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언어에 스며든 기억과 치유, 그리고 ‘멍’의 재음미(再吟味)"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언어는 기억을 담는 그릇이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지역의 삶이 개념화된 기억의 형식이다. 그 기억이 반복된 실천 속에서 하나의 언어로 자리 잡은 결과이다. 이러한 점에서 제주 언어 ‘놀멍 쉬멍 걸으멍’은 단순한 방언적 표현을 넘어, 제주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체화된 문화적 코드라 할 수 있다. 이 표현은 ‘놀면서, 쉬면서, 걸으면서’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서두르지 않는 삶, 관계 속에서 머무는 태도, 그리고 자연과 호흡하는 존재 방식이 내재되어 있다.
제주사색의 제4권 ‘제문(濟文)’이 지향하는 바는 바로 이러한 언어와 기억, 그리고 의미의 축적이 문화의 형식으로 체화되는 과정을 읽어내는 데 있다. ‘놀멍 쉬멍 걸으멍’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언어의 구조와 의미
‘놀멍 쉬멍 걸으멍’이라는 표현은 세 개의 동작이 병렬적으로 연결된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이 표현의 핵심은 동작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동작을 수행하는 태도에 있다. 놀면서도 경쟁하지 않고, 쉬면서도 멈추지 않으며, 걸으면서도 목적지에 집착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 이 언어 속에 담겨 있다.
이는 생산성과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언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제주에서는 삶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이동이 아니라 머무름의 연속이다. 따라서 ‘걸음’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관계 형성의 과정이며, ‘쉼’은 정지가 아니라 삶의 일부이다.
이러한 언어는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람, 돌, 바다라는 제주의 조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서두름보다 적응을, 경쟁보다 공존을 선택해 왔다. 그 선택이 바로 이 언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
올레길과 제인 고 서명숙 이사장: 언어가 삶의 방식이 되다
이 표현이 현대적으로 형성된 계기는 제주 올레길의 확산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제주 올레를 만든 고 서명숙 이사장은 “제발 천천히 걸으라”라고 반복해서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올레길 안내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 대한 주문이었다. 1)
올레길에서 ‘놀멍 쉬멍 걸으멍’은 하나의 구호가 아니라 실천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길을 걸으며 풍경을 보고, 사람을 만나며, 자신을 돌아본다. 그 과정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 된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탐방을 넘어선다. 그것은 삶의 리듬을 회복하는 과정이며, 잊고 있던 감각을 되찾는 시간이다. 결국 이 언어는 탐방의 목표를 넘어, 현대인의 삶을 재구성하는 '기억과 치유'의 새로운 의미로 확장된다.
‘멍’의 재정의: 비움에서 생성으로
필자는 ‘놀멍 쉬멍 걸으멍’을 다음과 같이 다시 재정의하고자 한다.
“놀면서 멍 때리고, 쉬면서 멍 때리고, 걸으면서 멍 때린다.”
이 재정의는 단순한 언어적 재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이 표현의 내면에 숨겨진 ‘비움의 상태’를 드러내는 시도이다.
‘멍 때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깊은 사유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의식이 목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흐를 때, 인간은 비로소 새로운 생각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동양적 사유에서 말하는 무위(無爲)와도 연결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 속에서 가장 많은 것이 생성되는 역설적 상태이다. 따라서 ‘멍’은 공백이 아니라 가능성의 시공간이다.
뇌과학과 문화의 만남: 멍의 인지적 가치
최근 뇌과학 연구는 이러한 상태의 중요성을 설명해 준다. 인간이 멍을 때릴 때 활성화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는 기억을 정리하고, 감정을 조절하며, 창의적 사고를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2)
즉, 멍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인지적 재구성의 과정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던 뇌는 멍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정리하고 다시 균형을 찾는다.
특히 자연 속에서의 멍은 더욱 큰 효과를 가진다. 바다를 바라보거나, 숲을 걷거나, 불을 바라보는 행위는 인간의 생리적 안정과 심리적 회복을 동시에 유도한다. 이러한 경험은 제주라는 시공간과 결합될 때 더욱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
결국 ‘놀멍 쉬멍 걸으멍’은 단순한 문화적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뇌와 삶을 회복시키는 실천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제문으로서의 ‘놀멍 쉬멍 걸으멍’: 기억의 형식화
제문(濟文)은 생존의 기억이 질서로 전환된 문화의 형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놀멍 쉬멍 걸으멍’은 제주 사람들의 삶의 기억이 언어로 체화된 결과이다.
이 표현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이다.
생존의 경험이 반복되고, 그 반복이 관계를 형성하며, 그 관계가 기억으로 축적되고, 그 기억이 언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이 언어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실천이며, 동시에 미래의 삶을 안내하는 규범이 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이 표현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속도와 경쟁이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멍’과 ‘느림’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맺음말
멍의 문화에서 길의 제도로
‘놀멍 쉬멍 걸으멍’은 하나의 언어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 더 나아가 하나의 문화적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표현이 담고 있는 ‘기억과 치유'의 새로운 의미는 단순한 휴식의 개념을 넘어, 인간의 삶을 재구성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제주사색의 흐름 속에서 보면,
연제는 자연의 질서이고,
제연은 그 질서와의 관계이다.
제인은 그 관계 속의 삶이고,
제문은 그 삶이 축적된 기억이며,
제도는 그 기억을 미래의 길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놀멍 쉬멍 걸으멍’은 제문에서 제도로 나아가는 하나의 출발점이다.
천천히 걷고, 비워가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다시 생각하고, 다시 관계 맺고, 다시 살아갈 수 있다.
주
1) 중앙일보,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 관련 기사」
2) 카이스트 과학향기, 「멍 때리기와 뇌의 수행 능력 연구」
참고자료
• 하이닥 건강정보, 「멍 때리기의 뇌과학적 효과」
• 제주올레 공식 자료 및 프로그램 설명 자료
• 매일경제, 「‘멍’ 때리기의 효과와 문화적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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