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茶)로 길을 만든다: 서광 오설록에서 읽는 지속가능한 제주 제도의 실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광 오설록의 개요: 길 위에서 만나는 공간의 의미
필자는 서귀포 혁신도시에 거주하며 일주일에 한두 차례 한림 금능의 근석농장을 오간다. 그 길목에 자연스럽게 자리한 곳이 바로 서광 오설록이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늘 다른 경로를 안내하지만, 필자의 발걸음은 언제나 이 길로 향한다. 길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삶의 리듬과 사유의 방향을 이끄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 길 위에서 마주하는 오설록은 언제나 많은 방문객으로 붐비며, 연중 내내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국내외 관광객의 흐름은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목적지이자 경로’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설록은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에 위치해 있다. 과거 황무지에 가까웠던 돌밭을 개간해 조성한 유기농 차밭을 중심으로 형성된 복합 문화 공간이다. 1979년 고(故) 서성환 회장의 차 문화 부흥 의지에서 출발하여 약 100만 평 규모의 차밭과 티뮤지엄을 기반으로 생산·전시·체험이 결합된 구조를 갖추었다.
오늘날 오설록은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곳은 단순한 장소를 넘어 자연과 인간, 그리고 기업이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관계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연제(然濟) 차원의 오설록: 자연이 열어준 가능성
오설록의 출발점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제주 특유의 화산 토양과 해풍, 그리고 한라산을 넘나드는 구름과 안개는 차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특히 안개는 자연적인 차광 효과를 형성하여 찻잎의 향과 깊이를 더해 준다. 돌이 많아 농업에 부적합했던 토지가 오히려 차 재배에 적합한 환경으로 전환된 점은 제주 자연이 지닌 역설적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이는 ‘연제’, 즉 자연 그 자체의 질서가 지닌 창조적 힘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은 스스로 길을 열고, 인간은 그 길을 따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설록은 자연을 극복한 공간이 아니라 자연이 허용한 가능성 위에 형성된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연(濟然) 차원의 오설록: 조화롭게 설계된 자연
오설록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개입을 통해 조성된 ‘관리된 자연’이다. 그러나 그 개입은 자연을 훼손하기보다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차밭의 배치와 경관 설계, 유기농 재배 방식은 모두 자연과의 조화를 전제로 한다. 이는 자연을 단순한 자원이 아닌 함께 유지해야 할 질서로 인식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지역개발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오설록은 외발적 발전(exogenous development)과 내발적 발전(endogenous development)이 결합된 통합적 발전(integrated development)의 대표적 사례이다. 외부 자본과 기획이 지역의 자연조건과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설록은 단순한 개발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균형 속에서 이루어진 제연적 발전의 사례로 평가된다.
제인(濟人) 차원의 오설록: 삶과 관계가 머무는 공간
오설록은 사람들의 삶과 취향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필자는 오랜 시간 차를 즐겨 왔지만 가족은 커피를 선호해 왔고, 정년 이후에는 차와 커피를 함께 나누는 생활로 변화하였다. 이는 단순한 기호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가족이 서귀포를 찾으면 근석농장을 오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오설록에 들르게 된다. 이곳은 단순한 방문지를 넘어 가족 간의 시간을 나누고 서로의 취향을 함께 하는 공간이 된다. 또한 지인들과 함께 찾은 자리에서 녹차밭 사이에 핀 녹차꽃을 마주한 경험은 찻잎과 향에 머물던 인식을 꽃으로 확장시키며 차에 대한 이해를 한층 깊게 하였다. 이처럼 오설록은 생산의 공간을 넘어 관계와 경험, 감성이 축적되는 삶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제문(濟文) 차원의 오설록: 차 문화의 현대적 확장
오설록은 차를 단순한 음료의 차원을 넘어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간다. 티뮤지엄은 전통 차 문화와 세계 차 문화를 함께 소개하며, 차를 경험과 학습의 대상으로 재구성한다. 녹차를 활용한 디저트와 차 시음, 다도 체험 프로그램은 전통 차 문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문화적 형식이다. 이는 차를 일상의 소비재에서 문화적 콘텐츠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녹차꽃을 마주한 경험은 이 공간이 소비의 장소를 넘어 감상과 사유의 장소임을 보여준다. 이제 차는 단순히 마시는 대상이 아니라 보고 느끼며 의미를 확장하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점에서 오설록은 제주의 자연을 매개로 문화적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는 ‘제문’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제도(濟道) 차원의 오설록: 지속가능한 발전의 경로
오설록은 생산·가공·관광·체험이 결합된 6차 산업 모델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 의미는 산업 구조를 넘어 자연–관리–인간–문화가 통합된 하나의 제도적 경로, 즉 지속가능한 길(濟道)의 구현에 있다. 이 모델이 주는 정책적 시사점은 자연 기반 지역개발이 보존과 활용의 균형 위에서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외부 자본과 지역 자원의 결합은 상생 구조로 이루어져야 하며, 생산 중심에서 문화·체험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지역 주민과의 연계 및 이익 공유 체계를 강화하고, 지역별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제도 설계가 요구된다. 이러한 점에서 오설록은 완결된 모델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완되고 진화해야 할 열린 제도라 할 수 있다.
지속가능성의 과제: 균형과 확장의 문제
오설록의 성과는 분명하다. 그러나 관광객 증가에 따른 환경 부담, 기업 중심 운영 구조의 한계, 지역 환원성 문제 등은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모델을 제주 전역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토 역시 중요하다. 지역마다 상이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 적용은 오히려 지속가능성을 저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오설록은 하나의 정답이라기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출발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맺음말
차로 길을 만든다는 의미
차는 자연과 시간,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오설록은 그 차 한 잔을 통해 하나의 길을 만들어냈다. 그 길은 소비의 길이 아니라 공존의 길이며, 단기적 개발이 아닌 지속을 지향하는 길이다. 이제 제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자연을 앞세우고 인간이 그 길을 따르는 데 있다. 또한 관리하되 훼손하지 않고, 문화를 통해 확장하며, 공동체와 함께 지속되는 길이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제도는 선언에서 출발하지만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 제주는 더 이상 길을 묻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 출발은 차 한 잔에서 시작될 수 있다.
참고자료
ㆍ 오설록 공식 홈페이지 및 브랜드 자료
• 오설록 티뮤지엄 전시 자료
• 농촌융복합산업(6차 산업) 정책 자료
• 제주 중산간 지역 생태 및 차 재배 환경 연구
• 지역개발학 관련 이론(내발적·외발적 발전 모델)



사진. 이성근. 오설록 차밭의 녹차꽃. 2026.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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