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의 잰틀맨십을 회상하다:
고은층의 삶에서 다시 발견한 신사와 숙녀의 조건"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떠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선명해지는 얼굴들
필자는 대학에서 정년 한 지 어느덧 8년이 되었다. 그중 3년 반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서귀포에서 살아왔다. 이제 그 생활을 마무리하는 싯점에 서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성취나 결과가 아니라 사람들의 태도와 관계의 인상이었다. 그 중심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단어가 바로 ‘서귀포의 젠틀맨십’이었다.
속담에 “떠나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머무는 동안에는 익숙함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떠나는 순간 비로소 또렷해진다. 서귀포는 필자에게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 못지않게 사람들의 태도로 기억되는 공간이 되었다. 소리 높이지 않으면서도 지켜지는 약속,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이어지는 배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조용한 책임감이 이 도시의 일상 속에 스며 있었다.
이 글은 『이성근 교수의 제주사색』에 수록될 하나의 사색이자, 서귀포에서 함께 시간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던 모든 인연들에게 전하는 작별의 인사이며 감사의 기록이다.
젠틀맨십의 어원과 오늘의 확장된 의미
젠틀맨(gentleman)은 본래 중세 영국에서 신분적 귀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이 개념은 혈통이 아니라 태도와 품성으로 평가되는 인간상을 뜻하게 되었다. 오늘날 잰틀맨십은 특정 성별이나 계층의 개념이 아니라, 시민의 품격과 삶의 윤리를 아우르는 보편적 가치로 확장되고 있다.
공자가 말한 군자(君子)가 “의를 먼저 알고 이를 뒤에 둔다(先義後利)”고 했듯이, 젠틀맨과 레이디는 앞에 서되 앞서지 않고, 말하되 상처를 남기지 않으며, 함께하되 독점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다. 성경 또한 “너희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립보서 4:5)고 말한다. 잰틀맨십은 약함이 아니라 절제된 강함이며, 자기 조절에서 비롯된 품격이다.
서귀삼연에서 만난 약속과 우정의 잰틀맨십
서귀포 생활 초기에 맺은 인연, 곧 서귀포 치유의 숲 해설사로 활동하는 현 선생과 경기도 중등 교장 출신 김 선생과의 관계는 젠틀맨십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체화되는 규칙임을 일깨워 주었다.
현 선생은 약속 시간을 분 단위로 지키는 정확함과 다소 촉바른 언어 사용을 통해 신뢰를 쌓아온 분이다. 서귀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연·문화 보존에 대한 태도는 지역 공동체가 지닌 품격을 말없이 보여주었다.
김 선생 역시 산행 약속에서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동쪽 산행은 자신의 차량을, 서쪽 산행은 필자의 차량을 사용하는 식의 상호 배려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평생 교육 현장에서 쌓아온 관계를 우정으로 지속하는 모습은 “관계는 관리가 아니라 존중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 서귀삼연은 식사 모임에서도 비용을 로테이션 원칙으로 지켜왔다. 그 단순한 규칙 속에서 “친구란 오래 함께 지켜낸 약속”이라는 오래된 격언은 삶으로 증명되었다.
서귀복연에서 배운 예(禮)와 도(道)의 잰틀맨십
서귀포 노인복지관에서 만난 맹 선생, 박 선생, 은 선생과의 인연은 고은층의 잰틀맨십이 연령이나 직업을 넘어 삶의 태도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맹 선생은 노인복지관 스마트폰 활용반에서의 만남을 계기로 동영상 제작까지 함께 배우며 상호학습을 실천했다. 맹자 후손답게 나이와 지위를 가리지 않는 예절 바름으로 “사람은 태도로 기억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사범학교 출신 교장·연구관 경력을 지닌 박 선생은 일상을 질서 정연한 루틴으로 살아가는 분이었다. 식사 모임 하나에도 철저히 준비하고, 자신의 농장에서 울금을 캐어 필자의 농장에 이식해 줄 때 장갑과 장화, 연장과 포대까지 미리 챙기는 모습은 ‘준비는 배려의 다른 이름’ 임을 일깨워 주었다.
수필가인 은 선생은 글로 소통하는 고은층의 삶 속에서 예와 도, 그리고 깊은 배려심을 실천해 왔다. 식사 자리에서도 말없이 사전에 계산을 마치는 조용한 잰틀맨십·레이디십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파크골프장에서 피어난 공동체적 잰틀맨십
서귀포 강창학과 칠십리 파크골프장에서 만난 신서귀삼연과 가지가지클럽, 푸른 클럽의 인연은 놀이의 공간에서도 품격이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기업가 출신의 신 대표는 점수와 승부에 초연한 달관타법으로 파크골프를 놀이처럼 즐기며, 모두를 수용하는 여유의 잰틀맨십을 실천했다. 중등 체육교사 출신 이 선생은 과학적 정석타법을 지향하면서도 기독교 장로로서 포용과 성실함으로 게임 자체를 존중했다.
가지가지클럽의 문 선생은 연륜 속에서도 솔선수범하며 “나이는 내려놓음에서 빛난다”는 교훈을 남겼고, 초등 교장 출신 김 선생은 강창학과 칠십리 파크골프장의 공간과 사람 자체를 아끼는 사랑의 잰틀맨십을 실천했다.
푸른 클럽의 고 선생과 회원들은 조화와 균형의 미덕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여장부 고 선생은 브리지 역할과 분위기 메이커로서 공동체를 잇는 잰틀맨십·레이디십을 발휘하며,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치를 일상의 놀이 속에서 구현해 냈다.
사회공의와 질서를 지키는 조용한 잰틀맨십
서귀포의 잰틀맨십은 개인적 친절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질서와 공의를 지탱하는 힘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서귀포 강창학 파크골프장의 운영과 관리에서 드러난 솔선수범의 리더십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창학 파크골프 협회장의 헌신적인 솔선수범과 열정적인 리더십은 규칙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질서를 세워나갔다. 구 소장의 원칙에 충실한 운영과 지속적인 환경 개선 노력은 이곳을 ‘이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가꾸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모든 클럽 회원들이 자조적으로 참여한 코스 관리와 환경 정비는 공동체 윤리가 생활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또한 서귀포 두 파크골프장에서 고은층 파크골퍼들에게 캔디를 나눠주는 이른바 ‘캔디천사’의 모습은 나눔과 건강이 결합된 생활형 잰틀맨십·레이디십의 상징이었다. 말없이 캔디 껍질을 줍는 정 선생의 행동은 “인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난다”는 오래된 가르침을 떠올리게 했다.
노자가 말한 “대도는 말없이 흐른다(大道無言)”는 말처럼, 서귀포의 잰틀맨십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질서를 세우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공동체를 지탱하는 조용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서귀포의 잰틀맨십이 남긴 것, 그리고 감사의 인사
서귀포 생활을 마무리하며 필자는 잰틀맨십이 특정 계층이나 직업, 혹은 성별의 전유물이 아니라, 고은층의 삶에서 더욱 또렷해지는 인간의 기본 태도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약속을 지키는 정확성, 규칙을 존중하는 일상, 우정을 지속하는 책임, 자연과 공동체를 아끼는 마음이 어우러진 삶의 방식이었다.
이 글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수많은 분들께도 이 지면을 빌려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또한 한림 금능의 근석농장 관리를 계기로 앞으로도 종종 서귀포를 찾게 될 것이며, 인연은 공간을 떠난 뒤에도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서귀포는 이제 필자에게 하나의 의미있는 생활거처 뿐만아니라, 신사와 숙녀의 품격을 배운 삶의 학교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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