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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잎식초 한 단지에 담긴 삶의 철학: 청산해림에서 만난 신제주인의 문화와 지혜"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


서문
사람을 만나러 가는 여행, 문화를 배우는 체험

여행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다. 이번 청산해림 방문은 후자에 가까웠다. 솔잎식초를 담는 체험도 목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목적은 제주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가고 있는 청산·해림 선생 부부를 다시 만나고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문화와 지혜를 배우는 데 있었다.
수요일 오전 10시, 필자와 서귀삼연의 김 선생 가족은 서귀포를 출발하여 한림 금능의 근석농장에 들러 고추밭을 정리하고, 저지마을에서 갈치정식으로 점심을 먹은 뒤 저지떡집에서 쑥떡을 구입하였다. 이어 오설록에서 녹차와 녹차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잠시 여유를 즐긴 후 청산해림으로 향하였다.
오후 2시경 도착한 청산해림은 여전히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우리가 도착한 뒤 서파장의 백 선생도 도착하였고, 해림 선생은 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내어 주었다. 잠시 정담을 나누는 사이 청산 선생께도 인사를 건넸다.
청산해림은 단순한 주택이 아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오랜 세월 함께 가꾸어 온 삶의 정원이자 철학의 공간이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돌길 하나에도 삶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음의 속도를 늦추게 된다.

일 년을 기다린 솔잎식초, 시간의 가치를 배우다

체험은 지난해 담가 두었던 솔잎식초를 개봉하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본채 바깥 서늘한 곳에 보관해 두었던 항아리를 식당 앞으로 옮긴 뒤 뚜껑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솔잎 위에 형성된 하얀 막이었다. 일반인에게는 낯설게 보일 수 있지만, 해림 선생은 이것이 아래의 식초를 보호하는 자연의 보호막이라고 설명하였다.
문득 부모가 자식을 품어 보호하듯, 형이 동생을 감싸듯, 자연도 스스로를 보호하는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형성된 것이 나중에 생성된 것을 지키는 모습은 인간사회의 내리사랑을 떠올리게 하였다.
이어 용기 위에 소쿠리를 얹고 식초를 천천히 걸러냈다. 정제된 식초 원액에 물을 타 시음하니 강한 신맛 속에서도 솔잎 특유의 은은한 향과 깊은 맛이 살아 있었다.
놀라운 것은 식초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사람은 재료를 준비할 뿐이고 나머지는 시간과 자연이 담당한다. 일 년 동안의 기다림이 곧 식초의 맛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든 빠르게 얻으려 한다. 그러나 솔잎식초는 기다림 없이 얻을 수 없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지만 반드시 자기 속도로 완성된다. 솔잎식초는 우리에게 "시간도 재료다"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필자의 전공은 계획학이다. 오래전부터 학생들에게 인간을 스스로 계획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존재, 즉 '자기 계획적 실체(self-programming entity)'라고 설명해 왔다. 반면 무생물은 이미 계획된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계획된 실체(programmed entity)'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번 솔잎식초 체험은 필자의 생각을 조금 넓혀 주었다. 솔잎과 미생물, 공기와 시간은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치 자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자기 조직화 체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솔잎이 인간처럼 계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계획을 넘어서는 고유한 질서와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하였다.

솔잎을 다루는 방식에서 배우는 배려의 문화

이번 체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솔잎을 용기에 담는 과정이었다.
해림 선생은 솔잎을 넣으면서 결코 손으로 누르지 않았다. 그대로 자연스럽게 넣고 용기를 가볍게 흔들어 자리만 잡아 주었다.
필자는 그 모습을 보며 흥미로운 생각을 하였다.
사람은 흔히 효율성을 이유로 무엇이든 누르고 조절하려 한다. 그러나 해림 선생은 솔잎에게도 자신의 공간을 허락하였다. 억지로 누르지 않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놓아두었다.
이는 단순한 작업 방식이 아니었다. 생명에 대한 태도였다.
가정에서도, 조직에서도, 사회에서도 사람을 지나치게 통제하면 숨 쉴 공간이 사라진다. 적절한 여백과 자율성이 있을 때 사람도 자연도 가장 건강하게 성장한다.
솔잎을 누르지 않는 모습에서 필자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았다. 배려란 상대가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공간을 인정하는 것이다.
청산해림의 문화는 자연을 지배하는 문화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문화였다.

버리지 않는 삶, 제주적 순환의 지혜

솔잎식초 재료 또한 특별했다.
정원의 소나무를 전지하면서 나온 새순과 가지가 재료가 되었다. 보통은 버려질 수 있는 것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체험 이후의 과정이었다. 지난해 담가 두었던 솔잎식초를 걸러내고 남은 솔잎은 모두 청산 선생의 몫이었다. 그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퇴비로 만들어 다시 정원과 텃밭의 거름으로 활용한다고 하였다.
식초가 된 솔잎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흙은 다시 나무를 키우고, 나무는 다시 솔잎을 내어 준다. 시작과 끝이 하나의 원으로 연결되는 자연순환의 구조였다.
여기에서도 청산해림만의 역할 분담과 협업의 문화가 보였다. 해림 선생이 발효와 정성을 담당한다면, 청산 선생은 정원 관리와 순환의 마무리를 담당한다. 마치 자연생태계가 각자의 역할 속에서 균형을 이루듯 부부의 삶도 그렇게 운영되고 있었다.
솔잎을 씻은 물 또한 잔디와 마당으로 흘려보냈다. 물은 자연 배수로를 따라 다시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청산해림은 지속가능성을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해림 선생의 배려와 청산 선생의 성실함

체험을 마친 뒤 필자는 해림 선생에게서 또 다른 덕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난번 체험 때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려 했던 마음이 인상적이었다. 약속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또한 김 선생과 필자에게는 솔잎식초병에 손글씨로 쓴 라벨을 붙여 주었다. 작은 병 하나에도 받는 사람을 생각하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필자와 김 선생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이 느껴졌다. 더 나아가 이웃인 백 선생과 대전에서 온 동거인에게도 마치 가족을 대하듯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거창한 선물이 아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반면 청산 선생은 우리 일행이 오랜 시간 솔잎식초 담그기 체험을 하는 동안 정원에서 묵묵히 잡초를 제거하며 자신의 몫을 다하고 계셨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해림 선생이 따뜻한 배려의 상징이라면, 청산 선생은 성실과 책임의 상징이었다.
청산해림은 배려와 성실, 감성과 실천이 만나 이루어진 삶의 공동작품이었다.

솔잎식초 한 단지에 담긴 신제주인의 삶

제주에는 원주민도 있고 이주민도 있다. 그러나 제주에 산다고 모두 제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주를 사랑하고, 제주를 이해하며, 제주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정한 제주인이 된다.
청산해림 선생 부부는 필자가 생각하는 신제주인의 한 전형이다. 그들은 제주를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고, 자연과 사람을 함께 품으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제주다운 삶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거창한 구호나 철학적 선언이 아니었다. 정원을 가꾸고, 솔잎식초를 담그고, 자연의 순환을 실천하며, 이웃과 정을 나누는 일상 속에서 조용히 완성되어 가는 삶이었다.
솔잎식초 한 단지에는 단순히 발효된 식초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기다림의 시간, 자연에 대한 존중, 생명에 대한 배려, 버리지 않는 순환의 지혜, 그리고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는 협업의 문화가 함께 담겨 있었다.

맺음말
삶도 발효가 필요하다

필자는 이번 청산해림 방문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문화란 거창한 유적이나 축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속에 있고, 한 가정의 생활습관 속에 있으며, 사람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 속에 스며 있다.
청산해림에서의 하루는 솔잎식초를 담그는 체험이면서 동시에 삶을 담그는 체험이었다. 자연은 기다림을 가르쳐 주었고, 솔잎은 순환을 가르쳐 주었으며, 청산 선생과 해림 선생은 배려와 성실이 어떻게 하나의 삶의 문화로 완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오늘 우리가 마신 한 잔의 솔잎식초에는 단순한 신맛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자연과 사람이 함께 빚어낸 시간의 맛이었고, 제주가 품고 있는 삶의 지혜의 맛이었으며, 청산해림 부부가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삶의 향기였다.
사람은 흔히 성공을 위해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빨리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 준다. 서두르지 않고, 억지로 누르지 않으며, 버리지 않고 순환시키면서도 결국 가장 깊은 맛을 만들어 낸다.
솔잎이 식초가 되기 위해 일 년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사람의 인품도, 관계의 깊이도, 삶의 지혜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삶은 오랜 시간의 발효를 통해 완성된다. 특히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가는 고은층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젊은 시절의 경험과 시행착오, 관계와 배움이 오랜 세월 숙성되면서 비로소 인생의 깊은 향기와 지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청산해림에서 만난 솔잎식초는 단순한 건강식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신제주인의 삶의 철학이었고, 기다림과 배려, 순환과 협업의 가치를 담아낸 작은 문화의 결정체였다.
돌아오는 길에 필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하나의 발효 과정인지 모른다.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사람을 이해하며, 자신의 삶을 조금씩 익혀 가는 과정 말이다. 그리고 고은층의 삶은 인생이라는 긴 발효의 결실을 가장 아름답게 맛볼 수 있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그 끝에서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향기로운 삶의 맛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사진. 이성근. 청산해림 솔잎식초 담금체험. 2026. 6. 10.

댓글
식초 위에 생기는 하얀 막은 식초가 발효되는 과정에서 초산균이 공기와 만나 형성되는 자연스러운 미생물 군집인 '초산막(초막)' 또는 '초모(Mother of Vinegar)'입니다.
초모는 공기(산소)와의 접촉을 돕고 초산균의 번식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초산발효는 알코올을 초산으로 산화하는 호기성 발효이므로, 초막이 잘 형성되면 산소 공급이 원활하다는 신호로 보며, 반대로 초막이 약하면 산패(부패) 위험이 커질 수 있습니다.
모든 고은층들께서도 초막의 두터운 혜택 맛을 늘 느끼시길 바랍니다. 시큼하지만 건강한 솔잎식초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대구 권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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