음의 짐을 키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중용적 단순화’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중용 실천을 생활의 방법으로 풀어내며, 필요 이상의 것은 버리고, 필요한 것만 남기는 생활 지혜를 강조했다. 삶의 자산을 정리하는 일은 곧 자기의 삶을 요약하는 일이며, 이는 덜어내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자연에 따른 삶’과 ‘운명의 수용’은 바로 이러한 단순화의 철학적 태도를 의미하며, 삶의 재구성을 위한 실천적 미덕이다.

넷째, 감정의 기복을 다스리는 ‘내면의 중용’과 ‘자기 성찰’의 지혜이다. 고은층의 삶에서 감정은 더욱 민감하고, 때로는 감정 자체가 존재의 위협이 되기도 한다. 작은 자극에도 흔들리고, 과거의 상처는 더욱 또렷이 되살아난다. 이때 중용은 단지 중간값이 아니라, 감정의 주인이 되려는 의지이자 내면의 평정을 유지하려는 실천이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내면의 평정(Apathy)’은 감정의 억제가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성경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그리고 절제”라는 구절도 결국 감정의 통제를 강조한 것이다. 공자의 중용 또한 인성의 선악 양면을 인정하며 시의적절하게 그 가운데를 취하는 지혜를 말한다. 이는 필자가 일상 속 감정의 기복을 스스로 관찰하고, 가능한 한 ‘지나치지 않음’을 실천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중용은 옛 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생존 전략이자 삶의 태도이다. 특히 고은층에게 중용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일과 관계, 자산과 감정이라는 삶의 네 가지 무게를 균형 있게 조절하며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내면의 나침반이다. 지나침 없이 조화롭고, 치우침 없이 단단한 중용의 삶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더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길이자, 미래 사회를 살아갈 '중용의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다.


참고자료
1) '중용(中庸)'은 사서오경에 속하는 경전 중 하나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녀야 할 자세와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본래 "예기"의 31편에 나온다./위키피디아
2) '중용지도(中庸之道)'와 '중용사상(中庸思想)'
'중용지도'는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항상 중간을 지키는 도리를 의미한다. 즉,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태도를 뜻한다. 이는 공자가 강조한 덕목 중 하나이며, 군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중용사상'은 극단 혹은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도를 택하는 유교교리이다. 유학에서 '중용 '두 글자는 치우침 없음과 일상적 꾸준함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형이상학적으로 '중'은 진리가 있는 곳이며 '용'은 진리가 쓰이는 곳이다. 공자의 중용지도는 인성의 선악 양면을 모두 인정하고 일의 대소후박을 참작하여 시의를 좇아 그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유교의 중용은 형이상학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가치론적인 수양방법으로까지 발전했다. 한국에서도 이이와 이황, 그리고 실학파의 정약용 선생에 이르기까지 중용의 실천적 의미에 대한 많은 탐구가 있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3)“모든 일에 절제하라. 절제는 자유로 가는 다리요, 지나침은 파멸로 가는 문이다.” 이 문장은 플라톤적 중용과 성경적 절제 개념을 응용한 문구라 할 수 있다.
4)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절제’를 인간의 네 가지 주요 덕목 중 하나로 꼽으며, 절제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공동체를 조화롭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5)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은 과도함과 부족함 사이의 중용(中庸)"이라 하여, 절제는 쾌락과 욕망의 지나침을 피함으로써 인간을 완성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6) 성경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절제"가 언급된다. 또한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7)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는 "절제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주장을 여러 편지와 저술에서 반복하였다.
8) 필자는 이 글에서 절제의 다른 이름으로 조절을 병용하고 있다.
9) 스토아 철학의 태도는 내면의 평정과 덕을 중심으로 한 이성적 실천적 삶의 자세를 강조한다. 핵심은 인간이 자기 통제와 자연(로고스)에 따른 삶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에 있다. 구체적으로는 이성에 따른 삶(Logos), 자연에 따라 살기(Live according to Nature), 내면의 평정 유지(Apathy), 덕을 최고의 선으로 삼음(Virtue is the only Good), 운명을 수용하는 자세(Fate Acceptance), 자기 수양과 공동체 의식 등이다.
이러한 태도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 에픽테토스의 "담화록, " 세네카의 "윤리서간집" 등에서 잘 나타난다. 요약하면, 스토아 철학은 이성과 덕을 통해 내면의 자유와 평온을 얻고, 운명을 긍정하며 살아가려는 삶의 태도이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지금 필자는 고은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고은층의 삶은 이전의 삶과는 확연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삶의 내용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고, 쉽게 몰입하게 되는 습관은 그대로다.

인간관계 또한 라이프 사이클이 바뀌면서 쉽지 않은 과제가 되었다. 그간 살아온 연륜만큼이나 정리해야 할 자산도 스트레스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 관리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감정의 기복이 일어나며, 함께하는 가족들은 이러한 일상의 네 가지 즉, 일, 관계, 자산, 감정에 대해 불만과 염려를 드러낸다.

최근 가끔 만나는 지인들 역시 필자와 비슷한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며, 문득 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이 동병상련의 고은층에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서남북꽃’으로 불리는 아마릴리스(Amaryllis)는 특히 제주 지역에서 이렇게 불리며,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화려하고 균형 잡힌 꽃을 피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별칭은 꽃의 대칭성과 사방으로 고르게 펼쳐지는 꽃잎 모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사방이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다’는 상징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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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중자존과 교수 인생"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ㆍ행정학박사



자중자존(自重自尊)은 교수의 품격을 완성하는 내면의 기둥이다


교수의 길을 걸어온 지난 38년, 나는 지식의 전달자이기 이전에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품고 강단에 섰다. 세월이 흐르고, 정년 한 지금, 내가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마지막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자중자존(自重自尊)’이다. 스스로를 무겁게 여기고 귀하게 대하는 자중자존하는 태도는 교수라는 직업의 윤리이자, 인간으로서의 최후 품격을 지키는 영혼의 자세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자중은 단지 겸손이나 절제의 미덕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의 무게, 즉 존재의 깊이를 품은 자기 관리의 기본이다. 자존은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이며, 자신을 존귀한 존재로 인식하는 내적 선언이다. 교수의 언행 하나가 제자의 인생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안 이후, 나는 언제나 “내가 나를 먼저 존중해야 남도 나를 존중한다”는 원칙을 삶의 첫 줄에 놓았다. 자중 없는 자존은 오만이며, 자존 없는 자중은 비굴이다. 이 둘은 쌍을 이루어야 진정한 인격의 향기를 낸다.

자중자존은 삶의 태도이자 교수의 품격이다

강단에서 나눈 말 한마디, 연구실에서 보인 몸가짐 하나까지도 모두 자중자존의 반영이어야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늘 나는 내 말에 의미를 실었는가? 내 행동에 진심이 있었는가?” 자중은 말과 행동의 무게이며, 자존은 존재의 높이다.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삶의 자세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교수는 성실한 삶을 실천하며 모범을 보여야 한다. 누군가의 멘토가 된다는 것은, 무형의 영향력을 평생 지닌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수는 가르침 이전에 살아 있는 ‘본보기’여야 하며,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무겁게 인식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자중자존의 태도는 강의실 안에서 뿐 아니라, 일상과 인간관계에서도 배어 나와야 한다. 정중하고 심사숙고하며, 내면의 중심을 지키는 삶이 교수의 품격이다.

자중자존은  인생의 말미에서 더욱 절실해지는 정신의 축이다

정년을 지나고 대학현장을 떠나면서, 나는 비로소 자중자존의 진가를 더 깊이 실감하게 되었다. 젊은 날엔 성취와 명예가 중요한 줄 알았지만, 고은층에게는 품격과 절제가 더 중요하다. 누구나 나이 들면 말이 많아지고 행동이 흐트러지기 쉬운데, 이럴수록 자기를 지키는 태도가 절실하다.
자중자존은 정년 이후에도 삶을 깨어 있게 하는 힘이다. 외적인 직책은 내려놓았지만, 내면의 사유는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자기 존재를 무겁게 하고, 그 무게만큼 자신을 존중하는 삶의 자세는, '고은'/고령과 은퇴의 시기를 더욱 향기롭게 만든다. 지금도 나는 아침이면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도 나는 나를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것이 고은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지혜요, 인생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품격이다.

자중자존은 나를 지키는 힘이자, 세상을 대하는 예의다

나는 가르치며 배웠고, 가르치며 함께 성장했다(敎學相長).
제자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나를 통해 제자의 가능성을 북돋았다. 그 모든 시간의 중심에는 자중자존이 있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장단점을 인정하며, 타인을 헤아리고 세상을 관조(觀照)하는 자세가 바로 교수의 지혜였다.
자중자존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향한 깊은 예의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이는 타인을 존중할 수 없고, 세상으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도 없다. 매사에 성찰하며 정중동(靜中動)하는 삶의 태도는, 교수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삶의 자세다. 나를 가볍게 여기면 인생이 가벼워진다. 그러나 나를 귀하게 여기면, 인생은 끝까지 품격을 잃지 않는다.

자중자존은 나이 들수록 향기로운 덕목이다

자중자존은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가장 깊은 가치이다. 나의 교수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면, 초창기의 열정도, 중년기의 성과도 모두 중요했지만, 결국 끝까지 나를 지탱한 것은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었다. 지금도 나는 매일 마음속에서 자문한다. “오늘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어떤 의미 있는 일과 시간을 보냈는가?” 그 질문이 나를 다시 중심에 세운다.
자중자존은 단지 고은층의 미덕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인격의 결실이다. 세월은 저물어가지만, 자중자존의 태도는 더욱 깊어져야 한다. 그 깊이는 지식보다, 지위보다, 더 오래 남는다.


참고자료
1)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명언
"나는 어디서 살았으며,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Walden  중에서

사진/38년간 봉직한 영남대 정년퇴임에 정부로부터 수여받은 황조근정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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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와 중심을 상징하는 숫자 '5'에 대한 논의"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ㆍ행정학박사


숫자 '5'는 조화와 중심을 상징한다


숫자는 단순한 기호를 넘어, 삶의 질서와 우주의 원리를 담아내는 상징성을 가진다. 그중에서도 ‘5’라는 숫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특별한 함의와 중심적 가치를 지닌 수로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몸, 세계의 방향, 자연의 원리, 종교의 상징, 문명의 질서에 이르기까지 ‘5’는 균형과 조화의 수로 기능해 왔다.
이 글에서는 숫자 '5'가 가진 의미와 중요성을 몇 개의 주제로 나누어 고찰하면서, 음양오행, 오방색, 성경, 고사성어, 속담, 위인 명언 등의 다양한 문화적 사례를 통해 ‘5(五)’가 전하는 상징적 의미를 논의하고 있다.

숫자 '5'는 동양사상의 오행(五行)과 오방(五方), 그리고 오덕(五德)의 중심축이다

동양철학에서 ‘5’는 우주와 인간을 잇는 조화의 수로 자리한다. ‘오행(五行)’이라 불리는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는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질서를 구성하는 핵심 원리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생성과 변화,그리고 소멸을 설명하는 철학 체계로 발전하였다. 또한 오행은 인간의 내면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과 연결되고, 간, 심, 비, 폐, 신의 다섯 장기(五臟)와도 대응한다.
이와 함께 오방색(五方色)은 동양 전통문화의 시각적 표현체계로, 동(靑), 서(白), 남(赤), 북(黑), 중앙(黃)을 통해 방위와 색의 상응 관계를 나타낸다. 예컨대 국기, 한복, 절기 음식, 의례복 등에 쓰이는 오방색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하늘과 땅, 사람과 삶을 엮는 상징언어이다.
조선 유학자 정약용 선생은 "인간은 오상(五常)을 갖추고 있어야 성인이 된다"라고 하며, ‘5’의 윤리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인간이 자연의 이치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는 동양적 인간학의 정수가 숫자 '5(오)’에 담겨 있다.

성경과 종교 속 숫자 ‘5’는 서양문명을 상징한다

서양의 성경 속에서도 ‘5’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완전성과 은혜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는데, 이는 두 개의 돌판에 각기 5개씩 나뉘어 기록된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첫 5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후반 5 계명은 인간과의 관계를 다룬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가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으로 5천 명을 먹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섯 개의 떡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와 보살핌을 상징하며, 작은 것으로 큰 일을 이루는 은혜’의 상징이 된다.
또한, 기독교 전통에서 ‘5대 신학 원리(Sola)’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도 ‘5’라는 수가 신앙의 기초 원리를 구성함을 보여준다.
숫자 ‘5’는 서양에서도 불완전한 인간이 신의 완전성에 다가가기 위한 단계로 해석되며, 중재와 질서의 힘을 상징한다.

숫자 '5'는 인간과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요소로 사용된다

인간의 신체 구조 또한 ‘5’의 질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다섯 손가락, 다섯 발가락, 다섯 감각(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다섯 장기(오장육부) 등은 생명의 기본 단위가 ‘5’의 리듬 안에 배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손가락이 다섯 개인 이유는 기능적 효율성도 있지만, 하나의 중심(엄지)을 중심으로 네 방향이 조화를 이루는 구조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한다.
사회적으로는 세계의 지리에서도 다섯 대륙(아시아·유럽·아프리카·오세아니아·아메리카)으로 구분되며, 올림픽 오륜기는 이 다섯 대륙의 평화를 상징한다. 또한 '오대양 육대주(五大洋六大洲)'에서도 지구상의 바다와 대륙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오대양은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북극해, 남극해를, 육대주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구분), 오세아니아를 의미한다.  
‘5’는 인간 개인에서부터 세계 공동체까지 포괄하는 균형의 구조로 작동하며, 중심이 있는 다원성의 조화를 보여준다.

사자성어와 속담 속의 숫자 '5'는 언어와 삶의 지혜를  상징한다

‘5’를 담은 사자성어와 속담에서도 이 숫자가 전하는 교훈을 엿볼 수 있다. ‘오상지덕(五常之德)’은 인·의·예·지·신을 가리키며, 인간됨의 기본을 강조하는 유교의 핵심 가치다.
또한 ‘오리무중(五里霧中)’은 상황이 전혀 파악되지 않는 난감한 상태를 말하며, 여기서 ‘5리’는 막연한 거리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숫자 5는 이처럼 구체적 수량을 넘어서 추상적 심리 상태까지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도구가 된다.

숫자 ‘5’는 위인들의 말속에도 중요한 통찰로 스며들어 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언어에서도 ‘5’의 통찰은 자주 등장한다. 공자는 “오 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이라 하여, 인간이 마흔에는 미혹하지 않고, 쉰 살에는 하늘의 뜻을 안다고 하였다. 여기서 ‘5’는 인생의 전환점이자 깨달음의 나이를 상징한다.
현대에 와서도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 욕구단계(a hierarchy of human needs)를 ‘5단계 이론’으로 제시하며, 생리적 욕구에서 자아실현에 이르기까지 인간 성장의 질서를 체계화하였다. 이처럼 ‘5’는 인간 삶의 균형점이자 체계적 사고의 틀로서 유용하게 작동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숫자 '5'의 의미는 조화로운 삶의 지도이다

숫자 '5'는 단순한 수량을 넘어 삶의 조화와 질서를 안내하는 철학적 이정표이다. 동양에서는 오행과 오방으로 우주의 원리를 담아내고, 서양에서는 성경과 인체를 통해 신과 삶의 연결고리를 상징한다. 감각과 손가락, 대륙과 장기처럼 인간의 구조 자체도 ‘5’의 설계 안에 있으며, 언어와 문화 속에서도 '5(五)'는 조화와 중심, 그리고 성찰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5’를 중심에 두는 삶은 균형 있는 사고와 실천을 지향한다. 다섯 방향을 보되 중심을 잃지 않고, 다섯 감각을 열되 무분별하지 않으며, 다섯 가지 가치와 덕목을 실천하려는 삶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모범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도 삶의 다양한 장면 속에서 ‘5(五)’의 철학을 되새기며, 조화롭고 품격 있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추가 학습자료 소개
1) 주역의 역경과 오행사상
2) 성경 구약 출애굽기와 신약 마태복음
3) 공자 논어 및 유교경전 오상(五常)과 오덕(五德)
4) A. Maslow, "A Theory of Human Motivation (1943)."

그림/ 김미예. 오방색.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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