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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꽃이 일러준 세 가지 사색: 산수유, 산수(山水), 그리고 수유(雖柔)의 길"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가산산성 산책길에서 만난 이른 봄의 신호, 산수유

오늘 우리 부부는 국립공원 팔공산에 자리한 가산산성 산책길을 오랜만에 찾았다. 이른 봄이지만 쾌청한 날씨 덕분에 걷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다 보니 숨이 차고 이마에 땀이 맺혀, 중간중간 멈춰 서서 물을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 길목마다 드문드문 피어 있는 노란 산수유 꽃망울이 시선을 붙잡았고, 그로 인해 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결국 정자에서 한참을 쉰 뒤 가족의 제안으로 하산을 선택했지만, 아쉬움이 남아 잠시 혼자 더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산수유를 사진으로 담으며 이 작은 꽃이 주는 의미를 곱씹게 되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꽃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산수유(山茱萸), 기다림과 지속의 시간을 품은 꽃

산수유는 잎보다 먼저 노란 꽃을 피워 올리며 봄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이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계절에 가장 먼저 피어나, 마치 희망의 전령처럼 우리 곁에 다가온다. 한 달가량 변함없이 노란빛을 유지하다가, 가을에는 붉은 열매로 이어지고 다시 겨울까지 매달리는 긴 시간의 흐름을 통해 ‘영원불멸의 사랑’과 ‘변치 않는 지속성’을 상징한다.

이는 단순한 식물의 생태를 넘어, 기다림 끝에 맺어지는 결실과 변함없는 마음의 가치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산수유가 화려함을 앞세우기보다 무리를 이루어 은은하게 빛나는 모습은,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일깨워 준다.

산수(山水)의 사유, 자연 속에서 배우는 삶의 균형

공자는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이라 하여, 지혜로운 이는 물을 즐기고 어진 이는 산을 즐긴다고 하였다. 이 가르침은 자연을 단순한 경관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비추는 거울로 보게 한다.

물은 막힘없이 흐르며 변화에 순응하는 유연함을 상징하고, 산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흔들림 없는 중심을 의미한다. 가산산성의 산책길을 오르내리며 만난 산수유와 산길, 그리고 그 속에서의 호흡은 곧 동적인 흐름과 정적인 고요가 어우러진 삶의 균형을 체험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하나의 사유의 장이 된다.

수유(雖柔)의 철학, 부드러움 속에 깃든 강함의 길

중용에서 말하는 “수우필명 수유필강(雖愚必明 雖柔必强)”1)은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고, 비록 유약해 보여도 반드시 강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인간의 성숙이 타고난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배움과 실천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차가운 계절을 견디고 가장 먼저 꽃을 피워내는 산수유의 모습 또한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시간을 이겨낸 강인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은층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 역시 빠름이 아니라 부드럽고 지속적인 태도 속에서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한 힘을 형성해 간다. 오늘의 산행길에서 만난 산수유는 ‘유연함 속의 강함’이라는 삶의 원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고은층의 산책과 사색, 일상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깨달음

정년 이후의 삶은 거창한 성취보다 일상의 사유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역시 문인이 아님에도 호기심에 이끌려 자연과 사물을 바라보고, 때로는 부족한 글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가산산성의 산책길에서 만난 산수유 한 송이는 단순한 꽃을 넘어, 산수(山水)의 질서와 수유(雖柔)의 철학을 동시에 떠올리게 했다. 이러한 경험은 고은층의 삶이란 결국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일상 속에 스며드는 사색의 축적임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작은 장면 하나에서도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으며, 그 태도야말로 삶의 깊이를 더하는 근본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맺음말: 노란 꽃이 전한 삶의 길, 기다림과 균형 그리고 부드러움 속의 강인함

가산산성 산책길에서 만난 산수유는 단순한 봄꽃이 아니라, 기다림과 지속, 그리고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징이었다. 또한 산수(山水)의 자연은 삶의 균형을 일깨워 주었고, 수유(雖柔)의 철학은 부드러움 속에 내재된 강함을 가르쳐 주었다.

결국 이 세 가지 사색은 고은층의 삶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해 준다. 오늘의 작은 걸음과 작은 사유가 쌓여 삶의 깊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는 이른 봄, 노란 꽃이 건네는 조용한 메시지를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새롭게 다짐하게 된다.

고자료
1) 인일능지 기백지, 인십능지 기천지(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이는 "중용(中庸)" 제20장에 나오는 문장이다.
“남이 한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을 한다.”
이렇게 하면 “수우필명 수유필강(雖愚必明 雖柔必强)”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고, 비록 유약하여도 반드시 강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진. 이성근. 국립공원 팔공산 가산산성 산책길. 2026.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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