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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 권태준 교수님  추모사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
2024. 5. 26 오전 5시 50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권태준 교수님,

언제까지나 저희들 곁에 계시면서 가르침과 사랑을 주실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시다니 우리 모두에게는 너무나 큰 슬픔입니다.


교수님은  우리 모두의 큰 스승이셨습니다.

특별히 저에게 교수님은 세 가지 길을 터주신 스승이셨습니다. 하나는 학문의 길, 다른 하나는 교수의 길, 마지막 하나는 올바른 삶의 길입니다. 교수님은 저의 인생 여정에서 은인이시고 스승이시며 교수 직분의 롤 모델이셨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을 모아 교수님을 추모합니다.

무엇보다 교수님은 선비형 교육자이셨습니다.

교수님은 우리 모두가 본받고 싶어하는 스승이셨습니다. 또한 교수님은 마음으로부터 제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신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셨습니다.


교수님은 학계에서 계획이론과 계획교육에 큰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는 계획이론의  업적입니다. 교수님은 계획분야의 대학자이셨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계획은 교수님의 계획이론에 기반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계획교육의 업적입니다.
교수님은 대한민국에 도시와 환경교육을 개척하시고 세워놓으신 진정한 전문가이시고 어른이셨습니다



교수님은 사회개혁에 기여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셨습니다.

교수님은 서울대에서 사회정의 연구실천 모임을 구성하시어 대표로 활동하셨고
경실련 공동대표를 지내셨으며
환경대학원에 이론· 실천 세미나를 설치하시어 매월 세미나를 통해 이론과 실천을 접목하는 지식 공유를 실천하셨습니다.


교수님은 미래를 보는 선견과 크게 보는 대견으로 반듯한 대한민국이 되는데 길잡이가 되어주셨습니다.

교수님은 대인이자 거인으로 일생을 사셨고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기억될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수님,  

교수님이 남겨놓으신 일들은 이제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저희들이 이루도록 힘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수님,

이제 이 땅에서는 마지막 인사를 올립니다.

 
부디 천국에서 영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추모사에 대한 답글

ㆍ이 교수와 나에게는 많은 가르침과 추억을 남겨 주셨습니다. 권 교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도록 하십시다./
김원배 박사 전 국토연구원, 미국 거주

ㆍ권태준 교수님은 한 학문분야의 틀을 만들어 주셨고, 이 사회의 갈 길을 보여주셨으며 몸소 이끌어 주셨습니다. 감사하고 아쉽고 섭섭한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올립니다./  
박영철 성결대 명예교수

ㆍ이 원장님, 권태준 교수님 추모사 때 왜 목이 메였는지 알겠네요. 제게도 권 교수님은 항상 경외스러운 분이셨지만 원장님께는 아주 특별하신 분이셨네요. 권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권 교수님의 영향은 앞으로도 마음 속에, 학문 속에, 현장의 실천 속에 녹여져 남아있을 겁니다./  
변창흠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전 국토교통부 장관

ㆍ이 선배님께, 이제 제주도로 돌아가셨겠지요. 이 선배님의 추모사는 저번에도 읽은 글이었지만 다시 읽어보아도 마음에 울림이 크네요.
저는 우리 아버지를 부친으로 모시고 어머니를 모친으로 모신 것과 함께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신 것이 저의 최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선생님의 영면으로 이 선배님과 한밤을 보낸 것도 나름 뜻깊은 추억이 된 듯 합니다./
권오혁 부경대  경제학과 교수  

ㆍ 추모의 글을 동문분들과 공유하겠습니다./
박인권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무부원장

ㆍ그러시군요. 은사님께서 생전에 교수님 글을 보셨을까요? 보셨더라면 더 좋겠는데요. 글을 바꾸고, 제목을 바꾸고..... 또 시기에 낸 것 등......역사 속에 작동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저는 권태준 교수님을 위해 천주교식 연령기도 한번 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정숙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명예교수회 편집위원장

문도(文道)와 인도(人道)를 행하신 교수님
하늘길(天道)로 향하시는 교수님




(2)
 "인생의 세 가지 길을 터주신 권태준 교수님"   
 
영남대 명예교수회 사제동행 특집 원고
2024. 5. 22 기고

이성근 명예교수(글로벌 인재대학)

 
옛말에 "사람은 태어나서 세 번의 뜻밖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일생의 소중한 기회를 잡기도 하고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또한,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귀인을 만나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인연을 만들기도 하고, 또는 그렇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나에게 기회와 만남은 바로 서울대 환경대학원(이하 환대원) 권태준 교수님(이하 교수님)이다. 필자가 환대원을 졸업하고 영남대에서 교수 직분을 얻어 도시 및 지역계획학 석·박사 학위로 이 분야 전문가가 되고 계획이론을 주전공으로 평생 교육과 연구와 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수님으로부터 비롯한 기회와 만남의 인연 덕분이다. 교수님은 나의 운명을 가른 은인이고 고교계명의 스승이며 교수 직분의 롤 모델이다. 학문의 길과 교수의 길, 그리고 교수 인생의 길을 터주신 진정한 스승 권태준 지도교수님과 나와의 인연을 소개한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권 교수님의 조교가 되고

나는 영남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환대원에 입학하였다. 3월 입학식에서 교수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당시 교수님은 학과장으로 우리에게 대학원 소개를 하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학원은 심오한 학문 보다 신문을 가려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곳이라고 하였다. 나에게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다. 대학 신입생의 오리엔테이션이면 몰라도 대학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런 말을 들었으니 퍼뜩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학원에 입학한 나는 학부보다 뭔가 차별적인 지식을 함양하는 곳이 대학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교수님의 첫 강의는 계획이론이었다. 계획이론은 도시 및 지역계획학 전공의 기초공통과목이었다. 이 과목은 행정학과의 기획론과 유사하여 나에게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교수님의 강의는 이론강의로 학생들에게는 강의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각자 필기한 강의노트를 돌려가면서 공부를 했다. 이때 나는 학생들의 강의 노트가 내용이 다르게 정리되어있는 것을 보고 학생들의 전공에 따라 강의내용을 받아들이는 수준이 다름을 알았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한 목적이 공부보다 행정고시(이하 행시)가 1차 목표이었고, 혹시 행시가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한 2차 목표가 대학원이었다. 2차 목표를 충족하는 데는 지방대보다 서울대가 좋을 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었다. 1학기 입학과 강의가 시작되자 교과목과 강의내용이 생소하고 매시간 출석을 부르고 과제가 주어지며 발표를 해야 했다. 또한 교재도 국내판이 없어 주로 원서를 읽어야 했다. 이때 학생들은 환대원을 환경고등학교라 불렀고 행대원을 행정고시학원이라 불렀다. 이는 행대원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시생이었고 환대원은 교육시스템이 고등학교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입학과 함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행시를 위해서 휴학을 하느냐 아니면 대학원을 위해서 행시를 포기하느냐의 양 갈래에서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였다. 결국 행시를 포기하고 대학원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나는 뜻밖에 교수님의 조교로 일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교수님은 나에게 평생의 선생님이 된 것이다.

 
아세아정책연구원 프로젝트의 참여와 교수님의 배려

나는 아세아정책연구원(이하 아정원)에서 난생 처음으로 연구프로젝트의 참여와 교수님의 인간적 배려를 경험하였다. 교수님의 조교 일은 동대문에 위치한  아정원이었다. 아정원은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민관식(이하 민 박사) 박사가 설립하였고 동대문을 지역구로 하고 있었다. 민 박사님은 박정희 정부에서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아정원에서 첫해 연구과제는 "서울시 도심기능에 관한 분석과 개편에 관한 연구"이었다. 나는 종로구와 중구에 대한 입지분석을 하였는데 주로 사무실 입지가 주였고 그 구체적인 사무실 업무기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약 2주 동안 수작업으로 입지계수를 구하고 도면 위에 배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수도권 집중억제정책에 관한 연구"에도 일부 참여하였다.

이 년차 프로젝트는 캐나다 IDRC/국제개발연구소와 서울특별시로부터 지원을 받아 "개발도상국의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는 두 개의 세부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하나는 "불량 무허가 주거지 개량사업의 평가에 관한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용 고형 폐기물 처리 방안에 관한 연구"이었다. 나는 폐기물 처리 방안에 관한 연구를 맡았다,

교수님은 한 달에 한 번씩 연구 중간점검 회의와 식사 자리를 가졌고 이때  나를 '인간 이성근'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그러면 김원배 박사는 "우리는 인간이 아닙니까?"하고 분위기를 띄우느라 묻기도 하였다. 그러면 교수님께서 "인간 이성근은 너희하고는 달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내가 시골뜨기 촌놈이라 기를 세워주기 위해 인간적 배려로  하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교수님께서 나에게 '인간 이성근'이라는 남다른 별명을 지어주셨다.

 
석사과정 졸업과 진로 모색

나는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종합시험 최고점수 획득과 석사학위 우수논문상을 수상하였다. 대학원은 학위과정을 수료하면 논문을 작성하기 전에 종합시험을 치른다. 당시 환대원 석사과정 종합시험은 공통 한 과목과 전공 두 과목이었다. 나는 종합시험에서 응시자 가운데 최고점수를 받았다는 것을 당시 학과장이셨던 김형국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다.

나는 종합시험을 치른 후 논문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 교수님께 상의를 드렸다. 교수님께서는 "석사학위 논문 주제와 관련하여 석사과정은 논문의 프로세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을 하는 것이라면서 논문 주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나에게 당시 수행하고 있던 "가정용 고형 폐기물의 효율적 처리 방안에 관한 연구"를 논문 주제로 추천하셨다. 그러나 당시에 농촌에서 쓰레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나는 폐기물의 논문 주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교수님께 다시 상의하여 논문 주제를 "불량 주택지구 정책평가와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로 변경하여 논문을 작성하였다. 나는 논문심사 과정에서 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어 졸업식에서 우수논문상을 받았다.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후 나는 진로 문제를 고민하였다. 당초 대학원에 진학할 때 행시를 통해 공무원이 되는 것이 희망이었고 환대원에 진학하면서 꿈을 접었으나 다시 공무원에 미련이 생겼다. 그래서 교수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자네는 어머니가 혼자 계시니 모교인 영남대학에 추천해볼 테니 가능하면 학교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주셨다.

그 후 교수님은 영남대학 추천과 임용은 다음 해 3월이고 불확실하니 그동안 국토연구원에 잠시 근무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당시 국토연구원은 신설 연구원이라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었으나 단기간 근무한다는 사유로 첫날 출근하자마자 되돌아왔다. 그래서 교수님께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아정원에서 유엔인구활동기금 (UNFPA)  프로그램을 운영하다가 내년에 영남대학에 기회를 찾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유엔인구활동기금 프로젝트를 맡아 매월 인구정책 세미나를 갖는 일을 하고 지냈다.

 
영남대 취직과 교수님의 자료보완

내가 대구집에 가는 길에 영남대 학생처장이고 학부 은사이신 행정학과 김종섭 교수님을 찾아가 뵈었더니 "권 교수님이 학교를 방문하여 나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하였다"고 하셨다. 나는 아마 조교 일에 대한 좋은 평가와 종합시험의 최고 성적,  그리고 우수논문상에 대한 얘기를 하셨을 것으로 짐작하였다. 나는 다음 해인 1980년 3월에 영남대 지역사회개발학과(이후 지역개발학과로 개칭) 전임강사 대우로 임용이 되었고 그로부터 38년 간 교수로 지내다 2018년 2월에 정년퇴직을 하였다.

나는 영남대에 임용되어 대구로 가기 전에 교수님께 인사차 찾아뵈었다. 교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나에게 교수 직분에 대한 조언을 주셨다. 첫째는 내가 계획이론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자 계획이론은 절차 및 방법론에 관한 이론으로 연구비를 지원받아야 하는 전공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계획이론은 직업으로서의 전공은 어려운 분야로 대부분 기피한다. 그러나 교수는 정해진 봉급을 받고 강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계획이론을 전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둘째는 교수 직분은 타직업과 비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타 직업과 비교하면 교수 직분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고 또한 타인과 비교하면 자신이 하는 일에 상대적 박탈감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셋째는 교수는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해야 유능한 교수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글은 논문연구를 위해서 필요하고 말은 강의와 정책 자문에 필요한 것이다.

또한 교수님께서는 내가 대구로 간다는 인사를 드리러 간 날에 '한국의 지역사회개발론' 자료정리를 부탁하셨다. 오래전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지원으로 "새마을운동의 사업평가에 관한 연구"를 서울대 행대원 김광웅 교수님과 공동연구를 진행했는데 출판 시점에 교육부의 제동으로 출판하지 못하고 있는 원고가 있다면서 지금은 출판이 가능하여 책을 출판하려니 기존 원고의 통계자료가 오래되어 최신자료로 바꾸는데 나에게 부탁을 하였다. 또한 지금은 '새마을운동' 보다는 '한국의 지역사회개발'로 책 제목을 변경하려고 하니 지역사회개발이론과 새마을운동 이전의 한국의 지역사회개발 사업에 대한 자료 보완을 부탁하셨다. 이날 나는 두 분이 작성한 오래된 200자 원고지 뭉치를 받아들고 댁을 나왔다.

그 이후 나는 책 내용의 보완구상과 자료가 일부 정리되는 대로 교수님 댁을 몇 차례 방문하여 지도를 받으면서 자료보완을 진행하였다. 마침 이 작업과정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따른 대학휴교령으로 강의가 없어 이 일에 매진하여 교수님이 부탁한 자료를 정해진 시간에 정리할 수가 있었다. 이 책은 1981년에 권태준·김광웅 공저자로 하여 "한국의 지역사회개발"로 법문사에서 출판되었다.



'사회학습과정' 의 주례사

교수님이 경북대 보건대학원 설립기념 세미나에 서울대 권이혁 총장님과 함께 내려오셨다. 나는 그때 동대구역에서 교수님을 만나 저녁 시간을 가졌다. 그때 "한국의 지역사회개발" 책자가 출판되어 세미나 차 내려오시면서 책과 자료수집비도 챙겨 주셨다. 그 책 서문에는 "책의 출판과정에 자료수집과 논평에 이르기까지 영남대 이성근 교수가 수고했다"는 글도 나온다.


교수님과 나는 여러 얘기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통금시간이 다 되었다. 교수님께서 기분이 좋으셔서 호텔에 같이 가자 하시기에 함께 갔었다. 나는 교수님의 방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나와서 다른 방을 정했는데 잠이 오지 않아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대학 동기한테 불쑥 전화하여 "전에 나한테 중매한다 해놓고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이튿날 친구가 바로 전화를 하여 선을 보게 되었고 몇 차례 교제 끝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집사람은 경북대 간호학과 전임강사였고 나는 영남대 전임강사 대우였다.


교수님께서는 결혼 전날 대구에 내려오셔서 주례를 서 주셨다. 지금 기억으로 주례사의 키워드가 '사회학습과정'이었다. 결혼생활은 하나의 사회학습과정이고 결혼하면서 부부가 한 권의 교과서를 선택하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상호학습과정으로 임해야 성공한 결혼생활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교수님의 소중한 주례사 대로 살지 못하고 서로 따로 공부하고 살았다는 아쉬움과 함께 지금 상호학습과정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대 국비 파견 해외연구 교수

전임강사 대우로 영남대학교에 내려온 지 이삼년이 지나고 서울대 환대원에 박사학위 과정이 개설되었다. 교수님은 환경대학원장으로 계시면서 나에게 박사과정이 개설되었다면서 입학을 권유했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다니다 미국 대학에 가도 무방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박사학위 과정 시험을 치뤘다. 당시 대학원 박사학위 과정이 초창기라 입학정원 5명에 25명이 응시하여 경쟁률이 5대 1이었고 다행히 합격하였다.

그러나 나는 대학원 입학시험 이전에 교육부(당시 문교부) 국비 해외파견교수로 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험 후 연말에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대학원 등록은 집사람이 대신하였고 등록과 함께 휴학을 신청하였다.

나는 미국에 유학을 가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하면서 토플시험도 몇 차례 치르던 중 마침 문교부 국비파견 해외연구교수에 대학의 추천을 받아 원서를 내어 외국어대에서 영어시험을 치르는 절차를 거쳐 최종 선발되었다. 나는 미국을 선호했기 때문에 당시 일리노이대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에 한국인인 존 킴/김창호 교수님에게 연락을 드렸더니 마침 한국에 나와있다 하여 서울에서 만나 인사를 드렸다. 김 교수님께서 미국에 돌아가셔서 바로 초청장을 보내주어 수속을 밟고 '84년 12월 31일에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미국 일리노이대에 도착하여 만난 김창호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미국에 오기가 쉽지 않으므로 여기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주었다. 당시 나는 박사과정을 어디에서 하든 배움의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김 교수님의 강의는 물론이고 관심있는 강좌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열심히 강의에 참석하였다.

그렇게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던 차에 우리 학과의 모 교수가 불미스러운 일로 학교를 퇴직하게 됨에 따라 학과에서는 나에게 귀국하라고 의견을 보내왔다. 당시 나는 영남대를 사직하고 그대로 미국에서 박사학위과정을 다닐 것인가 아니면 서울대 박사과정에 입학을 해 놓았기 때문에 귀국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였다. 그러나 미국까지 와서 한국인 교수에게 지도를 받는 것보다는 평소 존경하고 학덕 높은 권 교수님께 지도를 받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귀국하였다.

나는 귀국과 함께 대학원에 복학하여 박사과정을 시작하였다. 영남대에서 강의를 하고 프로젝트도 수행하면서 1박 2일로 서울대 박사과정 수업에 참여하였다. 한 이년이 지나자 몸에 무리가 와서 돌발성 이명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도 받았다.

마지막 학기에는  종합시험 세 과목을 치렀는데 시험방법이 특이하여 토요일 12시에 문제를 받아 익일 일요일 12시까지 제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험 관련 자료를 두 보자기에 싸서 서울로 갔다. 학교에서 문제를 받음과 동시에 여관 찾느라 봉천동에서 사당동까지 가서 어렵게 구한 여관방에서 밤새도록 시험문제지에 답안을 쓰고 이튿날에 제출하였다. 종합시험은 다행히 합격을 하여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하게 되었다.
 

서울대 환대원 국내교류교수로 박사학위 취득

 나는 박사논문 연구를 위한 시간을 가지기 위해 문교부 국내교류교수로 서울대 환대원에 가게 되었다. 환대원에서는 국내교류교수 조건이 파견대학에서 한 과목 이상 강의를 맡아야 했기 때문에 학과장인 김형국 교수님께서 과목배정을 해주신 기억이 난다. 나는 서울대에서 한 학기를 지내고 한 학기는 대구로 내려와서 논문의 실증연구를 진행하였다.

국내교류교수로 파견 중에 교수님께서는 '이론과 실천 세미나'를 설치하여 매월 1회 토요일 오후에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나는 국내교류교수로 환대원에 근무하는 동안 세미나에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하였고 여기에서 많은 배움의 기회를 가졌다.

나의 학위논문 주제는 "공동생산적 참여과정에 관한 연구"이었다. 교수님의 학위논문 주제가 "계획 주체와 객체의 상호적응과정에 관한 연구"이고, 나의 논문은 계획의 이해당사자가 공동생산자로 참여하는 논문이었다. 논문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중간중간에 교수님을 찾아뵙고 지도를 받아가면서 진행하였다.

논문의 이론적 연구가 마무리 되면서 나는 대구로 내려와 실증연구를 진행하였다. 당시 한국토지공사의 협조를 받아 택지개발사업지구 주민에 관한 설문조사와 조사결과를 분석하여 이론화하였다. 일 년 동안 논문연구에 매진하였다. 심사과정에서 몇몇 후배들과 토론과 수정을 거치면서 논문에 완성도를 높였다. 이때 낙성대에 있는 호암교수회관을 많이 이용하였다.

교수님은 논문심사 통과 후 학위논문을 전문서적으로 출판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출판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크다. 만약 교수님의 말씀대로 출판하였다면 지금의 화두인 '협력적 계획이론'과 한국의 협력적 계획의 이론과 실제에 선도연구로 기여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 이후에 교수님이 주관하는 전공도서에 논문을 싣기도 하고 성곡학술재단의 연
구공모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논문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1973년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하신 우죽 양진니 선생님이 주신 글

 
사제동행의 추억과 교수님의 ‘특별한 기대’

나는 영남대 교수로서 영남대에 근무하면서도 교수님을 잊은 적이 없고 늘 함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문득 교수님의 은덕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영남대 교수가 되고 교수님의 가르침으로 학문적 성장을 이뤘으며 교수님의 제자로 유무형의 프리미엄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할 길이 별로 없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뜻밖에도 교수님을 모실 기회가 여럿 생겨났다.

첫 번째는 내가 주관하는 경북의제21추진협의회 경주행사에 기조 강연자로 교수님을 초청한 것이다. 그날 행사를 마치고 친한 후배 두 사람을 불러 교수님과 저녁 시간을 보내고 불국사 인근 코오롱 호텔에서 일박을 하였다. 두 번째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상징 조형물의 설치를 위한 자문으로 김성경 사무처장의 부탁을 받아 교수님과 당시 국토연구원에 근무하던 김원배 박사를 초청하여 자문행사를 가진 일이다.  나는 김 처장의 영남대 행정학과 선배이자 박사과정의 지도교수이었다. 세  번째는 교수님의 부친이신 서울대 총장을 지낸 권 총장님께서 돌아가시고 얼마되지 않아 교수님 내외분을 자유스런 분위기로 경주에 초청한 일이다. 경주에 여장을 푼 후에 교수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포항의 해변가 식당에서 식사한 기억이 새롭다. 특히 그날 사모님이 크게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좋았다. 나는 그 옛날 학생시절에 저녁 늦게 교수님과 함께 댁을 방문하기도 하고 심지어 잠자기도 하는 등 시건머리 없는 행동으로 사모님께 수고를 많이 끼쳤었다. 네 번째는 내가 행대원 원장 재직 시 최고위 정책 리더과정(이하 최고위)에 교수님을 강사로 초청한 일이다.  특강을 마친 후 교수님을 모시고 식사와 함께 노래도 부르고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가졌다. 특히 현재 대구카톨릭대 학장으로 있는 서경규 교수에게 한 말씀이 생각난다. 당시 서 학장은 감정평가사이면서 내가 지도교수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내가 서 교수를 소개 드렸더니 교수님께서 "내가 할배 교수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교수님과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가졌고 교수님도 좋은 기분을 가지셨다.

다음은 교수님께서 나에게 가진 특별한 기대이다. 언제인가 내가 서울에서 교수님을 만나 식사를 마치고 대구로 오는 도중에 교수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이 교수 영남대 총장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교수님의 이런 말씀이 내가 대학의 경영역량도 가진 것으로 평가한 것과 나에 대한 인정감과 사랑의 말씀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교수님의 그런 말씀을 나의 마음속에 담아서인지 나는 정년 일 년을 앞두고 영남대 총장에 출마하였다. 직선이 아닌 간선이기에 열심히 경영계획서를 작성하여 발표를 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나는 영남대학의 경영계획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대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영남대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한국 사학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진 것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대구경북연구원(이하 대경연) 원장 재임기간의 자문

하나는 내가  학교를 휴직하고 이 년여 기간 동안 대경연 원장으로 일하면서 교수님과의 일을 기억한다. 나는 서울 출장길에 교수님을 모시고 서초동에서 식사한 일이다. 내가 차편으로 교수님 댁에 갔는데 사모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것을 보았다.

다른 하나는 연구원에서 경북도 의뢰로 "새마을국제화재단 설립 타당성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교수님의 자문을 받은 일이다. 연구진의 발표와 교수님과 두세 분의 자문 의견을 들은 후 마무리로 내가 요약정리를 하였다.

회의를 마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교수님께서 나에게 요약정리를 잘했다는 칭찬의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아는 교수님은 칭찬이 인색한 편이다. 나는 십여 년간 공부하면서 직접 칭찬받은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옛말에 "칭찬은 죽은 사람도 깨어나게 한다"는 말이 있다. 칭찬은 인색하기보다 넉넉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칭찬이 너무 지나쳐도 좋지 않다.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좋을 듯 싶다.

 
정년 이후의 만남과 아쉬움

그렇게 교수님을 뵈온 이후 친하게 지내는 동문 몇 사람과 함께 교수님 내외분을 모시고 수차례 식사하는 시간을 더 가졌다. 교수님이 그린 그림 액자를 가져와 나에게 주셨다. 사모님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렸고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한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오랫동안 만나는 기회를 기질 수 없었다.
 

교수님이 그려서 나에게 주신 그림


수년 전에는 사모님이 건강문제로 시술하셨다고 하셨다. 당시 교수님께서 많이 놀라셨을 것이다. 지금은 교수님이 건강문제로 병원에 계신다. 교수님의 쾌유를 간절히 빈다. 나도 나이를 들다 보니 군사부일체로 부모와 스승은 같다고 하나 아무래도 스승과 제자 관계보다는 부모와 자녀 관계가 더 편하고 오히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필자도 정년을 하고 교수님과의 인연을 되돌아보니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서는 몇 가지 아쉬움을 정리해 본다.

하나는 교수직을 시작하면서 계획이론의 지속적 연구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둘은 박사학위 논문으로 작성한 공동생산에 관한 이론을 전문서적으로 출판하라고 하였으나 실천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교수님은 필자에게 늘 관심과 사랑을 주셨다.

나에게 교수님은 세 가지 길을 터주신 진정한 스승이다. 하나는 학문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교수의 길이며 마지막 하나는  교수 인생의 길이다. 그리고 교수님은 나에게 '인간 이성근'이라 부르며 인간적  신뢰와 기대와 희망을 주셨다. 내가 평생 교수 직분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며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수님의 지속적인 가르침과 사랑의 힘이었다고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이 나를 평한 말씀을 타인의 글로 대신한다.

"이성근 교수를 생각하다 : 소중한 지인으로부터 읽는 이성근 교수의 회상록(2021)"에 박찬용 교수가 쓴 글에 교수님이 나를 평한 글을 소개한다. "권태준 원장님께서는 이 교수는 매우 성실하고 논리 정연한 학구파이며 굉장히 노력을 하는 사람이기에 학자로서 장래가 매우 촉망된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 항상 감사합니다. 

 
"인생의 세 가지 길을 터주신 권태준 교수님"에 대한 답글  

선배님, 귀한 글 고맙습니다./   김수현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교수님, 귀한 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도 함께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인권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무부원장

교수님, 감사합니다. 권태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깊이 느껴집니다./ 김두환 박사 LH 연구원

이 교수님 감사합니다. 이 내용을 저희 선후배님들과 공유하였습니다./
박세훈 박사 국토연구원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이 정말 특별하시네요. 슬픈 자리였지만 오랫만에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김륜희 박사 LH 연구원

평생을 은사를 모시고 살 수 있다면 정말 '행운'이겠지요. 더구나 그 은사님께서 아직 '살아계시다면' 더욱 큰 행운이겠지요. 평생을 잊지 않고 사셨으니까 그런 관계가 이루어졌겠지만, 어쨌든 행운이구나 하는 생각이 짙게 듭니다. 그렇게 사회활동을 하도록 격려하셔서, 교수님께서 많은 활동을 하셨구나 싶습니다. 또 교수님의 결혼이야기도 재미있지만, 특히 '사회학습과정'이라는 주례사도 많이 기억됩니다./
김정숙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명예교수회  편집위원장

"인생의 세 가지 길을 터주신 권태준 교수님"의 글을 경건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강의시간에 권태준 원장님 얘기도 자주하셨지요. 권 교수님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이구석 영남대 지역개발학과(79학번)/ 전 서울특별시청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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