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래시장: 제문(濟文)으로 읽는 시장의 기억과 현재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시장은 왜 삶의 기억으로 남는가?
사람과 시간이 만나는 곳, 서귀포
필자의 어린 시절은 자연생태계가 살아 숨 쉬던 고향 창녕 광산늪 인근 농촌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의 삶은 자연과 인간이 맞닿아 있는 전형적인 생활세계였다.
마을 주민들의 생필품은 유어면 소재지의 오일장에서 마련되었다. 따라서 오일장은 단순한 거래 공간이 아니었다. 인근 여러 면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동체의 장이었다.
장날이면 시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파는 데 그치지 않았다. 서로 안부를 묻고 소식을 나누며 관계를 확인했다. 시장은 거래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람 냄새가 살아 있는 생활의 현장이었다.
이러한 기억은 필자에게 시장을 단순한 경제 공간이 아니라 삶의 리듬과 공동체의 온기가 살아 있는 문화적 원형으로 각인시켰다.
중심지 이론과 5일장: 시간으로 조직된 시장의 질서
경제지리학의 중심지 이론¹)은 재화의 도달 범위(range)와 최소 요구치(threshold) 개념을 통해 시장의 형성과 운영 원리를 설명한다.
인구 밀도가 낮은 농촌에서는 상설시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일정한 주기로 장을 열어 수요를 집중시키는 방식이 필요했다. 그 결과 5일장은 시간적으로 분산된 중심지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보부상과 이동 상인들은 여러 장터를 순회하며 거래를 이어 갔다. 이를 통해 공간적 한계수요를 극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일장은 단순한 상업 기능을 넘어 지역 간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장으로 작동하였다.
동시에 시장은 정보와 문화가 함께 교류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5일장은 ‘시간이 조직한 시장’이자 ‘공동체가 유지해 온 생활경제의 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제문(濟文)과 제인(濟人)의 관점에서 본 서귀포 시장의 변천
서귀포의 재래시장은 자연의 제주인 연제(然濟)와 인간의 제주인 제인(濟人)이 만나 형성한 생활문화의 결과물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 공간을 넘어 사람의 삶과 관계, 기억과 정체성이 축적되는 제문(濟文)의 장이다.
오일장에서 상설시장으로 이어지는 변화는 교통 발달, 인구 구조 변화, 관광산업 확대와 맞물려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장은 지금도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밀착된 생활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동시에 외부 방문객에게는 제주 문화를 체험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서귀포 재래시장은 제인과 제문이 교차하는 살아 있는 문화 플랫폼이라 할 수 있다.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일상과 관광이 만나는 현대적 시장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은 상설시장과 관광지의 기능이 결합된 공간이다. 필자는 방어철마다 지인들과 함께 이곳을 찾곤 했다. 시장의 횟집에서 방어를 구입하고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시장의 활기를 체감해 왔다.
시장 내부에는 작은 개울 형태의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다양한 먹거리와 저녁 야시장은 시장의 활력을 더욱 높여 준다. 이는 단순한 소비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청장년층과 관광객들로 붐비는 야시장은 젊은 열정과 사람 사는 냄새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그 풍경은 필자의 기억 속 농촌 오일장과 겹쳐지며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매일올레시장은 전통시장과 현대 관광시장이 결합된 제문적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서귀포 향토오일시장: 생활경제와 공동체의 기반
서귀포 향토오일시장은 4일과 9일에 열리는 전통적인 5일장이다. 약 500여 개 이상의 점포가 참여하는 중형 규모의 시장이다.
이곳에는 농업인과 원주민, 이주민 등 다양한 생활 주체들이 모인다. 이들은 일상에 필요한 농산물과 생활용품을 거래하며 생활경제를 이어 간다.
필자 또한 한림 금능의 근석농장에서 텃밭농사를 준비하며 이 시장을 자주 찾았다. 모종과 고구마 등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시장의 역할을 몸소 체감하였다.
이 시장은 단순한 구매 공간이 아니다. 생산과 소비가 직접 연결되는 생활경제의 현장이며, 동시에 지역 공동체가 유지되는 기반이다. 이러한 점은 오일장이 지금도 제인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구조임을 보여 준다.
기타 오일시장과 지역 네트워크: 확장되는 생활권
서귀포 인근의 중문오일장과 근석농장 가까이에 있는 한림오일장 등 다양한 오일시장은 각기 다른 장날과 기능을 지닌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며 지역 간 생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필자는 모종 구입 등을 위해 여러 시장을 방문하면서 오일장의 기능을 직접 확인하였다. 오일장은 특정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권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구조는 과거 보부상들의 순회 활동과 닮아 있다. 다만 현대적으로 재구성된 형태라 할 수 있다. 결국 제주 재래시장은 개별 시장의 집합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따라 연결된 하나의 생활 네트워크로 이해될 수 있다.
제도(濟道)의 관점에서 본 서귀포 재래시장의 미래
오늘날 서귀포 재래시장은 전통시장특별법에 따른 시설 현대화와 관광 자원화 정책 속에서 변화하고 있다. 상설시장과 오일장이 공존하는 구조 속에서 각자의 기능을 새롭게 정립해 가고 있다.
매일올레시장은 관광과 소비 중심의 문화시장으로 기능한다. 반면 향토오일시장은 생활경제 중심의 전통시장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러한 이중 구조를 단절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로 발전시키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주민의 삶과 관광객의 경험을 함께 고려하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또한 시장이 지닌 공동체적 기능과 문화적 가치를 유지·확장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도 요구된다. 결국 서귀포 재래시장의 미래는 단순한 경제 공간을 넘어 ‘사람과 문화가 지속되는 경로’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맺음말
시장은 사람의 온기를 기억한다
서귀포의 재래시장은 필자에게 어린 시절 농촌 오일장의 기억과 현재의 삶을 이어 주는 시간의 다리이다. 시장은 지금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삶과 삶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제문(濟文)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단순한 전통의 보존이 아니다. 살아 있는 문화의 지속이다. 시장은 변화 속에서도 사람의 온기와 공동체의 기억을 품은 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서귀포 재래시장은 제주가 지켜야 할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용어해설
1) 중심지이론(Central Place Theory)의 핵심 개념
재화의 도달 범위(range)
재화의 도달 범위(range)는 소비자가 특정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하기 위해 이동하려는 최대 거리를 의미한다. 이는 이동 비용과 시간 부담, 소비자의 이동 의지 등에 따라 달라진다.
2) 최소 요구치(threshold)
최소 요구치(threshold)는 특정 재화나 서비스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수요 규모를 의미한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객 수와 구매력이 확보되어야 시장 기능이 지속될 수 있다.
3) 위계(hierarchy)
위계(hierarchy)는 재화의 도달 범위와 최소 요구치의 차이에 따라 중심지의 규모와 기능이 단계적으로 구분되는 공간 질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고차 중심지는 넓은 범위와 높은 최소 요구치를 가지며, 저차 중심지는 그 반대의 특성을 지닌다.
참고자료
ㆍ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일장」
ㆍ국토교통부 ·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관광정보』
ㆍ중소벤처기업부,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 관련 자료
ㆍWalter Christaller(1933), Central Place Theory
ㆍ제주특별자치도, 전통시장 및 오일장 운영 자료
ㆍ서귀포시청, 「서귀포 향토오일시장 및 매일올레시장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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