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른꽃도 다시 꽃이 된다:
박완서의 마른꽃과 고은층이 만나는 사랑의 완성"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사랑은 식는가? 아니면 사랑은 성숙하는가?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남기며 살아간다. 젊은 날의 사랑은 설렘과 열정으로 시작되고, 중년의 사랑은 책임과 헌신으로 이어지며, 노년의 사랑은 이해와 동행의 모습으로 성숙해 간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사랑도 시들고 감정도 무뎌지며, 인생 후반부에는 사랑보다 건강과 생존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정말 그럴까?
필자는 우연히 인터넷 검색 중 소설가 박완서의 "마른꽃"이라는 제목을 접하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은층의 마음속에도 사랑은 여전히 살아 있는가? 세월에 시든 꽃에도 다시 피어날 가능성이 남아 있는가?
이 제목을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고은층의 사랑을 떠올렸다. 인생의 후반전은 사랑이 끝나는 시기가 아니라 사랑이 완성되어 가는 시기일 수 있다. 젊은 날의 사랑이 불꽃이었다면, 고은층의 사랑은 향기이며 온기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간적 사랑을 넘어 필리아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품고 있다.
마른꽃의 의미: 세월을 견딘 사람만이 아는 사랑
박완서의 소설 속 인물들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그들은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고, 사랑에 실패하며, 삶의 무게에 지쳐 살아간다. 그러나 작가는 바로 그 상처 속에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마른꽃은 생기를 잃은 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시간의 흔적이다. 한때 아름답게 피어났던 생명의 기억을 간직한 존재이다. 꽃은 말랐지만 꽃이었던 사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월은 얼굴에 주름을 남기고 몸의 기력을 약화시키지만, 사랑할 수 있는 능력까지 빼앗아 가지는 못한다. 오히려 아픔을 경험한 사람은 타인의 눈물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외로움을 겪어 본 사람은 누군가의 손을 더 따뜻하게 잡아 줄 수 있다.
젊음은 사랑을 시작하게 하지만, 세월은 사랑을 깊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마른꽃은 실패한 사랑의 흔적이 아니라 성숙한 사랑의 씨앗이다. 꽃이 시들었다고 향기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 고은층에 이르렀다고 사랑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고은층의 사랑: 소유에서 동행으로
젊은 시절의 사랑은 대체로 에로스(Eros)의 성격을 지닌다. 설렘과 열정, 끌림과 욕망이 사랑의 중심에 있다. 상대를 얻고 싶고 함께하고 싶으며, 때로는 독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인생을 오래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은 결국 소유가 아니라 동행이라는 사실이다.
고은층의 사랑은 "무엇을 받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족함을 비난하기보다 이해하려 한다.
배우자의 걸음이 느려지면 자신의 걸음을 늦추고, 기억력이 흐려지면 대신 기억해 주며, 병이 들면 함께 아파하는 것이 고은층의 사랑이다. 화려한 고백보다 말없는 배려가 더 큰 감동을 주고, 열정보다 신뢰가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젊은 날의 사랑이 불꽃이라면 고은층의 사랑은 장작불과 같다. 눈부시게 타오르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따뜻함을 전한다.
그래서 고은층의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 배려이며, 경쟁이 아니라 공존이고, 소유가 아니라 동행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책임이다:
함께 익어 간다는 것의 의미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어느 날부터는 병원 예약 날짜를 함께 기억해야 하고, 약봉지를 대신 챙겨 주어야 하며, 계단을 오를 때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날이 찾아온다. 건강도 예전 같지 않고 기억력도 흐려진다.
그때 사랑은 감정보다 책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젊은 시절에는 사랑 때문에 결혼하지만, 고은층은 사랑 때문에 끝까지 곁을 지킨다. 병원 진료를 함께 가고, 식사를 챙겨 주며, 걸음이 느려진 배우자의 속도에 맞추어 걷는 모습은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장면일 수 있다.
성경은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 말씀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설명한다. 오래 참아 주는 것, 기다려 주는 것, 끝까지 곁에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그래서 인생 후반전의 사랑은 책임의 완성형이며 인격이 맺는 아름다운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고은층 사랑의 이중주: 필리아(Philia)와 아가페(Agape)의 길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여러 형태로 구분하였다. 에로스(Eros)는 열정적 사랑이고, 필리아(Philia)는 우정과 동반자적 사랑이며, 아가페(Agape)는 조건 없는 사랑이다.
젊은 시절의 사랑이 에로스에 가깝다면, 고은층의 사랑은 필리아와 아가페가 함께 어우러지는 이중주에 가깝다.
필리아는 평생을 함께 살아오며 형성되는 우정과 신뢰, 그리고 동반자적 사랑이다. 말없이 눈빛만 보아도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걸어온 세월 자체가 관계의 자산이 되는 사랑이다. 이러한 필리아는 인생 후반기에 평온과 안정, 그리고 정서적 안식을 가져다준다.
아가페는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는가와 상관없이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조건과 계산을 넘어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이며, 용서와 이해, 배려와 희생을 포함하는 사랑이다.
따라서 고은층의 사랑은 필리아가 주는 우정과 동행 위에 아가페가 주는 헌신과 포용이 더해질 때 더욱 성숙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이는 감정의 차원을 넘어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사랑의 정신을 보여 준다.
고은층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과거의 상처를 용서하게 되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조차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특히 부부와 가족관계는 이러한 필리아와 아가페가 가장 아름답게 실천되어야 할 공간이다.
그때 사랑은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삶 전체를 품는 힘으로 확장된다.
사랑의 마지막 확장: 사람을 넘어 세상으로
진정한 사랑은 결국 자신을 넘어선다.
젊은 시절에는 가족을 사랑하고, 중년에는 직장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며, 노년에는 세대와 사회를 품게 된다. 사랑의 반경이 점차 넓어지는 것이다.
고은층의 품격도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평생 쌓아 온 경험과 지혜를 후배들에게 나누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다음 세대를 위해 길을 열어 주는 삶은 사랑의 사회적 확장이다.
필자가 강조하는 고은층의 의미(meaning)도 여기에 있다. 인생 후반전은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이다.
사랑을 받는 사람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으로 변화될 때, 인생은 더욱 깊고 아름다워진다. 사랑은 받는 기쁨보다 나누는 기쁨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기가 바로 인생 후반전이다.
결국 고은층의 사랑은 개인적 행복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을 넘어 이웃으로, 공동체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사랑의 유산이 된다.
맺음말
마른꽃도 다시 꽃이 된다
박완서의 "마른꽃"은 우리에게 말한다. 고은층이라고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꽃이 말랐다고 생명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고은층이라고 역할이 끝난 것이 아니며, 나이가 들었다고 사랑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삶의 깊이를 얻은 사람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사랑이 있다.
젊은 날의 사랑이 꽃이었다면 고은층의 사랑은 향기이다. 꽃은 시들어도 향기는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 향기가 자신을 넘어 가족과 이웃, 사회와 다음 세대까지 퍼져 나갈 때 사랑은 비로소 완성된다.
마른꽃이 다시 꽃이 되는 기적은 젊음을 되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사랑이 남아 있는 한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부터가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계절의 이름은, 성숙과 동행, 필리아와 아가페적 사랑의 완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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