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도시를 통해 정의를 세운 1세대 도시계획가, 고(故) 권태준 교수님을 생각하다"

국립도시건축박물관 개관 전: 삶을 짓다: 한국 도시건축 (1950–2010)을 앞두고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도시계획가의 초상: 사실구시와 도공칠덕의 길

고(故) 권태준 교수님을 회상할 때, 필자는 가장 먼저 “사실구시(四實求是)의 도시계획가”였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교수님께 도시계획은 생각하고(思), 쓰고(書), 가르치고(敎), 실천하는(實) 과정 속에서 진실을 찾는 지적 윤리적 여정이었다. 이 네 가지 실천은 서로 분리된 행위가 아니라, 학문과 교육, 정책과 실천이 맞물려 움직이는 하나의 통합된 삶의 궤적이었다.

동시에 교수님은 전문성, 공공성, 정의감, 책임성, 청렴, 절제, 그리고 자존감을 아우르는 일곱 덕목, 곧 도공칠덕(都公七德)을 품고 살아낸 분이었다. 교수님의 학문과 실천은 도시계획이 단순한 제도나 기술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한 전문가의 본질적 질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도무사행(都無四行)’의 시대, 백지 위에 길을 낸 개척 세대

1960–70년대,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파도 속에 있었다. 그러나 도시계획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그 시기에, 정작 현장에는 법과 제도도, 이론도, 전문가도, 교육기관도 부족했던 ‘도무사행(都無四行)’의 시대이었다.

이와 같은 도시계획의 여명과 계명의 시대에 1세대 도시계획가들은 수많은 실무의 수행과 계획들을 세워가며, 동시에 법과 제도, 교육기관의 설립과 인재양성, 그리고 전문영역을 처음부터 정립해 나가야 했다. 그 시대에 고 권태준 교수님도 함께 계셨다.

법학에서 도시계획으로: 한국형 절차적 계획이론의 탄생

안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신 교수님은 미국 서던메쏘디스트대와 예일대에서 법학을 수학한 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비교법과 행정법을 가르치는 정통 법학자로 출발하셨다.

그러나 1967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 설치가 논의되면서 교수님은 도시계획 분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으며 법학과 정책학, 계획학을 연결하는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상호적응적 계획이론(Co-adaptive Planning)이었다.

이는 완성된 청사진을 전제하는 계획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과 다양한 행위자 간 피드백을 토대로 단계적 조정과 학습을 전제로 한 절차적·참여형 계획 이론으로, 오늘날 한국 도시계획의 중요한 지적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도시를 향한 ‘행동하는 공적 지식인’

교수님의 도시·국토에 대한 인식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도시는 ‘잘 사는 도시’가 아니라, ‘잘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교수님은 사회정의와 환경정의, 그리고 분배정의를 도시계획 담론 속에 일찍이 접목했다. 『분배의 의식화 시대』,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 등에서 수도권 집중과 공간 불평등 문제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도시계획을 개발 이익의 도구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공공제도로 규정했다.

또한 1992년 리우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 학술자문위원장으로 참여한 이후, 도시·국토계획의 담론 속에 지속가능성과 환경정의를 체계적으로 도입했다. 교수님은 학자로 머물지 않고 경실련, 감사원, UNESCO 한국위원회, 중앙·국가계획위원회 등에서 정책과 제도 개선을 이끈 행동하는 공적 지식인이었다.

교육자이자 선비형 대학자로 남은 스승

천생 교육자이신 고 권태준 교수님은 우리나라 도시·지역·환경계획 교육의 제도적 기틀을 세운 분이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와 환경조경학과의 설립과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셨다. 또한 지방대학 교수요원 양성과 정착 제도를 도입해 학문 생태계의 지역균형에도 힘썼다.

교수님은 학문에 한없이 엄격했지만, 사람을 향한 마음은 깊고 따뜻했다. 특히 생전 교수님께서 필자에게 남기신 한 말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학문 이전에 먼저, 인간 이성근이어야 한다.”

그 말씀은 필자에게 학자로 사는 길이 곧 사람됨을 닦는 길임을 가르쳐주는 조용한 은유이었다.

고 권태준 교수님으로부터 다시 이어져야 할 질문: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교수님의 삶을 네 갈래로 정리해 본다.

• 도시계획·환경교육의 개척자
• 절차적·상호적응적 계획이론의 창시자
• 정의로운 도시를 꿈꾼 행동하는 공적 지식인
• 청렴과 절제를 지킨 선비형 대학자


사실구시(四實求是)의 정신과 도공칠덕(都公七德)은 오늘의 도시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나침반이다.
개발과 효율의 논리가 다시금 공동체의 정신과 정체성을 밀어내는 시대에, 필자는 스승의 질문을 다시 되새겨 본다.

“도시는 누구를 위해, 어디를 향해 존재하는가?”

그 질문에 답을 이어가는 일이 바로, 필자가 교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깊은 예가 될 것이다.

사실구시와 도공칠덕의 길을 오늘에 이어 가기 위하여

사실구시의 계획이론가이자 도공칠덕을 실천한 1세대 도시계획가 고 권태준 교수님의 발자취는 기록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쓰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오늘 이 도시와 이 땅 위에서 계속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