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연(五緣)이 빚어낸 형제의 우정: 혈연을 넘어 삶의 동반자가 된 김인배·김문배 형제를 생각하며"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사람은 인연으로 만나고 관계로 완성된다
사람은 혼자 태어나지만 혼자 살아가지 못한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친구와 이웃, 스승과 제자, 동료와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수많은 관계를 맺는다. 그 가운데 형제자매는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특별한 인연이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생득적 지위 또는 귀속적 지위(ascribed status)라 부른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형제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같은 형제라도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다.
세상에는 형제이면서도 남보다 먼 사람들이 있고, 남이면서도 형제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형제이면서 동시에 친구이고 동반자이며 정신적 동지로 살아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필자는 오랜 벗인 김인배와 김문배 형제를 통해 인간관계의 깊이와 우정의 품격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두 형제의 삶을 돌아보면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혈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혈연과 지연, 학연, 문연, 우연이라는 다섯 가지 인연이 겹겹이 쌓여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 왔다. 필자는 이를 ‘오연(五緣)’이라 부르고 싶다.
첫 번째 인연, 혈연(血緣): 형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평생의 동행
형제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친구이다. 같은 부모 아래에서 성장하고 같은 밥상을 마주하며 같은 추억을 공유한다.
김인배와 김문배 형제 역시 세 살 터울의 형과 아우로 태어나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평생을 함께 걸어왔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경쟁보다 협력에 가까웠고, 질투보다 존중에 가까웠다. 형은 아우를 아끼고 아우는 형을 존경하였다.
동양에서는 형제애를 수족지정(手足之情)이라 부른다. 손과 발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지만 결국 한 몸을 이루듯 형제 역시 그러하다. 성경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 133편 1절)라고 말한다.
형제의 우애는 혈연에서 시작되지만 진정한 형제애는 삶 속에서 완성된다. 김인배와 김문배 형제는 평생 서로를 세워 주며 형제애를 실천하였다.
두 번째 인연, 지연(地緣):
삼천포가 길러낸 문학적 감성과 역사의식
두 형제의 고향은 지금의 사천시, 옛 삼천포이다.
삼천포는 남해안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다. 예로부터 바다와 섬이 어우러진 풍광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태어난 곳이다. 우리말 속담에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삼천포는 길과 사람과 이야기가 모이는 공간이었다. 이는 단순히 딴 길로 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드는 문화적 공간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사천과 삼천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해전 역사와 남해안 해양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역사의식과 상상력이 길러진다.
두 형제의 문학적 감수성과 역사 탐구 정신 역시 이러한 남해안 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났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고향을 떠나 살아도 고향이 심어준 정신적 뿌리까지 떠날 수는 없다. 고향은 평생의 정체성이며 정신의 원형이다.
세 번째 인연, 학연(學緣): 스승 김정한과 함께한 젊은 날의 문학 수업
두 형제는 같은 교육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특히 동아대학교 시절은 두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당시 동아대학교에는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소설가 김정한 선생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정한 선생은 "사하촌", "모래톱 이야기" 등을 통해 민중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이다. 현재 부산 금정구에는 김정한문학관이 세워져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대학 시절 김정한 선생과 김인배, 김문배는 동아대 앞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당시 김인배는 이미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김정한 교수는 수업 시간마다 "우리 학교에서 소설가로 등단한 학생은 김인배 한 사람"이라며 자랑스럽게 소개했다고 한다.
1975년 동아대 3학년 재학 중이던 김인배는 문학과 지성사 신인문학상을 통해 "방울뱀"으로 등단하였다. 이는 당시 젊은 문학도들에게는 가장 권위 있는 등용문 가운데 하나였다.
이듬해인 1976년에는 동생 김문배가 중편소설 "알리바이"로 동아문학상에 당선되었다. 이 역시 김정한 선생의 추천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형제가 나란히 소설가로 등단한 사례는 흔치 않다. 더욱이 같은 스승 아래에서 문학적 꿈을 키우고 서로를 격려하며 성장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학연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2023년 진주교육대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된 "두류 동문 문인 작품집"에는 김인배의 소설과 김문배의 수필이 함께 수록되었다. 이는 형제의 문학적 여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네 번째 인연, 문연(文緣): 문학과 역사, 그리고 향가 연구로 이어진 형제의 공동 작업
두 형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문연(文緣)이다.
김인배는 소설가이자 국문학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대학원에서 김정한 문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평생 문학 연구와 창작에 헌신하였다. 소설집만 해도 다섯 권 이상을 출간하였고, 대표 소설집인 "열린 문 닫힌 문"은 7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집이다.
그는 말 그대로 "원고 속에서 살다가 원고 속에서 생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은 사후인 2025년 1월 유고소설로 출간되었다.
김문배 역시 문학과 역사 연구를 병행해 왔다. 그는 특히 향가와 일본 고대어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이어 왔다.
두 형제는 공동으로 "향가 및 만엽가", "한일고대사 임나신론" 등을 집필하였다. 이들 저서는 일본서기의 고대 언어와 일본 천황 및 신들의 이름이 한국어와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독창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또한 신라 향가와 일본 만엽집의 언어적 연관성을 탐구하면서 한일 고대문화 교류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단순한 언어 연구를 넘어 동아시아 고대사의 흐름을 재해석하려는 학문적 도전이었다.
문학은 개인의 창작이지만 문화는 공동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두 형제의 문연은 단순한 공동 집필이 아니라 평생 함께 이어온 정신적 동행이었다.
다섯 번째 인연, 우연(友緣):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형제의 우정
다섯 번째 인연은 우정의 인연이다.
형 김인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동생 김문배는 형의 문학과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사천시 동서동 청널공원에는 김인배 문학동판이 세워져 있다. 이는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다. 한 작가의 삶과 문학정신을 지역사회가 기억하는 상징물이다.
김인배는 오랫동안 경남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창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중심으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통영과 거제 지역 문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제자들이다. 그는 지역 문학 행사와 문화제의 단골 초청 연사였으며 경남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특히 2018년까지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아 수많은 신인을 발굴하였다.
동생 김문배는 형의 업적을 기억하고 알리는 일을 자신의 사명처럼 이어가고 있다. 이는 혈연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우정의 힘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우정의 완성: 즐거움과 유익함을 넘어 덕의 우정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즐거움을 위한 우정, 유익함을 위한 우정, 그리고 덕(德)을 위한 우정이다.
즐거움의 우정은 즐거움이 사라지면 끝난다. 유익함의 우정은 이익이 없어지면 멀어진다. 그러나 덕의 우정은 서로의 인격과 가치를 존중하기 때문에 오래 지속된다.
김인배와 김문배 형제의 관계는 바로 이 세 번째 우정에 가깝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넘어 서로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였다. 그래서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좋은 관계는 시간을 이기고 죽음을 넘어선다.
맺음말
고은층의 삶에 남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고은층으로 살아가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인생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지위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며 명예도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다.
김인배와 김문배 형제의 삶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준다. 생득적 지위와 관계인 혈연은 하늘이 맺어 주지만 우정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형제라는 귀속적 지위와 관계 위에 존중과 배려, 협력과 헌신이라는 성취적 지위 (achieved status)를 더할 때 관계는 더욱 깊고 아름다워진다.
공자는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라고 하였다.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이 모인다.
김인배와 김문배 형제가 보여 준 오연(五緣)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관계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그리고 인생 후반기에 가장 소중한 자산은 결국 사람이며, 가장 오래 남는 유산은 사랑과 우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다.
부록 : 김인배 · 김문배 형제 소개
1) 김인배(金仁培)는 사천(옛 삼천포) 출신의 소설가·국문학자
1975년 동아대학교 재학 중 문학과 지성사 신인문학상 "방울뱀"으로 등단하였다. 김정한 문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열린 문 닫힌 문"을 비롯한 다수의 소설집을 출간하였다. 창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였고, 경남문인협회 부회장 및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25년 유고소설이 출간되었으며, 사천시 동서동 청널공원에 문학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2) 김문배(金文培)는 사천(옛 삼천포) 출신의 소설가·수필가·향토사 연구자 1976년 동아문학상 중편소설 "알리바이"로 등단하였다. 향가, 만엽집, 한일고대사 연구에 꾸준히 매진하였으며, 김인배와 함께 "향가 및 만엽가", "한일고대사 임나신론" 등을 공동 집필하였다.
현재도 신라문화와 고대 언어 연구, 수필 창작 및 지역사 연구를 이어가고 있으며 형 김인배의 문학정신을 계승하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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