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와 나비가 전해 준 제주의 교훈: 절물오름의 세신과 사려니숲길의 공연"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제주에서의 유유자적한 삶
사 년 전 필자는 서귀포 혁신도시에 거처를 정하고, 평생을 경기도에서 교직에 헌신하다 은퇴 후 서울에 집을 둔 김 선생과 함께 자연 속 일상을 누리게 되었다. 도시의 분주한 생활과 달리, 제주는 시간의 흐름마저 느긋하게 만드는 땅이다. 맑은 공기와 바람결에 스치는 파도 소리, 산과 숲의 상큼한 향기가 뒤섞여 마음을 새롭게 정화해 주었다.
이 글은 바로 그 유유자적한 제주의 숲길에서 얻은 두 가지 인상 깊은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절물오름에서 본 새들의 질서 있는 세신(洗身)
절물오름의 생태와 유래
절물오름은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대표적인 오름으로, 이름 그대로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곳’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속칭 '절에서 나는 물'이라 부른다. 옛날 제주 사람들에게 절물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자 휴식의 공간이었다. 숲이 울창한 오름은 사계절마다 빛깔을 달리하며, 탐방객에게 자연의 품으로 들어서는 길을 열어 준다.
샘터에서 새들이 보여 준 질서
필자는 산행을 마치고 목을 축이기 위해 절물 샘터로 향했다. 샘 옆에는 작은 연못과 대나무 대롱을 통해 물이 떨어지는 자리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곳은 새들의 세신장이었다. 참새와 박새들이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물줄기 아래에서 뒤꽁무니를 씻은 뒤 날개를 퍼덕이며 물기를 털어내는 모습이 질서 정연했다.
그 장면은 마치 인간 사회의 규율과 배려를 압축한 듯했다. 작은 생명들이 질서를 지키며 함께 공간을 나누는 모습은 우리 인간에게도 나눔과 공존의 덕목을 일깨워 주었다.
사려니숲길에서 본 나비들의 공연(公演)
사려니숲길의 이름과 특징
사려니숲길은 제주시 조천읍과 서귀포시 남원읍을 잇는 울창한 원시림 속 탐방로다. ‘사려니’는 옛 제주어로 ‘신성한 곳’을 뜻하며, 예로부터 치유와 안식의 숲으로 불려 왔다. 이곳에는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윽한 향과 고요함이 마음을 감싼다.
비 온 뒤의 나비들의 공연
비가 갠 뒤 숲길을 걷던 중, 하천 위를 가로지르는 평지보다 높은 데크에 이르렀을 때 눈앞에 뜻밖의 장관이 펼쳐졌다. 수십 마리의 나비가 하천변 모래 위에서 날개를 펼쳐 햇볕을 받으며 집단으로 날개를 털고 있었다.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는 듯 공간을 나누고, 햇살을 함께 공유하며 날개를 말리는 모습은 하나의 공연과도 같았다.
그 장면은 단순한 곤충의 생존 행위가 아니었다. 자연이 오랫동안 길러낸 공연의 무대였고, 필자의 눈에는 작은 존재들의 화합이 장엄한 오페라처럼 다가왔다. 그날의 나비들은 숲길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겨 지금도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자연이 주는 성찰과 공존의 교훈
절물오름의 새들은 질서와 배려를, 사려니숲길의 나비들은 조화와 화합을 보여 주었다. 인간이 문명 속에서 잊은 가치가 오히려 작은 생명에게는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장자"에 “큰 스승은 말이 아니라 자연이다(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라는 구절이 있듯, 자연은 언제나 무언으로 가르침을 준다.
이 두 경험은 필자에게 ‘유유자적’이란 단순한 한가로움이 아니라, 자연을 벗 삼아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삶의 태도임을 일깨워 주었다.
새와 나비가 남긴 제주 일상의 가르침
제주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작은 생명들의 지혜를 배우게 하는 스승이다. 절물오름의 새들이 보여 준 세신의 질서, 사려니숲길의 나비들이 남긴 공연의 울림은 인간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삶의 교훈이다.
결국 ‘유유자적’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그 안에서 배우고 깨닫는 태도일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도 제주의 숲과 오름을 걸으며, 작은 생명들이 전해 주는 가르침을 글로 남기고자 한다. 그것이 곧 자연이 내게 허락한 제2의 교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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