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밭을 바꾸고 삶을 세우다:
남원 서귀다원에서 읽는 제주 사람 ‘제인(濟人)’의 경영철학"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한 다원’을 통해 ‘제주 사람’을 읽다
제주의 공간은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 의미는 언제나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선택과 실천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점에서 서귀포 남원 지역의 한 다원, 이른바 ‘서귀다원’은 단순한 농업 경영체를 넘어 제주 사람의 삶의 방식이 체화된 구조로 읽힌다.
필자는 서귀포 혁신도시에 거주하며 다양한 현장을 접해 왔다. 그 가운데 서귀다원은 감귤 중심의 전통 농업 구조를 넘어 차(茶)라는 새로운 선택을 통해 삶의 방향을 재구성한 사례로 주목된다.
이 글은 서귀다원을 하나의 사례로 삼아, 자연 위에서 형성된 생업이 어떻게 관리되고, 그 과정에서 인간형이 형성되며, 다시 문화와 제도로 확장되는지를 ‘연제–제연–제인–제문–제도’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연제(然濟)의 기반: 감귤밭이라는 자연 위의 삶
제주의 농업은 오랜 시간 자연에 대한 순응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그 중심에는 감귤이 있다. 감귤은 제주의 기후와 토양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생업 기반이다.
감귤밭은 단순한 재배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바람과 돌, 물과 햇빛이 결합된 자연의 결과이며, 그 위에서 살아온 제주인의 생존 방식이 축적된 공간이다.
다시 말해 감귤밭은 ‘주어진 자연’ 속에서 형성된 삶의 최소 단위이다. 이 점에서 감귤밭은 자연의 질서가 그대로 작동하는 상태, 곧 연제(然濟)를 가장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제연(濟然)의 전환: 감귤밭을 차밭으로 바꾸다
서귀다원의 출발은 감귤밭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것을 전환하는 선택에서 시작되었다.
이 전환의 계기는 외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의 차 재배와 가공, 유통을 직접 체험한 경험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농업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감귤밭을 차밭으로 바꾸는 일은 단순한 작목 변경이 아니다. 토양과 경관, 노동 방식과 수익 구조를 함께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나아가 생산과 가공, 체험과 판매를 결합하는 이른바 6차 산업화로 확장된다.
서귀다원은 이러한 전환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이다. 자연 위의 삶이 관리와 설계를 통해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제연(濟然)의 의미이다.
제인(濟人)의 형성: 가족 경영과 역할 분담의 윤리
서귀다원의 핵심은 농업 방식의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가 만들어내는 인간형에 있다.
이곳은 가족 경영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부부와 자녀가 각자의 역할을 나누고 생산·가공·판매·체험을 분담한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책임을 전제로 한 조직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원칙은 ‘무노동 무임금’이다. 이는 온정 중심의 가족관계를 넘어 노동과 보상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윤리로 작동한다.
이처럼 가족은 더 이상 단순한 혈연 공동체가 아니다. 하나의 경영 주체로 전환된다. 역할은 나뉘되 목적은 공유되며, 협업은 감정이 아니라 원칙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인(濟人)을 확인한다. 자연과 사회 속에서 형성된 인간형이 삶의 실천을 통해 구체화되는 모습이다.
제문(濟文)의 내면: 삶의 철학과 세대 윤리
이와 같은 경영 방식은 경제적 선택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삶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 핵심에는 ‘재산을 미리 나누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이는 단순한 재산 관리가 아니라 노동과 책임을 통해 삶을 완성해야 한다는 윤리적 인식에 기반한다.
이러한 사고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노동을 통해 가치가 창출된다는 인식은 고전 경제학에서 현대 경영학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강조되어 왔다.
서귀다원에서는 이러한 원리가 가족 내부의 규범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 규범은 반복되는 실천을 통해 문화적 질서로 축적된다.
이처럼 삶의 방식이 의미와 기억으로 축적될 때, 그것은 제문(濟文), 곧 문화가 된다.
제도(濟道)로의 확장: 지속가능한 제주 농업의 길
서귀다원의 또 다른 특징은 삶의 방식이 제도적 장치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공동명의 등기와 같은 자산 관리 방식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법적 절차를 넘어 자산의 분할과 외부 유출을 방지하는 구조로 기능한다. 가족 내부의 합의를 제도로 고정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구조는 외부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지역 내부에서 발전을 이루는 내발적 발전 모델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서귀다원의 사례는 제주 농업의 미래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생산 중심의 농업을 넘어 경영·문화·제도가 결합된 구조로 전환될 때 지속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맺음말
한 가족의 선택이 ‘제주의 길’이 되다
서귀다원은 하나의 농장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 위에서 선택을 통해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 속에서 인간형을 형성하며, 다시 그것을 문화와 제도로 확장해 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연제에서 제연으로, 제연에서 제인으로, 제인에서 제문과 제도로’ 이어지는 흐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서귀다원이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한 가족의 선택이 경영이 되고, 그 경영이 삶으로 이어지며, 그 삶이 하나의 길로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길을 만든다’는 제주사색의 핵심이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묻고 답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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