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의 길을 다시 묻다: 제주형 지방행정체제 개편과 지속가능한 제도의 설계”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행정체제’를 넘어 ‘제주의 길’을 묻다
필자는 도시 및 지역계획학을 전공하고 평생 대학에서 지역개발학을 연구하고 가르쳐 왔다. 또한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 소속 자문기구에서 지방이양, 지방분권 촉진, 지방행정체제 개편, 지방자치발전 관련 업무에 참여하였다. 아울러 행정자치부 지방행정혁신 컨설팅단 단장 등을 맡아 국내외 정책 연구와 자문 활동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학문적·정책적 경험은 제도가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1)
특히 지난 4년여 동안 서귀포 혁신도시에 거주하면서 제주 사회의 행정체제를 생활 속에서 체감하게 되었다. 최근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을 둘러싼 정책 홍보와 논쟁을 지켜보며 필자는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과연 행정체제를 논의하고 있는가? 아니면 제주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가?
행정체제 개편은 단순한 조직 개편이나 권한 배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제주라는 공간에서 어떤 삶의 구조를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제도를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제주 사회가 함께 걸어갈 ‘길’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제주형 행정체제의 형성과 구조: 단층제 실험의 의미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의 출범은 기존 기초자치단체를 폐지하고 행정시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대한민국 지방행정사에서 보기 드문 ‘권한 집중형 단층제’ 실험을 시도한 사건이었다.2)
이 체제는 의사결정 절차를 단순화하고 정책 추진 속도를 높이며, 광역 단위의 통합적 계획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행정 권한 집중은 주민과 행정 간의 거리를 확대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지역별 생활 현장의 요구와 다양한 공간적 특성이 정책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다는 한계도 드러났다.
결국 제주형 단층제는 효율성과 대표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작동해 온 하나의 제도 실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개편 논의는 이 실험을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개편의 추진 경과와 현재의 좌표: 반복되는 시도와 좌절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 논의는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어 왔다. 역대 도정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개편을 추진해 왔으며, 최근에는 숙의형 공론화 과정을 통해 3개 기초자치단체 설치안이 제시되기도 하였다.3)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중앙정부 승인, 주민투표 요건, 정치적 이해관계 등 복합적 변수 속에서 최종 제도화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핵심 문제는 공론화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적 합의가 실제 정책 결정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단순한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신뢰의 문제이다. 공론이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는 어떠한 개편안도 지속적인 추진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개편의 실패 자체보다 실패가 반복되는 구조를 먼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왜 개편은 지지부진한가?: 갈등과 제약의 구조
행정체제 개편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단일 요인으로 설명될 수 없다. 도민 공감대 부족과 지역 간 이해 충돌, 특히 제주시 분할 문제에서 나타나는 공간 정체성의 혼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중앙정부 승인과 주민투표라는 제도적 절차가 더해진다. 또한 행정비용 증가 우려와 효율성 논리, 현행 ‘직선 도지사 중심 체제’와 ‘분권형 체제’ 간의 정치적 논쟁도 맞물려 있다.4)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한 찬반 논쟁이 아니다. 권한과 책임의 배분, 공간과 공동체의 정체성, 제도 설계 방식이 서로 얽혀 있는 구조적 문제이다. 해결 역시 이러한 구조적 관점 속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의 기준: 미래를 읽는 다섯 가지 좌표
지속가능한 제주라는 관점에서 행정체제 개편은 단순한 구조 조정이 아니라 제주 사회의 미래를 설계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첫째, 저출생·고령화·지역소멸에 대응할 수 있는 행정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5)
둘째, 제주 자연의 본질인 연제(然濟)와 이를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제연(濟然)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자연의 자기조직적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사회적 관리와 조정 기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셋째, 제인(濟人)의 관점에서 도민 삶의 질과 공동체 지속성이 핵심 기준이 되어야 한다. 행정체제는 주민을 위한 삶의 기반이어야 하며, 주민 참여와 생활 접근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넷째, 제문(濟文)의 관점에서 제주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이 정책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제주다움이 행정의 언어와 정책 속에서 구현될 때 지역의 지속가능성도 강화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도(濟道)는 이러한 요소들을 통합하여 지속가능한 길을 설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좌표는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을 단순한 구조 논쟁에서 미래 설계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기준이 된다.
행정체제 개편의 방향: ‘구조 개편’에서 ‘운영 혁신’으로
이제 행정체제 개편은 자치시 도입 여부나 직선시장제와 같은 구조적 선택을 넘어,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행정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기능을 재설계하며, 서비스의 질과 비용 효율성 사이의 균형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형평성과 포용성을 중심으로 한 행정 운영이 이루어져야 한다.6)
결국 행정체제의 성패는 제도의 형태 자체보다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구조 개편은 수단일 뿐이며, 궁극적 목적은 도민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있다.
협업적 거버넌스의 설계: 제도를 움직이는 방식
제도는 구조 이전에 관계라는 점에서, 행정체제 개편은 도와 시, 그리고 주민 간 협력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공공과 민간,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협업적 거버넌스는 필수적 요소가 되고 있다.7) 특히 숙의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참여 제도의 재설계는 공론과 정책 간 괴리를 줄이는 핵심 수단이다.
이는 단순히 참여를 확대하는 차원을 넘어 행정의 역할을 공급자 중심에서 조정자와 촉진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 전환이 이루어질 때 제도는 비로소 살아 움직이게 된다.
전환의 전략: 실험과 단계적 접근의 필요성
행정체제 개편은 단번에 완성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실험과 학습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시범지역을 설정하여 다양한 모델을 적용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확대해 나가는 방식은 정책 실패 비용을 줄이고 제도의 적응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8)
제주가 특별자치도라는 제도 실험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듯이, 앞으로의 행정체제 개편 역시 ‘실험하는 제주’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단계적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맺음말
제도는 결국 ‘길’이다
행정체제 개편은 단순히 권한을 나누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구조를 재구성하는 문제이다.
제주가 선택해야 할 것은 특정한 제도 형태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다. 연제에서 제연으로, 제인에서 제문으로 이어지고 다시 제도(濟道)로 귀결되는 흐름 속에서 제주는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제도는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걸어가며 형성되는 과정이다. 결국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은 하나의 제도 개혁이 아니라 제주 사회가 함께 걸어가는 길의 재설계이다. 그 길은 제주 사람들의 삶 속에서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주
1) 대통령자문 지방이양추진위원회·지방분권촉진위원회 관련 자료.
2)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3)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 공론화위원회 자료 및 제주특별자치도 발표자료.
4]))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체제 개편 관련 정책자료.
5) 통계청, 「장래인구추계」 및 지역소멸 관련 연구자료.
6)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지방행정체제 및 지방분권 관련 연구보고서.
7) 숙의민주주의 및 협업적 거버넌스 관련 행정학 연구자료.
8) 정책실험(policy experiment) 및 단계적 제도개혁 관련 지역개발학 연구자료.
참고자료
ㆍ제주특별자치도,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 관련 정책자료』.
ㆍ제주형 행정체제 개편 공론화위원회, 『공론화 조사 및 권고안 자료』.
ㆍ행정안전부, 『지방행정체제 개편 관련 정책보고서』.
ㆍ한국지방행정연구원, 『지방분권과 지방행정체제 개편 연구』.
ㆍ통계청, 『장래인구추계』.
ㆍ대통령소속 지방분권촉진위원회 자료집.
ㆍ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정책자료집.
ㆍ협업적 거버넌스 및 숙의민주주의 관련 행정학·지역개발학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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