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령을 내려놓고 다시 걷는 사람들, ‘반복을 넘어 ‘꼬닥꼬닥’으로 가는 제인(濟人)의 길"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머리말
말의 습관에서 존재의 방식으로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러 자신을 돌아보면, 여전히 몇 가지 반복되는 말속에 머물러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말들은 단순한 표현을 넘어 삶을 해석하는 틀이며,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고은층의 삶에서는 경험의 축적과 함께 해석의 관성도 함께 쌓인다. 이때 “또 그 타령이냐”라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특정한 감정과 기억, 그리고 해석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인식적 징표이다.
필자는 신서귀포에 거주하며 한림 금능의 근석농장을 오가며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말이 어떻게 삶이 되는지를 반복적으로 목도해 왔다. 바람의 방향과 물때의 흐름, 계절의 순환은 늘 변한다. 자연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같은 말과 해석을 되풀이하며 스스로를 묶어둔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글은 출발한다. 고은층의 타령을 구조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넘어서는 심령의 자유의 가능성을 제인(濟人)의 관점에서 모색하고자 한다.
타령, 반복되는 언어가 삶이 되는 과정: 제문(濟文)의 해석
타령은 본래 일정한 장단 위에서 반복되는 음악적 형식이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내면 구조를 드러내는 상징이 된다. 이때 타령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기억과 감정, 그리고 해석이 융합된 하나의 서사 구조로 전환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해석한다. 따라서 특정한 말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사고의 틀로 굳어진다. 결국 현실을 구성하는 인식의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1)
이 점에서 타령은 제문(濟文)의 관점에서 하나의 문화적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개념화하는지를 보여주는 내면의 기록이다. 우리가 반복하는 말은 곧 우리가 믿는 세계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그 믿음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된 결과이다. “우리는 우리가 반복하는 것이다”라는 통찰은 인간 존재의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원리라 할 수 있다. 2)
그러나 제문에 머무르는 해석은 양면성을 가진다. 인간을 해방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착시키기도 한다. 특히 고은층에 이르면 경험은 깊어지지만 해석은 굳어지기 쉽다. 이때 타령은 더 이상 표현이 아니라 삶을 고정시키는 구조로 작동한다.
고은층의 열 가지 타령: 삶을 묶는 구조의 유형화
필자가 관찰한 고은층의 타령은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그 본질은 네 가지 축으로 수렴된다. 결핍, 책임 회피, 시간 왜곡, 그리고 운명론적 인식이다. 이는 다시 열 가지 유형으로 구체화된다.
첫째, 결핍과 집착의 타령이다. 돈타령, 일 타령, 이성 타령이 여기에 속한다. 이는 없는 것에 대한 반복적 집착을 통해 현재의 삶을 공허하게 만든다. 인간은 결핍을 말할수록 결핍 속에 머물게 된다. 그 결과 이미 가진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둘째, 관계와 책임 회피의 타령이다. 남 탓, 친구 타령, 배우자와 자녀 타령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삶의 책임을 외부로 전가한다. 결국 자기 삶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만든다.
셋째, 시간에 갇힌 타령이다. 과거 타령, 현재 타령, 미래 타령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는 시간의 균형을 붕괴시킨다. 인간을 후회와 불만, 불안 속에 분산시킨다.
넷째, 운명과 자아의 타령이다. 운 타령과 자기 비하 타령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열 가지 타령은 형태는 다르지만 공통된 본질을 지닌다. 그것은 인간을 현재로부터 이탈시키고 삶의 주도권을 약화시키는 구조이다.
타령은 왜 구속이 되는가? 제인(濟人)의 존재론과 ‘꼬닥꼬닥’의 상실
타령이 구속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을 해석하는 반복된 틀이다. 인간은 그 틀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결국 자신의 언어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심리학에서 인지적 고착과 자멸적 미래예측(self-defeating prophecy )으로 설명한다. 반복되는 생각은 결국 현실을 그 방향으로 이끄는 힘을 가진다. 3)
제인(濟人)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연 속에서 형성된 존재이다. 동시에 상황을 읽고 대응하는 존재이다. 제주사람은 바람과 물때를 읽으며 살아왔다. 그 기준은 ‘속도’가 아니라 ‘때’이다.
이때 ‘꼬닥꼬닥’은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걸음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생활 방식이 아니다. 존재 방식의 핵심이다.
그러나 타령에 갇힌 인간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같은 자리를 맴돌 뿐이다. 상황을 읽지 못하고, 이미 만들어진 해석만을 반복한다. 타령은 ‘정지된 반복’이다. 반면 꼬닥꼬닥은 ‘나아가는 반복’이다. 이 점에서 양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타령을 내려놓는 길: 자연이연(自然而然)의 회복
타령에서 벗어나는 길은 억지로 생각을 바꾸는 데 있지 않다. 자연스럽게 인식을 전환하는 데 있다. 스스로 자충적 미래예측(
self-fulfilling prophecy)으로 방향과 길을 여는 것이다. 이는 근석농장에서 체득한 자연이연의 질서와 맞닿아 있다.
봄비가 내리면 동백은 스스로 떨어진다. 하귤은 스스로 익어간다. 연못의 물은 제자리를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흐른다. 자연은 반복되지만 결코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인간이 회복해야 할 길은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수용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둘째는 책임이다. 삶의 주도권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가져오는 과정이다.
셋째는 현재성이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삶의 방식이다.
넷째는 겸손과 절제이다. 욕망과 비교를 내려놓는 태도이다.
다섯째는 자각이다. 자신의 언어를 인식하는 순간이다.
“지족자부(知足者富)”라는 고전의 지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인간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만족을 찾을 때 비로소 자유에 이른다. 4)
이 다섯 가지 길은 특별한 수행이 아니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그 순간 타령은 억지로 멈추지 않는다. 스스로 사라진다.
제인(濟人)의 자유: 비움과 ‘꼬닥꼬닥’의 회복
고은층에서의 자유는 더 많이 가지는 데서 오지 않는다. 덜 매이는 데서 온다. 이는 축적이 아니라 정리와 비움의 단계에서 완성된다.
인간은 자유를 선택의 확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집착의 감소가 자유를 만든다. 이 점에서 노자와 에픽테토스는 서로 다른 전통 속에서도 같은 진리를 말한다. 5)
제주사색의 흐름에서 보면, 연제는 자연의 질서이다. 제연은 그것의 사회화된 질서이다. 제인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다. 제문은 그것을 해석하는 문화이다. 제도는 그것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체계이다.
이 흐름 속에서 타령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다시 ‘꼬닥꼬닥’ 걸어가기 시작하는 일이다.
맺음말
말을 내려놓는 순간, 삶은 다시 흐른다
인생의 어느 싯점에서도 변화는 가능하다. 그러나 고은층에 이르면 남은 시간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때 타령을 멈추는 일은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성경의 말처럼 6) 지금 이 순간은 늦은 시간이 아니다. 가장 적절한 시간이다. 시불재래(時不再來)의 경구가 말하듯,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타령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현재로 돌아오는 일이다. 그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반복되는 말속에 머물지 않는다. 자연의 흐름 속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 걸음은 빠르지 않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꼬닥꼬닥’의 걸음이다. 바로 그 걸음 속에서 고은층의 삶은 가벼워지고, 깊어지며,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주
1) 국립국악원, 「전통음악 용어사전」, “타령.”
2) William James,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New York: Henry Holt, 1890).
3) Aaron T. Beck, Cognitive Therapy and the Emotional Disorders (New York: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6).
4) 노자, 『도덕경』, 제33장.
5) Epictetus, Enchiridion, trans. Elizabeth Carter (1758).
6) 『성경』, 전도서 3장 1절.





사진. 이성근. 영남대 캠퍼스 산책길. 2026.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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